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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19(목) |
제대로 된 명작시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제대로 된 명작시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봉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중 서점에 진열된 시조전문 문예지는 몇 종에 불과하다. 시조의 저변인구가 극히 적고 시조가 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나마 게재된 작품들을 보면 완벽하게 시조정형을 갖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두 자의 파격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3.4조의 음보율을 무시하거나 수(首),장(章)의 구별도 없이 자유시를 흉내 내는 작품들이 태반이다. 시조작품은 독자층이 얇아 자유시의 흉내를 내면 다소 많이 읽히리라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정형을 지키기 위한 글 솜씨가 모자란 탓일까?
이에 더하여 내용까지 잘 갖춘 시조는 가물에 콩 나듯 하여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다수의 시조작품은 문예사조를 외면하고 20C 현대시법이 아닌 19C 낭만주의 또는 주정주의 시를 답습하고 있다. “현대시조는 다분히 기득권 내지 보수성에 안존하고 ... 아직도 많은 시조들이 전통적인 전원서정이나 사랑서정에 기울어 있거나 영탄조와 과거적 상상력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金載弘저 한국현대시의 사적탐구 P83)는 말까지 듣는다. 중견시조시인 일수록 오히려 정형을 버리고 파격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주장은 ‘시조는 음보율만 맞으면 자수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작가일수록 작품을 자세히 보면 3.4조 음보율마저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없는 2단어 또는 3단어를 뭉쳐서 한 음보라고 쓰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심지어는 賊反荷杖격으로 정형을 제대로 지키는 시인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감각이 둔한 3류 시인이라고 卑下하기까지 한다.
이하 대표적인 월간지와 시조전문 계간지 및 일간지상에 발표된 최근의 시조를 분석하여 본다.
1. [월간문학]의 작품들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문학]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종합문예지이다. 수많은 출품작 중에서 중견작가의 작품 위주로 게재하고 있어 [월간문학]에 게재된 시조는 바로 한국시조의 대표작들이며 시조의 수준을 가늠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춘문예 새내기들의 작품보다 훨씬 명작이라야 하며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2008년 1월호에 자유시 35편 시조 6편, 2월호에 자유시 38편 시조7편, 3월호에 자유시 41편 시조 8편이 실려 시조의 점유율은 16%가 채 안 된다. 그나마 시조는 정형을 제대로 지킨 작품보다 그렇지 못한 작품이 더 많다.
1월호에 실린 이용호의[모과꽃], 김민정의 [사랑하는 이여], 김차복의 [꽃이 지며], 수 암의 [수종사 가는길], 강대규의 [허공], 이원구의 [두 하늘 밑엔] 등 6편은 시조정형을 제대로 지킨 작품들이다.
2월호에 실린 7편은 성덕제의 [천수만의 아침] 한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6편은 파격시조이다. 최승범의 [자명종], 전연욱의 [황혼의 일손], 양점숙의 [섬], 우아지의 [흔들리는 그네], 김명호의 [청소], 전학춘의 [돈의 환생]등 6편은 음보율을 아예 무시했거나, 자유시를 흉내내어 수(首)의 구별을 없애버렸거나, 이 두 가지를 겸한 작품들이다.
3월호에 실린 8편중 정소파의 [어슬픈 황혼에 서서], 김영배의 [장태산(壯泰山) 휴양림], 김사균의 [소경(小景)] 3작품은 비교적 정형을 갖추었고, 황다연의 [장산 한마당], 제갈태일의 [우박](사설시조), 권형하의 [귀산(歸山)], 이처기의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서연정의 [규봉암에서 쓰는 편지]등 5편은 3,4조 음보율을 일탈하여 2음보, 5음보, 3,3음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8편이 모두 首,章의 구별만은 잘 지키고 있어 다행이다.
