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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묻은 것과 믿은 것 - 2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참관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논쟁을
벌였다. 그 참관자 중에는 놓친 식사를 하고 몸을 씻기 위해 물러난
파노 긴시테는 제외되어 있었는데, 그가 있었다 하더라도 혼란스럽기
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참관자들은 그것이 논쟁인지도 알 수 없었
다. 엘시 에더리와 정우 규리하는 단 한 마디씩 말한 다음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러가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한심한 참관자
대열에 속해 있던 틸러 달비가 두 사람이 니름을 나누고 있다는 가설
을 거의 믿게 되었을 무렵, 엘시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시의
발언은 참관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진 못했다. 그가 꺼낸 말은 앞서의
말과 같았다.
'안됩니다.'
'가고 싶어요.'
정우 역시 같은 말로 대답했다. 참관자들은 또다시 침묵이 재개될까
두려워했다. 다행히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왜 안되는지 말할까요?'
'안전 문제나 제 포로 신분에 대한 이야기 외의 이야기라면 환영하
겠어요.'
엘시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그런 이유 정도는 이미 예상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침묵한 것은, 아마도 내가 제
시할 이유들에 대한 적절한 반론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
작합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참관자들은 그제서야 침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지
식이 그들을 즐겁게 하진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할말이 없어서 서
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이다. 엘시가 말했다.
'적절하지 않은 이유라도 말해주십시오.'
'들어주지 않으실 테니 말하지 않겠어요. 그냥 부탁해요. 가게 해주
세요.'
엘시는 정우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껏 정우는
수락되지 않을 요구로 심술을 표현한 일은 없었고, 따라서 엘시는 정
우가 정말로 아스캄에 가길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쉽게 판단할 수
없었던 엘시는 자신이 확실히 아는 사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한 가지 오류를 정정해야겠습니다. 규리하공. 당신은 포로 신
분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어제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군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입니다. 따라
서 당신은 규리하 시찰을 위해 출장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우는 분명히 그 말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엘시가 원하는 방식으로
들은 것은 아니다.
'어, 그건 포로를 좀 고상하게 부르는 말이 아니었던 건가요?'
'……당신이 규리하의 재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등
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문위원회는 규리하의 유력인사들 중 많
은 분들이 소속되어 있는 뜻깊은 위원회이며 그 임무는 규리하를 원
활하게 재건할 수 있도록 군정 당국을 자문하고 보좌하는 것입니다.
포로와는 완전히 의미가 다릅니다.'
'그런가요. 죄송해요. 그런데 왜 제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
요?'
'당신이 소속되어 있으면 규리하 가문에 호의적인 유력 인사들을 끌
어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자문
위원직을 수락한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니 이해를 못하
셨군요. 결과적으로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의 이름을 무단으로 이용
한 꼴이 되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하셨으니, 만일 사임
하고 싶다면 그러셔도 무방합니다.'
'그 자문위원이라는 것을 계속하면 아스캄에 갈 수 있는 건가요?'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하죠.'
그런 평가가 어려웠던 경우는 별로 없지만, 틸러 달비는 엘시와 정
우를 영리하다고 보아야 할지 멍청하다고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화의 전반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미리 짐작하는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후반부는 틸러가 아는 최고의 멍청이
한 쌍, 그러니까 그의 여동생과 그녀의 천생연분인 매제를 떠올리게
할 만큼 형편없었다. 편리할 것 같아서 당신 이름을 이용했다고 솔직
하게 말하는 엘시와 이름을 이용하는 대신 아스캄에 보내달라고 말하
는 정우에게서 고도의 정치적 감각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분
명했다. 엘시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위원회에 아스캄 현지시찰을 요청할
겁니까?'
'네.'
'위원장의 허락이 필요하겠군요.'
'그게 누구죠?'
'여기 있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입니다.'
시허릭 마지오는 낭패감을 느꼈다. 임기응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순
발력보다 신중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말을 끝낸 엘시가
몸을 돌렸을 때 시허릭은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정우는 시허릭이 아무 말도 하
지 않자 질문했다.
'위원장님. 이렇게 부르면 되죠? 아스캄에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으니, 그곳을 시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은데요. 허락하
시겠어요?'
시허릭은 골치가 아팠다. 그는 엘시가 자신에게 거절하는 곤혹스러
움을 떠넘긴 것인지, 그렇잖으면 승낙하는 어려움을 떠넘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우의 아스캄행은 온갖 위험 요소를 무릅쓰는 일이
다. 하지만 엘시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려줄 리는 없다. 혹은, 그저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은 솔직성인 것일
까? 결국 시허릭은 평소의 생활 태도와 배치되는 행동을 했다. 그는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그렇게 하세요. 규리하공.'
