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엄격히 구별하는 이황의 학설에 반대했다. 이이는 이와 기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해서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의 작용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활동과 작용은 기의 운동에서 나타나며, 기가 발하면 이는 단지 여기에 올라탈 뿐이라는 기발이승을 주장하였다. 또한, 다양한 현상 속에 보편적 원리인 이가 존재하며, 이러한 보편적 원리는 기의 작용에 의한 현실의 구체적인 현상들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이이는 이의 보편성과 기의 국한성을 설명하였으며, 이를 이통기국론이라고 한다.
한편, ‘중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의미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러한 중용의 덕을 강조하였다. 율곡 이이는 이러한 중용의 덕을 누구보다 잘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이이의 생애 및 사상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적인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적인 주리론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理氣不離)를 들어 비판했다. 이처럼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대립된 주장을 균형 있게 아우르며, 본체와 작용, 현실과 원리의 대립을 조화시키려는 독특한 성리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와 기에 대한 이이의 관점은 이와 기 중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 중용의 자세에 기반하여 이와 기 각자의 기능을 조화롭게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이는 선조 재임 시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이이는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였다. 특히, ‘을해당론’ 사건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는데, 이는 1575년(을해년)에 일어난 정쟁조정 사건으로, 당시 동서 양당으로 갈라져 당쟁의 조짐이 일자 이이가 주동이 되어 정쟁의 주요 발단이 된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관으로 파견한 사건이다. 이러한 이이의 행적은 그의 중용의 자세를 또한 잘 보여준다.
또한, 이이는 현실적인 정치사상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이는 태평한 세월이 장기간 지속되면 폐단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누적되면 기존 질서가 붕괴되어 과감한 개혁으로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여러 개혁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본체와 작용, 현실과 원리를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통일적인 관계로 본 것으로 이와 기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서 파악한 그의 성리학 이론과 연관이 깊다. 이러한 그의 행적에서, 현실 혹은 원리 중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를 조화롭게 여기는 중용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중용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내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았는지 경계하며, 조화로운 자세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 사이트]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3026&cid=62051&categoryId=62051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540711&cid=46622&categoryId=46622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90803&cid=41884&categoryId=41888
첫댓글 이이가 23세 때, 퇴계 이황 선생은 당시 58세로, 조선의 대학자가 되어있었고, 이이와 이황 역시 35살이라는 나이차에 상관없이 학문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 나누고, 이이는 이황 선생의 집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큰 배움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황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2년 동안 두 사람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편지로 조선 시대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편지에서는 학문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서로의 안부 등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의견과 입장 차이가 있지만 존중하며 학자의 길을 간 두 사람을 보면 이황과 이이의 논쟁과 토론이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켰고, 더더욱 심회시켰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만남은 이이가 남긴 쇄언이라는 글에 나타나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두 학자들은 서로 다름 속에서도 서로 교류하며 서로를 인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