정형을 지키지 못한 작품일수록 내용도 뒤떨어진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
<원간문학 08.2월호> 돈의 환생 전학춘
돈이란 놈은/ 죽어서도/ 특별한/ 삶을 사네 우리네는/ 죽으면/ 굴뚝에/ 불태우던지 손과 팔/ 구두에 밟혀/ 지하/ 처박힐 텐데/
강물에/ 몸 던지려/ 소주병/ 끌어안고 몸 떠난/ 연인 찾아/ 밤거리/ 헤맨 일도 없이/ 깊숙한/ 안주머니 품/ 늘어져/ 잠자던 생/
보통/ 팔자로는/ 구경 못할/ 장엄한 지하 언 손/ 요모조모/ 용안(龍顔)을/ 다듬어서/ 마른땅/ 바닥 짓는데/ 원료로/ 환생한다지/
오작교/ 해후하는/ 별똥별들의/ 희열/ 길 떠난/ 마누라 거웃/ 그리운/ 광대에/ 논자락/ 참새 허수아비마냥/ 저녁놀/ 조롱하고/
닭 쫒아/ 지붕 날다/ 어둔 독방/ 갇히고/ 얼마나/ 많은 하늘이/ 그대에게/ 비굴한가
황폐한/ 가을 들녘에/ 그놈 한번/때려 주고 싶어/
시조정형의 근간인 3,4조 음보율을 무시한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밑줄 친 곳). 다섯째 수 종장에 해당하는 끝 2행은 왜 띄웠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작품은 6연의 자유시라고 함이 마땅하다.
[굴뚝에 불태우다]는 말은 없다. [아궁이에 불 때다.][굴뚝에 연기 난다.] 이다. 사람이 죽으면 [손과 팔이 구두에 밟혀 지하에 처박히는]일도 없다. 그런 짓을 하는 패륜의 상주가 있는가? [마른땅 바닥 짓는데 쓰이는 원료]는 무엇인지 설명 없이는 알 수가 없다. [마누라 거웃(陰毛)]은 비속어로 시의 품격을 떨어트리고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참새 허수아비]가 다 있는가? 참새 모양의 허수아비? 참새로 만든 허수아비? [닭 쫒다 지붕 쳐다본다]는 말은 있어도 [닭 쫒아 지붕을 나(飛)는] 돈이나 사람은 없다.
현대시를 [變容의 미학]이라 하지만 이와 같은 시구(詩句)들은 [前景化작업]이나 [낯설게 하기]등 변용과는 거리가 먼 修辭法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은 돈(지폐와 동전)이 폐기되면 어떻게 환생하는지, 환생한 것이 무슨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는지 핵심적인 시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추상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마치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분질러 던져 놓은 것 같이 껄끄럽고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
<원간문학 08.2월호>
자명종(自鳴鐘) 최승범
내 마음/ 깨워 주는/ 자명(自鳴) 하나/ 갖고 싶다/
허방에/ 빠지려 하면 “눈/ 똑바로 뜨라”/ 따르릉
경망한/ 휘뚝거림이면/ “꼴값하라”/ 따르릉/
헛된/ 욕심이면/ “나이를 챙기라”/ 따르릉
이웃을/ 하찮게 여기면/ “너만 사는 세상이냐”/ 따르릉
내 마음/ 그때 그때 일깨우는/ 자명 하나/ 갖고 싶다./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밑 줄 친 부분이 3,4조 음보율에 맞지 않으며 만약 한 음보로 읽으려면 숨 가쁘게 급히 읽어야 한다. 수(首)의 구별도 없고, 각 연이 2또는 4행으로 완전히 자유시의 흉내를 내고 있다. 특히 첫째수(首라고 할 수도 없지만) 중장은 3,5,1,5,3의 음보로 시조와는 거리가 멀다. 끝 연 [그때 그때 일깨우는]도 시조의 종장 둘째마디로 보기는 어렵다. 시의 내용으로도 수를 구별할 수 없다.
[자명 하나 갖고 싶다]는 [자명종 하나 갖고 싶다]가 되어야 한다. [따르릉]이 지루하게 중복되고 있다. [..하면 ..해라, 따르릉]의 틀에 넣을 수 있는 진술은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제2,3,4,5연은 하나로 묶어야 할 내용이다. 제1연과 제6연이 중복되는 등 많은 시어를 낭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시상이 평범하고 단조로운 서술형 시이다.