시허릭은 말을 끝내자마자 엘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엘시는 그
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엘시는 그저 무표정하게 정우에게
필요한 주의 사항을 말했고 자문위원의 출장을 보좌할 수행인을 결정
할 때도 그 무표정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엉겅퀴 여단 1대대로 하여금 당신을 수행하게 하겠습니다. 규리하
공. 바로 출발하십시오.'
정우는 엘시의 마지막 말에 놀랐다.
'바로 출발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가시기로 결정되었다면 이 정보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
가기 전에 바로 출발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일 겁니다. 곧장
출발하여 아스캄에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돌아오십시오.'
'하지만, 어, 무슨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요? 그곳이 가까운 곳도 아
니고.'
'수행인들이 모든 준비를 해줄 겁니다.'
정우는 그런가 보다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에서 일어난 정우
는 틸러와 함께 방으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엘시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정우는 잠깐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이오?'
'예.'
정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대로 그냥 출발하라고요? 그래도 돼요?'
'예. 달비 부위. 마차로 규리하공을 모시도록 하라.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도록.'
틸러는 싱긋 웃으며 우물쭈물하는 정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우는
한번 더 의아한 표정으로 엘시를 바라보았지만 엘시는 어서 가라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정우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전을 나
섰다. 그녀의 뒤에서 틸러가 따라왔다.
틸러는 근처의 병사들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린 것 외에는 별다른 말
없이 마구간까지 정우를 안내했다. 마굿간 앞에 선 정우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방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였고 아무리 생각
해봐도 공무 수행을 위해 도보로 열이틀 거리나 떨어져 있다는 곳으
로 출발하는 모습은커녕 산책 나가는 모습도 되지 못했다. 정우는 엘
시가 혹 아주 괴팍한 방법의 거절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보
았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이어 일어난 일들 때문에 더 체계화되지
못했다.
세 가지 사건이 거의 시간차 없이 일어났다. 먼저 틸러가 마구간에
서 육두 마차를 끌고 나타났고, 그 직후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든
하전사 한 명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으며, 마지막으로 목욕 도중에
끌려왔는지 아직까지도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는 파노 긴시테 노인
이 나타났다. 정우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에야 자신이 파노와 함께 마차 안에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가 그 상황에 익숙해지려 애쓸 때 마차가 튕겨져나가듯 출발했고,
그래서 정우는 도대체 누가 마차를 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했
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우는 틸러 달비와 하전사 한 명
이 마차를 몰고 있다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지만 그 사실을 확신하
지는 못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규리하 성을 빠져나왔지만 정우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정우는 나랏님과 같은 마차에 탔
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해버린 파노 노인을 달래기에도 바빴고, 또한
마차의 속도에 공포를 느꼈다. 분명 도로를 달리는 것이었지만 정우
와 노인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 힘들었다. 바퀴는 천둥 같은
소리를 내뿜었고 튀어나가는 돌이 내지르는 비명은 소름끼쳤다. 힘이
남아 있는 동안 정우와 파노는 마차 벽을 부여잡고 버텼지만 곧 두
사람은 마차가 선회할 때마다 좌우로 튕겨져 나갔다. 결국 정우와 파
노는 마차나 자신들 중 하나가 부서질 거라 믿으며 울먹거렸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겨우 질풍 같은 질주가 멎었다. 오후 내내
계속된 공포에서 해방된 정우와 파노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그러나 정우는 곧 당혹감을 느꼈다. 마차 문을 열고 기다리던 틸
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정우는 울상이 되
어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일어설 수가 없어요.'
틸러는 씩 웃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정우의 기억대로 하전사 한 명
이 다가왔다. 정우와 노인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차 밖으로 나
왔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은 채 정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산도 최소 10 킬로미터는 떨어진 것 같은 광막한
황야였고 어디에도 초록빛은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
을 타고 출렁거리는 흙먼지 뿐이었다.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흙먼
지의 꿈틀거림은 그림자의 춤처럼 보였다. 우울해지는 광경이라 생각
했을 때 정우는 마차가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정우는 자신들을 태우
고 온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틸러가 데려온 하전사가 마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다.
정우는 걱정스러웠다. 사방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는 이런 벌판
에 세 사람만 남겨졌으니 겁을 집어먹어도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도깨
비가 느낄 감정은 아니었고, 그래서 정우가 느낀 것은 걱정이었다.
그녀는 틸러나 엘시가 뭘 제대로 알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
러웠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무릎을 힘겹게 움직여 정우는 틸러에게
다가갔다.
틸러는 모닥불을 일으키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황야였기
에 정우는 틸러가 쌓아놓은 땔나무를 보곤 놀랐다. 어렵게 모닥불을
피운 틸러는 정우와 파노를 불 주위에 앉게 했다. 파노는 모닥불 옆
으로 오자마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정우 또한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윗분들이 알아서 잘 할거
라고 믿는 파노와 달리 정우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자신
의 시선에 압박감이 담기길 기원하며 틸러를 바라보았다. '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해요.'
