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 신대방 시대를 연 일등공신
장비담당관 박웅재
‘장맛은 묵어야 더 낫다’고 했다. 1964년부터 지금까지 38년 간을 기상청이라는 한 직장에 몸 담아온 기상서기관 박웅재(朴雄在, 58) 장비담당관은 들어온 경력으로 따진다면 현 재직자 중 최고 선임자로 묵은 장맛처럼 말과 행동에 깊이가 있다. 남에게 내세울만한 일이 없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한 그는 여러 차례의 간청 끝에 입을 열었다.
공무원은 누구나 다 안다. 평생을 바쳐온 일상을 되돌아볼 때 무엇을 성취하였고,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 말하라면 남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말할 만한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박봉 속에서 지내온 공무원의 일상이야말로 굳이 공복이라는 거창한 애국심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40여 년 나랏일을 해왔다는 것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다.
끊임없이 상하간을 배려하는 노력과 수고로운 노동이 없었다면 일상도, 일상을 넘어선 그 무엇도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공무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만만찮은 일이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럭저럭 평탄하고 수월하게 살아가는 듯하면서도 잘못된 예보만 탓하며 비난받는 기상청이야말로 때론 맥이 풀릴 때가 있다”고 말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설 익은 욕망보다 권력과 거리가 먼 기상청 사람 특유의 초월이 엿보인다.
항상 반짝이는 구두와 다림질의 날이 선 옷맵시로 정갈함이 배어있는 그는 서울 토박이 말투의 부드러움과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화법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그가 기상청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몸담았던 곳은 외부기관을 설득하여 협상을 이끌어 내야 하는 국유재산 관리 업무였고 이 분야에서 빛을 발하였다. 정부의 재산관리를 담당하는 재무부에서조차 이 업무에 관해서는 기상청의 아무개(박웅재)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 과장은 중앙관상대라 불리던 기상청이 교통부 소속이던 시절, 총무과에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한 후 1970년 기상직 9급 공채 시험을 거쳐 관측과와 예보과를 돌았다. 이후 기관장으로 울산과 동두천의 기상대장으로 나가기까지 청주기상대와 괴산기상관측소에 근무하던 기간을 제외하고 주로 시설과나 총무과에서 오랫동안 기상청의 재산관리를 맡았다. 아쉬운 부탁 일로 재무부에 자주 들어가지만 점심때가 되면 상대를 접대할 여유가 없어 약속이 있다며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던 어려운 시절을 회고하였다.
- 철도 분야 전공자가 기상 분야로 진출한 것이 특이한데.
▶ 어렵던 시절 우선 직장을 갖는 일이 중요하였다. 처음 총무과에서 행정업무를 지원하다 철도청으로 갈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 송월동 기상청 가까이 있는 대학에 다닐 요령으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군대에 갔다 온 후 기상청을 선택하였다.
- 지나온 기상청 생활을 회고해 달라.
▶ 예보과에 근무하던 1970년대, 예보업무를 하면서 TV는 김동완 씨가, 라디오는 내 목소리를 통해 일기예보가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1972년부터 1976년 사이의 일이다. 요즘 말하는 대외 홍보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김동완 씨의 인기가 높았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일기예보를 듣던 시민이 팬이라며 전화를 해올 정도로 당시 기상인은 인기였다.
1978년부터 1993년까지는 시설관리과와 총무과에서 기상청의 국유재산을 담당하였다. 처음 이 업무를 맡고 보니 설계도면 3권과 재산대장 12장이 전부였고, 전국 도처에 있는 기상관서의 부지 모두가 타 기관으로부터 빌려 쓰는 실정이었다. 이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두 관리 전환하거나 교환을 통해 공적부상 우리 청의 땅으로 만들었고, 청사를 새로 신축하였다. 지금은 재산 대장이 천여 장이 넘는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관측과에서 AWS 400여대를 깔아 관측 자동화를 추진했었고, 최근 견학생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기상청에 전시장을 만들었다.
- 국유재산 관리 업무에 어려움은 없었나.
▶ 지방관서의 부지를 확보할 때 시나 군의 땅이면 그래도 사정이 낫다. 사유지일 경우 땅임자는 기상청이라는 정부기관이 나서니 땅값이 크게 오를 것이라는 판단으로 우선 버티고 본다. 이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완고한 노인을 삼고초려로 어렵게 설득하여 계약서에 도장 찍은 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땐 일이 매우 복잡해진다.
- 가장 보람 있는 일을 꼽는다면.
▶ 현재의 신대방동 청사 부지를 확보하였던 일이다. 이곳의 부지를 확보하는데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그 일을 위해 이리 저리 많은 사람을 만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기상 역사에 남긴다는 신념으로 뛰었다.
(글 : 김승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