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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교육공간
목차
Ⅰ.조선시대의 인문 사회적 배경
Ⅱ.학제와 교육정책의 변천
Ⅲ.조선시대의 교육공간 형식 및 변화양상
Ⅳ.부분별 교육공간
역동서원의 공간구조
Ⅰ.조선시대의 인문 사회적 배경
척불 강조, 숭유기풍을 강화함으로서 유교사상의 철학화와 보편화가 이루어졌으며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서 인간적 교양을 중시하는 대신 행정의 실무에는 전문지식이 미약한 양반관료와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지배적 사회군인 관인계급의 양반, 그리고 직업선택과 이주의 자유가 박탈당한 국가에 대한 생산을 비롯한 의무를 짊어진 계층으로 교육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상민계층과 중인 천민으로 상하 지위체계가 확고했다.
Ⅱ.학제와 교육정책의 변천
1.제 1 기(태조∼연산군:1392∼1506)-교육문화의 시창기
1)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본질적인 두드러진 차이가 없다.
2)태종. 세종. 성종의 업적으로 많은 교육시설과 서적이 출간되고 교육에 힘을 써 민족문화의 황금시대
3)연산군의 폭정으로 儒者들이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여 사학으로 교육에 전념 => 서원성립
2.제 2 기(중종∼명종:1506∼1567)-교육의 성숙기
1)실질적으로 교육가들의 철학사상이 발전되어 서원발생
2)소수서원- 학풍의 부흥으로 풍기에 安裕를 추모하는 서원
3.제 3 기(선조∼숙종:1568∼1720)-교육의 爛熟期
1)임진왜란으로 인한 학풍의 퇴폐에서 탈피. 訓育向上에 힘씀
2)고명한 학자속출.문학.사학.향교.서당.서원을 매개로 교육력 강화
3)말기 빈번한 당쟁으로 학풍쇠퇴
4.제 4 기(영조초∼근대 서구식 교육기관 설립)-교육문화의 영락기
1)청조의 고증적 사상과 중국을 거쳐 들어온 서학 =>실학파 등장
2)재래의 유학세력 여전
3)한말 아무런 준비없이 근대서구식 교풍을 받아들임
5.제 5 기(근대 서구식 교육설립후- 강희 4년 1910) - 근대 서구식 교육으로 넘아가는 과도기적 시기
1)서양의 새 학술 이념유입
2)갑오개혁(1897) - 과거제폐지, 교육제도개혁
Ⅲ.조선시대의 교육공간 형식 및 변화양상
1.풍수지리설과 택지선정
1)풍수지리설 - 소박한 지리적 신앙과 음양오행설이 결부하여 음양오행설을 철학적으로 도입함으로써 합리화하여 불승과 유학자에 까지 신뢰를 받았다.
2)풍수지리설이 유교철학의 기본원리를 이론적 기반으로 하고 유교자체가 부정되지 아니하여 미신으로 배격의 대상이 되지 않은것은 오히려 풍수지리설은 유교의 지지와 보호하에 전민족의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3)풍수지리설 내용
양기와 양택
+- 양기 : 넓은 의미로 지역-집단양기(국. 도 주 읍): 도시계획범위
+- 양택 : 좁은 의미로의 장소-개인양기(가옥, 택지): 주거축적범위
4)陽氣期-인간이 주거할 수 있는 地
+- 생 -- 생자 -- 양 -- 주거지(양택)
+- 사 -- 사자 -- 음 -- 묘지(음택)
5)유형의 구성 : 기의 혈상화가 산천의 모양으로 나타남
+- 개별적 단독형 : 산. 사. 지. 수 등의 형상으로 논함
+- 복 합 형 : 개별적 각 요소가 종합된 전 범위의 형국
6)개인과 자손의 영달과 번영은 개인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조상의 음덕의 결과 => 묘지에 대한 택지선정
7)조선시대의 교육공간의 구성
·기능
+-재향 ·교육사조 : 선현의 학통을 지켜나가는 것
+-교육
8)풍수지리설의 묘지의 택지선정의 문제와 선현을 제향하는 조선시대 교육공간의 지리적 입지에 영향을 줌
Ⅳ.부분별 교육공간
1.서 원
1)서원건축의 배경
서원건축은 사학교육기간 건축중의 하나로서 나라에서 경영하는 공공교육기관인 향교건축과 대응되는 위치에 있다.