<원간문학 08.3월호>
장산 한마당 황다연
물 소리/ 숲의 노래/ 그 넘실거림/ 청명하다
물에 잠긴/ 산그림자/ 가끔/ 잔돌을 굴리고
싸리꽃/ 5월 뒷끝을 쓸면/
말하라고/ 너 말하라 해도/ 침묵만/ 엮는 숨결
국화 향내/ 밟고 떠난/ 어머니/ 빈 가슴만 한
아무도/ 짚어 낼 수 없는/
아른아른/ 망사옷 입고 온/ 안개도/ 그냥 좋았다./
가시 풀/ 시들더니/ 또 한 발 가까운/ 열락의 무대/
바다를/ 지키는 소금맛/
3,4조 음보율을 갖추어야 할 12구중 제대로 된 것은 3구에 불과하다. 아예 음보율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둘째수 종장 [아무도/ 짚어 낼 수 없는// 세계/ 다 드러낸/ 하늘빛//]은 형식의 파괴가 극에 달한다. 3,6,2,4,3의 5음보가 되어 종장 정형은 어느 모로 맞추어 보아도 찾아 낼 수가 없다.
싸리꽃은 7,8월에 피는데 [5월 뒷끝을 쓸면 달아 오르는 너덜겅]은 무엇이며 [어머니 빈 가슴만 한 아무도 짚어 낼 수 없는 세계를 하늘빛이 다 드러낸다], [가시풀이 시들면 기쁨이 가깝다], [바다를 지키는 짠맛은 네게도 있는 젊은 정신이다]는 등, 시의 내용상 줄거리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귀신들의 대화인가? 시어들이 서로 좌충우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난도질 해 놓은 낙지다리 같이 토막토막 꿈틀거린다. 현대시의 특징인 형상화 부분은 한 군데도 없고 추상적인 진술 일색이다. 난해하게만 쓰면 좋은 시가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 [계절문학]의 작품들
한편 한국문인협회는 07년 겨울호를 창간호로 하여 계간 [계절문학]을 내고 있다. 창간호에 자유시 50편 시조 10편, 08봄 호에 자유시 22편 시조 4편으로 역시 시조의 점유율은 16%에 불과하다.
창간호에 실린 10편의 시조 중 완형의 정격시조는 유자효의 [여름 강]과 申順愛의 [노린재 동충하초 버섯]등 2편뿐이다.
이 2편은 내용상으로도 표현미와 완성미를 잘 갖추고 있어 마치 깊은 산속을 누비다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반갑다.
08봄호에 실린 권영춘의 [홍시(紅柿)], 임영식의 [지난 여름], 서일옥의 [곶감]등 3편은 완벽하게, 남궁경숙의 [샛강]은 비교적으로, 시조 정형을 잘 지킨 작품이다.
이하 [계절문학]에서 파격을 한 시조와 정격시조를 대비해 본다.
<계절문학 07겨울 창간호>
새 순 황순구
흙을/ 차 내고 돋는/ 새 순/ 질서는/ 전설이 된다/
빛에/ 초점을 두고/ 가슴으로/ 영원을 가눈다/
끈끈히/ 달라붙는 열화(熱火)/ 길목은/ 계절이 찼다/
항시/ 은혜로운 일월(日月)/ 아침마다/ 새로운 듯/
바람따라/ 펄럭이는/ 맥맥히/ 이어온 목숨/
행여나/ 휘여 갈지라도/ 이 자리는/ 푸르리./
수(首)의 구별이 없는 6연의 자유시이다. 억지로 2수의 연시조라고 하더라도 음보율의 파괴는 지나치다.
[흙을 차내고/ 돋는 새순]으로 미흡하나마 2음보에 맞추어도 덜하겠는데 굳이 [흙을/ 차내고 돋는//새순//]으로 의도적으로 음보율을 파괴하고 시조정형이 아닌 3음보로 읽으라고 강요한다. 시의 내용은 새 순에 대하여 막연하고 추상적인 예찬(禮讚)으로 일관하고 있다. 형상화 부분은 없고 시적 논리가 결여된 자기주장뿐이다.
