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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
나도 여호수아
박 승 일
1.
“아이고 이거 큰일났구나.”
2017년 8월 31일 신문을 보시던 아빠의 걱정입니다.
조선일보 A16면에 난 기사를 보시고 한 걱정.
<미국 휴스턴 1300mm 물폭탄이 쏟아졌는데 그 물의 양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15일간 떨어지는 물의 양과 맞먹는 1조 갤런(약 3조 7900억L)이며 이로 인한 수
몰면적은 1400㎢로 이것은 시카고 시와 뉴욕 시의 면적을 합한 넓이>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2017년 9월 1일도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참 무서운 일이야.”
하시었다.
조선일보 A 20면의 기사.
<뉴욕 타임즈는 8월 30일 (현지시각) 미국 본토에 상륙한 단일열대폭풍 중 가장 많은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휴스톤을 물에 잠기게 한 허리케인 ‘하비’가 텍사스 주를 떠났다 하며 이렇게 보도하였다. 미국립허리케인센터는 전날 육지를 벗어나 바다로 나갔던 ‘하비’가 30일 오전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돼 루이지애나 주에 재상륙했다. 루이지애나 주 포트아 지역에는 하루 동안에 660mm의 물폭탄이 쏟아졌다. USA 투데이는 민간기상분석업체 ‘애큐웨더’를 인용해 ‘하비’ 관련 피해액이 1600억 달러(18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 이는 2005년 루이애지나 주 뉴우올린스를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2012년 미동부를 강타한 ‘샌디’의 피해를 합친 규모
와 맞먹는다. 피해 항만이 폐쇄되면서 미국산 액화석유가스(LPG)수출이 전면 중단, 미국산 액화석유가스의 주 수입국인 한·중·일 지역의 가스 가격도 급등할 것이 우려된다.>
“아니 요새 미국이 왜 이러냐?”
2017년 9월 6일 수요일,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의 탄식.
조선일보 A 16면의 기사.
<‘하비’ 뺨치는 어마어마한 허리케인 ‘어마’(1rma)가 최고시속 249㎞ 강풍 예상. 미국 플로리다 주 비상사태 선포. 이번 주말 영향권 들어 ‘어마’가 카리브해에서 미 동남부로 북서진하고 있어 미 재난당국이 긴장. AP통신에 의하면 ‘어마’는 최고풍
속이 시속 220㎞에 달하는 4등급(최고는 5등급). ‘어마’ 상륙이 예상되는 플로리다 주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비상사태 선언.>
나는 아버지께서 신문을 보시며 걱정하시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
내 이름은 오여호수아.
내 아버지는 교회 목사님.
“나는 네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라고 그 이름을 따서 ‘오여호수아’로 지었다. 부디 너도 여호수아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어다오.”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수아서’를 24번이나 읽었어요.
3.
학교에서 내 준 숙제를 하게 되었는데 세계에 있는 사막들을 조사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책꽂이에서 TIME LIFE에서 낸 <사막>을 꺼내어 참고를 하였어요. 거기엔 여러 사막에 대한 기록이 있었어요.
1. 사하라사막
북아프리카를 동서로 약 5200㎞에 걸쳐 북아프리카의 횡폭으로 하나 가득 펼쳐져 있다. 넓이가 900만 ㎢···· 미국의 50개주 넓이를 합친 것보다 더 넓다. 산맥도 있고 해발 3500m 되는 눈 덮힌 산도 있고 10분지 1이 모래 언덕. 연간 강우량 25mm이하.
2. 오스트레일리아 사막
340㎢
연간 강우량 127mm.
3. 아라비아 사막
260만 ㎢
아라비아 반도의 3분의 1.
4. 터어키스탄 사막
190만 ㎢
BC1000~2000년 무렵에 있었던 촌락의 유적이 수면 밑 3m 아래에 있다. 유사 이전의 건조시대에 카스피 해안에 형성되었던 촌락 흔적이 남아 있다.
5. 북아메리카 사막
130만 ㎢
미국 서남부에서 멕시코 북서부에 걸쳐 있다.
ㄱ. 그네이토 베이슨
ㄴ. 모하비 베이슨
ㄷ. 소노라 베이슨
ㄹ. 치와와 베이슨
6. 모하비 사막
미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사막.
7. 파타고니아 사막
67만 ㎢
이곳에서 6400㎢ 떨어진 소노라 사막과 공통된 식물이 많고 서로 닮았다.
8. 타아르 사막.
60만 ㎢
인도 서부에서 파티스탄에 걸쳐 인더스강 동쪽에 있고 ‘대인도 사막’이라고도 불린다.
9. 칼라하리 사막
57만 ㎢
남아프리카.
10. 이란 사막
39만 ㎢
세계 1위의 높이인 모래언덕(200m)
11. 아카타마 페루 사막.
36만 ㎢
연간 강수량 13mm
안개가 있어 동식물 약간이 생존.
그런데 사막의 토양 속엔
나트륨 염칼륨 염이 있다.