조선시대까지의 사학교육기관으로서는 서원이외에도 서당(書堂)과 정사(精舍)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사학의 대표는 서원인 것이다. 한국의 서원건축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향교와 마찬가지로 문헌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2년(AD327)에 관학으로 태학이 건립되었음이 삼국사기 권 18에 기록되어 있고, 또 중국의 구당서 동이전에는 경당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기록만으로 사학교육기관인 서원과 같은 제도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백제 또한 아직까지 이렇 다할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일찍이 일본에 많은 박사(博士)들을 보낸 것으로 보아 교육기관이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신라는 화랑도 교육이 주가 되어 삼국통일에 큰 밑받침이 되었고, 통일이후에는 국학이 AD682년에 세워졌는데 화랑도는 관학적 성격이 있고, 사학적 성격도 있었으나 서원제도와 같은 것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고려시대는 분명히 관학과 사학으로 나누어져 사학으로는 십이도(十二徒)와 서당이 있었고 관학으로는 국자감(國子監), 향교(鄕校),동서학당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십이도는 국자감에 버금가는 고등교육기관이었는데 문종 7년(AD1063)최충이 관직에서 물러나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쓴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9개의 학사가 있어 이를 낙성제(樂聖齊), 성명제(誠明齊) 등 구제(九齊)라 하였는데, 이를 본 딴 사숙(私塾)들 11개소가 속속 건립되고, 이들 모두가 합쳐져 십이도가 된 것이다. 한편 서당은 서민계급의 자제를 수용교 육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관학인 성균관, 사학, 향교와는 달리 사학으로 서원, 서당, 정사의 세가지 교육기관이 있었다. 먼저 서당을 살펴보면, 글방, 서재, 사숙 등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중기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초기에 과거시험 준비에 치우쳤던 것으로 점차적으로 초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한편 정사는 명망 높은 유사(儒士)가 산수 좋은 곳에 은거하여 서재를 지으면, 여기에 그를 흠모하는 청소년들이 모여들어 공부하던 사학기관이었다. 예컨데 퇴계 이황은 완락재(玩樂齋)를 짓고 그 건너편에 용운정사(龍雲精舍)를 지어 제자들이 공부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학의 으뜸기관인 서원은 세종 때 세워지기 시작하였음을 세종실록 권2. 즉위년 11월 을유(乙酉)조의 기록으로 알수 있다. 이때의 서원은 단순히 자제교육의 장소로서 후일 서재로 개칭하게 되었다. 즉 이 당시에는 성현의 신위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서원이라 할 때에는 사학교육과 사묘(詞廟)가 합쳐진 것으로 최초의 것은 주세붕이 중종 37년 1542년에 고려때 유학자 안유의 신위를 모시고, 다음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데서 유래한다. 그후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선생이 나라에 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책, 전답, 노비 등을 1556년에 하사받음으로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서원이 건립되어 점차 그 피해가 심해지자 대원군은 고종즉위 8년 만에 1인1원(1人1院)의 원칙아래 전국 47개소의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없애게 되었던 것이다.
2)서원건축의 입지환경 및 건물배치 특성
①입지환경
조선시대의 건축은 위치선정에서부터 건물배치, 그리고 외부공간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조화하려는 특성을 가졌으며 또한 風水地理思想과 종교사상이 그 저변에 깊이 형성되어 발전 정립되어왔다. 같은 시대의 지배적 유교문화공간이었던 書院과 鄕校도 이러한 공통적인 건축현상4 서 예외가 될 수 는 없었으나 궁궐이나 사원 건축과는 비교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건축 환경을 조성하였다. 특히 書院은 16세기부터 종가, 정자 등과 함께 그 지역의 뚜렷한 유교문화권을 형성시켜왔으며 향교는 지방의 독특한 제도적인 교육문화권을 갖고 있었다.