<계절문학 07겨울 창간호>
여름 강 유자효
한여름 푸른 밤에 보름달은 강에 뜨고
도롱이 늙은 어부 검은 강을 저어 가고
와스스 대바람 소리 흩날리는 빗방울
시조정형을 빈틈없이 갖추었다. 음보율과 자수율은 물론 의미까지 잘 갖추어 고저강약(高低强弱)이 뚜렷하다. 2행씩을 1구로 묶어 6구를 각각 떼어 놓아도 의미가 통한다.
도롱이 두른 늙은 어부가 밤에 여름 강을 노 저어 건너고 있다. 정겹고 낭만적이다. 초장에서 하늘의 보름달이 강으로 내려오는 수직적 이미지를 도입하고 중장에서 강을 건너는 수평적 이미지를 교차시켜 조화를 이루고 종장의 홀연히 이는 대바람과 흩날리는 빗방울이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대 반전을 일으켜 시의 맛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푸른 밤]과 [검은 강]은 표현이 뒤바뀐 것 같지만 이런 아이러니가 시적 흥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 시는 아깝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다. 비가 오는 밤이면 제 아무리 보름달이라도 보일 리가 없고 강물에 비치지도 않는다. [도롱이]와 [빗방울], 아니면 [강에 뜨고]를 바꾸어야 할 것 같다. 하나의 사족을 붙이자면 도롱이, 노 젓는 늙은 어부 등 옛날 풍물을 본 적이 없는 청소년들이 이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계절문학 07겨울 창간호>
노린재 동충하초 버섯 申順愛
질곡의 낭떠러지 몇 번을 굴렀을까 찢기고 할퀸 상처 스스로 치유하며 탈바굼 애련한 사연 지층 속에 묻었네.
허물을 벗는 아픔 혼절의 메아릴까 절망을 뛰어넘어 다시 서는 강한 심지 횃불을 높이 든 여정 허공 향해 띄웠네.
동충하초(冬蟲夏草)는 곤충에 기생하여 숙주가 되는 곤충의 시체에 자실체를 내는 식물이다. 숙주가 되는 곤충은 누에, 나비, 매미, 벌, 딱정벌레, 메뚜기, 거미 등이다. 마치 겨울에는 곤충이었다가 여름에는 식물로 변하는 하나의 생물체인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취급된다. 이 작품은 2수의 연시조로 시조 정형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음보율은 물론 자수율까지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다. 따라서 초등학생이 읽어도 리듬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고 의미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한 무더기 동충하초로 자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좌절과 부상과 환골탈태를 겪어야 했을까? (첫째 수). 허물을 벗을 때는 혼절까지 해 가며 다시 태어나 존재를 크게 과시하는 동충하초의 의지와 성공담(둘째 수)을 듣는다. 이 작품은 실타래를 풀듯이 술술 풀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을 연상시키는 한 편, 신비스러운 생명체에 대한 외경(畏敬)의 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C 현대시법을 구사함이 없이 서정양식의 시에 머물고 있는 점이라 하겠다.
3. 계간 [시조문학] 및 [새시대시조]의 작품들
창간년도가 오래된 시조전문지인 계간 [시조문학]과 [새시대시조]의 08봄호에 게재된 작품 중 형식과 내용이 좋은 작품을 골라 본다.
<시조문학 08봄호>
이른봄 장승철
찬바람 자리 비운 빈 뜨락 양지 쪽에
햇살들 오골 오골 새떼처럼 모여 앉아
누구를 먼저 깨울까 정하느라 바쁘다.
동인순례(울산시조시인협회)에 실린 작품이다. 시조는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짧은 몇 마디로 정곡을 찌르며 정형만 갖추면 리듬은 자동으로 맞게 되어 있다. 자유시가 따르지 못하는 장점이다.
