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단종2년(갑술 1454) 5월24일 한양(漢陽) 정릉(貞陵 : 현재 정동) 집에서 출생하였다. 젊을 때 호탕하고 뛰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장성하자 학문에 힘을 썼다. 선생의 휘(諱:이름의 높임말로 돌아가신 어른의 생전의 이름)는 굉필(宏弼)이요 자(字)는 대유(大猷)이다. 한훤당(寒暄堂)은 지금 소학당(小學堂)이 자리한 경남 합천 야로현 처가 마을 개천 건너 바위 아래 지은 조그만 서재의 이름이었으나, 사람들이 한훤당을 김굉필 선조님의 호로 삼았다.
김굉필 선생은 성종(成宗) 갑인(甲寅 1494)년에 행의(行義)로 추천(推薦)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마침내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으나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남에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인(門人)이라는 명목으로 연루되어 함경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 한훤당 선생은 다시 귀양살이를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옮겼으나 연산군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귀양보낸 죄에 더하여 무참히 참형(斬刑)을 받으니 51세의 나이로로 세상을 마쳤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난 중종2년(정묘 1507), 김굉필 선생에게 도승지라는 벼슬이 내려졌고 중종12년(丁丑 1517)년에는 우의정(右議政), 선조8년(을해 1575)에는 영의정 벼슬이 추가로 내려졌고, 선조10년(정축 1577)년 문경공(文敬公)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광해군2년(경술 1610), 대간과 성균관 및 각도 유생들이 임금님께 지속적으로 글을 올려 마침내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는데, 배향된 오현(五賢) 중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그 으뜸이다.
선생의 나이 스물한살 되던 해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청하니 점필재 선생은 ‘소학(小學)’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모두 이 속에 있다.”하니, 명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특출한 행실이 비할 데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늦은밤이 되어서야 잠을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선생은 위로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 강호 김숙자(江湖 金淑滋),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학통(學統)을 잇고 아래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탄수 이연경(灘叟 李延慶), 신당 정구(新堂 鄭鵬) 등 뛰어난 석학(碩學)들을 계도(啓導)하니 이른바 동국 도학(東國 道學)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51년의 짧은 일생이었지만 남기신 도학(道學) 정신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같은 두분의 큰 학자를 비롯해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한강 정구(寒岡 鄭逑), 중봉 조헌(重峰 趙憲),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등 큰 선비들의 흠모와 추앙을 받았다.
서흥군(瑞興君)의 작위를 받은 천록공의 증손(曾孫)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 판서운관사(奉順大夫判書雲觀事)를 지낸 분으로 바로 한훤당의 고조(高祖)분이시다. 한훤당의 증조(曾祖)는 휘 중곤(中坤)으로 조선조 초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네 왕조를 차례로 섬기어 명성이 있었고 벼슬이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에 이르렀다. 현풍곽씨(玄風郭氏)에게 장가들어 그 뒤로부터 현풍에서 살게 되면서 영남파의 중조로 모시는 분이다.
한훤당 할아버지의 휘는 소형(小亨)인데 봉훈랑 의영고사(奉訓郞義盈庫使)요, 아버지의 휘는 유(紐)인데 무과(武科)에 올라 어모장군 충좌위사용(禦侮將軍忠佐衛司勇)이었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가선대부 중추원부사(嘉善大夫中樞院副事)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청성군(淸城君) 휘 승순(承舜)의 딸이다.
부인은 순천박씨 사맹(司猛) 예손(禮孫)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5녀를 두었으니 장남 언숙(彦塾)은 선무랑(宣務郞)이요, 차남 언상(彦庠)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3남 언서(彦序)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4남 언학(彦學)은 참봉(參奉) 벼슬을 지낸 분이다. 영남 장파, 중파, 계파와 같은 종파는 위 할아버지 때부터 나눠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