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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師館 스크랩 윤동주 & 이육사
sooaram 추천 0 조회 139 11.10.16 21: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윤동주

윤동주 (1941년)
출생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지린 성 화룡현
사망 1945년 2월 16일 (27) 오전 3시 36분
일본 제국 일본 제국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형무소
사인 옥사(고문 후유증)
거주지 만주->일제 강점기 경성부->일본 도쿄->만주->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형무소
별칭 해환(아호), 히라누마 도오슈(일본식 이름)
학력 연희전문학교, 도시샤 대학 영문과
직업 시인, 독립운동가
종교 개신교(장로교)
부모 윤영석/ 김용
친척 독립운동가 송몽규(고종사촌), 시인 윤영춘(5촌 당숙), 가수 윤형주(6촌 동생)
웹사이트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호는 해환(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종형제간이기도 하다.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지산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욱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2]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밍둥춘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3]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기숙사인 핀슨홀

 

그는 어려서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편집] 소년 시절

[편집] 중학 시절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敎)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敎)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敎)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문익환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편집] 연희전문 시절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편집] 일본 유학

[편집] 창씨개명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윤동주의 원고 원본
.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4]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5][6]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7]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편집]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大?)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 경내에 있는 윤동주 시비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8]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편집] 투옥과 최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유영석과 당숙 유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말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9]

[편집]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편집] 작품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서시(序詩)》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편집] 경향 및 평가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1]

[편집] 상훈 경력

[편집] 가족관계

  • 조부 : 윤하현 장로
  • 조모 : 강씨부인
    • 고모 : 윤씨
    • 고모부 : 송신영
      • 고종사촌 : 독립운동가 송몽규 ( 1917.9.28 ~ 1945.3.7 )
        • 내종조카 (송몽규의 조카) : 소설가 송우혜
  • 부 : 윤영석
  • 모 : 김용
    • 누이 : 요절
    • 누이 : 요절
    • 누이 : 윤혜원 (1924 ~ )
    • 매제 : 오형범 (1924 ~ )
    • 남동생 : 윤달환(일주, 성균관대 교수 (1927. 11. 23 ~ 1985))
    • 제수 : 정덕희
      • 조카 : 윤인석
    • 남동생 : 윤별환 (요절)
    • 남동생 : 윤광주 (요절)
  • 당숙 : 윤영춘
    • 재종형제(윤영춘의 아들) : 가수 윤형주(1947 ~ )

[편집] 평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10][11]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12]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13]

[편집] 기타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1990년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창씨개명설을 지적받게 되자 윤동주를 연구하던 한 교수는 이를 언급하기를 꽤 난처해했다 한다.[4]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2005년 이후에 공식적으로 언급 인정되었다.

[편집] 대중 문화에 나타난 윤동주

[편집] 방송

  • KBS1 《마돈나여 광야에서 별을 노래하라》 제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영상시극, 1984년 12월 22일(방영시간 120분)[14]
  • KBS1 《영상기행3.1절 ? 민족시인 尹東柱》, 1988년 3월 1일(방영시간 60분)[15]
  • NHK 《NHK스페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尹東柱, 일본통치하의 청춘과 죽음〉, 1995년 3월 11일(방영시간 60분)[16]
  • EBS지식채널e》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부: 별 (2006년 7월 31일 방영), 2부: 시 (2006년 8월 7일 방영)
  • KBS해피선데이 - 1박 2일》백두산 탐방 특집 윤동주 생가 방문 (2008년 6~7월)
  • SBS그것이 알고싶다》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 후쿠오카 형무소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2009년 8월 15일)

[편집] 기념물

핀슨홀과 윤동주
  •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등이 모금한 성금으로 연세대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 1985년부터 《월간문학지》에서 그를 기념한 「윤동주문학상」 수상자를 매년 선정, 수상하였다.
  • 199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7]
  • 1992년 9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18]
  • 1995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19] 2005년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 정지용의 시비가 그 옆에 건립되었다.[20] 또한 교토 대학 부근 그가 머물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세기를 빛낸 한국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
------------------------------

 

 

 

■ 눈감고 가라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

 

 

■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 자화상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별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참회록

                                    

 

파아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24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이육사

이원록 또는 이원삼
Yiyuksa 264.jpg
이육사
출생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
사망 1944년 1월 16일(40세)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
필명 이육사
직업 시인, 독립운동가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장르
주요 작품 광야,청포도
배우자 안일양
자녀 이옥비, 이동박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이다.

