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정진을 할 뿐 사랑을 듣지 않았다 정진불청애精進不聽愛
대종사는 24세에 연화봉蓮花峰 초당草堂에서 얼음물에 목욕하고 찬 방에 밤을 새우는 삼동정진三冬精進을 하였다. 새해 들어 봄기운이 완연完然한 어느 날, 묘령妙齡의 처녀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告白하자 이를 피한 뒤 처녀가 돌아가고 난 후 수행정진修行精進하였다.
하산下山하기 위해 정리하자 쌀 한 말, 간장 한 되를 절반 남기고, 솜옷 한 벌을 이불 겸 사용하여 흉하고 먼지만 났다. 사무친 정진으로 수양력修養力은 뭉쳤으나 고행난행苦行難行으로 해수증咳嗽症을 얻었다.
~~~~~~~봄이 완연하던 어느 날, 묵연히 정좌正坐하고 있는 초당에 18, 9세쯤 되어 보이는 묘령의 처녀가 혼자서 나물바구니를 옆에 끼고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가지 않고 이쪽저쪽 초당주위를 뱅뱅 돌며 돌아다니자 소태산 대종사가 물었다.
어디서 온 처녀요. 어째서 집에 가지 않소?
처녀는 수줍은 태도로, 그러나 간절한 어조로 자기가 이 초당주인의 딸이라는 것과 소태산 대종사가 입산 시 자기 집에 하루 밤을 유숙할 적에 언뜻 뵈옵고는 그 후 사모하는 마음을 걷잡을 길 없어서 염치를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다며 애원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말하였다.
남녀가 유별하고 또한 내가 석 달째 정진을 하고 있는데 같이 있으면 쓰겠소?
근엄한 말에도 처녀는 듣지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처녀에게 말하였다.
이 인근에 누가 있을지 모르니 잠시 내가 보고 오겠소.
소태산 대종사는 초당에서 나와 옆 산 바위로 가서 앉아 입정에 들어버렸다. 처녀는 기다리다 해가 석양에 들자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초당으로 돌아와 골짜기로 내려가 옹달샘의 물을 길어다 처녀가 앉았던 마루를 닦고 다시 정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초당에서의 정진을 마무리하고 영산 집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김광선은 영산 집으로 돌아가 가끔 연화봉 초당을 찾아 소태산 대종사와 같이 정진하고 돌아갔다. 소태산 대종사가 연화봉 초당에서 정진이 3개월여가 지났을 때 김광선이 또 찾아왔다. 소태산 대종사는 김광선에게 이제 영산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김광선은 행장行裝을 수습하며 그 동안 먹고 남은 양식을 보니 절반가까이나 되었다. 김광선은 깜짝 놀랐다. 입산 할 때 분명히 한말 밖에 가져오지 않은 양식을 석 달 동안 지내고도 두 되 남짓 남은 것이다. 보통 사람이면 한 달에 한 말 두 되 정도의 식량이 드는 법인데 석 달 동안 여덟 되로 지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탄식처럼 말하였다.
“일은 바쁜데 시절이 이르지 아니하니 한이로다.”
그리고 나무 가지를 꺾어 입고 있던 옷을 툭툭 털었다. 그러자 옷에서 연기 솟듯이 먼지가 자욱이 일어났고 석 달 동안 주야晝夜로 입고 자고 하였던 솜옷이 헤어져 떨어졌다. 그러나 얼굴은 세속에서 지낸 사람보다 오히려 좋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초당에서 출발하여 영산으로 오기위해 김광선과 길을 걷다가 목이 타 주막에 들렀다. 그 앞 모정에는 여러 행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화로를 가운데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화롯가에서 불을 취하고자 화롯불에 마음이 가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불이 회오리바람을 만난 듯이 훅 솟아올랐다. 좌중은 깜짝 놀라 한참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태산 대종사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좌중의 공기가 진정되자 일어서서 말하였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내가 화로에 손을 대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일부러 한 일은 아니니 실로 미안합니다.
