짤라 비구니와 마라 빠삐만의 대화 6
짤라(cala) 비구니는 꼬살라 왕국의 수도 사왓티에서 수행을 했다. 꼬살라 왕국은 강대한 왕국으로 매우 큰 영토를 가진 나라다. 꼬살라 왕국의 수도 사왓티도 매우 크고 넓은 도시다. 사왓티는 모든, 일체라는 뜻의 삽밧타(subbattha)에서 나온 말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가장 큰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다. 붓다께서 평생 동안 45년간 설법을 하셨는데 그 중에 사왓티의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27년 동안 머무시며 법을 펴시었다. 사왓티를 중심으로 법을 펴신 것은 큰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왓티는 비구와 비구니가 수행에 필요한 사대품인 공양, 가사, 약품, 거주처가 충분하게 조달되고 제공될 수 있는 도시였다. 초전법륜경을 펴신 곳은 바라나시였지만 가깝던 빔비라사 왕이 죽은 뒤에 아들 아자타사뚜가 왕이 되고 나서 꼬살라 왕국의 사왓티로 거처를 옮기셨다. 특히 이곳에서 도시와 가까운 곳의 숲을 보시 받고 수많은 법을 펴셨다. 또 꼬살라 왕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이곳은 부유한 도시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곳이다. 생계가 곤란해서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우면 누구도 법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붓다께서 사왓티에 오래 머물러 계셔서 붓다를 친견하기 위해서 많은 곳에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이곳에서 출가를 했다. 또 사왓티에서 많은 법문을 하셨다. 이처럼 붓다께서 가장 오래 머무신 사왓티에는 사리뿟다 존자도 함께 계시면서 붓다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대신해서 법문을 하셨다. 사리뿟다 존자는 다른 아라한과는 달리 오랫동안 사왓티에 머물며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승가를 돌보셨다. 지금 경전에 나오는 아라한 비구니들도 모두 사왓티에 거주하면서 수행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짤라 비구니는 사리뿟다 존자의 여동생이다. 사리뿟다 존자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모두 비구니가 되었다. 첫째 동생인 짤라 비구니와 두 번째 동생인 우빠짤라 비구니와 세 번째 동생인 시수빠짤라 비구니가 있다.
사리뿟다 존자의 남동생도 세 명이 있는데 쭌다, 우빠세나, 레와따가 모두 출가를 해서 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가족 모두가 출가를 했지만 사리뿟다 존자의 어머니는 힌두교 신자로 살았다. 그러나 사리뿟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께 특별하게 승낙을 받고 어머니 집으로 갔다. 그 뒤에 일주일동안 보살펴드리고 마지막에 어머니가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돌아가셨다. 비구와 비구니 계율에는 가사를 입고 재가자를 돌보거나 형제를 돌볼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어머니에 대해서만큼은 잠시 가사를 벗고 돌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런 뒤에 다시 종전과 같은 비구가 되어 가사를 입을 수 있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아무리 갚아도 다 갚지 못한다. 누구나 자기 어머니에게는 모유를 먹은 모유의 빚이 있다. 이 모유의 빚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지만 오직 불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유일하게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다. 사리뿟다 존자는 마지막에 어머님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도해서 자신이 먹은 모유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았다.
어느 날 짤라 비구니가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하기 위해 사왓티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왓티에서 탁발을 해서 공양을 마친 뒤에 홀로 있기 위해 눈먼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먼 숲 깊숙이 들어가서 한 나무 밑에 앉았다. 이때 마라 빠삐만이 짤라 비구니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짤라 비구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구니여, 그대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이에 짤라 비구니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벗이여, 나는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자 마라 빠삐만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왜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이에 짤라 비구니가 대답했다. ‘태어나면 감각적 욕망을 즐기게 된다.’ 이에 마라 빠삐만이 다시 질문했다. ‘비구니여, 태어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체 누가 이런 견해를 갖도록 했는가?’
이때 짤라 비구니는 태어남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한다고 했다. 그러나 마라 빠삐만은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했느냐고 추궁을 한다. 과거나 현재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고귀한 탄생인데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세속에서는 괴로움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바란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가 커질 수 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은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러므로 짤라 비구니는 사성제의 진리를 완성하신 아라한이라서 당연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세속의 정신을 가진 마라 빠삐만은 윤회하지 않는 출세간의 깨달음을 모르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세간을 사는 사람과 출세간을 사는 사람의 견해는 큰 차이가 있다.
짤라 비구니가 대답했다.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기 마련이고, 태어난 자야말로 속박과 살해와 비참함의 괴로움을 겪어야 하니, 나는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는다네. 태어남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붓다께서 설하셨으니 괴로움을 모두 제거할 수 있도록 진리에 들게 하셨네. 색계에 사는 자들과 무색계에 사는 자들도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여 다시 태어남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네.’
