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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직장이 쉬는 토요일이 오면 금요일밤에는 어김없이 서울을 벗어나곤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구석구석 꽤 많은곳을 돌아 다녀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잘 알려진 관광지 위주의 여행이었지만 점차 관광에서 벗어나 짧으나마 여행가는 목적지의 실제를 보고 오려 많이 애썼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왠지모를 아쉬움이 많이 남곤 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담배를 끊고, 단전호흡을 시작하며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육식보다는 채식위주의 식생활이었고, 커피나 콜라보다는 茶를 주로 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사는 것밖에 모르던 삶이 여행을 통해 조금씩 바뀌어지더니, 이제는 생각까지도 '서울을 벗어나 살 수 있겠다'라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구나 한번은 꿈 꿔 봄직한 먼 미래 - 적어도 나이가 쉰살은 넘어 은퇴한 뒤 - 의 여유로운 전원생활이었지, 아직 열심히 일할 나이인 30대엔 가당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후,많은 것을 가졌다 놓쳐도 보고,몸고생 마음고생 하며 몇년을 보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사는가?"
불행히도 이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명상도 하고 단전호흡도 하며 이 화두에 매달렸지만 속시원한 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한권의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바로 <조화로운 삶(Living the Good life)>이었습니다. 처음엔 미국인 부부가 썼다는 이 책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완전히 빠져 들었고, 그 날 밤을 그만 꼬박 새워 버렸습니다. 이 책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은 있었습니다.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정신은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외쳐댔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시골에 가서 어떻게 먹고 살지?" 라는 기초적인 의문은 물론이고,
"어디서 살까?",
"살 집은?"
"병이 나면 어떻게 하지?"
"만약에 실패하면 ?" 등등...
그때 아내와 어머니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아직 젊으니 인생에 한두해 실패한다고 해도 그리 큰 일은 아니다.''진정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자'
그때부터 살 곳을 찾는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심중에 두었던 곳은 네군데였습니다.
1)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부근
2) 강원도 태백 또는 삼척 부근
3) 제주도 한라산 기슭
4) 지리산부근 -전라남도 구례,광양,경상남도 산청,함양 그리고 하동
가족들과 토론을 한 결과는 이랬습니다.
1) 가능한 한 도시화가 덜 된 곳
2) 겨울에 춥지 않은 곳
3) 이왕이면 산/강/바다가 모두 있는 곳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하동'입니다.
사실 위의 것들은 모두 가족들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오직 '茶에 대한 깊은 호감과 애정'이 이곳 하동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茶를 만드는 곳이 어디 하동뿐이겠습니까마는 특별히 마음에 감동으로 남은 茶는 하동에서 만든 茶였고, 그 인연을 못잊어 하동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연고도 없는 하동에서 어떻게 땅을 사고 정착할 집을 구할지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몇차례의 여행으로 알게 된 여관아주머니ㆍ식당주인아저씨등에게 부탁해, 알아보마라는 막연한 대답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미덥지 않아 직접 하동에 내려와 공인중개사무소(복덕방)를 찾아 나섰으나 서울과는 달리 잘 눈에 띄지도 않고, 낯선 하동읍내를 한시간쯤 뒤져 어렵게 찾은 두 곳중 한 곳은 폐업, 다른 한 곳은 출장중... 이래서야 처음품은 생각은 고사하고 살 곳 마련도 힘들겠다는 생각에,고심해서 찾은 곳이 하동군청 민원실이었습니다. 젊은(?)사람들이 시골에 내려와 살려는 것에 매우 의아해하는(약간의 의심도 하는) 그 분들에게 한참 사정얘기를 하고, 겨우 화개면의 공인중개사무소를 소개받아 화개로 이동했습니다.