鄕校는 조선시대 도읍내 주요공공건물로서 주로 성 밖의 한적하고도 경치가 좋은곳에 위치하여 지방의 가장 권위있는 상징물로써 존재하여 왔다. 鄕校는 주로 읍의 중심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는데 이는 향교가 중앙의 조직에 의한 官學이었으며 또한 講學의 장으로써만이 아니라 지방민의 교화사업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던 곳이기에 읍과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서원은 향교와는 달리 읍으로 부터 원거리에 위치하였는데 이는 書院이 중앙조직과는 관계없는 사학이었으며, 또한 유학자들이 서원자리를 정함에 있어 風光景勝이 뛰어난 곳이거나 선현이 講道하던 인연이 깊은 곳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聖賢講道의 지리는 대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조건이 겹치는 곳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원지의 유래 가운데 고려 말 이래의 閉寺를 이용한곳이 많았고 (紹修· 玉山· 迎風· 盧江· 臨湖 書院), 사찰 터 역시 대개 그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았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서원은 읍과 먼 곳에 위치를 정하게 되었다. 표2는 {읍지}와 {여지도서}를 중심으로 한 書院과 鄕校의 위치 분포도로서 (향교는 주로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후 남은 47개 서원과 당시 전라도의 나주, 남원 진관, 경상도의 안동, 경주진관 내에 건립된 서원을 주 대상으로 했음) 향교는 대부분 읍의 중심에서 5리 안팎의 거리에 위치한 반면 書院은 5리 이상의 먼 곳에 자리를 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書院의 자연환경에 대하여는 박노계(朴盧溪 1561-1835)의 (陶山歌)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퇴계의 精舍경영에서도 자연과의 합일된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표) 서원 및 향교 위치
위치
서원명
향교명
읍의 중심으로부터 2리 이내
충열, 포충사(거창), 죽림, 영귀, 송림
영암, 태인, 옥과, 장흥, 익산, 해남, 장수, 용담, 흥덕, 정읍, 화순, 부안, 함열, 고부, 보성, 무안, 남원, 무주, 장성, 고창, 남평, 김제, 임실, 포천, 파주, 영월, 현풍, 예안, 청창, 선산, 홍주, 예천, 진도
읍의 중심으로부터 3-4리 이내
창절사, 포충사(철원), 창성묘, 절수, 동, 성황사, 충현사 영산
동복, 강진, 광주, 여산, 곡성, 나주, 여주, 순흥, 거창, 성양, 진주
읍의 중심으로부터 5-6리 이내
우저, 덕봉, 서안, 흥암, 남강, 송학, 향현사, 장암, 우곡, 충열사(동래)
광양, 무장, 전주, 함평, 운봉, 순천, 구례, 상주, 홍산
읍의 중심으로부터 7-10리 이내
충열사(충주), 도천, 삼천, 송강, 덕양, 유양
창평
읍의 중심으로부터 11-15리
삼봉, 도정, 화산, 봉암, 도동, 병산, 창열사(홍산)
읍의 중심으로부터 16-20리
무성, 함계, 용연, 월봉, 의열사, 학산, 의산, 로강
읍의 중심으로부터 21-30리
포충사(광주), 파산, 사충, 기공사
읍의 중심으로부터 31리이상
옥동, 충절사, 병암, 봉산
성곽내
만경, 첨강, 임파, 영천
한국의 서원은 대다수가 背山臨水의 명당에 입지하여 뛰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좋은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도산과 옥산서원 등은 山水가 함께 어울려진 대단히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②건물 배치및 외부공간 구성
조선의 서원은 사묘와 강당을 구비한 제사, 교육의 기관이었으므로 건축의 전체 양상은 사당이 있는 묘의 구역과강당과 학교 건축으로서 제향과 강학의 기능이 동시에 행해졌던 당시의 사회적필연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축계획의 사원건축은 향교건축보다 다소 자유스러웠다(축선상의 건물배치, 지형에 따른 구역 설정 등) 이는 서원의 설립목적이 사문의 진흥과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지방의 사림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건립시기별로 뚜렷한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의 변화양상이 나타나지 않는 향교건축에 비해 서원건축은 어느 정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는 향교가 관학인 이유도 있으나 건축의 주체가 유교사상에 심취된 위정자들이었으므로 형식적요소가 많았던 반면, 서원은 설립초기의 목적과 달리 사회적인 변동으로 인하여 서원의 기능도 따라 변했기 때문에 건축적인 면에서도 그 변화가 온 것으로 보인다.
서원건축은 지형에 관계없이 모두 앞쪽에 講學구역을 두고 뒷편에 墓구역을 두는 前學後墓의 배치형식으로 일관하여 항상 제향구역이 맨 뒤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건물의 기본배치 모슴은 일정한 중심축을 설정하여 그 축선 상에 전면으로부터 문(2층 누각, 또는 평대문, 솟을대문), 강당, 사당 순으로 배치하였으며 강당 앞에는 좌우로 재실을 건립하여 교생들의 기숙처로 활용하였다. 기타 祭器庫와 장판각, 그리고 교직사 등은 관련 주 건물(사당, 강당) 주변에 적절히 배치되었다.
이상과 같은 서원건축의 배치계획은 향교건축에서의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향교건축은 평지에 향교가 들어설 때는 전묘후학의 배치기법을 이용하였으며 경사진 지형을 교지로 택할 경우에는 그 지형을 2,3단으로 整地한 후에 서원건축과 동일한 방법의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구역설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법은 모든 향교에서 예외 없이 지켜졌는데 이는 제향공간을 중요시한 유학자의 사고와 한국건축에 있어 공간의 位階性이 동시에 합일된 건축계획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설립시기에 따른 서원건축의 배치 및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3단계로 구분지어 특성을 볼 수 있다.
