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의 제29대 왕(재위 654-661) 신라 중대(中代)의 첫왕.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왕자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로 진덕여왕이 죽은뒤 신라왕실에 성골(聖骨)이 다하여 진골(眞骨)의 몸으로 즉위하여 이 후는 진골이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즉위전에 김유신(金庾信)과 같이 선덕. 진덕의 두여왕을 보필하여 반도 통일의 대업을 도모하고 특히 당나라에 대하여서는 군사를 청하여 삼국통일(三國統一)을 꾀하였다 왕은 즉위하자 원년(654)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히 살피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60여조를 수정하게 하였으며 당으로 부터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 되었다. 660년(무열왕 7)에는 당나라가 백제 정벌에 나서자 왕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으로써 응원케 했다 661년(무열왕 8) 5월에는 당이 고구려 정벌의 대군을 발하였으나 왕은 반도통일의 대업을 보지못하고 죽었다. <표준영정 제 12호> 1975년 김기창이 문화재관리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영정으로 경주 통일전에 소장되어 있다. 김춘추는 미남이고 능변(能辨)이라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당나라에 가서도 그의 인품과 수완으로 외교의 성공을 보았다. 안산김씨는 문헌상 신라 태종무열왕 직계후손
김춘추(金春秋)무열왕(武烈王)계보(係譜)
신라 무열왕릉 안내도 무열왕릉 입구
무열왕릉 비각 무열왕릉
무열왕릉 비
이름은 춘추(春秋)요 수(壽)는 59세였다. 이찬(伊찬??) 용춘(龍春)의 아들이요 진지왕이 손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 金氏요 진평왕의 따님이다. 3년에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7년 3월에 당나라에서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수륙군 13만명을 이끌고 백제를 징벌하거늘 임금께서 유신(庾信)등으로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에 남천장에 당도했다. 8년에 당나라에서 또 소정방을 보내어 수륙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징벌하였다. 경주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 흥국문(興國門) 현판 : 나라를 일으키라는 뜻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 : 삼국통일기념비 왼쪽은 태종 무열왕의 사적비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서원문(誓願門)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 태종 무열왕의 영정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고 중간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영정이 유리 액자에 보관되어 있어 유리의 반사 빛이 생긴다.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17점의 기록화 전시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보인다. 태종 무열왕이 661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법민은 왕위를 이어받아 신라 제 30대 문무왕이 된다. 654년에 이미 병부령이 되었고, 660년에는 김유신 장군과 함께 신라군을 지휘하여 백제 정벌을 한 경험이 있는 태자 법민이 36세에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은 당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부활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된 663년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며, 이후에도 계속된 고구려와의 교전으로 인해 피곤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664년에 김유신 장군이 나이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자 극구 만류한 것은 그의 어려운 처지를 짐작하게 한다. 장군은 중풍으로 인해 경주에 머물었으며, 문무왕은 주 병력이 당나라 군사와 평양을 침공할 때 지금의 서울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평양의 부근에도 가지 않은 고구려 정복을 신라에 의한 통일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민족사(民族史)에 대한 명확한 관점(觀點) 없이는 답할 수 없는 질문 이다. 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니 우측에 비석이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흘려서 쓴 한자 이기에 읽기 힘들었지만 <태종 무열왕 사적비>, <문무대왕 사적비>, <태대각간 김유신 사적비>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의 칭호를 받았는데,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다소 의아 스럽다. 좀 더 올라가면 통일에 기여한 세 명의 영정이 걸려있는 통일전이 있다. 여기까지 오른 목적은 단 하나, 문무대왕의 영정을 보기 위해서이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오랫동안 그 인물에 대해 연구한다고 한다. 치솟은 눈썹, 날카로운 눈빛, 반듯한 코, 굳게 닫힌 입술, 당당한 풍채 상상했던 모습처럼 멋지다. 한편 태종 무열왕의 영정은 문무대왕보다 부드러운 인상이다. 김유신, 진주, 천존 장군 등과 함께 10만 군사를 이끌고 이천으로 갔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옥천으로 내려온다. 이 때 흠순과 품일 장군은 정예군 5만명을 경주에서 곧바로 옥천으로 이끌고 온다. 옥천에서 김유신 장군은 흠순, 품일 장군과 함께 정예군 5만으로 사비성을 침공하고, 무열왕은 행군으로 지친 10만 군사를 금돌성으로 옮겨 진을 친다. 이었을 것이다. 무열왕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에 대비해서 10만 군사로 강력한 수비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이 서울에 머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김유신 장군은 경주에 머물면서 왜국에 사신을 보낸다. 왜국은 668년 9월 26일 한 배 가득한 선물을 보내어 오고, 사흘 후에는 새로 건조된 배 한 척을 또 선물로 보내온다. 그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고구려 침공으로 인해 느슨해진 신라의 후방으로 왜국이 침공해 오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왜국은 왜국대로 고구려를 정복한 신라와 당나라군이 침공해 올 것을 염려했던 것은 물론이다. 