정우의 시선을 느낀 틸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빙그레 웃으
며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를 받아든 정우는 자신의 시도가 실패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음식물이 담긴 바구니였다. 어쨌든 정우
는 땔감이 어디서 난 건지 알게 되었다. 또다른 바구니에는 불 피울
것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식욕을 돌볼 상태가 아니었던 정우
는 바구니를 내버려둔 채 - 이번에는 말로써 - 질문했다.
'틸러. 왜 여기에 온 거죠?'
틸러는 불을 더 크게 피우려 애쓰며 말했다.
'여기서 엉겅퀴 여단 1대대 병사들을 기다릴 겁니다. 규리하공 아가
씨. 이 불빛을 보고 올 겁니다.'
'예? 여기로 병사들이 온다고요?'
'예. 우리가 출발한 직후 대장군님께서 뱀단지로 연락하셨을 겁니
다. 불빛을 보기 쉽도록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정우는 규리하성을 떠나기 직전을 떠올렸다. 몇 시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며칠 전이나 되는 것 같았기에 정우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겨우 정우는 엘시가 밤이 오면 불을 크게 피우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
올렸다.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달린 거잖아요. 왜 그렇게 달린 거죠? 죽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당연히 안전 문제 때문이지요. 규리
하공 아가씨가 규리하성을 떠났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달려야 했으니
까요. 그리고 이곳으로 찾아올 병사들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정우는 감탄했다.
'이런 일이 일상사인 것처럼 말하는군요? 혹시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스캄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신 것은 규리하
공 아가씨인 걸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께서 가도 좋다고 말하기 전
까지는 저도 오늘 밤 이곳에 와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부터
좀 먹어도 될까요?'
틸러는 바구니를 가리켰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들어요. 그렇다면 당신도 제가 아는 것 정도밖에 모른다
는 것이죠? 우리가 떠난 다음에 뱀단지로 연락이 갈 거라는 것, 그리
고 아스캄까지 우리를 수행할 병사들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것은 당
신이 짐작한 것이지요?'
'예. 다르게 짐작할 수 없지요.'
정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이 진 것도 당연하군요. 제국군이 모두 당신처럼 밤에 불을
크게 피우라는 말만 듣고도 알아서 척척 행동할 수 있는 병사들로 이
루어져 있다면.'
틸러는 씹던 음식을 삼키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레짐작이나 개
인적인 판단은 절대 금물입니다. 지휘관은 명확하게 명령해야 하고
병사들은 받은 명령만 정확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전투
행동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겁니다. 대장군께선 시각을 말씀해
주시고, 장소를 말씀해주시고, 교환해야 할 암호를 알려주시고, 제가
소대 지휘권을 잠시 이양하도록 하셨을 것이며, 전체 계획서를 여러
부 만들어 필요한 모든 곳에 보내도록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규리하
공 아가씨는 빨라도 열흘 뒤에나 출발할 수 있었겠지요.'
'와.'
'예. '와'죠. 하지만 이것은 전투 행동이 아니고 남작을 빨리 해치
울수록 안전한 규리하성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장군께선
간단하게 처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장군님이 뱀단지로 수행
병들을 보내주실 거라 짐작하고, 또한 제가 떠난 뒤에 제 직속 상관
인 데시마스 수교위님에게 제 소대 지휘를 잠시 대행하라고 전달해주
셨을 거라 짐작하는 겁니다. 또한 저는 데시마스 수교위님이 놀라지
도 않을 거라는 것까지 짐작합니다. 노는 부위를 돌리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남작을 해치워요? 당신도 남작의 피를 원하는 건
가요?'
술병을 들어올리던 틸러는 그것을 잠시 내버려두고는 정우를 바라보
았다.
'저도 원한다고요? 무슨 말씀인가요, 규리하공 아가씨?'
'대장군님은 남작을 사형시키겠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저는 그저 점심을 해치운다거나 일을 해치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남작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는 규리하공 아가씨
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술병을 끌어당겼다. 잔에 술을 부은
틸러는 정우에게 건넨 다음 마차를 모는 동안 떠올렸던 가설을 말했
다.
'규리하공 아가씨. 혹 남작을 사형시키고 싶지 않으셔서 직접 오신
건가요?'
정우는 말없이 술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틸러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
다.
'골케 남작이 알면 정말 고마워하겠군요. 하지만 세상에는 두 종류
의 사람이 있지요. 때리지 않아도 철없는 짓을 스스로 피하는 사람과
때려야만 철없는 짓을 포기하는 사람. 그런데 전자는 참 드물지요.
그래서 때론 폭력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남달리
비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나신 규리하공 아가씨는 그 사실을 받아들
이시기 힘드시겠지만요.'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약간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도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는군요. 틸러.'
'네?'
'틸러. 유사 이래 최대의 학살극을 벌인 건 나가도, 킴도, 레콘도
아니에요. 그건 도깨비였어요.'