사실 서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와 산다고 하면 환영 받을 줄 알았는데 실제는 매우 틀리더군요. 기특하다는 칭찬은 고사하고, 열심히 설득시켜야만 아주 조금씩 이해를 합니다. 땅을 보러 다니면서도 어느 날은 같은 이야기- 하동에 왜 내려오는지? 어떻게 살건지등등 - 를 서너차례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알아듣도록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만나는 공인중개사마다 보여주는 땅들은 모두 전원주택지 뿐이었습니다. 평당 40만원에서부터 싼 땅은 평당 15만원 정도씩 하는... 이래서야 어디 농사짓고 살 수 있겠나 싶어 정말 암담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동은 인연이 아닌가보다 !'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알아 볼 수 밖에 없음이, 실망스러웠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몇차례 茶를 주문한 적이 있던 다원이었습니다. 일면식도 없이 단지 몇차례 茶 주문한 적 밖에 없는 사람을 어찌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시던지요... 茶를 대접 받으며 그간의 사정얘기를 드렸더니, 그 분들 경험담이며 여러가지 충고로, 외지에 내려와 더해가기만 하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라앉히게 되었습니다. 그분들도 도시에서 살다 시골내려와 터잡은,어찌보면 선배이셨던 겁니다. 이야기 도중 얼마 전에 차밭이 두군데 매물로 나왔는데, 팔리지 않았을지 모르니 한번 알아보자고 차밭주인에게 전화를 해 보시고, 그 중 한 곳이 아직 팔리지 않았으니 저녁에라도 차밭주인을 만나보자고 하셔서 아주 다행히, 좋은 인연으로 좋은 땅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도움을 주신 정선생님 내외 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생활비는 어떻게?
=> 가장 고민했던 부분임에 비하면 대답은 의외로 쉬웠습니다.
도시에서의 생활비를 100으로 본다면 시골에서는 50 이하로 줄일 수도 있으리라 봤고 실제도 그렇습니다. (물론 쓰기 나름이지만요.) 그리고 추구하는 삶이 가능한선에서의 자급자족이었기에 의외로 생활비에 대한 부담이 적게 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시생활비의 1/5이하로도 가능할 것으로 보임)
적게 쓰면 그만큼 적게 벌어도 되겠지요...
#.노후대책은 어떻게?
=> 이 부분은 오히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걱정해야 할 것이라 보입니다. 시골에서는 70,80대 어르신들이, 정정하게 직접 밭을 돌보십니다. 오히려 시골서 사는게 확실한 노후대책이라 할 수 있겠죠.
#.의료비는 ? 목돈이 들어갈 경우엔 ?
=> 다행히 20대때 보장성 건강보험을 여러개 들어놓아 70세까지는 암등 큰 질병엔 어느정도 안심입니다. 그리고 목돈이 들어갈 경우는? 글쎄요... 별로 그럴 일이 없을 것 같군요. 왜냐하면 도시에서 목돈 들어가는 일중 제일 큰일이 집장만 하는건데 이곳에선 별로 그렇지가 않거든요.
#.자녀들 교육은?
=>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자녀는 없습니다. 만일 있다해도 크게 걱정할 것 없는것이 공교육비가 아주 저렴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도시처럼 서로 비교를 해가며 사교육비 지출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고요. 또 주변 산청이나 함양에 대안학교들도 있습니다.
#.처음해 보는 농사는 어떻게?
=> 처음엔 "이 씨를 뿌리면 진짜 싹이 날까?" 하는 어이없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콩 심은덴 콩나고 팥심은덴 팥이 나고 자라더군요, 하하...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됩니다. 시골에선 모든 분이 선생님입니다.
#.살 집은 어떻게?
=>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식주(衣食住)죠. 이 부분만큼은 남의 손 많이 빌지 않고,
되도록이면 스스로 해보자는 것이 가족의 공통된 희망인고로,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습니다.
농민이 아닌 사람이 농지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농지취득자격증명원'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당읍면의 농지위원 2명 (보통 한동리에 한명)이 농사를 지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 해주고 일년에 30일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강제로 매수를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해야 농지취득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농지는 1,000㎡ (약 303평)이상을 취득해야 등기를 이전할 수 있습니다. (법이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농지취득을 쉽게 하는 쪽으로 법개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2년도 현재입니다.)