기타 무기 염모하비 사막엔 붕사, 석고가 채굴되고 있고 아타카마 페루 사막에선 질산 염류가 나온다. 사막에 있는 식물로는 주로 선인장이 있고 칼리포니아 반도에는 코끼리나무가 있다.
이라크 사막에는 1953년까지 180개소의 얕은 우물이 있다.
사막은 2억 3000만년 전부터 시작된 극소수의 사막뿐 아니라 그 밖의 대부분의 사막은 100만년에서 500년 전에 생겼다.
사하라 사막에는 7억㎘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고, 3억 9000만t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북아메리카 사막에는 ‘메스키트’라는 나무가 있는데, 지하로 30m 까지 곧은 뿌리가 내려간다고. 그 외에 ‘아이언우드’ ‘스모우크 트리’ ‘블루 버어드’라는 나무도 있다.
모하비 사막에 있는 ‘조슈아 나무’는 나무 나이가 수 백년, 나무 높이는 7.5m. 사막에서 볼 수 있는 그 밖의 나무로는 ‘아카시아’ ‘솔트 부시’ ‘세이지’가 있다.
“우와! 무슨 사막이 이렇게 많아? 그리고 그 넓이도 어마어마하게 넓네? 어디 그 넓이를 다 합해 봐야지.”
나는 사하라 사막에서 아카타마 페루 사막까지의 넓이를 더해 보았어요.
900만+340만+260만+190만+130만+67만+60만+57만+39만+36만=2049만 ㎢ “아니, 이렇게 넓어?!”
우리 나라 남북한 합친 넓이가 22만 ㎢밖에 안 되는데 거의 그 100배가 되는 땅이 사막이라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 지금 뭐하고 있노?”
언제 들어오셨는지 아버지께서 물으셨어요.
“숙제하고 있어요. 아버지, 이 지구상에 사막이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어요. 아, 글쎄 우라나라 넓이의 160배나 돼요.”
“오, 그래? 그렇게나 많다니 나도 놀랐는 걸? 어떤 잡지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나는구나. 세계 인구 77억명 중에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20억 명이 넘는다고. 만약 이 사막들만 농사 지을 수 있는 옥토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해 전 UN식량농업기구에서 영국 기사 죤 람세이를 사막에 파견하여 최신 우물파기 설비와 기술을 현지인을 권하여 6년간 270개의 깊은 우물을 마련해 주었다고 하는데 그게 그 많은 사막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니? 사막 총 넓이가 얼마라고 했니?”
“2049만 ㎢요.”
새벽 5시.
아버지가 새벽기도 인도하러 교회 가시자 나도 일어나 구약 성경 ‘여호수아서’를 또 펴서 읽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습관입니다.
새벽이 머리도 맑고 책읽기에 좋은 시간이어서 이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여호수아서 10장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12절에서 14절 말씀이 아주 신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
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는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기브온 사람에게 화가 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과 짜고 기브온을 치러 오자, 기브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동맹국인 이스라엘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는데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셨어요.
여호수아는 용기 백배, 신나게 싸웠어요. 이스라엘의 군사도 역시 용감하게 적을 치며 승승장구였어요.
그러자 예루살렘 왕, 헤브론 왕, 야르뭇 왕, 라기스 왕, 에글론 왕, 이 오개국의 연합군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을 치는데 도망치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아주 엄청 큰 우박 덩이를 쏟아 내리셨어요. 그래서 우박에 맞아 죽은 숫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더욱 많았어요. 아직 적군이 꽤 남아 있는데 해가 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 때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소리쳤어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그래서 그 적의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진멸하려고 하는데 해가 지려해서 이렇게 명령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한대로 해가 머물러 서고 달도 그쳤어요.
이러니 내가 이 대목을 읽으며 신이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얼마나 신났을까? 다섯 나라 연합군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참 통쾌했을거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참 부러웠습니다.
산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고운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습니다.
논에는 벼들이 익어 황금들판을 이루었습니다.
“아들, 나하고 삼촌이 사는 시골에 같이 가자.”
목요일. 개교기념일이라 마침 시간이 났습니다.
“네.”
나는 아버지의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맺습니다.
아버지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삼촌이 농사짓는 정선에 가십니다.
정선엔 아버지가 나중에 들어가 사시려고 사 둔 밭 7000㎡와 또 13000㎡의 산이 있습니다. 그것을 삼촌에게 맡겨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였는데, 봄에는 비료와 농약, 빌려 쓰는 농기계 삵 등등에 쓰라고 영농비를 주십니다. 또 생활 보조금조로 300만원-. 가을엔 삼촌이 농사지은 콩, 깨, 무, 당근, 가지, 고추를 받아 옵니다.
삼촌이 사시는 집 가까이에 내 나이 또래의 이 상태네 집이 있습니다. 학년도 같은 초등학교 5학년. 봄, 가을 1년에 두 번 갈 때마다 나는 내가 읽은 책과 약간의 학용품을 상태에게 주었습니다.
상태는 나에게 동네 여기 저기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어요.
상태네는 소를 길렀어요.