틸러는 낭패한 기분을 느꼈다. 정우의 말대로였다. 페시론 섬과 아
킨스로우 협곡에서 일어난 참극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
이 도깨비가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지식과 자
신이 아는 도깨비를 쉽게 연결짓지 못한다. 정우는 고개를 숙여 자신
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저 강대한 레콘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죽지 않는 나가들
은? 못 가는 곳이 없는 킴들은? 전부 불가능하죠. 하지만 도깨비들은
더 이상 웃을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
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도깨비의
어진 성품과 싹싹한 태도 때문에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지요. 아니,
망각하고 싶은 것일 거예요. 미안하지만 도깨비들이 피를 무조건적으
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예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던 틸러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틸러는 그것이 무엇
인지 곧 깨달았다.
'어,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것이 있군요. 규리하공 아가씨는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셨는데…… 그 말을 잘 하시는군요?'
'그 말?'
'도깨비들은 입에도 담지 않는 말이 있잖습니까?'
'네? 아, 피요? 저는 괜찮아요. 매달 보니까.'
틸러는 술잔을 깨물 뻔했다. 가까스로 술을 삼킨 틸러는 그것을 내
려놓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면 정우의 얼굴을 보지 않아
도 되기 때문이다. 틸러의 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정우는 태평하게 말
을 이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주위의 어떤 도깨비들도 도와줄 수 없어서 제
가 직접 처리해야 했지요.'
틸러는 절대로 더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그, 그렇겠군요.'
'물론 즈믄누리에서는 저도 그 말 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겐 피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지요? 킴이니까.'
'괘, 괘, 괜찮습니다.'
'절대로 괜찮지 않다는 말투군요. 이상하네요. 당신 설마 킴처럼 생
긴 도깨비인가요?'
틸러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가까스로 말했다.
'아, 저, 예. 피 이야기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규리하공 아가씨.
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저는 상대방의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예절이라고 배웠습니
다.'
'옷 아래에서 일어나는 신체 활동?'
'예. 옷을 입는 이유가 없어지는 일이니까요.'
'아하, 그거. 이해했어요. 고마워요.'
틸러의 호흡이 좀 쉬워졌다. 정우가 말했다.
'다시 말하죠. 도깨비들은 큰 소리로 웃을 줄 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도깨비들도 폭력을 쓸 수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으려면 페시론 섬에 상륙했을 때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등기부 위조는 사형의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
'붓 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것을 뺏는 것
은 가혹한 일입니다.'
'칼 한 자루 놀려서 어떤 사람의 평생을 뺏는 일은?'
'그러면 어떻게 판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서 그러면 안된다고 가르쳐주고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
아야지요.'
틸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규리하공 아가씨. 그렇게 설득해서 들을 사람 같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할 수 없죠. 남의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결국 지
독한 피냄새를 풍기게 되니까.'
틸러는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틸러의 표정을 본 정우가 활
짝 웃었다.
'아, 미안, 미안해요. 이건 저를 귀여워 해주셨던 어르신이 들려주
신 이야기지요. 당신도 어쩌면 그 분의 성함을 알 거예요. 비형 스라
블이라는 분인데, 알아요?'
'물론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승천한 티나한의 친구분이잖
습니까.'
'비형 어르신은 해몽서를 쓰고 계세요. 그 일 때문에 그러신 건지
모르겠지만 온갖 옛이야기를 많이 수집하셨어요. 어르신은 언젠가 제
게 키탈저 사냥꾼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정우는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었어요. 네 마리의 식성은 모두 달
랐지요. 한 마리는 눈물을, 한 마리는 피를, 한 마리는 물을, 그리고
한 마리는 독을 마셨어요. 그 중 가장 빨리 죽는 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였대요. 눈물은 도저히 몸 안에 둘 수 없어서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기 때문에 눈물을 마시는 새는 가장
빨리 죽지요. 그렇다면 가장 오래 사는 건 어떤 새일까요?'
'글쎄요. 말씀하신 것들 중에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나 의심스
러운데요. 어떤 새지요?'
'피를 마시는 새. 아무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마시니까요.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피를 마시는 새에겐 가까이 가지
않아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계속 말했
다.
'비형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제게 질문하셨지요. 피
는 누구도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인데, 왜 몸 밖으로 나오
면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피비린내를 풍기게 되냐고. 틸러. 당신은
대답할 수 있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몇 달 동안 저는 그 날이 올 때마다 피를
마시는 새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어머, 미안해요. 옷
아래 이야기는 금지지요. 사과했으니 그렇게 제가 못볼 물건이나 되
는 것처럼 외면하는 일은 삼가주세요. 고마워요. 저도 그 답은 잘 모
르겠어요. 하지만 피를 마시면 오래 살 수는 있어도 피비린내를 풍긴
다는 것은 이해했어요.'