또,토지거래허가 구역에서는 도시인이 농지 303평(1,000㎡)이상, 임야 606평(2천㎡)이상을 취득할 때는 일정한 서류를 갖추어 해당 시 군 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신고구역에서는 농지 1,515평(5천㎡), 임야 3,030평(1만 ㎡)이상을 취득할 경우 해당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합니다. 다행히 구한 땅이 위의 조건과는 무관하여 무사히 등기를 마쳤습니다.
이제 살 집이 문젠데...
처음 계획으론, 시골엔 빈집이 많을테니 빈집을 구해 조금허름하더라도 고쳐서, 낯선곳에 적응하며 집을 지을동안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쉽게 구해질 줄 알았던 빈집 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시골엔 빈 집이 없었습니다. 사람만 살지않는다 뿐이지 창고등 갖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외지인에게 선선히, 들어가 살라고 빌려 주는 집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서울서 살던 곳은 계약이 되어 나와야 하는 처지이고,구해질듯 하지만 막상 구해지지 않는 빈 집을 찾다 찾다 포기를 하고 (열흘동안 일곱번이나 서울을 왕복했습니다.) 결국은 마을입구의 한 집에 전세로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너무 빈집 구하기가 힘들어 처음엔 집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전세가격이면 구입도 가능) 수리비용에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그 활용도와 매각불투명등으로 구입을 포기했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 농지전용을 받는 데에도 집을 갖지 않는 편이 훨씬 유리하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으로는 이렇게 전세로 사는게 외지인에겐 어떤면에서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인집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수많은 것들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줍니다.
일가붙이 하나없이 내려온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든든한 안내자요,지원자가 되어 주는 게지요.
시골살이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것들을 처분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지향점을 '조화로운 삶'이라 하기엔 너무나 거창해 그냥 '좋은 삶'이라 이름 붙여 보지만 이 역시 낯간지럽기는 마찬가지네요.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가족이 살아가려는 '좋은 삶'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본다면,
첫째, 좋은공기,좋은 물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
둘째, 육체를 건강하게 살찌우는 좋은 먹거리를 먹고 마시고
셋째, 서로 고맙게 나누고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넷째, 돈이 목적이 아닌 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육체적 노동의 신성함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와 만족을 느끼고,미래에의 희망을 키우며
다섯째,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여유롭고 알차게, 다른 누군가의 대리가 아닌 '나만의 인생'을
핑계대지 말고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년여전을 돌이켜보면 저역시 대다수의 도시 생활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희뿌연 하늘 아래에서 양치질할때면 구역질나는 수돗물을 참아야 했고, 영양가는 고사하고 맛과 향도 없는 음식물을 먹으며 출근길엔 다른 차가 내 차앞에 끼어들까 노심초사, 출근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로 일터에 나갔고, 하루종일 잡다하고 사소한 업무들, 상사와 동료, 부하직원들과의 끊임없는 신경전.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지는 접대, 회식,모임등의 술자리.
간혹 잠깐의 정신적 여유가 들 때마다 드는 의문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저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지?'
'가족들하고 정답게 밥먹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사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괴로움(苦)이요, 아픔(痛)이었습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또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오직 그 뿐인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어 '연봉 얼마짜리' 인생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때의 그 자괴감이란...
나의 아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적 모순속의 도시생활에서 아내 역시
'여성의 사회참여' 내지는 '자아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직장에를 다녔지만,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움(美)으로만 보려는 사회의 편견 속에, 예쁜 나의 아내는 더욱 예뻐지기 위해
(혹은 예뻐 보이기 위해) 무리하게 피부과 치료를 받던 중 그 부작용을 심하게 앓아야 했고, 육체의 고통은 정신의 허약을 불러와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우울, 신경질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결단은 필요했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당위는 인정했지만 그 '다름'이 주는 생경함과 낯설음은 우리 가족을 몇년이고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낯선 두려움 보다는 주류(主流)의 세상에서 낙오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돈을 벌어서...'
