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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죽느냐 사느냐?』
마2:7~18
어떤 교회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 한 전도사님이 마태복음을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설명하는 데, 한 여신도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어찌 남자를 모르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잉태하게 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전도사님이 진땀을 빼면서 설명을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납득시켜주지 않고는 2장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해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성도가 그 여자 성도를 책망하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야!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이 그 말씀을 믿고 아내로 맞이했다는데, 남편도 아닌 네가 뭔데 그렇게 계속 트집을 잡냐?”고 하더랍니다.
이 말이 어찌 보면 억지 같아 보이지만, 정확한 대답이 스며있는 말입니다.
남편 요셉이 어떻게 했다고요?
“믿었다!”
마리아와 정혼하여 날짜를 받아놓고 기다리는 중에 뜻밖에도 마리아가 배가 불러오는 겁니다. 아직 손목도 안 잡아봤는데요. 이 당시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남편 될 요셉이 그 사실을 떠벌리면 마리아는 당장에 돌에 맞아 죽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했을까요?”
그러나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1:20~22『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 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래서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씀을 믿고, “믿고” 마리아와 예정대로 결혼하고, 또 결혼식 이후에도 그 아이가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25절에서 기록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결정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속에서 천사와 따지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 요셉을 성경이 뭐라 기록합니다.
마1:19에서 이미 그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잉태하면서부터 선택을 촉구하심>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부터 그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양단간에 결정할 것을 촉구합니다.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믿을래? 안 믿을래?”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이 천년 전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예수님도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대충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눅12:51~53을 봅시다.
눅12:51~53『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과 가족 간에도 이렇게 분쟁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아들은 믿고, 아버지는 안 믿고, 아내는 믿고, 남편은 안 믿고, 이런 현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낼 모레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인용되는 성경구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말씀을 붙였습니다. 이 말씀의 출처는 바로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마2: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즉, “기쁘다 구주 오셨네”인데, 누가 기뻐했는지 본문에는 주어가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누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다고 했습니까? “그들이” “그들이” 그들이 누구입니까?
⁂ 동방박사들입니다.
예수님 탄생을 가장 먼저 기뻐해준 사람들이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큽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오직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수천 년을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 축하 사절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어떻게요?
밤하늘에 큰 별을 하나 띄워서 천문학을 연구하는 박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셨습니다.
그 별을 보고 동방박사들은 어찌했습니까?
“믿었습니다.” 믿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믿고,” 그 별을 따라 “온 인류에게 소망이 되고, 구원이 되실 분이라고 믿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준비해서 목숨을 걸고 별을 따라와서 예수님 탄생의 첫 번째 축하사절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을 믿고 멀리 이방에서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들과 함께 “믿지 아니한” 대표적인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헤롯왕입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찌 했습니까?
(7~8절)『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 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지금 헤롯 왕이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탄생하면 나에게 와서 보고해 달라, 그러면 나도 가서 그 아기에게 경배하겠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속으로는?
태어나는 즉시 죽여 버릴 꿍꿍이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나서 꿈을 꾸었습니다.
(12절)『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이들이 헤롯을 피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지 않고 살짝 빠져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어떻게 합니까?
(16절)『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 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아기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헤롯은 베들레헴 지역의 2세 미만 아이들을 다 죽여 버리는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몽땅 죽임으로써 예수를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왜 헤롯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을까요?
마리아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고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줄 때에 “아멘”으로 믿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가 성령으로 된 것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동방박사도 별을 보고 구세주가 나실 것을 믿고 축하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왕 헤롯은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냥 안 믿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문제는 “경배”입니다.
경배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 사전에는 “삼가 절 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절한다는 뜻입니다. 절을 하되 공경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예를 갖춰 절을 한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넓은 의미로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께 절한다. 절을 하되 진심으로, 공경하는 자세로 절을 한다는 뜻입니다. 절을 하되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과 제세로 예를 갖춰 드리는 절,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하면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분께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더 풀어 설명하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안 믿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뭣을 뜻합니까?
그전까지 자기가 경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기 이전에는 어떤 것을 경배했습니까?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뭐, 나는 아무것도 경배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무신론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 경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경배합니다.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을 경배합니다. 친구를 사귀면서 친구를 경배합니다. 친구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직장에 취업하면 그 직장의 목표에 경배합니다. 그 직장의 행동 준칙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이윤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경배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자나 깨나, 오매불망 회사의 이익을 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그 일에 목을 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학원에 보내고, 일류학교에 보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렇게 하여 남들보다 잘나고 똑똑하여 남들을 딛고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경배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자가 세속적인 왕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원칙에 따라서 자기 스스로 높여놓은 자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지위를 높여서 남들로부터 경배를 받는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왕으로서 유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미 경배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속으로야 어떠하든지 겉으로는 유대인들 모두가 그의 앞에서 굽실거립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와서 또 다른 유대인의 왕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그를 죽이려는 것이지요.
“나 말고 다른 왕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헤롯이 경배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보니 큰 별이 떠서 구세주가 나실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경배해야 할 그 분이다.”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 탄생하셨는데, 우리가 그 분을 경배하지 않고 누구를 경배하랴!”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길을 가든지,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 내가 노력하고, 내가 벌어서 편하게 살겠다. 또는 지금까지 내가 쌓아올린 이 권위는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다. 내 권위를 해코자 하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 하면서 계속 불신의 길을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헤롯처럼 사느냐? 동방박사처럼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마치 햄릿이 외친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어찌 되었습니까? 내가 죽더라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 그러니까 자기의 장인 될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끝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만 결국은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도 죽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이런 경우에 택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죽음으로 통하는 길을 선택하여 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 중에서 생명이 되는 길을 선택한 예는 대단히 드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죽음 쪽을 선택합니다.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은 당초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목적은 광산에서 바위를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이너마이트를 사람들은 어디에 쓰기로 선택합니까? 사람 죽이는 전쟁 무기로 씁니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무시무시한 핵무기 제조에 쓰기로 선택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을 짓만 골라서 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기술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 무기 제조로 연결됩니다. 과학의 발달은 바로 전쟁 무기의 발달입니다.
헤롯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탄생이 자기의 왕권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유아들을 다 죽이고 마는 잔인함을 보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종착역이 ‘죽음’인 역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사람들이 죽음 역이 아닌 생명 역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죽음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이 열차에서 내려서 생명 열차로 갈아타자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꿈쩍도 안 하십니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던져진 화두는 헤롯이 될 것이냐,
동방박사가 될 것이냐입니다.
이것은 바로 죽음의 길이냐 생명의 길이냐입니다.
동방박사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외칠 수 있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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