틸러는 하품이 나올 만큼 평범한 윤리관이라고 생각했다. 이득을 위
해 타인을 괴롭히지 말라.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내용이지
만, 그렇기에 거기에는 자극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 틸러는 조심스럽
게 웃었다.
'어떤 사람은 피비린내를 풍기더라도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알고서 그러는 거니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정우는 물끄러미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무슨 표정인지 생각하다가 그것이 실망감에 가까운 것이라고 판
단했다. 틸러는 자신의 현실적인 말이 정우의 이상주의를 상처 입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틸러. 당신도 시카트처럼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군요.'
'예?'
'물론 즈믄누리를 나와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저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엔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만 가르쳐주는 대
장군님 같은 분은 정말 드물군요. 저는 당신도 대장군님 같은 사람이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 모르면서 가르
치려고 하네요. 전 그게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틸러는 불쾌함을 느꼈다.
'규리하공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어떤 점에서 그렇게 했습니까?'
'틸러. 당신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믿겠죠. 미안하지만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나쁜 짓 하지 말
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말
한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틸러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 때문에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 스
스로도 원하지 않는 논쟁에 뛰어들고 마는 자신의 버릇이 자존심 때
문인지 호승심 때문인지 고민하며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공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제 우
둔함에 대한 질책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
한 의미가 아니라면 규리하공 아가씨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신 겁니
까? 골케 남작은 오래 살고 싶어서 파노의 피를 마셨습니다. 아가씨
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죠. 저는 골케 남작이나 파노 영감님 때문에 길을 나선 것이
아니에요.'
틸러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그러면 누구 때문에 길을 나선
거냐고 정우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질문하지 못했다.
먼곳에서 그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파노
를 깨어나게 하고 정우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정우는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려 애쓰며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정우는 그녀의 시대에 속한 것들 중 후대에 전설이 될 가능
성이 가장 높은 것들 중 하나를 보게 되었다.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악랄한 싸움꾼이었다. 싸움이 최선책일
때도 싸웠지만 최악의 결과를 얻을 것이 뻔할 때도 싸웠다. 그는 싸
움 자체를 즐겼다. 인정하지 않지만 파라말은 상대를 도발하여 격분
시킬 때 쾌감을 느꼈고 상대의 급소를 단번에 내려칠 때 전율을 느꼈
으며 상대가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볼 때 황홀감을 느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파라말이 상종 못할 악한으로 취급되지 않는 까닭은, 그
의 폭력성이 십구로 위에서만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런 파라말에게 있어 눈앞에 펼쳐진 바둑판은 심히 만족스럽지 못
한 것이었다. 상대의 착점을 바라보던 파라말은 참을 수 없는 기분으
로 바둑판을 가리켰다. 멍한 얼굴로 파라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을 바라보던 스카리는 욕설을 내뱉었다. 파라말이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공의 마음이 스무번째 줄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그만
두도록 하지요.'
스카리는 반대하지 않았다. 돌을 쓸어모아 통에 담으며 스카리는 사
과했다.
'미안하게 됐군. 파라말.'
'아뇨. 괜찮습니다. 수담을 나눌 수 없으면 잡담이라도 나누지요.
무슨 생각에 그리 골똘히 빠져계신 겁니까?'
파라말이 짐작한 것처럼 스카리는 자신의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말하려는 내용이 좀 어려운
것인 듯했다. 스카리는 먼저 파라말과 자신의 친분을 재확인하려 했
다.
'내가 자네에게 바둑 가르쳐달라고 말한 것이 4년 전이었지? 그 때
자넨 진짜 놀랐지. 쳇. 발케네 남자가 바둑을 배운다니 놀랄 일이긴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이유를 묻지 않았어. 그리고 4년 동안 재미도
없을 텐데 내 상대를 해줬지. 경고하는데 그게 재미있었다고 말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는 마.'
'좋습니다. 가끔 바둑판으로 공의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습니다.'
스카리는 웃었다.
'그런 정석은 배운 적이 없는데? 유용할 것 같으니 기억해두겠어.
어쨌든 이젠 자네에게 바둑을 배우려고 한 이유를 말해주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헨로 가문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두잖아.'
'그 사람들이야 유명한 애기가들지요. 현재 문중에서 가장 강한 니
어엘 헨로 수교위 같은 경우에는 칼리도백과 호선으로 둔다더군요.
물론 승률은 높지 않지만.'
무심히 엘시를 거론했던 파라말은 스카리의 얼굴이 확 변하는 것을
보고는 찔끔했다. 파라말은 스카리가 조금 전에 배운 정석을 활용할
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다행히 스카리는 그러지 않았다.
'에더리가 정말 그렇게 잘 두나? 난 그 놈과 둬봤다는 사람 본 적
없어. 자넨 둬 봤나?'
'아뇨. 백작의 집엔 바둑판도 없습니다. 칼리도의 본가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그 놈이 잘 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대장군에게 아첨하는
놈들이 지어낸 말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칼리도백과 둘 기회는 없었지만 백작과 호선으
로 둔다는 사람과 둬 본 적은 있거든요. 제가 정선으로 둬야 했습니
다.'
