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냄과 분냄' - 사단이 성도들에게 놓는 영적인 덫!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있는 미움, 불편함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 팔았습니다.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미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의분'을 내신 것입니다.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분과 성냄의 차이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만납니다.
마침 안식일이라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을 엿봅니다.
만일 환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송사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속내를 들킨 그들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선만 행하시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어찌하든 그들이 깨우쳐 죄에서 돌이키길 원하셨습니다.
때때로 의분을 내신 이유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화되어 죄가 버려질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에 악이 있으면
선한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안좋은 감정이 납니다.
남편은 음식을 짜게 먹고 아내는 싱겁게 먹는다고 합시다.
아내 편에서는 얼마든지 남편에게
“짜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 싱겁게 잡수세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무조건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게 옳습니다.
이처럼 함께 노력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윗사람을 존중해 주고
질서에 따라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에 따르기를 바라는 경우입니다.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감정이 있는 이상 진리로 변화될 수도 없으니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혈기나 분내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성냄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엘리사의 경우입니다.
그는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 권능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자녀가 없는 여인에게 잉태의 축복을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문둥병을 고치고 기도로 적군을 물리치는 등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었습니다.
또 수질이 좋지 않은 물에 소금을 넣어
그 물을 좋은 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는 드물게 병들어 죽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였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마을에서 몰려 나와
엘리사를 둘러싸고 조롱합니다.
그가 머리숱이 적고 외모가 볼품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왕하 2:23)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아이가 몰려와 조롱하는 통에
엘리사는 매우 곤혹스러웠습니다.
타일러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어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만둘 기미는 안보이고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히는지
아마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벧엘은 분열왕국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본거지입니다.
그 인근 지역의 아이들이라면 이러한 문화 속에서 마음조차 강퍅했을 것입니다.
길을 막고 서서 침을 뱉기도 하고
욕하며 심지어 돌멩이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엘리사가 아이들을 저주하였습니다.
그 때 근처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사납게 뛰쳐나와
순식간에 아이들을 물어뜯어 죽여버렸습니다.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비록 아이들의 심한 조롱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엘리사의 마음에 감정이라는 악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은 일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깨우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손을 떼는 순간 튕겨져 오릅니다.
화를 눌러 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눌러 참는다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화가 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
는 글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을 인이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화가 날 때에는 시간을 갖고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이런 식으로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하여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을 당할 일이 생기지 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집니다.
예전에는 열 번 화내던 것이 아홉 번, 여덟 번, 점점 줄어듭니다.
나중에는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 19:11)
영어로 ‘화, 성냄’(anger)은
‘위험’(danger)과 철자 하나 차이입니다.
성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니 참는 자가 이기는 자이며 승리하는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잘 참다가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는 곧잘 화를 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게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 말 한마디,
생각까지 아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보고 계시며
우리 안에 성전 삼고 계시므로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활해야 합니다.
어느 부부가 말다툼을 하다가
화가 난 남편이 아내에게 그만 떠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내는 그 후 죽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지 못해 성을 냈던 남편이나 아내 모두 얼마나 고통당했겠습니까.
이처럼 성냄은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므로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