[햇살들이 새떼처럼 모여 앉아 있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숨어 있는 시적진실을 시인이 찾아내어 보여 주는 것이다. 햇살이라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명사를 [새떼]와 같다고 비유하여 멋지게 形象化하고 있다. 그 새떼가 잠자고 있는 삼라만상 중에서 누구를 먼저 일으켜 세워 새봄의 테프를 끊게 할까 의논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기발한 컨시트를 동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형식은 물론 내용면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시조가 아닌가 싶다.
<새시대시조 08봄호>
간이역과 고속열차 이차남
왔으면 들러야지 잘 계시냔 말도 없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람처럼 내달리나
만고에 쓸데없는 놈 서울행 고속열차.
최신 교통수단인 KTX가 등장한 21C 현대시조이다. 세계화의 첨단을 달리는 젊은 엘리뜨들과 고향 농촌에서 이들을 길러내고 지켜보는 어른들을 대비하고 있다. 바쁜 일정에 고향마을을 지나면서도 들러지 못하고 모른 척해야 하는 젊은이들과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마음이 서운한 촌로들의 심경을 잘 그려 내고 있다. 시조의 형식과 내용을 잘 갖춘 작품이다.
<새시대시조 08봄호>
달맞이꽃 임춘자
둑길에 달맞이꽃 배시시 웃음 물고
몰래한 연애질을 시치미 떼고 있네
서녘엔 줄행랑치는 노오란 쪽달 하나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고 안 그런 체 하는 선남선녀의 모습을 잘 그려 내고 있다. 수줍어하면서 시치미 떼는 여자와 동네사람들의 이목을 따돌리고 벌써 저 멀리 달아난 남자의 모습을 코믹하게 형상화 하고 있다. 달맞이꽃을 주제로 하여 발표된 시가 많지만 대다수가 단순 서술형으로, 또는 주정시에 머물고 있는데 반하여 이 작품은 19C형 시법을 탈피하고 달과 꽃을 등장시켜 사람 사는 이야기(人間事)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4. 중앙시조백일장의 작품들 08년 1/4분기 중앙일보 지상에 발표된 당선작들은 모두 3장 6구 12음보는 갖추었으나 3.4조의 기본율격을 일탈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동안 기성 창작계와 비평계가 정형파괴 불감증에 걸려 시조를 왜곡시킨 결과 신인들마저 3.4조 율격은 무시해도 되는 줄 알고 글을 쓴 때문일 것이다.
08.1월 (심사위원: 이승은 홍성란)
장원: 그 겨울, 태안에서(이응준)
검게 타 썰물지는 저 바다를 바라보면/ 붉은 피돌기가 확, 솟구처 숨 막히고/ 폐사한 굴 양식장엔 물보라만 출렁거렸다// 닦고 퍼내어도 밀려오는 기름의 떼/매복의 군사들처럼 넘실넘실 민물을 탄다/ 대대로 이어온 터전 흔들리는 밑바닥// 걸레 한 장으로는 어둠을 막을 수 없다/ 소라멍게 쭈꾸미도 제 자리에서 말라죽고/ 공포의 검은 그림자 스멀스멀 밀려온다// 얼만큼 부대껴야 푸른빛이 살아날 건가/ 밑천 다 드러낸 자리 몸 바꿔 흐를 날은/ 무너진 갯바위에는 이 밤 달빛 환한데//
차상: 대중탕에서(현영화)
아버지 등 밀다 본 물 마른 계곡 하나/ 입은 함박 웃지만 눈썹이 젖으셨다/ “늙은께 유달리 때만 껴야” 잦아들던 그 목소리//
차하: 봄날(정효근)
참새가 포르르 마른 풀잎을 물어 가고/ 참새가 포르르 닭장 솜털을 물어 가고/ 봄볕이 꽃씨를 품에 안았다 참새처럼 가뿐히//