제1기 (16세기 중엽-藏修優位時代)
이 시기의 서원건축은 본래의 기능인 학문연구에 맞추어 건축계획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강학을 위한 건물(강당· 재실· 장판각· 경각 등)이 많이 건립되었으므로 서원 내 講學공간의 비율이 높았다. 제1기에 있어 초창기의 유구로는 경북영주의 소수서원을 들 수 있다. 이 서원은 한국에 세운 최초의 서원으로서 우선 입지한 곳부터 사찰 터로 불교문화공간이 유교문화의 공간으로 바뀐 특수한 입지를 갖고 있으며, 건물배치와 공간구성등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원건축의 기본 형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림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정한 축의 설정 없이 講學을 위주로 한 강당과 재실 등이 불규칙하게 경내의 중앙에 위하고 있으며 사당은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되어 경내의 좌측 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강당은 대부분 건물들이 남향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서향으로 사당 쪽으로 향하게 건립 되어진 게 주목된다. 이러한 배치형식으로 인하여 서원건축의 시창기에 처음 건립된 소수서원은 유교건축의 특징인 공간의 位階性은 전연 나타나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산만한 공간감만이 형성되고 있다.
16세기 후반에 와서는 사원건축이 초기와는 달리 일정한 유형을 갖고 등장한다. 즉 서원자리는 대부분 享祀者가 일찌기 講道하던 곳으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며, 지형도 경사지를 택해 공간의 분화 및 계층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시기의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북의 도동· 옥산· 도산· 병산서원 그리고 전남의 필암 · 무성서원 등이며, 이러한 축선에 따라 주요건물들이 배치되었고 서원내의 중심공간이 강학구역 내에는 강당과 재실이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공간의 분화도 완전히 이루어져 각기 고유의 공간성을 보호받고 있다.
제2기 (17-18세기, 享祀優位時代)
조선조에 있어 書院과 舍宇는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들어와 크게 증가를 보이고 있다. 숙종조(1675-1720)에는 이미 한 道에 서원, 사우가 8,90개나 되었으며, 또한 서원의 기능에 큰 변화가 와 養育人材의 교육적 기능의 주기능이 부차적이었던 祀賢爲主의 기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연히 건축계획에서도 제1기의 일정한 형식에서 차츰 변화의 양상을 가지고, 특히 교육공간내의 건물조합방법이나 그 규모가 달리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서원으로서는 興岩書院 (경북 상주,1702년)을 들 수 있는데, 그 특징으로는 교육의 기능을 돕기 위한 부속건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당후면에 교육 공간 내에 講堂과 東, 西齋만을 건립하였으며, 재실도 상당전면에 와 있지 않고 강당 후면에 배치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공간의 성격은 제향공간과 교육공간이 문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 있어 각 공간의 독립성이 약하게 나타나다. 이시기에 건립된 경기도 용인의 深谷書院도 강학구역내의 강당과 동재만이 단촐하게 건립되어졌다.
제3기 (19세기-, 書院整備時代)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의 600여개소 서원가운데 오직 47개만 남기고 모두 훼철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훼철된 서원들은 다시 중건을 서둘렀으나, 건축모습은 훼철되기 전의 모습은 볼 수 없고, 기능면에서도 단지 제향만을 위주로 하며, 교육의 기능은 명목상으로 유지되었을 뿐이다. 이시기 초반에 건립된 대표적 서원으로는 경북의 仁興書院과 전남의 芳春, 秀岩書院등을 들수 있는데 이 서원 역시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그 후에 중건을 본 서원들이다. 인흥과 방춘서원은 강당과 사당만이 건립되어졌으며, 수암서원은 축의 설정이 않된 채 사당과 강당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고 교육공간의 구성이 애매하게 나타난다. 19세기 후반기로부터 20세기 이후에 중건된 서원들은 단지 사당만이 건립된 곳이 많으며 현재 전국의 각 지방에 상당수가 산재해 있고 그 호칭도 주로 사(祠)로 통용되고 있다.
이상의 고찰결과 서원 건축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講學을 위한 공간형성보다는 제향위주의 건축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으며, 외부 공간의 구성은 당시 서원의 규모 및 건립시기에 따른 변화의 양상 등으로 그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교육과 제향공간이 주 공간으로 등장하고 부 공간으로 서원에 따라 과정적 공간(매체 공간)과 지원 공간이 형성되어진다. 이러한 공간들은 주위의 담장으로 인해 1차로 위요공간을 형성하고, 2차로 다시 각 기능별 건물 조합에 의해 공간의 중첩성을 띠게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한국의 서원건축은 중국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구성형태만은 중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고 오직 규모면에서만 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3)서원건축의 구조 및 양식
서원의 건축양식은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며 일정한 통일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는 사찰 및 궁궐건축과 크게 비교되는 것으로 서원건축은 사찰건축의 종교성, 궁궐건축의 권위성과 는 다르게 오로지 순수한 학문연구를 위한 건축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검소함을 장려했던 유교사상도 건축 환경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한다. 서원의 주요 건물인 사당과 강당, 그리고 재실, 누각의 건축양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祠堂
대부분 정면3간, 측면1간 규모의 맞배집으로 일관되어진다. 사당건물의 특징인 전면 반간을 개방하여 제향의식 시에 편리하게끔 계획한 서원이 많으며 건물내부는 통간으로 마루를 깔고 主壁으로 배향인의 중심인물을 모시고 양측 벽으로 종향인을 모셨다. 공포는 익공식(2익공)이 주류를 이루고 주심포식은 도동서원 외 몇 곳에서만 나타난다. 다포형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같은 유교건축인 향교건축에서는 드물게 나타난다(전북 익산향교 내성전 등) 전면을 퇴간으로 개방했을 경우 에는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려 사이엔, 꼭 화반을 배치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로 받침을 두었다.
