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7406] 노자 도덕경 4장-和光同塵[화광동진]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解其紛,和其光,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노자 도덕경 제4장 비어 있기에 가득 찬 역설 해설
道沖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영)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
挫其銳,解其紛,(좌기예, 해기분)
和其光,同其塵。(화기광, 동기진)
湛兮似或存。(잠혜사혹존)
吾不知誰之子,(오부지수지자)
象帝之先。(상제지선)
道 도 (길)沖 충 (빌)而 이 (그리고)用 용 (쓸)之 지 (의)
或 혹 (혹)不 불 (아니)盈 영 (찰)淵 연 (깊을)兮 혜 (어조사)
似 사 (비슷할)萬 만 (만)물 물 (것)宗 종 (근본)
挫 좌 (꺾을)其 기 (그)銳 예 (예리할)
解 해 (풀)紛 분 (분잡할)
和 화 (화할)光 광 (빛)同 동 (같을)塵 진 (티끌)
湛 담 (맑을)存 존 (있을)
吾 오 (나)知 지 (알)誰 수 (누구)子 자 (아들)
象 상 (상)帝 제 (제왕)先 선 (먼저)
번역
도는 비어 있으나 아무리 사용해도 늘 가득 차 있고
넘치지 않도록 해 준다. 깊고 넓어서 만물의 근본인 것 같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복잡한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에도 뒤섞이건만 맑고
고요함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보다도 먼저 있었던 것 같다.
노자 『도덕경』 4장은 아주 짧지만,
노자의 도를 가장 깊고도 맑게 보여 주는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장은
도를 어떤 “고정된 실체”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만물의 근원 같으나 드러나지 않으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빛을 누그러뜨려 먼지와 함께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참된 근원은 앞에 나서지 않는다.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품고,
높이 빛나기보다 낮게 섞이면서
오히려 모든 존재를 살린다.
1. 순우리말 옮김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는 빈 듯하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깊고 그윽하여
만물의 큰 뿌리 같다.
날 선 것은 무디게 하고
헝클어진 것은 풀어 주며
눈부신 것은 누그러뜨리고
세상 먼지와 함께 섞인다.
맑고 잠잠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아마도 하늘과 임금보다 먼저 있었으리라.
2. 풀이
이 장에서 노자는 도를 네 가지 결로 보여 줍니다.
첫째, 도는 비어 있다.
그런데 그 비어 있음은 결핍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함없이 쓰이는 자리입니다.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고정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도는 깊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훨씬 깊은 자리,
만물이 거기서 나오는 듯한 근원입니다.
하지만 그 근원은 뻣뻣한 원인이 아니라
깊고 고요한 바탕입니다.
셋째, 도는 날카로움을 죽이고, 얽힘을 풀고,
눈부심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하나 된다.
즉 도는 과장과 극단과 분열과 과시를 싫어합니다.
높이 빛나는 것보다
서로 부딪히지 않게 하고,
세상의 낮고 작은 것들과 섞이며,
삶을 부드럽게 만드는 힘입니다.
넷째, 도는 잡히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앞에 있고,
모든 것을 떠받칩니다.
3. 관계 존재론 (관계가 존재를 낳는다) 관점에서 풀이
이 장은 관계 존재론의 존재 방식을 거의 그대로 보여 줍니다.
3-1. 도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빈 자리
“道沖而用之 或不盈”
도는 비어 있는 듯하지만 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관계 존재론의 말로 옮기면
존재의 근원은 꽉 찬 덩어리가 아니라
관계들이 맺어지고 풀릴 수 있게 하는 열린 장이다.
즉 도는
어떤 단단한 물건이 아니라
관계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여백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고집하지 않고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꽉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지만,
비어 있으면 만물이 깃듭니다.
이 점에서
관계 존재론의 핵심 명제 하나를 이렇게 다시 적을 수 있습니다.
존재는 채워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비어 있음, 열려 있음, 마주할 수 있음에서 시작한다.
3-2. 만물의 뿌리는 “가장 위”가 아니라 “가장 깊은 곳”
“淵兮 似萬物之宗”
깊고 그윽하여 만물의 큰 뿌리 같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근원을
위에 있는 것, 강한 것, 눈에 띄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근원을 깊이에서 찾습니다.
관계 존재론에서도
진짜 근원은
어느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기대고 있는 관계의 깊은 바탕입니다.
즉 근원은 “가장 큰 것”이 아니라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4. 교육 관점에서 풀이
4-1. 비어 있음이 배움의 시작이다
오늘의 학교는
아이들의 머리를 자꾸 채우려 합니다.
지식, 정보, 정답, 스펙, 경쟁심, 목표로
끊임없이 채웁니다.
하지만 노자는
참된 근원을 “비어 있음”에서 봅니다.
배움은 더 많이 채우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마음의 소란을 비우고,
비교의 시간을 비우고,
정답 강박을 비우는 데서 시작한다.