인간으로 태어나서 즐거움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결코 즐거움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인간으로 태어나면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때로는 살해를 당하고 여러 가지 장애로 비참한 일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사성제의 진리를 완성한 아라한의 마음이다. 하지만 누구나 태어나지 않는 것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짤라 비구니는 태어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마라 빠삐만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짤라 비구니가 태어남을 뛰어넘는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말은 어느 얼빠진 사람이 한 말이 아니고 나의 위대한 스승이신 붓다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직 무명에 덮여서 살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서 세세생생 복락을 누리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알고 팔정도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다시 태어나서 괴롭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두 가지 차이는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아는 자와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아는 자의 차이다. 그래서 붓다께는 나는 오직 한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성제에서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인 고성제가 얼마나 중요한 발견인지 알 수 있다.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소멸시켜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짤라 비구니가 마지막으로 ‘색계에 사는 자들과 무색계에 사는 자들도 괴로움의 소멸을 알지 못하여 다시 태어남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직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은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정수행을 해서 색계에 태어나서 사는 생명이나 무색계에 태어나서 사는 생명도 아직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삶을 지적한 것이다. 생명이 사는 31개의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에 사는 어떤 생명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지혜수행을 해서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면 집착이 끊어져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짤라 비구니의 이런 말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오해의 소지가 크다. 짤라 비구니는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성취하여 윤회가 끝나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윤회 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윤회하는데 이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며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말하고 있다. 짤라 비구니가 말한 괴로움의 소멸은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인 열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뿐만 아니라 욕계 천상에 사는 생명이나 선정수행을 해서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생명은 아직 생을 집착하고 있어 짤라 비구니의 말을 동의하지 못한다.
심지어 사악도에 사는 생명조차도 영원히 살기를 원해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세간과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원하는 출세간으로 나뉜다. 세간의 생명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해 출세간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선정의 세계에서는 색계와 무색계를 최고의 세계로 알고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된 자는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도 다시 윤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는 오직 통찰지혜가 있어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라서 서로 대치된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난무하는 견해는 서로의 견해로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왕자 고타마가 태어났을 때 숫도다나 왕의 요청으로 왕의 스승인 아시따 선인이 방문했다. 이때 아시따 선인은 고타마의 탄생을 보고 울었다. 자기가 죽으면 무색계에 태어나는데 이 왕자가 성장하여 깨달음을 얻고 나서 법을 펼 때 이 법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색계로 가면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을 배울 수가 없을뿐더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도 이 가르침이 그대로 남아서 배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도 선정의 세계와 출세간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 가를 알 수 있다. 붓다가 출현하셨지만 정법이 살아있는 시기는 한정되어있다. 때가 되면 정법이 사라져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정법이 살아있는 시대에 태어나기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났더라도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
여기서 짤라 비구니와 마라 빠삐만의 대화는 악의 상징인 마라 빠삐만은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선의 상징인 짤라 비구니는 생명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알면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윤회를 인정하지만 하나는 윤회를 집착하여 다시 태어난다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윤회를 집착하지 않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견해다. 그래서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는 차이가 있다. 힌두교는 마음이 몸만 바꾸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환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같은 생명이 아니라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재생이라고 한다.
구름이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질 때 구름과 비는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것이라고 보면 환생이다. 하지만 구름이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질 때 구름과 비는 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같지 않다고 보면 재생이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로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자아가 있어서 윤회하는 세계가 있다. 또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항상 하지 않는 무아라서 윤회가 끝나는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아직 무명을 가지고 살아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열반이라는 말을 강조하지 않는다. 모든 가르침이 오직 열반을 위한 것이지만 드러내놓고 열반을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열반은 최상의 지혜를 얻는 자의 정신세계이기 때문에 범부는 알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요약하면 같은 것이라고 볼 때는 자아가 있어 집착을 끊을 수 없어 해탈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같지 않은 것이라서 무아라고 볼 때 비로소 집착을 끊을 수 있어서 해탈의 자유를 누린다. 똑같이 윤회를 믿지만 하나는 영생을 바라고 하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아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종교인들이 천국에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윤회를 원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이것이 팔정도의 계정혜 중에서 정에 속하는 세간과 혜에 속하는 출세간의 차이다.
여기서 생기는 두 가지의 차이는 어리석음과 지혜의 차이라서 옳고 그름이 없고 토론의 대상이 아니고 단지 가르침만 있다. 이는 법은 오직 법을 아는 자에게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괴로움뿐인 생명을 초월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소멸하는 길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 길은 어리석음에서 지혜를 얻는 길이라서 선업의 공덕을 쌓은 매우 한정된 사람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