-- 講堂
정면5간(소수, 도산서원은 4간) 규모의팔작짐의 대부분이나 맞배집도 필암, 도동서원등에서 나타난다. 평면형태는 대부분의 서원에서 중앙부를 우물마루로 깔아 대청으로 계획하고 양측면에는 1간씩을 온돌방으로 꾸몄는데 이는 교육상의 편리를 위한 평면계획이라 하겠다. 건축양식은 익공식이 많고 이외에는 민도리집 앙식이며 주심포양식도 도동서원 등에서 나타난다. 가구는 전, 후방 평주위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종량을 얹힌 5량 구조가 대부분이다. 기타강당에는 장식적인 의장요소는 없으며 창호는 띠살, 판장문이 고루 쓰이고 특히 대청의 창호 개폐방법으로는 띠살의 들어열기문으로 되어있다.
-- 東,西齎
강당앞에 대칭으로 건립되어 교생의 기숙처로 이용되었으며, 전면반간 폭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안쪽은 온돌방으로 꾸며 기거하기에 편리하게끔 계획되었다. 지붕은 팔작지붕도 나타나나 맞배지붕이 주류를 이룬다. 건축구조는 주로 민도리식 양식이며 띠살창호 3량가구 등 민가풍으로 되어있다.
-- 樓閣
누각은 서원의 정문으로 건립되는 경우(필암, 무성, 도동서원)가 많으며 정문과 강학구역 사이에 건축된 곳도 있다(옥산, 병산, 서악서원). 건축양식은 주로 익공식이며 지붕은 거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문으로 건축된 누각은 1층 정면에 판장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이용하게 하였고 2층은 주로 사면을 개방시키고 그 주위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4)서원의 외부공간
서원의 외부공간 구성은 향교에서와 달리 크게 한 가지 방법으로 집약 된다고 할 수 있다. 향교에서는 제향공간이 앞에 오고 강학공간이 뒤로 자리 잡는 전묘후학의 배치에 따른 것과 그 반대되는 전학후묘의 두 가지로 나뉘고, 기타 병렬형의 것이 있었으나 서원건축은 강학공간이 앞에 오고 제향공간이 뒤로 가는 전학후묘의 배치에 따른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서원건축이 주로 평지가 아닌 배산임수(背山臨水)하는 주변의 경관이 좋은 산지에 터를 잡기 때문에 자연히 제향공간이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성서원(靑城書院)과 같은 극소수의 서원에서는 향교에서처럼 병렬형의 배치도 있는 것이다. 사액서원의 시초요, 실질적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강학공간이 앞에 오고, 사묘공간이 뒷 편에 위치하지만 각 건물의 좌향이 다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전학후묘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소수서원이 자리한 경북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는 본래 숙수사가 있던 곳이라 서원의 진입은 우편으로 죽계라 부르는 냇물을 끼고 서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돌아들면 남측에 면하여 서있는 담장과 일각대문에 다다른다. 일각대문 앞 동측에는 동서로 면한 경영정 정자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서있러 유생들이 냇가에서 자유롭게 풍류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인 강당이 동향하여 자리 잡아 강학공간의 출입은 강당의 남측 측면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강당은 정면4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자리 잡고 있다. 평면의 사방으로 반칸 폭의 개방된 툇마루를 두고 기단의 주변에는 흙바닥 마감의 마당을 형성하며, 이렇다 할 담장이나 수목이 없는 트여진 공간으로 이루어진 만큼 일각대문 진입시 강당측면 더불어 강당의 서북쪽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사묘의 지붕과 둘러친 담장과 내삼문들이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이점이 서원건축의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공간구성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또한 동서양재도 한채로 구성되어 정면 6칸 측면 1칸반의 장방형 평면상의 중앙에 대청 2칸을 두고 동서로 온돌방 각 2개씩을 두어 동쪽을 직방재, 서쪽을 일신재라 하여 남향하고 있음이 다른 점이다. 특히 강당의 유일한 온돌방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이곳에 기거하는 선생이 동서양재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에는 직방재, 일신재 이외에도 지락재와 학구재 두채의 서재가 동북방에 서있어 다른 서원과 또 다른 공간구성의 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묘인 문성공지묘는 강당의 뒷쪽 서측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방형으로 둘러막은 담장속에 서있어 강당 대청에서나 동서양재 쪽에서 사묘공간을 바라볼 때 담장과 풍판(風板)이 달린 맞배지붕의 측면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사묘 앞쪽으로 넓은 공간이 펼쳐지고 담장 밖의 낮은 동산 소나무 숲이 보임으로써 존현 공간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활달한 공간정서를 갖게끔 하고 있다. 