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사 유래와 의미
많은 사람들은 조상제사를 우리의 고유한 미풍양속으로 알고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지만 실상 조상제사는 우리 것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유입된 외래문화이다.
사가들의 연구와 조사에 의하면 조상제사의 유래가 고려조 이전까지는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고려말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조 때 중국의 유교가 낳은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그때 조상제사의 의식도 함께 유입되었고 이것이 후에 조선 이태조에 의하여 민간에 널리 장려된 것이다.
중국에서의 기원을 볼 때 공자 이전인 하나라와 상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당시 조상제사는 지금처럼 죽은 자에 대한 제사가 아니고 살아있는 증손을 높이는 의미에서 높은 곳에 앉혀 놓고 제사형식의 예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황제에게만 적용되던 것을 제후들까지 그리고 평민의 지위가 향상된 춘추전국시대에 와서는 시민들도 따라하게 되고 급기야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상제사제도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외래문화요 그 본의는 죽은 조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어른에게 드리는 효의 한 예였던 것이다.
이 태조와 조상제사
그리고 이 태조에 이르러 조상제사가 민간에 널리 장려된 것은 조상에 대한 효도를 권장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당시 정통성을 갖지 못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이용한 정치적 이유가 컸다.
이성계는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국호를 변경함으로 민심이 이반되자 정권유지를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 그는 칼로 정권을 잡았지만 등을 돌린 민심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우인(友人)처럼 지내던 국사(國師) 무학에게 자문을 구한즉 무학대사가 조상제사의 묘안을 제안했다. 대사의 말인즉 “정권은 칼로 잡을 수 있으나 이반된 민심은 칼로 잡을 수 없는 것이니 간접적인 방법을 쓰십시오. 자고로 이 백성은 조상에 대한 효가 극진하오니 이를 장려하면 옳게 여길 것이외다”하면서 될 수 있는대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많이 드리게 한 것이 오늘날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제사를 많이 드리는 나라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혹 더러는 조상제사가 왜 나쁘냐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줄 안다. 인간적인 관습과 예로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돌아가셔도 조상은 조상이고 부모는 부모인데 자식과 후손된 도리로써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놓고 예를 표하는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죽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는 무관한 전혀 차원이 다른 영적 세계로 격리된다. 이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세와 내세는 서로 오갈 수 없는 서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현세는 물질로 구성된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이 사는 곳이요, 하늘나라는 영적인 세계로 하나님을 비롯, 천사와 육체를 벗어난 사람들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또한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나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 백팔번뇌의 고통이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곳에 거하는 육체를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현재의 체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질임을 알 수 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39~40).
물질은 어디까지나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살 동안의 유지를 위해 있는 것이다.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은 육체의 보존을 위해 음식도 의복도 필요하지만 죽음 이후에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을 위해 차려놓는 음식은 육체를 벗은 상태에 있는 조상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많은 불신자들 중에는 초혼술을 하는 무속인들이 점치러 온 사람들에게 조상의 생전 모습을 설명하면 쉽게 현혹당하고 조상귀신의 존재를 믿을 뿐 아니라 조상제사의 근거로까지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조상의 혼령이 아니라 단지 그야말로 귀신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귀신도 어느 정도의 시공(時空)은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과거를 알거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자기 모습을 변신(變身)도 할 수 있다(고후 11:14). 그리고 그 둔갑술은 생전의 조상에게 빙의(憑依)되었던 귀신(악령)임이 틀림없다. 귀신은 그 어떤 존재에 빙의되어 오랫동안 함께 공생하게 되면 그 빙의된 실체를 많이 닮을 수 있다. 예컨대 무형의 물을 어떤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서 얼리면 그 물은 담겼던 용기의 모양을 가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체는 물 또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서 무형적인 존재요 우리의 육체는 용기(Form)와 같다 하겠다. 우리의 영혼도 원래부터 나의 육체의 모습을 지닌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영계를 체험한 이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계시는 분들의 모습이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을 지닌 것이 아니고 체질은 바뀌었으나 얼굴의 모습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왜?