 

 

陸史 이원록(李源祿) 선생

1904. 4. 4()1944. 1. 16

 

?1925. 의열단(義烈團) 가입

?1932. 한국군관학교 수료(중국 남경)

?<청포도> 등 민족시(民族詩) 30여 편 발표

?1944. 1. 옥중(獄中) 순국(중국 북경)

?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소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陸史)의 시() <광야>(曠野)의 한 귀절이다. 복국의식(復國意識)과 광복(光復)의 열의(熱意)속에 점철된 삶을 영위한 선생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항일투쟁(抗日鬪爭)으로 무려 17회에 걸쳐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민족 저항시인으로서 민족혼을 일깨웠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신의(信義)와 의리가 강한 선비로 알려지다

 

190444() 경북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촌리(遠村里) 881번지에서 아은처사(亞隱處士)인 부친 이가호(李家鎬)와 모친 선산인(善山人) 허형(許衡)의 딸 허길(許佶) 사이에서 5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본명은 원록(源祿)이나 후에 원삼(源三) 또는 활()이라 하였으며 자()는 태경(台卿), 아호는 육사(陸史)이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용모는 청수하고 깨끗한 선비형으로서 한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가 강하였다. 12살이 되던 해에 조부 이중직(李中稙)이 숙장(塾長)이었던 예안보문의숙(禮安普文義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7세가 되자 대구로 이사하여 시내에 있는 교남학교(嶠南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듬해에 영천에 살고 있던 안일양과 혼인하였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白鶴書院)에서 학문을 연수하였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여 1923년에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동경에 있는 대학을 다니다가 1925년에 귀국하였다.

 

의열단원 윤세주에 감화되어 의열단에 가입 활동중,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붙잡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국내에 들어와 일제(日帝) 주요기관 등을 파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던 유세주(尹世?)의 의열투쟁에 큰 감화를 받은 선생은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맹(加盟)하였다.

 

당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중국 길림(吉林)에서 북경(北京)으로 이동하여 의열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북경에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軍資金)을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2710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북의 경찰, 헌병, 관공서 직원 등을 총동원하여 과거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색 검거하게 되자 선생은 형, 아우 등과 함께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64번이었는데 이때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하였다.

 

일경은 선생의 형을 이 사건의 지휘자로, 선생은 폭탄운반자로 그리고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일본 대판(大板)에서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게 되자 24개월여 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하였다.

 

출옥후 선생은 윤세주가 경영하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지도 등에 힘썼다.

선생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되어 요양하고 있을 때 192911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북경으로 가던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심양(瀋陽)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노신(魯迅)을 만나고 남경(南京) 한국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다

 

19326월초 중국 북경에 가서 만국빈의사(萬國殯儀社 : 중국 혁명원로인 楊杏佛 장례식)에서 노신을 만나게 되어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뒤어들기로 결심하고 193210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교장 김원봉, 남경 소재)에 입교하였다. 이 훈련반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당시 장개석에게 요청하여 설치한 한국 청년간부 속성 양성기관이었다.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배양에 중점을 두고 총기사용법 등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철학 등 정신무장과 교양 함양을 위한 과목으로 편성하였으며 훈련기간은 전시(戰時)를 고려하여 6개월 간으로 하였다.

 

교관은 한국인 20여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지원부서에 약간명의 중국 군인이 파견되었다. 교생 전원은 합숙, 수용되고 교내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토록 하였다.

 

선생은 이 학교 제1기생 정치조에 소속되어 6개월 동안 비밀통신, 선전방법, 폭동공작, 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423일 수료한 후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귀국하여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정세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띠고 활동중 1934522일 서울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민족시인으로서 <청포도> 30여 편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이때 선생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열단의 밀명(密命)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에서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결단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시와 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복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문인으로써 새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선생은 정치, 사회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하여 1935개벽지(開闢誌)<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하여 <해조사>(海潮詞), <노정기>(路程記) 등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작품과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지, 조선일보, 중앙일보등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絶頂),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작과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과 같은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인문평론, 문장등지에 게재하였고 이어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 냉광등 잡지에 발표하였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는 조선어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일본식 창씨를 강요하고 동아일보조선일보등을 폐간시키는 등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하에서 선생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되었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되어 <파초>(芭蕉), <독백>, <자야곡>(子夜曲) 등의 시를 지었으며, 한편 중국인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글을 발표하던 문장, 인문평론지 마저 일제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1942년에는 사실상의 유고(遺稿)<광야>(曠野)를 발표하는 등 시를 비롯하여 수필, 평론, 번역 등 매우 광범위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이와 같은 작품 활동속에서 다시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과 백형의 소상(小祥)으로 19435월에 귀국하였으나 동년 7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피체되어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북경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다