인사를 하고 김광선을 재촉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어느 동네 샘물터를 지나다가 물을 마시려고 하였는데 그릇이 없어 손으로 물을 움켜 내려고 하는 순간 물길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기운이 미치는 데마다 이적이 일어났다. 지나가던 사람이 또 이것을 보고 주목을 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김광선은 놀라움에 겨워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소태산 대종사가 앞길에 가로놓인 산 너머의 광경을 눈앞에 보듯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연화봉 초당에서 불철주야 정진으로 상당한 수양력을 얻었으나 이때의 난행고행難行苦行으로 해수증咳嗽症을 얻어 만년晩年에 고생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영산 노루목에서 수양할 스물네 살 때(1914)였다. 구도의 열의는 불타올랐으나, 어찌할 방향을 몰라 엄동설한에 노루목 찬방에서 변변한 이불도 없이 홀로 앉아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장 선운사禪雲寺에 가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선운사 산내 암자에 얼마간 가 있다가 절은 여러 가지로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여비 문제도 난감하여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집에서는 당장 먹고 살 끼니도 없는 판에 타관에 나가서 살 여비 마련이란 도무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고, 아무런 계획도 서지 않은 채 우두커니 있었다.
이웃 돛드레미帆縣洞에 사는 김광선金光旋이 딱한 처지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를 보고 선운사 산 너머에 사는 친지의 초당을 알선하였다. 그 친지 김준상金駿相이라는 사람으로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에서 한약방을 하였다. 초당은 연화봉 중턱(연화리 산 77-2)에 있는 3칸 오두막집이었다.
김준상은 집 근방의 산에다 초당을 지어놓고 정신이 복잡하면 가서 쉬기도 하고, 피부병에 용한 의원이라 전염성 피부질환 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치료도하는 초당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 무렵 소태산 대종사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되어 문둥병자로 오인 받기도 했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김광선의 안내로 처음 연화봉에 갔을 때는 1914년 말경이었다. 영산에서 하루를 걸어 김준상의 한약방에 도착하여 하루저녁을 지내고 아침에 초당으로 올라갔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날씨에 평소에는 사람이 거처하지 않던 빈 초당을 정리하고 소태산 대종사와 김광선은 싸늘한 적막 속에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마음에 들었으나 김광선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도 역시 입정삼매에 들었다. 저녁이 되자 김광선은 날씨가 하도 추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적막 속에서 갑자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두런두런 나더니 곧 조용해지고 잠시 후 공중에서 은은한 풍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김광선은 일어나 소태산 대종사에게 물었다.
지금 밖에서 이상한 풍악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김광선은 아무래도 이상하여 방문을 열어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초당주위는 대낮같이 밝고, 향기롭고 청량한 공기가 ‘쏴―.’ 하니 방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때 선관도복仙官道服 차림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하늘에서 구름처럼 모여들더니, 소태산 대종사를 향해 차례차례 예배禮拜를 올리고 물러갔다. 김광선은 꿈인지 생시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선관들이 예배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부동不動할 따름이었다. 사흘 밤을 계속해서 이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며칠 후 김광선은 영광으로 돌아가고 소태산 대종사 혼자서 남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연화봉 초당에서 한번 자리에 앉으면 며칠을 그대로 있었다. 구태여 밥을 먹는 일, 잠을 자야 할 일, 옷 갈아입을 일 없이 줄곧 입정入定이 계속되었다. 차가운 밤, 이불은 커녕 차가운 냉방에 앉아서 정진하다 혹 잠이 오면 골짜기에 내려가 옹달샘에서 물을 몇 동이씩 몸에 끼얹어 정신을 차렸다.
봄이 오고 있었다. 처음 올 때 입고 왔던 솜옷 그대로 지내도 소태산 대종사는 더운 줄도 갑갑한 줄도 모르고 지냈다. 깊은 정에 들었던 것이다. 수양력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지혜도 상당히 열렸다.
어느 날, 집안사람들이 선산先山의 이장移葬문제를 가지고 의논하러 왔다. 소태산 대종사는 곧 한 귀의 글을 지어 그들에게 보였다.
‘청산백골위후사靑山白骨爲後事 허명세전무인시虛名世傳無人市
푸른 산의 백골에다 뒷일을 위한다는 것은 헛이름을 대대로 사람 없는 저자에 전하는 것이라.’