낭산에 사천왕사를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정식으로 절을 짓지 못하고 비단으로 절의 경계 를 둘러친 후, 볏짚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가 승려와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니 침입하던 당나라의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자락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사천왕사 터에는 건물 초석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뿐이다. 선덕여왕의 능이 있는 낭산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동해남부선 기차가 휑하니 지나간다. 동해남부선은 일본 강점기 때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사천왕사를 두 동강내면서 가로 질러가고 있다. 그 때문일까? 머리가 잘려진 귀부(龜趺)는 처절했던 과거의 아픔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670년은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한다고 알려온 해이다. 밟는다. 큰 여동생인 보희 대신 작은 여동생인 문희가 옷고름을 달아 주면서 춘추와 문희는 관계를 맺게 되고 문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게 된다. 한 날 김유신은 가문에 먹칠을 한 문희를 태워죽이겠다는 연출을 하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는 남산에서 이를 보고 춘추에게 구하라고 하여 둘은 혼인하게 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이므로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인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춘추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는 원래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춘추와 문희의 결혼식은 현재의 포석정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정원이 바로 안압지로 알려진 월지(月池)이며 태자궁은 임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소성왕 원년 (799) 기록을 보면 우두주(牛頭州) 도독이 사자를 보내 아룁기를 “소 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세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峴城川)으로부터 오식양 (烏食壤)으로 향하여 갔습니다”라고 했다. 이 동물은 코끼리일 것이데, 아마도 월지에 있었던 왕실 동물원 에서 탈출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동해남부선은 임해전지를 역시 가로 질러 가고 있다. 임해전지는 현재 울타리가 쳐진 것보다 훨씬 넓었던 것이다. 말을 탄 기병은 평지에서는 보병의 8배, 경사진 곳에서는 4배의 전투력을 가진다고 하니, 당나라 군사의 전투력은 38만의 보병에 맞먹는 것이었다. 마침내 당나라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맞서는 신라군은 전략적인 위치에 진을 치고는 있었지만 숫자가 3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결과 신라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3만 마리가 넘는 당군의 말을 빼앗았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당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재목이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자 곧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았는데 60보를 나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신도 역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 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로써 위협하였으나 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 육진병법이란 병사를 여섯 집단으로 나누어 지휘부를 꽃잎처럼 둘러싸는 형태로 진을 지는데, 활, 긴 창, 칼, 도끼로 무장된 전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전략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략, 그리고 당나라의 군사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신라의 해군력이 전쟁의 승리를 약속했던 것이다. 잇도록 하고,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하고,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내라고 했다. 들이 시선을 끄는데, 12지신상은 3개가 유실되어 있다. 또한 주변에는 복원공사 후 남은 석재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공사가 적절하게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쥐 상의 표현 양식은 다른 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해 남부선은 또 다시 능지탑 앞을 스쳐 지나고 있다.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일본의 침입을 막겠다는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유린된 현장에서 나는 슬픔과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유난히 많이 넘나드는 대왕암을 해변에서 쳐다보고 있는데, 파도소리를 깨고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멀리서 무당들이 굿을 하고 있다. 동해의 신에게 호소하는 것일까 아니면 대왕암에 있는 문무왕에게 호소 하는 것일까? 문무왕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 신문왕은 문무왕이 끝내지 못하고 간 절을 완공하고, 그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했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감은사에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건물 하부에 지하층이 만들어져 있다. 전투를 대 승리로 이끌어 낸 문무왕은 대답은 자명한 것이라고 동해의 바다 한가운데서 가만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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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