또 장판각이 정면 2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 집으로 바닥은 우물마루인데 일신재의 서측에 남향하여 서있으나 그 전면 처마선은 일신재 · 직방재의 처마선보다 뒤로 물러나 있으므로, 일신재 직방재에서 강당과 사묘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차단하지는 않고 있다. 현재 사묘 담장앞 높은 마당은 모두 잔디를 심어 마감하였으나 본래의 모습은 흙바닥 마감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사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의 중심축은 사묘나 장판각의 중심축과 평행하지 않고 있어 결론적으로 소수서원은 사액서원의 시작이었던 만큼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외부공간을 구성한 것임을 알수 있다. 전사청 뒷편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서있는 영정실(影柾室)은 고려때 명유(名儒)이며 이곳 출신인 안향(安珦)의 회헌영정(晦軒影幀),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등을 보관하기 위하여 근년에 건립한 것이며 그 뒷편 담장밖에 고직사(庫直舍)가 자리잡고 있다.
5)외부공간 구성물
외부공간 구성요소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수평적 요소인 바닥은 흙바닥 마감이 으뜸이지만 가끔 잔디마감을 하는 경우가 있다.이때 잔디마감은 제향공간의 사묘주변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 생각된다. 제향공간에서는 제향때 사묘의 앞마당이 중요한 제향기능을 다하여야 하므로 잔디식재가 부적당하기 대문이다. 수직구성물로서는 담장을 으뜸으로 들수 있다. 담장은 서원이 선비들의 공간인 만큼 사고석 담장은 쌓지않고, 막돌허튼층 쌓기의 돌담이나 돌과 집, 또는 돌과 기와를 주재료로한 토담이 주종을 이룬다. 다만 담장위는 기와지붕을 하였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사고석 담장은 1970년대 중수때 본래의 토담을 헐고 새롭게 쌓은 것이다. 굴뚝 또한 담장과 마찬가지로 수직적인 요소인데 이는 돌담이나 토담과 같이 돌과 흙으로 위쪽은 기와지붕으로 마무리한다. 외부공간 구성물로서 중요한 요소로는 석물(石物)이 있는데, 이는 향교건축에서와 같이 제향때 뜰을 밝히기 위해 광솔가지를 태우는 정료대(庭療臺), 손을 씻는 관세대, 제향때 제물로 쓰는 염소등을 매어두는 생단(牲壇), 축문을 태우는 예감대, 물확, 성함 등이 적당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 끝으로 연못이 설치되기도 하는 데 남계정사 이외에도 병산서원, 돈암서원, 덕양서원 등 소수의 실례들이 남아 있다.
2.향 교
1)향교건축의 역사적 배경
향교건축은 나라가 세운 교육기관의 건축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라 불리우게 되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교육제도가 이미 삼국시대에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태학을 설치하여 미혼의 자제들을 뽑아 글을 가르치고 무예를 연마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권제18권에 전한다. 한편 구당서,신당서에서는 고구려에 경당제도가 있어 미혼자제를 받아 독서나 활쏘기를 하였는데, 오경, 사기등의 책들을 교과서로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당은 지방촌락에까지 지엇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교육기관에 대해 명확히 말해주는 기록이 아직까지는 발견된바 없어 무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와 같은 풍속을 가졌다고 역사서에 기록된 점이나 AD 285년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일본에 논어, 천자문등을 전한 점, AD 360년 근초고왕 1년(AD 375)에는 박사 고흥이 서기를 편찬한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백제에도 교육기관이 있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신라는 일찍이 화랑도교육이 있어 삼국통일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관학이었는지, 사학이었는지 명확치 않다.
고려시대는 관학과 사학으로 나뉘는데 관학으로 국자감,향교,동서학당,오부학당등이 있었다. 고려의 국자감은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같은 것으로 성종 2년(983)에 송나라로부터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와 제기도(祭器圖)및 72현찬기가 들어와 성종 11년에 창건되었다. 그후 몽고란으로 불타자 숭문관을 재건하여 개성의 성균관으로 변천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관학으로서 서울의 성균관과 사부학당,지방의 향교를 건립하여 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 서울의 성균관은 태조 2년(1398)에 창건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경술(經術)과 문예(文藝)를 주로하고 정주학(程朱學)을 봉독하였으며 정원은 200여명이었다.