2. 안은 적이나 밖으로 정에 들다 내적외정입內癪外定入
대종사는 25세 되던 여름 어느 날, 법성포法聖浦 장에 가기 위해 선진포仙津浦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다 우두커니 입정入定에 들어 한나절을 서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한 생각뿐으로 배에는 거대한 적癪이 들어있고, 온몸에는 부스럼 딱지가 붙어있고, 해수증咳嗽症과 영양결핍으로 피골상접皮骨相接한 병자病者의 모습이었다.
어느 때는 밥상에서 등상불等像佛이 되어 있기도 하고, 주문呪文이 떠올라 외웠으나 차츰 ‘주문’도 ‘이 일을 어찌할꼬?’도, 먹고 자는 일마저 잊어버리는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들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친이 열반하자 부친과 친교가 있었던 영광읍내 부자로부터 성화같은 채무 독촉을 받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탈이파시를 통해 벌이를 함으로써 읍내 부자의 빚을 갚고 다시 구도에 전념하였다.
도사를 만나고자 하는 생각은 완전히 단념하고 자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한 생각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두커니 방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것이 화두를 잡고 참선하는 형태가 되었다.
부친이 지어 주셨던 삼밭재 초막에 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 귀영바위 굴(눈썹바위봉 입구)에 앉아 있기도 하였다. 이때 주문이 떠올랐다.
“우주신 적기적기宇宙神適氣適氣.”
이 주문이 무언지 잘 모르나 밤낮으로 외우기도 하였다.
그 후 자신도 모르게,
“시방신 접기접기十方神接氣接氣.” 라고 고쳐 불렀다.
또 다른 주문이 떠올랐다.
“일타동공 일타래一陀同功 一陀來
이타동공 이타래 삼타동공 삼타래
사타동공 사타래 오타동공 오타래
육타동공 육타래 칠타동공 칠타래
팔타동공 팔타래 구타동공 구타래
십타동공 십타래.”
떠오른 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두 주문을 기도 올릴 때 마다 외웠다. 그러나 주문도 일시적이었을 뿐 대체를 ‘이 일을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았고 후에는 그것마저 잊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스물네 살(1914) 들어설 무렵, 노루목 집에는 빗물이 새어 방바닥은 똘(도랑)이 되어 분별없이 앉은 소태산 대종사의 무릎 아래가 그득히 고여 있으니, 방에는 작은 못 부엌에는 큰 못, 온 집이 물 뿐이라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걸레로 방을 훔쳐내고 하는 동안에 비는 차차 개었다. 그래도 소태산 대종사는 우두커니 앉아 선정에 들었다.
노루목 지붕에 눈이 수북이 쌓이면 이원화가 빗자루로 지붕을 쓸었다.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가 덮을 것이 없자 이원화가 자신의 치마를 덮어 주었다.
초가에서 입정에 들어 있을 때 배에는 물동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거대한 적癪이 들어 있고, 머리는 까치집이요 온몸에는 종기가 나고 부스럼 딱지가 붙어 뜯어내면 하루에도 한 됫박씩은 나오는 만신창이었다. 그리고 간단없는 해수증咳嗽症으로 기침을 시작하였고 영양결핍으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되었다.
이원화는 소태산 대종사가 해수증으로 고생하자 남의 밭 맬 삯을 미리 받아 꿀 한 단지를 사다주니 다 먹고 기절하여 버렸다. 그리고 일어나자 기침이 개었다.
노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이면 으레 혀를 끌끌 차고 한 마디씩 했다.
허허, 박성삼(소태산 대종사의 부친)이 평생 죄 진 일이 없었는데 아들이 궂은 병이 났으니 세상일은 알 수가 없네.