'자네가 정선으로? 그게 누군데?'
'시련의 아르키스 대수호자입니다.'
스카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도시연합에 있는 대수호자하고 어떻게?
에더리가 미라그라쥬에 가기라도 했다는 거야?'
스카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파라말은 몸을 뒤로 조
금 젖히며 말했다.
'천만에요. 대수호자와 바둑을 둘 때 칼리도백은 미라그라쥬를 방문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방문하지 않았고요.'
'지금 농담 하는 거야?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바둑을 뒀다는 거
야? 설마 대수호자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건가?'
파라말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뱀단지로 두는 겁니다.'
'뱀단지?'
'예. 뱀단지로 서로의 착점을 알려주는 거죠. 그러면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동시에 바둑을 둘 수 있습니다.'
'허! 그런 방법이 있나? 그런데 폐하의 뱀단지를 그런 시시한 짓거
리에 쓴다고?'
'물론 세번째 벽난로 방을 이용한 것은 아닙니다. 한계선 남쪽으로
가면 이곳만큼 뱀부리미가 귀하지는 않지요. 그런 자들의 도움을 받
아 바둑을 두는 겁니다. 공께서야 바둑 둘 줄 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셨으니 기계의 이야기를 별로 접하지 못하셨겠지만 기객들 사이에
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름 높은 기객이 제국 남부에 가면
시련으로부터 아르키스 대수호자의 대국 요청이 국경을 넘어오는 일
이 흔합니다. 저는 비스그라쥬에서 몇 번 그렇게 뒀습니다. 백작도
그런 식으로 둔 적이 있다더군요.'
스카리는 겨우 파라말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엘시를 이해할 생각
은 없었다.
'폐하의 대장군이 적국의 수괴와 바둑이나 둔다는 것도 말이 안돼.
넋 빠진 놈.'
스카리를 당황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파라말은 그 비난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산공부사는 적당히 중립적으로
들리는 말을 한 다음 대화가 원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스카
리가 말했다.
'그래. 헨로 가문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바
둑을 배우기로 결심했어. 내가 발케네의 무식하고 거친 남자가 아니
라는 것을 부냐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거든.'
'대단한 결심을 하셨군요.'
파라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카리는 발케네 남자이기 때
문이다. 스카리도 동의했다.
'빌어먹을. 발케네를 통틀어 바둑 둘 줄 아는 남자는 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헨로 가문에 찾아가서 대국을 하면
창피를 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냐. 내
가 바둑 둘 줄 안다는 건 자네밖에 몰라. 그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바둑 둘 줄 모르는 척하면서 바둑 좀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그 사람
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바둑 둘 줄 모르는 척하면서 상대를 놀라게 한다고요?'
'그래.'
'왜 그러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안됩니다.'
'뭐야? 내 기력이 그렇게 형편없나?'
'아니오. 음. 체이다 헨로 정도라면 공께서 두 점 치수 정도로 해볼
만하실 겁니다. 문제는 공의 기력이 그 사람들의 상대가 안 될 만큼
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속일 정도로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공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일은 상대보다 몇 치수 이상 높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스카리는 주춤했다. 하지만 곧 손가락 하나를 펼쳐보이며 말했다.
'처음 한두 판이면 돼! 자네가 가르쳐줄 수 없나?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의 재능으로 보이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파라말은 스카리의 속셈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기력 낮
은 기객이라면 헨로 가문 기사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하지만 기재
가 있어 보이는 문외한이라면 가까이 두어 가르치고 싶은 것이 또한
기사의 본성이다. 파라말은 발케네 남자가 좋아하는 치하의 말을 꺼
냈다.
'교활하군요.' 스카리는 흡족해했다. '그런 식으로 그 가문에 접근
하실 생각입니까?'
'부냐가 에더리와 약혼한 이후로 그 놈들은 나와 모든 관계를 끊었
어. 내가 초대해도 오지 않고 직접 찾아가면 사람 앉아있질 못하게
해.'
'그래서 천재인 척해서 관심을 끌어보겠다는 것이군요. 하긴 그 가
문은 바둑 잘 두는 것만 아니라 좋은 기사를 키워내는 걸로도 유명하
지요. 혁기에 재능이 있는 발케네 남자라면 호기심의 대상으로도 충
분할 테고요. 하지만 안됩니다.'
'도저히 안되겠어?'
'발케네공.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천재로 위장할 수는 없습니
다. 엄청나게 운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헨로가 사람들은 애기가들
입니다. 당신의 계획이 탄로나면 그 사람들은 당신을 기객이 아닌 사
기꾼으로 생각해서 상종도 안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스카리는 신음했다. 파라말은 빙긋 웃고는 질문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접근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질문을 받은 스카리는 파라말을 외면했다. 숨소리를 낮추고 싶어하
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때문에 스카리의 호흡은 더 부자연스러워 보
였다. 스카리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네가 짐작해보지 그러나?'