 

무슨 영문으로 붙잡혔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가족들은 뜻밖에 19441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들었으며 막내 동생 원창(源昌)이 북경으로 달려 갔으나 선생의 유해는 이미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줌의재로 변하여 조그마한 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 천애(天涯)의 고아와 같이 일가친척 한사람 임종을 지켜주는 이 없이 이국(異國)에서 유명(幽命)을 달리 하였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으리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60년 봄에는 선생의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되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히 잠들게 되었다.

 

?어데다 무릎을 꿇려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없다.?

<절정에서>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은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연보>에서

 

선생의 시에서 나타나듯 선생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광복의 열의와 복국의식(復國意識)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무한한 사색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난 선생의 시문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으며 이 민족에게 한없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였다.

 

무려 17회에 걸쳐 옥살이를 하면서도 오로지 독립을 위해 의열투쟁 대열에 앞장섰으며, 육신이 쇠약해지자 민족시인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등 암흑기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50주년을 맞이하지만 선생의 위대한 이름은 영생불망(永生不忘)하리라.

 

[편집] 생애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진보)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형인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이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으며, 나중에 이육사(李戮史), 이육사(李陸史)로 고쳤다. 또다른 필명으로 이활(李活)이 있다.

이육사 동상.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32년 6월 초 중국 베이징에서 만국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노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한국내에 소개하였다.

 

1943년 국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구금 중 순국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詩作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명하였다.

[편집] 참고자료

[편집] 가족관계

  • 잉조부 이황의 5대손 입향조(入鄕祖) 이구(李?, 1681~1761)
  • 곤조부 이수원(李守元, ?~?)
  • 래조부 이세익(李世翊, ?~?)
  • 현조부 이구운(李龜雲, 1744~1823)
  • 고조부 이정순(李程淳, 1764~1844)
  • 증조부 이만수(李晩秀, ?~?)
  • 조부 이중직(李中稙, ?~1916)
  • 조모 오종(吳鐘, ?~?)
  • 외종증조부 허조(許祚, 1817~?)
    • 외재종조부 허훈(許薰, 1836~1907) 허신(許藎, 28세 졸) 허겸(許?, 1851~1940) 허위(許蔿, 1855~1908)
  • 외증조부 허희(許禧, ?~?)
  • 외조부 허형(許?, 1843~1922)
  • 외조모 이중(李中, ?~?)
    • 외숙부 허민(, 1870~1910) 허발(許潑, 1872~1955) 허규(許珪, 1884~1957) 허길(許佶, 1876~1942)
  • 외종조부 허필(許苾, 1855~1932)
  • 부 이가호(李家鎬, ?~1941)
  • 모 허길(許佶, 1876~1942)
  • 장인 안용락(安庸洛, ?~?)
  • 장모 조욱일(曺旭日, ?~?)
  • 처남 안병철(?~?)
  • 처 안일양(安一陽, 1905~1983)
    • 아들 이동윤(李東胤, 1930~1932)
    • 딸 이경영(李京英, ?~?)
    • 딸 이옥비(李沃非, 1941~)
      • 아들 양우영, 양우석
    • 양자 이동박(李東博, 1941~)
      • 아들 이승엽(, 1975~)
  • 이원기(李源祺, 1899~1942)
    • 아들 이동영(李東英, 1933~2007)
      • 손자 이승환, 이인환, 이문혁, 이중혁, 이혜원
  • 동생 이원일(李源一, 1906~?)
  • 동생 이원조(李源朝, 1909~1955)
  • 동생 이원창(李源昌, 1914~?)
    • 아들 이동박(李東博)
  • 동생 이원홍(李源洪, ?~?)
  • 증고종숙 이영우(李英雨, ?~?)
    • 조카 이상흔(李相欣, ?~?)
  • 종조부 이원식(李元植, ?~?)
  • 종백숙부 이동하
  • 재종형제 이경식(李京植, ?~?)

