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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59-1 ❏문화재지정: 광양신재최산두선생유허비(光陽新齋崔山斗先生遺墟碑) -전라남도기념물 제22호(2005.01.27지정) ❏배향인물: 최산두(崔山斗) 박세후(朴世煦) ❏창건연도: 1577년(선조 10)~1580년(선조 13) ❏향 사 일: |
신재서원은 우장면 현 북 3리 향교 옆에 1577년(선조 10)에서 1580년(선조 13)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이 1578년 기묘명현이면서 대학자였던 광양고을 출신 최산두(崔山斗)와 역시 기묘명현이면서 중종 때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유재란 때에 왜구의 침공으로 읍내가 함락되면서 신재서원도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실 이후 단지 터만 남아 있었는데, 1690년(숙종 16)에 광양의 많은 선비들이 중건 의사를 주창한 후 감영에 소청을 올렸고, 이듬해에 원우를 중건하게 된다. 숙종 신미년(1691)에 사민(士民)이 건립했다는 서원가고의 가록은 중건을 말한 것이다. 중건 이후 사액을 받지는 못하였는데, 기묘명현이고 호남 3걸로 불릴 만큼 대학자인 최산두를 배향하는 서원이 사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광양사림들과 수령들의 의지가 부족한 결과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1775년(영조 51)에는 향중유림 정철진, 서윤화 등의 주도적인 노력에 의해 중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828년(순조 28)에는 정한기, 서현두 등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해 또 한 차례 중수한다. 그런데 서윤화 등은 흥학재를 중건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따라서 서윤화 등의 광양 유림들은 향교-흥학재-서원을 함께 진흥시키는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향교를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과 서원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이 서로 당색(黨色)을 달리하며 대립과 갈등을 빚었던 곳도 적지 않았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해방이후 1967년에 봉양사복설기성회가 조직되고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복설되었다.
1)주벽-최산두(崔山斗, 148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농중자(籠中子). 아버지는 한성판윤 한영(漢榮)이며, 어머니는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사숙하였다.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15세 때 ≪통감강목 通鑑綱目≫ 80권을 가지고 석굴(石窟)에 들어가서 2년간 수천 번을 읽고 나오니 나뭇잎이 모두 강목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洛中君子)’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생원이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
1513년(중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 홍문관저작, 1516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장령·사인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 풀려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신재집 新齋集≫이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2)박세후(朴世煦, 1493∼155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중온(仲溫), 호는 인재(認齋) 또는 눌재(訥齋). 안의(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미창(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 사화(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일소되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균관전적에 등용되고, 1522년 박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527년 다시 박사로 복직되어 전적을 지내고 사헌부감찰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광양현감이 되어 해상의 방위에 전념하고, 공자의 묘가 허술한 것을 보고 터를 닦아 묘우를 옮겨지었다. 1533년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郎)이 되고 곧 이조좌랑으로 옮겼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535년에 공조좌랑, 이듬해 장악원첨정이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문외출송을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홍문관교리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종부시(宗簿寺)와 봉상시(奉常寺)의 첨정을 지냈다. 1540년 밀양부사로 특선되어 치적을 올렸고, 1544년 좌필선(左弼善)에 이어 곧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의를 지내고, 154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관동지역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연척인 양구현감 신난수(愼蘭秀)의 비행을 적발하여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고문을 받고 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사우인 봉양사(鳳陽祠)와 내·외삼문,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봉양사의 입구인 내삼문이 있으며 강당은 외삼문 우측에 작게 자리잡고 있다. 서원 경내 왼쪽에는 최산두의 유허비가 자리잡고 있다.
신재서원의 유물·유적으로는 현재 서원 경내 사우 입구에 서 있는 2기의 비석이 남아있다. 그것은 1775년(영조 51)에 건립된 「신재선생 유허비」와 1828년(순조 28)에 건립한 「봉양사사적비」이다.
1)광양신재최산두선생유허비(光陽新齋崔山斗先生遺墟碑)-전라남도기념물 제22호
신재 최산두선생유허비는 조선시대 후기인 1775년에 건립되었다.
신재 최산두는 기묘명현으로 점필재 김종직과 한훤당 김굉필의 학맥을 이었으며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등 당대 거유들을 배출한 조선시대 호남의 대학자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임란 이전 이곳 광양에 봉양사가 세워져 광양출신으로 광양현감을 지낸 바 있는 박세후와 함께 배향되었으며 중수한 1775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선생의 유허비는 순천부사인 김약행이 찬하였고 인물의 행적과 봉양사의 연혁은 물론 정암 조광조 등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어 조선전기 사림문화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의 이해, 그리고 봉양사 및 지역문화의 이해를 돕는데 훌룡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선생의 행적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봉양사사적비
1828년(순조 28)에 건립하고 송치규가 찬하였다.
참고-광양시지, 광양시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다음카페 초계최씨 종친회 http://cafe.daum.net/as0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