'부냐 아가씨 때문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무슨 계획을 가지
신 건지는 모르겠군요.'
'엉망이라잖아.'
'예?'
'부냐가 그렇게 되고나서 남작은 산송장 비슷하게 되었다고 들었어.
가장이 그 모양이니 집안이 제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지. 당연히 풍비
박산 날 지경이야. 쳇! 헨로 가문에서 바둑꾼을 그렇게 키워냈다면,
왜 어려울 때 코빼기 비치는 녀석은 하나도 없는 거야?'
'아니오.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계보에 속한 기객들 중 몇
명이 찾아와서 스승을 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기 연명하
기도 바쁜 처지들인지라 남작이 사양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럼 아무 쓸모가 없지. 그래서 내가 가서 그 집안을 좀 돌봐주고
싶은데, 빌어먹을. 나한테는 명분이 없잖아. 어차피 접근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파라말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자가 되겠다는 겁니까?'
'바둑 배우려고 드나들면서 집안 일 돌볼 수 있을 정도면 돼. 그런
데 자네에게 배웠다고 말하면 제자가 될 수 없잖아.'
파라말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사제 관계를 밝힐 수 없다는
기괴한 조건으로 4년 동안 스카리에게 바둑을 가르쳐온 것은 스카리
가 내놓는 지도료가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카리를 좋
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남자들 중에서 자신을 거부한 여자의 가
족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돕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그것도 상대
가 불편하지 않도록 제자로 들어간다는 형식을 궁리해낼 만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고민을 많이 하신 듯하군요. 발케네공. 안타깝지만 모양이 안 좋습
니다. 말씀하신 일은 칼리도백이 해야 할 일입니다. 공께서 그러시면
주제 넘게 나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엘시의 이름은 스카리를 다시 흥분시켰다.
'그렇잖아도 그 놈 이야기 하고 싶었어. 에더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것이 아냐. 그 놈은 당장 백화각에 가서 부냐를 꺼내야 해! 그 개새
끼는 만병장이야. 그 놈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안 하고 있다
고! 내가 백병장이나, 아니면 십병장만 되었더라도 난 당장 그렇게
했을 거야. 애초에 그깟 고자 같은 놈에게 만병장이라는 것은 어울리
지도 않아!'
바로 그렇기에 스카리에게는 백병장도, 십병장도 주어지지 않을 거
라고 생각했지만 파라말은 그 생각을 말로 바꾸지는 않았다. 파라말
은 달래듯이 말했다.
'칼리도백은 삼가고 조심하는 미덕을 보이는 것입니다. 만병장에 대
해서 우리는 만 명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처신을 기대하니까요.'
'자기 앞가림 못하는 바둑꾼들도 찾아와서 도우려고 하는데 약혼자
주제에 한 번 들여다 보지 않는 것이 삼가고 조심하는 건가?'
'발케네공. 아시잖습니까? 백작은 대장군의 일만으로도 지쳐 쓰러질
정도로 바쁩니다. 이 전쟁 전에도 도망친 태위 때문에 백작은 제국군
전체를 다 통괄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을 준
비했고, 승리했으며, 그 전후 처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칼리도
백이 잠 잘 시간이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어쨌든 백작은 지금으
로서는 헨로 가문을 보살필 시간까지는 도저히 낼 수 없을 겁니다.
백작이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헨로 가를 보살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에더리가 나설 때까지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난 그렇게
못해.'
'조금만 기다려보시지요. 어쩌면 파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카리는 확연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찔끔했다. 그는 매섭게 파라말
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이야기가 있어?'
'아니오. 제 추측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 사정상 백작은 죄수 신
분의 약혼자를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지요. 설령 그가 그러길 원하더
라도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의 주위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뭐? 여자라니? 그 멍청이에게 칭찬할 점은 난봉질을 안한다는 것뿐
인데. 그것도 지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배짱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겠
지만.'
'저는 적당한 여자가 있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정우 규리하지
요.'
말을 꺼낸 파라말은 스카리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 의아
해 했다. 스카리는 당황과 충격이 뒤범벅된 얼굴로 파라말의 말을 재
확인했다.
'정우? 비셀스 규리하? 아이저 규리하의 딸 말인가?'
'예. 사정이 급하기로는 칼리도백에 못지 않은 그 처녀 말입니다.'
'설명해봐.'
'그녀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경백
위를 계승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가진 인맥은 별 도움이
안되는 도깨비들과의 친분이거나 당장은 쓸모 없는 규리하 가문의 인
맥 뿐입니다. 그런 꼴로 규리하령을 계승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든
든한 남편을 구해야 할 겁니다. 작금의 제국에서 좋은 남편감의 목록
을 뽑아본다면 역시 첫줄에는 칼리도백이 들어가겠지요. 물론 락토
공께서 찬성하실 리는 없지만.'