소태산 대종사가 앉아있는 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래도 점잖게 동정을 하는 편이었고, 아예 흉측한 병자로 보고 조상 묘 자리를 잘못 써서 용천병(문둥병)에 걸렸다느니 천질天疾이 났느니 하고 문둥병자라 여겨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이원화가 품을 팔아서 겨우 보리밥 한 그릇을 준비하여 소태산 대종사에게 올리고 다시 품 팔러 들에 나갔다가 점심때가 훨씬 기울어서야 돌아왔다. 그때까지 소태산 대종사는 밥상 앞에서 등상불等像佛이 되어 있었다. 가까이 와본 이원화는 깜짝 놀랐다. 깡 보리밥은 바짝 말라 더욱 새까맣게 되었고, 거기다가 파리 때가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쳐다보기도 징그러웠다. 이원화가 기가 막혀 말했다.
아이고,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요? 아침 밥상 앞에서 지금까지 등상불이 되어 있다니요.
그제 서야 소태산 대종사는 눈을 뜨고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앉아만 있게 되었나?
소태산 대종사의 나이 24, 5세경부터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고창 연화봉 초당에서 3개월 수양을 하고 노루목 집으로 돌아온 스물다섯 살(1915) 때부터 갈수록 깊은 입정삼매에 빠져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완전히 폐인으로 보였다.
처화處化(소태산 대종사의 자) 그 사람 모습 좀 보게나. 머리에는 참새 떼가 집을 지었지. 얼굴은 세수 한지가 몇 년이나 된 것 같고, 온몸에는 부스럼 덩어리인데 하루에도 고름이 한 되씩은 흘러나온다네. 문둥이 중에서도 상 문둥이가 아니고 무언가. 끼니도 제대로 못 잇고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비만 오면 방에는 배를 띄운다네. 전생의 죄업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영산에서 산길로 와탄천臥灘川을 따라 1㎞쯤 가면 도로변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는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길룡리나 장산리, 천정리 등 인근 사람들이 와탄천을 건너 법성포로 내왕하는 선진포 나루다.
이 나루에서는 사람이 타고 다니는 나룻배 뿐 만이 아니라 일본인 지주들이 소작료로 쌀을 거두어들여 법성포를 통해 군산이나 목포로 운반할 때 이곳을 이용하는 큰 배가 드나드는 포구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노루목 집에서 적공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법성포 장터에 가기위하여 선진포 나루터까지 왔다. 나루터 가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소태산 대종사는 이 느티나무 아래 한쪽에서 잠시 땀을 식히려 섰다가 그대로 입정삼매에 빠져들고 말았다. 법성포 장터를 가던 사람들은 소태산 대종사가 보이지 않자 집으로 돌아간 줄 알고 그들끼리 법성장으로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장을 보러 간 사람들은 장에서 볼일을 다 보고 다시 선진포 나루터로 돌아와 보니 집으로 간줄 알았던 소태산 대종사가 느티나무 한쪽 아래에서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보게, 자네 처화處化(대종사의 자) 아닌가? 여기서 무얼하고 있나?
소태산 대종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인지 송장인지도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흔들었다.
이 사람아, 정신 좀 차리게. 이게 무슨 꼴인가?
몇 번을 되풀이하여 흔들고 난 후에야 소태산 대종사는 감겼던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응, 여기가 어딘가? 지금이 어느 때여?
어딘 어디여, 선진포지. 지금 곧 해가 넘어갈 무렵이네.
그래? 내가 여기에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이 사람아, 그건 우리가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자네가 우리에게 되물어? 정신을 어디다 보냈어?
글쎄,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
정신 똑똑히 차리고 잘 생각해 봐.
한참동안 사람들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소태산 대종사는 그제 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하, 바로 그랬구나. 내가 오늘 아침에 법성포 장터에 간다고 여기까지 와서는 잠시 땀을 식히러 서서 하늘에 무심히 떠가는 구름을 쳐다본 기억 밖에는 없는데, 그렇다면 하루 종일 여기서 이렇게 서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리고 다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꾼들이 이를 보고 집에 전해 주어 소태산 대종사를 데리고 왔다.
소태산 대종사의 부인 양하운은 가사에 대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큰 뜻을 짐작한 양하운은 일호의 원망도 없이 가사를 꾸려갔다.