'조금 더 공부를 해서...'
'조금 더 ...' ,
'조금 더...'
남보다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물질적 여유가 생긴 후, 남은 여생은 그냥 무위도식하며 시골에 내려와 흔히들 이야기하는 전원생활을 누리는 것이 당시 문제해결인식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위의 삶은 사는 곳만 다른, 또 다른 형태의 도시 생활일뿐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족이 '좋은 삶'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먹거리를 통한 육체의 건강.'
하동에 내려와 살며 이만큼 떨어져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후, 아직 도시에 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며 얼마나 도시 사람들의 육체가 망가져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역시 하동에 온 후 거의 일년여는 앓고 살았습니다.
촌 생활을 시작하면 바로 짠~하고 건강 체질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도시毒을 해독하느라
그랬는지 건강이 좋아지기는 커녕 사소한 감기조차도 몇달씩 앓으며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아내의 고생은 저에 비할 바가 아니게 온 몸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돋아나 괴로와 했구요,
어머니는 비만으로 인한 관절통증과 노령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이 고루 괴롭혔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우리 가족의 쑥예찬')에서 다시 상술 하겠지만,우리 가족에게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삼시 세끼 빠뜨릴 수 없는 음식으로 고치겠노라 결심했고,그때 그때 바로 나타나지 않는 '효과'에 조바심을 누르고 서로를 격려해가며 오늘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벌써 상당부분 좋아지기도 했구요. 아직 치료과정 중이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부분도 있으나 우리 스스로 '완벽'하게 건강해 질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은 점점 강해지기만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사고가 아닌 한, 인간은 건강하게 평생 살 수 있는 길이 있다 확신합니다.
'좋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도시의 인간 관계는 경쟁과 경계나누기,철저한 무관심과 자기방어본능이 강합니다. 그러기에 내 아이는 남의 아이와 틀려야 하고, 우리집은 남의 집보다 커야 하고, 우리 자가용은 옆집 자가용보다 좋아야합니다. 옆집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도 알지 못하고, 옆집 아이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을 당해도 내 아이가 무사하면 곧 잊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분명히 다른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점 중의 중요한 하나는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조금 불편한 사람을 도울 줄 알며, 호의 베품을 고맙게 받을 줄 아는 사람간의 관계. '좋은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 가족의 주요한 부분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가지 더!
바로 '육체적 노동'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땀흘리는 일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천시되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농촌에 사는 것을 기피하는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육체적 노동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처지와 한계에 맞는 적당한 육체 노동은 운동후에 느끼는 쾌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우려반 비웃음 반이었습니다.
망치질 한번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사람이 집을 짓는다니... 개가 웃을 노릇이지요...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빈집을 사서 살며 천천히 한 3~4년 두고 지어볼까하고 꽤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1년여를 살며 어느정도 육체적 노동이 몸을 조금씩 단련 시켜 나가고, 육체의 단련과 함께 정신도 어려움을 극복하며 느끼는 쾌감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자,이제 엄두가 났습니다.
물론 집짓는 일이 (그런 일은 생전 처음 해보는 우리가족으로서는 정말이지 죽을만큼) 힘듭니다.
농사역시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기에 보람은 더 큽니다. '정말 하동에 잘 내려왔다'라고 느낄 때는 온 몸에 땀을 흠뻑 적시도록 일하고 황토집짓는 현장을 떠나 현재 거처하는 집으로 내려가며, 섬진강 너머 저편 백운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볼 때, 그 마지막 햇살이 구름과 어우러져 말로 형용 못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갈 때, 육체의 고단함은 벅차오르는 정신의 희열로 기분좋은 나른함이 되어 버립니다.
살아감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하셨나요?
우리가족의 경우는 바로 위의 '좋은 삶'이고 그 방편으로 이곳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일년여가 지난 지금 백퍼센트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같지만 또 어제와 같지 않은 새로운 오늘을 살 수 있음에 가슴 설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