사학은 중학, 동학, 남학, 서학으로서 태종 11년(1411)년에 창건되어, 서울에 있는 부(府)직할관학으로 성균관 아랫 급의 관학이었고 정원은 10명이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부(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에는 향교를 세웠는데 조선개국초인 태조 때부터 건립이 시작되었다. 교육정도는 서울의 사학과 같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소과(小科)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2)鄕校建築의 構成
향교는 크게 두기지 건물 군으로 구성된다. 존현사상(尊顯思想)에 입각한 것으로 현인들의 몸가짐과 사상을 받들어 모시고 본받음으로써 스스로의 인격을 닦을 수 있도록 공자를 비롯한 주국의 사성(四星),십철(十哲),육현(六賢),우리나라18현(我朝18賢)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文廟)와 동서양무(東西兩無)가 건립된다.
이의 으뜸 전각은 대성전으로 성균관의 대성전 안에는 중앙에 문선왕(文宣王)인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그 앞에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사성(四星)의 신위를 배향하였다. 또 대성전 동서 양벽을 의지하여 공문 10철(閔損,再耕,再雍 등)과 송조 6현(周敦離,程 )의 위폐를 모셨다. 대성전 앞 동쪽과 서쪽에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 평면의 동서양무가 건립된다. 동무에는 중국의 명현 47위와 우리나라 명현 9위를, 서무에는 중국명현 47위와 우리나라 명현 9위를 모셨었다. 그러나 광복 후인 1949년 동·서양무에 있던 신위를 묻고,우리나라 18현의 신위를 대성전 안에 모시어 오늘에 이른다.
각 지방향교의 대성전, 동서양무의 신위수는 대설위(大設位), 중설위, 소설위로 나누어져 전체적인 젠체적인 신위의 수가 결정됨으로 소설위인 경우에는 동서 양무가 건립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 있는데 이 공간이 결국 유학의 교육공간인 것이다. 중앙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 동서양족에 유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하는 동서양재가 세워진다. 강당인 명륜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고, 동서양재 또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을 둔다.
향교의 구성은 이와같이 尊賢공간과 講學공간으로 크게 나뉜다. 이밖에도 경판을 보관하는 경판고(經板庫) 또는 존경각(尊敬閣), 제사를 지내는 일들을 보는 전사청(典祀廳),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그리고 향교의 선생과 유생들의 식사, 빨래등을 해주는 고직사(庫直舍)또는 교직사(校直舍)가 있다. 이들은 일반 살림집의 모습을 갖추어 향교옆에 건립된다.
3)鄕校의 外部空間
향교의 외부공간은 우선 그 배치법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뉘어 진다.
첫째는 소위 전묘후학(前墓後學)의 배치로서 이는 배향공간(配享空間)인 대성전과 동서양무가 앞쪽에 오고, 뒷 쪽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동서양재가 뒷족에 오는 경우이다. 나주향교가 바로 이 배치의 예인데 이 향교는 태종 7년(1407)에 창건 되었다. 막돌 쌓기로 된 벽과 기와지붕을 한 담장의 중앙에 선 외삼문을 들어서면 앞쪽에 내삼문이 바라보이는 바깥마당이 된다. 이 마당은 외삼문 쪽 담장 안쪽으로 몇 그루의 나무만 심겨져 있고 나머지는 맨 흙바닥으로 마감된 동서로 긴 사다리꼴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마당은 결국 외삼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한차례 숨을 가다듬고 다음의 성스러운 문묘 제향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단계의 과정적 공간인 것이다. 이 마당은 외삼문 중앙의 문안으로부터 흙바닥의 중앙에 신도(神道)가 내삼문 바로 앞까지 놓여지고, 여기서 동쪽으로 꺽이어 동측 일각대문까지 뻗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앞에 문묘인 대성전이 높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의 기단위에 서 있다. 그리고 대성전 기단의 동측과 서측계단 까지는 길이 나있고 이 두길은 내삼문과의 중간지점에서 동서로 뻗은 길과 만나게 된다. 또한 내삼문 어간(御間)에서 시작된 길이 이의 중앙과 연결되는 것이다. 대성전 앞 동서 양쪽에 서향으로 앉은 동무(東撫)(정면3칸 측면 1칸)에 동향으로 앉은 서무(西撫)(정면3칸 측면1칸)가 있었으나 현재는 그 건물자리만 남아있다. 대서전 앞과 옆, 뒷마당 일부는 흙바닥 마감이고 일부는 잔디를 심었는데 이는 후대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몇그루의 큰 느티나무만이 서있는데 이렇다 할 치장이 없어 극히 소박한 느낌을 준다.