한편 소태산 대종사는 노루목에서 이원화의 시봉을 받으며 병고가 깊어지면서 차츰 거동마저 활발치 못한 가운데 입정돈망入定頓忘에 들어 구도의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양하운은 소태산 대종사를 위해 후미진 산골짜기 큰골 정자나무 기도터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사방팔방으로 절을 하며 기도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천하 만물 다스리는 귀인 되기를 비나이다. 복이 무쇠방석으로 되기를 점지해 주소서. 우리 처화 양반 소원 풀어 주시고 병 나아 주기를 비옵고 비나이다.”
양하운은 소태산 대종사의 병고가 하루 빨리 회복되기를 3년간 지성으로 기도하였다.
노루목 초가에서 면벽面壁하고 입정해 있는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하던 이원화는 안타까워 물었다.
“어쩔라고 그라요, 어쩔라고 그라요? 원님 되고 싶어 그라요?”
“원님이 대수여. 제갈공명 같은 선생이 되야제.”
소태산 대종사는 이원화에게 당부하였다.
“조석朝夕으로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축원을 올려주소.”
이후로 이원화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배가 고프나 부르나 으레 아침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노루목 샘터 바위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사방팔방으로 절을 하고 천지신명께 축원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부디 처사양반 둘러싼 사마잡귀 다 물리쳐 버리고 병 낫게 해주소서.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우리 처사양반 발복發福하여 영광고을 원님 되게 하소서.”
이원화가 기도 올리는 것을 본 소태산 대종사가 물었다.
나를 위해서 기도 올려주니 참 고맙기는 한데 왜 하필이면 영광고을 원님 되라고 비는가?
영광고을 원님이면 이 세상에서 매우 높은 어른인 것 같애서요.
고을 원님이 높기야 하지. 그러나 이왕 나를 위해 기도를 올리려면, 이제부터는 신묘생辛卯生 박처화朴處化 세계 만국만민을 다 구제해 주는 만국양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려주게.
이원화는 이후부터 ‘처화 어른 만국양반 되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올리었다.
3. 병진년에 큰 깨달음을 이루다 병진대각성丙辰大覺成
1916년丙辰年 이른 봄, 대종사는 정신이 문득 쇄락灑落하여지며 영기靈氣의 움직임을 느꼈다. 하늘은 청명淸明하고 별이 반짝이는 가운데 맑은 공기를 호흡하니 전에 없던 생각이 차례로 떠올랐다.
대종사는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주역周易》의 글귀가 환히 해석되고 모든 의심들이 한 생각을 넘지 아니했다.
그때 심경이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 만상자연명萬象自然明’이었고, 깨달음을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根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生滅 없는 도道와 인과보응因果報應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였다.
1916년丙辰年 4월 28일(음 3.26) 새벽, 소태산 대종사는 노루목 어두운 방안에 그날도 앉아 있다가 정신이 문득 쇄락해짐을 느꼈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분이며 이상한 영기靈氣의 움직임을 느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상히 여기고 방문을 나와 살펴보니 하늘은 청명하고 별은 유난히 반짝이었다. 맑은 공기를 깊이 호흡하며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다 ‘나의 지내온 바가 모두 고생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고생을 면하기로 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며 전에 하지 않던 생각을 차례로 하였다.
날이 밝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먼저 머리를 다듬을 빗이며 손톱을 자를 가위 등 청결기구를 찾았다. 시봉하던 이원화는 소태산 대종사의 의외의 행동에 한편은 놀라고 한편 기뻐하며, 그 동작을 주시하였다. 이때가 소태산 대종사 마침내 정定에서 나오는 첫 걸음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였다.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길룡리 이웃인 구수미장에 가다 잠시 집 옆 노루목 고개 바위에 앉아 동학의 《동경대전》을 가지고 서로 담론하였다.
그 말 가운데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吾有靈符基名仙藥(내게 신령스런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기형태극 우형궁궁基形太極又形弓弓(그 모양은 태극이며 또 2개의 활을 합쳐 놓은 모양이다).’ 이라는 구절을 듣고, 소태산 대종사는 그 뜻이 해석되었다. 스스로 해석됨이 대단히 신기하였다.
조금 뒤 유학자 두 사람이 지나가다가 노루목바위에 앉아 쉬면서 《주역周易》의 건위천乾爲天 중 한 구절을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였다.