그것은 우리 영혼이 우리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함께 있는 사이 육체의 모습으로 고착화(固着化)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도 예외가 아님을 성경은 일러주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알아 볼 수 없는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라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 역시 뚜렷하게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셨다(요 20:19~20).
마귀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는 항상 뱀의 형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계 12:7~9, 20:1~2). 그러나 마귀가 원래부터 뱀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장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교만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엿보다가 공중으로 내어 쫓김을 받은 것이다(겔 28:14~17).
그리고 이 놈이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를 범죄케 하기 위하여 뱀속에 들어가 뱀의 모습으로 하와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 범죄로 말미암아 후손된 우리까지도 형벌아래 놓이게 되었고 사단은 뱀의 체질에 갇혀 뱀의 운명과 함께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뱀도 틀림없이 언젠가는 죽었을 것이다. 뱀이 죽자 사단은 그 뱀의 육체로부터 해방되었고 따라서 그 사단의 형체는 그가 있던 뱀의 형체로 변모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계 20:1~2).
이와 마찬가지로 사단이 범죄하여 추방되었을 때에 그에게 동조했던 일단의 천사의 무리들도 함께 공중으로 추방되었는데 역시 인간을 괴롭히고 실족케 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서 오랜 세월동안 함께 거하게 되면 같은 원리로 그 사람의 형체를 닮는다 할 수 있지 않는가?(계 12:9)
그리고 이 놈이 오랫동안 사람에게 붙어 살았으므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것이요. 또한 그 사람의 모습으로 고착화 되었기 때문에 점쟁이를 통해서 조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며 그 조상의 생전의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이를 이해한다면 불교에서 주장하는 교리 중의 하나요 세간에 이슈(issue)가 되고 있는 윤회설(輪廻說)의 오류도 깨달을 것이다.
끝없는 윤회로 방황할 필요도 없거니와 전생(前生) 운운하는 것은 사실은 조상이나 자신에게 빙의된 사단의 간교한 둔갑술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술(邪術)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하신 것이다(레 20:6, 신 18:9~12).
망하는 길의 첩경
그리고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은 귀신을 불러 들이는 일이요 결국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요 10:10).
보라 우리 인류의 시조를 범죄케 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한 자가 누구인가, 마귀가 아닌가? 뱀을 통해 마귀가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게 하므로 죄를 짓게 하고 그 결과로 그의 후손된 우리까지도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생의 사역이 기록된 신약성경 중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각양각색의 병을 치료하신 기사가 있는데 그중에는 병의 배후에 귀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었던 질병들 중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므로 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 목적도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요일 3:8).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귀신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괴롭히는 장본인이요 원수며 대적자이다. 이런 귀신을 왜 섬겨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귀신들은 사람에게 조그마한 헛점만 있어도 침투하려 하는데 음식차려 놓고 정성드려 절하면 ‘좋아라’ 하고 몰려 오지 않겠는가? 주위에 귀신 많이 섬기는 가정들을 한 번 보라 어떠한가(?) 마음의 평안과 기쁨, 그리고 영적 자유를 잃어버리고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며 후손 3~4대를 못 가서 불행해 지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그러므로 조상 제사의 실상은 조상혼령에 대한 예(禮)가 아니라 이런 잡귀들을 집안으로 불러 들여 불행을 자청하는 일이다. 그리고 귀신에게는 절대로 축복권이 없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권세는 있으나(요 10:10), 사람들에게 이로움은 절대로 주지 못한다. 귀신 섬겨서 복받은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속지 말라. 그것은 복이 아니라 미혹이요 독(毒)이며 마귀의 처소인 지옥으로 유인하는 미끼이다.
우리 육신은 세상의 것인 물질로 지음받았고 물질로 살아가기 때문에 마귀 또한 인간을 미혹할 때는 꼭 세상 것으로 미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영(靈) 즉 신령하다고 다 믿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한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신 것이다(요일 2:15~17, 4:1). 그러므로 귀신이 조상의 혼령으로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나 또는 효도를 빙자하여 조상제사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착각을 하게 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도적질하고 인간을 불행케 하려는 마귀의 고도의 술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도 우상숭배 못지 않게 금하고 있는 것이다(시 16:4;고전 10:20~21).
신영균 목사 한믿음교회 신앙계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