비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들어오고
새로운 감각이 살아납니다.
4-2. 날카로움을 죽인다는 것
“挫其銳”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한다는 말은
아이들의 기운을 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를 찌르고 베는 경쟁의 날을 무디게 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학교는 너무 날카롭습니다.
점수는 날카롭고
평가는 날카롭고
비교는 날카롭고
속도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은 늘 베입니다.
날 선 비교 대신
부드러운 관계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앞서느냐 뒤처지느냐가 아니라
각자의 결이 살아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4-3. 얽힌 것을 푼다
“解其紛”
헝클어진 것을 풀어 준다는 말은
바로 지금 교육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이들은
성적, 진로, 부모 기대, 또래 비교, 자기 혐오, 미래 불안으로
이미 너무 얽혀 있습니다.
그 얽힘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학교가 아니라
하나씩 풀어 주는 학교입니다.
배움은
더 얽히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매듭이 조금씩 풀리는 일이어야 합니다.
5. 『골방 우주론』 관점에서 풀이
이 장은 거의 골방의 존재 방식을 말합니다.
5-1. 골방은 빈 듯하나 다하지 않는 곳
골방은 작고 비어 보입니다.
화려한 것도 없고
큰 권력도 없고
세상의 중심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비어 있음 때문에
골방은 다하지 않는 우주가 됩니다.
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작은 창, 먼지 한 톨, 밤의 적막.
이 작은 것들이
오히려 거대한 세계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골방은
“없는 곳”이 아니라
비어 있어서 더 많은 것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5-2.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
“和其光 同其塵”
이 구절은 골방 우주론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처럼 읽힙니다.
빛을 부드럽게 하고
먼지와 함께한다.
이것은
눈부시게 앞에 나서지 않고
낮고 작은 것들과 한데 섞이는 삶입니다.
골방은
대단한 빛의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조금 눅여진 공간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발 물러난 자리.
그 대신 먼지와 함께 있고
낡은 책등과 함께 있고
밤공기와 함께 있고
자기 그림자와도 함께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가 가장 깊어지는 자리입니다.
5-3. 있는 듯 없는 듯
골방도 그렇습니다.
세상 눈에는 별것 아닌 방.
있어도 없는 듯한 자리.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사유가 깊어지고
시가 태어나고
우주가 조용히 열립니다.
노자의 도처럼
골방도
크게 떠들지 않으나
만물을 품는 작은 근원입니다.
6. 현대인에게
노자 4장은 지금의 인간을 정면으로 비춥니다.
6-1. 현대인은 너무 꽉 차 있다
노자가 말한 도는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은 늘 꽉 차 있습니다.
정보로 꽉 차 있고
욕망으로 꽉 차 있고
자기주장으로 꽉 차 있고
성과 압박으로 꽉 차 있고
비교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꽉 차 있으니
받아들이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관계를 품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더 채우는 일이 아니라
비우는 일입니다.
6-2. 지금의 인간은 너무 날카롭다
현대인은
말도 날카롭고
판단도 날카롭고
시선도 날카롭고
자기 검열도 날카롭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남도 베고
자기 자신도 벱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라고.
이것은 둔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결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똑똑함보다
부드러움이 더 깊은 지혜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6-3. 지금의 인간은 너무 눈부심을 사랑한다
현대는 빛나는 것만 추앙합니다.
성공, 유명세, 드러남, 속도, 화제성, 성과.
그러나 노자는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화려함의 반대편으로 내려가
작고 낮은 것들과 함께 숨 쉬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전시품이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가 됩니다.
7. 한데 묶은 최종 풀이
도는 채워진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낳는 빈 자리다.
그것은 높이 군림하지 않고
깊이 스며든다.
그것은 날을 세우지 않고
상처를 줄이며,
얽힘을 더하지 않고
매듭을 풀고,
스스로 빛나기보다
먼지와 함께 섞인다.
그러므로 참된 존재는
앞에 나서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교육은 아이를 더 눈부시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얽힘을 풀고
비교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며
존재가 스스로 피어나게 하는 일이다.
현대인은 너무 꽉 차 있고
너무 날카롭고
너무 눈부심을 좇는다.
그래서 깊이를 잃었다.
다시 비어야 하고
다시 누그러져야 하며
다시 먼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
8. 짧은 문학적 메시지
도는
빈 그릇 같으나
마르지 않는다
깊은 샘 같아
만물의 뿌리 같다
날 선 마음을 눅이고
얽힌 삶을 풀고
눈부신 욕망을 누그러뜨려
낮은 먼지와 함께 있다
그래서
도는 크게 빛나지 않으나
오래 남는다
있는 듯 없는 듯
가장 먼저 있었고
가장 깊게 지금도 있다
[출처] 노자 도덕경 4장 새김|작성자 정낙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