‘대인大人(큰 사람)은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하고
여일월합기명與日月合其明(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하고
여사시합기서與四時合其序(사시와 더불어 그 순서를 합하고)하고
여귀신합기길흉與鬼神合其吉凶(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한다.)이라.’
소태산 대종사는 이 구절을 듣고 이 글 또한 그 뜻이 환히 해석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스스로 이상히 여기어 ‘이것이 마음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지금까지 일구월심 안타깝게 알고자 했던 의심들을 차례대로 연마해 본즉 모두 한 생각을 넘지 아니했다.
이렇게 마음 밝아지는 것이 마치 새벽에 날이 밝으매 만상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때의 심경을 소태산 대종사는 한 편의 시로써,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 만상자연명萬象自然明
맑은 바람 불고 둥근 달 떠오르니 삼라만상이 자연히 밝아지도다.’ 라고 표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마음이 밝아져 깨달은大覺 진리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구원겁래의 서원으로 20여 년 구도 끝에 일원一圓의 진리를 깨달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20여년의 구도 끝에 깨달음大覺을 얻은 기쁨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리하여 땔나무를 하는 사람과 소 먹이를 베는 아이의 노래 소리도 자신의 깨달음을 찬양하는 것 같았다. 또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래 소리도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일심정력 드려대어 석 고르게 잡아서 방 고르게 잘 심세.’ 하며 노래하는 소리가 그대로 도를 아는 말 같아서 그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또한 그해 겨울 돛드레미帆縣洞에 있을 때에 ‘생사고락 그 이치며 우주만물 그 이치를 억만 사람 많은 중에 내가 어찌 알았는가?’ 하고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흥이 나서 하룻밤을 흥타령으로 앉아 세웠다.
이른 새벽 눈은 한 자나 쌓였는데, 굽 나막신을 신은 채 뒷산에 올라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어찌된 일인지 신발에 눈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소태산 대종사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 탄식하고, 깨달음을 얻었으되 말할 곳이 없어서 탄식하였다. 그 심경을 〈탄식가嘆息歌〉로 노래했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는 자신의 깨달음을 경축하고, 또 일체생령을 경축하며 그 심경을 〈경축가慶祝歌〉로 노래했다.
4. 부처님에게 연원을 정하다 불타연원정佛陀淵源定
대종사는 자력自力으로 구하는 중 사은四恩의 도움으로 깨달음大覺을 얻은 후 종교의 여러 경전經典을 열람閱覽하고 “근본적 진리를 밝히기로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며 석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聖人들 중의 성인이다.”며, “발심發心한 동기動機와 도道 얻은 경로經路를 돌아본다면 은연 중 석가모니불의 행적行蹟과 말씀에 부합符合되는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며, 장차 회상을 열 때 불법으로 주체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會上을 이 세상世上에 건설하리라.”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1916년 깨달음大覺을 얻은 후 그 과정을 생각하여 보니 순서를 알지 못하겠으나 강연이 말을 하자면 자력을 구하는 중 사은四恩의 도움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과거 모든 종교의 중요 경전을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스스로 의심하고, 스스로 닦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바른 공부길의 순서를 알기가 참 어렵구나. 동양 도덕에는 유․불․선의 경전과 근래에 몇 가지 신흥종교의 학설이 있고, 서양에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하니, 그 교리의 강령을 한 번 참고하여 내가 깨친 바와 대조하여 보리라.’
소태산 대종사는 의형 김광선에게 부탁하여 먼저 인근에 구하기가 용이한 유서儒書인 《소학小學》 《논어論語》 《중용中庸》 《대학大學》 《맹자孟子》등 사서四書를 구해 대략 훑어보았다. 그리고 동학과 선도를 신앙하는 친지들을 통하여 동학東學의《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 선서仙書인 《음부경陰府經》 《옥추경玉樞經》, 기독교 성경인 《신약新約》 《구약舊約》을 구해 대략 열람한 뒤 탄식하였다.
“나의 아는 바는 옛 어른들이 이미 먼저 간파하였도다!”
그러나 그 중의 어느 하나에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아니하며 생각하였다.