'응? 우리 아버지가?'
'예. 락토 공께서 엘시 백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아시죠? 그런
데 발케네의 목전에 엘시 백작이 온다면 춘부장께서는 그 사실에 감
사하기는 어려우시겠지요.'
'아아.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겠어. 그래. 분기탱천하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는 에더리를 몰라서 그래. 그 녀석이 넋 빠진 얼간
이라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아. 황제의 대장군? 유일
한 제국만병장? 쳇. 자기 약혼자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 황제의 눈치
나 보는 옹졸한 놈이야. 가진 재주는 바둑돌 깔짝거리는 재주와 칼
들고 주정 부리는 재주뿐이고. 그런 조무래기를 왜 무서워하시는 건
지 모르겠어.'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향의 정복자에 대한 평으로는 지나치
게 유치해서 맞장구를 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물론 파라말은
스카리의 그런 순진함도 좋아했다.
'어쨌든 엘시 백작과 정우가 결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말
씀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난점이 해결된다면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는 짝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귀족원에서
도 그 결혼을 반대할 명분은 없으니 락토 공께서도 적극적으로 거부
하기 어려우시겠지요.'
스카리는 팔짱을 끼고는 파라말의 말을 숙고했다. 파라말은 크지는
않지만 잘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토양이라는 것이 없는 하늘누
리에서 개인적인 정원이라는 것은 유수부의 일개 경비병의 입장에서
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다. 물론 발케네공의 입장에서는 검약의 절정
이라 해야겠지만.
조금 후 스카리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라말.'
'예.'
'자네는 내 친구지?'
'아뇨. 스승입니다.'
스카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스승. 사실 비셀스 규리하가 좋은 신부감이라는 것을 내게
말해준 사람이 자네가 처음은 아니었어. 그런데 신랑 후보에 대해서
는 좀 다른 말을 들었지.'
파라말은 '아'라고 말하듯 입을 조금 벌렸다.
'혹시 발케네에서 연락이 온 겁니까?'
스카리는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파라말은
그가 고민하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대답이 긍정일 것은 의심하지 않았
다. 스카리는 긍정했다.
'맞아.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 비셀스 규리하를 며느리로 선택했다
고.'
파라말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나마나 일방적인 통고였을 것이다. 암
살공은 아들에게 너의 짝을 찾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며느
리를 데려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스카리 또한 소심한 아들
은 아니다. 파라말은 얼굴 비출 곳이 없으면 락토와 스카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면도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스카리가 말했다.
'네가 말한대로 에더리가 비셀스와 결혼하는 꼴을 볼 수 없어서 그
런 걸 수도 있지. 에더리와 그 여자가 결혼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으
니 대신 나를 밀어넣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거야. 며느리의 지참금이 탐난다는 거지.
쳇. 노인네 과욕이야. 황제나 다른 대귀족들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걸. 어쨌든 그 녀석과 나는 도대체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군. 항상 한
여자를 놓고 부딪히게 되니. 그런데 말이야. 폐하께서도 에더리와 비
셀스가 결혼하길 원할까?'
'용인도 아닌 제가 폐하의 흉중을 짚어낼 수 있을 리는 없지요. 하
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듣긴 했습니다.'
'뭔데?'
파라말은 자신의 말이 스카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심스럽게 즐기며
말했다.
'폐하께서 부냐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은, 백작의 짝으로 다른 사
람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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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회 예고 : 그리하여 그레이트 마징가의 파일럿은 테츠야고 자신
은 테츠로이며, 그 이름이 전부 철이로 번역된 것이 대해서는 한국방
송계의 번역 관행에 대해 따지라는 말로 흡혈안드로이드를 진정시킨
철이. 그러나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전기 포켓몬의 모습을 목격한
철이는 자신이 축생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에 정신적 쇼크를 받고서는
'네트는 광대해' 같은 의미불명의 말을 남기고 전뇌공간으로 사라진
다. 그러나 그곳에는 치바에서 손상된 신경을 치료받고 다시 현역으
로 복귀한 전설적인 카우보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한편 추적 의무에서 해방된 안드로이드는 자신을 뒤쫓아온 현상금
사냥꾼을 마스터라고 부르고 만다. 자신은 기사가 아니므로 마스터가
될 수 없다는 대답을 들은 안드로이드는 그렇다면 호부호형이라도 허
락하라고 요구한다. 과연 폭주갈매기는 세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
면 음속을 돌파할 수 있다는 '제트 스크림 어택'의 비밀을 풀 수 있
을 것인가? 힘내라, 조나단! 혼돈을 향해 달리는 왕자에게 목걸이를
전달하는 것은 핏빛 새의 사명! 목걸이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의 정체
는? 다음회 '블루워터와 스머프의 관계' 많이 기대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