08.2월 (심사위원: 이승은 홍성란)
장원: 사다리(유현주)
아버지의 길 하나 담에 기대 있었다/지척에서 닿지 않는 허방을 건너기 위해/ 예닐곱 걸음을 이어 임시방편 만든 길// 한발씩 진화해서 도시로 온 사다리는/ 모로 눕는 일 성에 안 차 바닥에 누웠다./ 날마다 쇠로 된 지네 그 길로 집에 간다// 지네의 내장 되어 수시로 흔들린다/ 마디 사이 끼어있던 오래된 기억들이/ 이따금 금속성내며 튀어나와 박힐 때// 다 익은 가을을 눈앞에 두고서도/ 끊어진 길 이을 수 없어 입맛만 다셨다는/ 아버지 덜컹거리며 겨울을 건너신다//
차상: 다림질을 하며(오영민)
빨아 논 와이셔츠 팽팽하게 다리는 아침/ 말재기 하던 어제 일이 보풀보풀 일어나서/ 속상한 남편 달래듯 꾹,꾹,눌러 펴본다// 다툼으로 까칠해진 내가 마음 쓰였는지/다린 옷을 기다리다 내밀어 당기는 손/ 뿌리쳐 외면 못하고 안기고 마는 여자// 해묵은 옷일수록 색깔 바랜다지만/판판한 다림판 받칠 등이 있기에/ 구김살 몇,몇개쯤은 잔정으로 여겨 산다//
차하: 고목(양희영)
사람이 죽으면 꽃도 가구도 산 것이 아니지/ 살아서 육친에게 이웃에게 나누시며/ 오십 년 어루만진 정 비우시던 어머니// 아들딸 밀고 당기던 초록 깃 빨간 양단이불/ 먼지 난다고 야단치던 손사래도 실려갔다/ 아득히 빈 하늘 너머 흔들리는 웃음소리//
08.3월 (심사위원: 이승은 홍성란)
장원: 조끼 한 벌(이재경)
아버지 낡은 조끼 모로 누워 코를 곤다/ 뒤집힌 속에 비치는 색 바랜 손세탁표/ 올기가 흰머리처럼 하늘하늘 바랬다// 팔다리도 하나 없이 몸통뿐인 덧 옷가지/ 안에 품는 옷자락 긴 세월 시린 물살에/ 말없이 닳고 닳아서 방바닥에 놓였다// 옷가지도 오래 되면 주인을 닮아 가는가/ 속이 타도 꼿꼿하게 그림자로 감싸는 이/ 조끼를 머리맡에 두고 코를 고는 아버지//
차상: 무국 끓이는 아침(김종연)
노려본 활자들의 역공에 시달린 날/멸치 국물 우려내고 표고도 썰어 넣고/ 뽀오얀 들깨가루에 시름마저 풀어 넣는다// 총총총 칼질 소리에 흥겨운 가락 얹어/ 밤새운 허방질을 도마 위에 저미는데/ 바람 든 무 속살 보니 다시 돋는 생채기// 네게도 정복 못할 그 무엇이 있었는가/ 얼마나 쓰렸기에 이렇게 속을 비웠나/ 지난 밤 내 속을 품듯 너를 꼭 보듬는다//
차하: 봄, 도둑고양이(정화경)
언제 숨어들었을까 살금살금 도둑고양이/ 바람도 까치발하던 돌담 밑이 수런거린다/ 빠끔히 고개 내미는 생쥐 눈 떡잎 두 장//
밑줄 친 부분은 3.4조의 운율이 아니거나 2이상의 음보를 부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종장 둘째마디를 억지로 맞춘 파격 부분이다.
신인들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낡은 서정시에서 벗어나 사물을 깊게 보고 현대 시법을 구사하려는 경향이 있어 다행이나 시조 정형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음은 매우 염려스러운 대목이다. 1월 차하 당선작 [봄날]은 동시조에 가깝고 [참새가 포르르]가 중복되고 있지만 일반인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의 정경을 잘 그려 내었고, 3월의 차하 당선작 [봄, 도둑고양이]는 돌담 밑에 몰래 숨어들어 와서 생쥐 눈 같이 반짝거리는 떡잎 두 장을 내미는 무형의 봄을 유형의 도둑고양이로 변용하여 형상화하고 있어, 다른 상위 당선작들 보다 오히려 현대 시법을 잘 원용하고 예술적 감각도 앞서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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