향교의 배치에 있어 전학후묘나 전묘후학의 배치와는 달리 강학공간과 배향공간이 나란히 놓이는 소위 병렬형이 있다. 이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왼쪽에 배향공간, 오른족에 강학공간이 오는 좌묘우학(左廟右學)으로 동래향교, 사천향교 등이 있고, 우묘좌학으로는 밀양향교, 거창향교 등이 있다.
①방위
한국의 고건축은 풍수지리설과 양택론에 의해 택지선정 및 배치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설이 고려사회에 유행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음양오행 신앙이 더욱 치열하여 유교는 도덕면과 정치면에 큰 지배력을 가졌지만 민중의 일상생활에 가진 것은 음양오행설과 풍수사상으로 건축, 관혼상제, 이사등 사사건건을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방향과 방위를 정하고 시일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사회에 설립한 유교건축인 향교도 그러한 기본적인 사회, 기본사상에 입각해 건축물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향교는 남향으로 있었으며 뒷편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들로 앞쪽에는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위치해 있다. 예로 전북의 장수향교는 덕유산에 餘勢가 길게 뻗어 동은 장안산과 서는 팔공산으로 에워싸인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전북의 나주향교는 뒷면에는 錦星山 좌측은 멀리 무등산이 있고 우측에는 앞산이 있었다. 진주향교 역시 自然地勢에 따라 몹시 경사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멀리 남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기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향교건축도 역시 자연사상의 영향을 받아 택지선정 및 배치를 하였음을 알수있다.
②축, 대칭관계
형태에는 항상 정형과 부정형이 공존한다. 정형이란 대칭적이며 안정된 정연한 형태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형이며 비정형이다.
인간은 항상 안정된 것을 원하지만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항상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부정형은 자유스러운 형태로서 동적이고 정형으로서의 지향성으로 인하여 활동적이고 희망적이어서 공간에 활력을 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정형은 안정되기는 하나 지루한 감을 느끼기 쉽다.
산천의 변화가 많은 지세에 세워졌던 한국건축은 반드시 직선과 직각만을 활용한 건물배치를 하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으므로 반드시 직선과 직각이 아닌 배치가 주변의 지세에 따라서 불규칙하게 보이면서 잘 조화되는 질서를 추구 하였던 것이다. 한 마을에 세워진 민가 배치를 보더라도 두 채 이상이 나란히 세워진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이렇듯 한국건축의 일반적인 배치기법은 얼핏 보면 대칭인 듯 보이나 실은 비대칭인 경우가 더 많으며 간혹 대칭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형태에 조금씩 변화가 있어 비대칭적으로 균형을 이루고있다. 그런데 향교건축은 상기한 한국 古건축의 특성인 비대칭성 (동적대칭) 균형과 정반대의 정적대칭으로 건물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모든 중요 건물은 남북의 중심축을 엄밀하게 지켜 일축선상에 배치했고, 형태에 따라 모든 건물 역시 중심축 좌우로 정연하게 놓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이 있는 영천향교를 보면 정문인 風化樓와 학의 건물인 明倫堂 제사공간으로 진입하는 大成문 그리고 공자및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건물이 일축선상에 베치되어 있고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는 동, 서무와 양제는 대성전과 명륜당 전면에 정대칭으로 놓여있다.
예외로 급격한 경사지에 위치한 진주향교는 명륜당이 중심축선 상에서 벗어나 우측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동,서 양제가 정대칭으로 되어있지 않은데 이는 대지의 지형상 어쩔 수 없는 건물 배치법이라 생각한다.
향교건축에서 이러한 규칙이 건물배치에 엄격히 지켜왔던 것은 역시 유교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위정자들에 의해서 설립했기 때문에 의례적 건축으로서의 형식과 모든 규율이 엄격한 상태에서 나온 건물 배치법이라 본다. 이러한 구조와 배치는 같은 유교건축인 서울의 성균관과 강릉문묘에서도 나타나는데 향교는 이들 형태를 축소형으로 지방에 설립한 것인데 지방과 설립연대에 따라 형태나 구조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일축선 상의 배치와 정대칭 형식의 건물배치는 중국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북경의 서합원 주택과 만주의 공자묘 건축이다. 서학원 주택을 보면 수화문, 과청 그리고 정방이 일축선 상에 놓여있어 한국주택의 건물 배치와 비교하면 아주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 수법의 기본은 前低後高의 대지에서는 앞에 강학처를,뒤에 문묘를 놓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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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玄斗鎔 [한국건축의 陽宅論에 관한 考察] 대한건축 학회지 22券 80號
3. 김홍식 [傳統의 理解와 表現] 空間 131호
4. 정재종 [朝鮮朝 書院建築의 考察] 文化財 第 6輯
5. 서상우 [朝鮮時代 敎育空間에 관한 考察] 대한건축 학회지 25券 101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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