‘모든 경전의 의지義旨가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없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 시대에 적부적適不適이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사월초파일 전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느 절로 갔다. 처음 가보는 절이었으나 산수경치며 절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옛 집을 찾아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절 구경을 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태산 대종사를 보더니 큰 절을 올리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래세계의 주세불主世佛께서 어찌 이제야 오십니까. 제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인 어른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의 주세불께서 천만방편으로 천하 만민을 널리 제도하려면 이 경전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인이 보여준 경전은 《금강경金剛經》이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 경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 적은 없으나 보면 알 것도 같습니다.”
“소중히 간직하시고 잘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늙은이는 이 책을 전해드리기 위해 이처럼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끝났으니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소태산 대종사는 예사 꿈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꿈에서 본 절의 모습과 주변의 산수경치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불갑사佛甲寺란 절과 흡사하다고 대답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불갑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재철一山李載喆이 찾아오자 그를 불갑사로 보내어 《금강경》을 구해오게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구해온 금강경을 보고 “석가모니불은 성인聖人들 중의 성인이다.”고 하였다
그 후 불교의 《선요》 《불교대전》 《팔상록八相錄》 등의 관계서적을 보신 후 말하였다.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을 주체 삼고자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였다.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 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나니라.”
정산종사께 한 제자가 여쭈었다.
“대종사님은 어찌하여 부처님께 연원을 대셨습니까? 수운, 증산선생은 연원이 없는데요.”
“수운선생이나 증산선생은 그냥 일어난 분이요, 대종사님은 불법을 주체로 회상을 펴고 교화하시려니 그러신 것이다.”
5. 세상을 향하여 첫 말씀 토하다 향세초설토向世初說吐
대종사는 1916년丙辰年 깨달음을 얻은 후 밖으로 시국時局을 살펴보고, 정신도덕 부활復活이 시급함을 느끼어 ‘물질物質이 개벽開闢되니 정신精神을 개벽하자.’는 표어標語를 제창提唱하고, 돛드레미帆懸洞 이씨 제각李氏祭閣에 머무르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시국時局에 대한 감상感想과 그에 따른 대책으로 ‘현 사회를 본 첫 감상’을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要法, 강자强者와 약자弱者의 진화상 요법進化上要法, 지도인指導人으로 준비할 요법要法의 법어法語를 설하였다.
영광 묘량면 영당에 사는 전주 이씨들은 사는 곳과 선산과 너무 멀어 선산 초입인 돛드레미帆懸洞에 제청祭廳을 마련하고 장사지낼 때 이를 이용하였다. 김광선은 돛드레미에서 전주 이씨의 제각 옆에 살며 그들의 선산과 제각을 관리하며 근동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노루목 집은 몇 해 동안 개초蓋草를 하지 않아 빗물이 새는 등 폐가가 되어 더 이상 머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광선은 소태산 대종사가 개달음을 얻은 후 거처할 곳이 적당하지 않자 이씨 제각李氏祭閣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자 근방의 사람들이 소태산 대종사가 머무는 이씨 제각으로 모여 들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한 후 밖으로 시국을 살펴보고, 정신도덕의 부활이 시급함을 느끼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씨 제각에 머무르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대책으로 ‘현 사회를 본 첫 감상’을 제 몸을 닦으며 가정을 바루고 나아가 사회와 인류 세계를 다스리는 요법(修身齊家治國平天下要法)인 수신의 요법 4개 조항, 제가의 요법 5개 조항, 강자와 약자의 진화상 요법 3개 조항, 지도인으로 준비할 요법 4개 조항의 법어를 설했다.
수신의 요법은,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고, 수양 연구 취사를 놓지 아니하여야 새 세상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제가의 요법은 실업과 근검저축, 교육과 의견교환, 도덕과 정치복종, 희망과 방법 참조를 주의하여야 새 가정 새 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요,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은 강자는 자리이타로 약자를 진화시키며,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강약이 서로 진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상극 없는 새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이요,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은 지도 받는 자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신용을 잃지 말며, 사리를 취하지 말고, 지행을 대조하여야 제생의세濟生醫世의 경륜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