[편집] 이육사를 연기한 배우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감상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 어조 : 식미지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은 대립되고 있어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는 어조임



* 표현상의 특징


-시각적 이미지(이상적 세계를 구현하는 소재)


- 청색 :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


- 흰색 : 흰 돛 단 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 참고 김기림 시 <바다와 나비> [청(靑)과 백(白)의 이미지] 비교


: <바다와 나비>에서는 청색과 백색의 이미지 대조가 보이지만,

 

<청포도>에서는 모두 시인이 바라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소재이다.


 


* 구성 : 5연 각 2행 (내용상 3단락)


제1~2연 :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


- 청포도 :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매체


제3~5연 :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


- 그가 찾아올 그 날 :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


- 청포 입은 손님 :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


제6연 : 손님을 맞을 마음가짐과 준비 자세


- 은쟁반, 모시 수건 : 화해로운 미래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

* 주제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

 

 

                                삶의 비약적 상승과 희망을 노래한 미래 지향적인 시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민족의 삶의 터전

비 한 방울 나리잔는 그따에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극한 상황

오히려 꽃은 밝아케 되지 안는가

역설적 희망(생명의 탄생)-극한 상황을 초극하는 의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새 생명 탄생을 위한 노력

광복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삶을 바쳐 정진하겠다는 의미

북쪽 쓴도라에도 찬 새벽은

생명이 부정되는 공간

1연과 같은 의미→좀더 구체적이다

눈속 깁히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마케 나라오길 기다리나니

봄을 기다리는 화자의 신념

결연한 의지

마츰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새 생명 탄생을 위한 인고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한 활동을 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

한 바다 복판 옹솟음 치는 곧

억눌림 속에서의 몸부림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약속이 이루어진 날의 환상적 기쁨   꽃성-혹독한 시대 상황이 걷히는 날→광복의 날

나?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광복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우리 민족

오날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새 생명 탄생의 환희

시인의 강인한 의식, 치열한 현재성과 현장성

 

▶성격-관조적, 영탄적, 의지적, 상징적, 저항적, 현실참여적

▶어조-강인하고 의지적인 남성적 어조

▶표현-상징에 의한 암시적 표현

▶특징-희망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시(시어의 강렬함)

▶시상전개-①점층적 전개  ②각 연이 서경(앞3행)에서 서정(4행)으로 표현됨

▶제재-꽃

▶주제-새 생명 탄생의 의지(참된 삶에 대한 의지와 기다림)

▶출전-<육사시집>(1946)

 

광야

                                                       민족의 역사를 말하는 조국의 터전

까마득한 날에

태초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천지개벽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광야의 원시성· 신성성(과거)

    생명체의 대유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산맥들이

활유법-광야의 광활함.장엄함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역동감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광야의 광활성(과거)

                 범하진

끊임없는 광음을

            세월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시간→시각적 이미지화(세월의 흐름)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민족사의 태동과 개척(과거)

   역사,인류문명     동적 이미지-신성한 공간에서 태동하고 개척한 민족사의 유구한 흐름

지금 눈 내리고

    일제하의 현실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광복의 기운              (눈 ↔ 매화 향기)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민족의 현실 인식과 선구자 의식 (현재)

           미래에 대한 확신과 의지-확고한 역사 의식

           씨-자기 희생적 의지. 미래 지향적 의식

다시 천고의 뒤에

민족사에서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 순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긍정적 미래에 대한 확신(단정). 초인-민족사를 꽃피울 민족지사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예언자적 역사 의식(미래)

              '가난한'과 대응

*갈래-서정시, 자유시, 저항시

*성격-상징적, 남성적, 의지적, 예언자적, 미래 지향적

*제재-광야

*주제-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 극복 의지(조국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

*특징-①시간적 시상 전개

      ②한시(漢詩)의 구성 방식(1·2연-기, 3연-승, 4연-전, 5연-결)

      ③비유적·상징적 이미지 사용

      ④남성적·의지적 어조

*출전-<육사시집>(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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