상태네 밭은 산비탈에 구불하고 좁은 밭이어서 기계로 갈 수 없어서 소의 멍에에 쟁기를 묶어 ‘이려 이려’하며 가는데 어른이 아닌데도 상태는 능수능란하게 자기 아버지와 함께 밭일을 하였는데 나도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려 이려 쩌저!”
하면 그 큰 덩치의 황소가 꼼짝 못하고 하라는대로 하는 게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상태야! 너네 황소, 참 순하다.”
“응. 하지만 이 고삐 힘이 더 커.”
“그게 무슨 말이니?”
“소 코에 이 고삐가 꿰어 있어서 꼼짝 못하는거야. 만약 내 말에 거역하면 내가 이 고삐를 잡아 당기지 그러면 코가 아파서 쩔쩔매지. 그러니 내가 하라는대로 안할 수 없지.”
“야, 그 고삐 대단하구나!”
“그러엄.”
“나도 할 수 있을까?”
“해볼래?”
“글쎄, 무서울 거 같애.”
“이 고삐만 꽉 쥐고 있으면 안심이야.”
“정말?”
“응.”
나는 상태의 손에서 고삐에 연결된 줄을 넘겨 받았으나 아무래도 겁이 나서 곧 돌려 주었습니다.
“오여호수아, 너 겁쟁이구나.”
상태가 한 ‘너 겁쟁이구나’라고 한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내자식이····· 고삐만 쥐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는데도····)
싶어서 다음에 가서는 용기를 내어 고삐를 잡고 소를 몰아 보았습니다. 다행히 황소는 상태에게처럼 순하게 따라 주었습니다.
(에이, 공연히 겁 먹고 그랬네?)
(고삐! 고삐라! 고삐 하나에 그 큰 황소가 고분고분 말을 듣다니!)
나는 정말 고삐의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빠! 바닷물로 수돗물을 만들어 부산 시민에게 공급해 주었대요. 두산중공업에서요.”
소년조선을 읽다가 내가 말하자.
“그래 나도 신문에서 읽어 보았다. 부산 시민들이 마셔도 괜찮을까 하고 의심을 하니까 그 수돗물을 가지고 미국에 있는 유명한 수질연구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아주 좋음’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 연구소 이름은 내가 지금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바닷물은 짜지요? 그럼 그 짠기만 빼버리면 되겠네요?”
“아니지, 바닷물 속엔 소금기 말고도 사람이 마시기엔 맞지 않는 불순물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런 것들을 다 걸러내야 한다던데.”
“그래요? 하지만 수돗물이 아닌 다른물은 에 그러니까 에에.”
“공장에서 쓸 공업용수나 농사 지을 농업용수를 말하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예, 맞아요. 그런 물은 소금기만 걸러내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 두산중공업사에 문의해 보면 자세히 알려 주겠지만-.”
“아버지, 미국에 물폭탄 쏟아 부은 태풍 ‘하비’와 ‘어마’ 말인데요. 그 엄청난 물! 그건 바닷물이 아니니까 소금기 빼지 않아도 공업용수나 농업용수로는 넉넉히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수돗물로는 쓰지 못해도-.”
“그글쎄. 아마도-.”
“아버지, 삼촌한테 갔을 때 옆집의 상태한테 배운 건데, 자기 몸뚱이의 열배도 넘을 황소를 상태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게 신기해서 물어 보았더니 ‘그건 이 고삐때문이야.’하며 고삐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었어요.”
“으음. 그렇지. 고삐의 역할이 크지. 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꼼짝 못하고 시키는대로 하는 걸 보고 ‘그 사람 아무개에게 고삐가 꿰였군.’하고 말하지.”
“그래서 말인데요. 그 태풍의 코에 고삐를 꿰어서 틀어 쥐고.”
“아니 뭐라고?”
“태풍의 고삐를 꽉 움켜 쥐고, 미국의 사람 사는 도시나 농토에 뿌릴 물폭탄을 2049㎢ 모든 사막으로 끌고 가서 거기다 쏟아 붓게 하여 그 사막들을 다 농사지을 수 있게 만들면 77억 명 중 배고파 고생하는 그 20억 명에게 걱정없이 먹여 살릴 수 있지 않겠어요?”
“음. 그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니? 참 거창하고 훌륭한 착상이다.”
“아버지 오늘 새벽 5시에, 아버지는 새벽기도회 인도하러 교회에 가신 후 제가 읽었는데 여호수아서 10장 12절에서 14절에 있는 말씀을 읽고 참 신나게 생각했어요.”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하고 말하고 해와 달이 그대로 된 내용?” “맞아요. 나도 ‘하비’나 ‘어마’ 그밖의 모든 태풍에게 ‘태풍아, 너희는 2049㎢ 권 세계의 사막에 너희 비를 쏟아 부어라!’ 할 수 있고, 내 말대로 되게 해 주셨으면 참 좋겠어요. 그 때 여호수아처럼-. 대상이 태양과 달에서 태풍으로 바뀌긴 했지만.”
“음. 네 이름이 오여호수아! 그러니까 충분히 그런 상상할만도 하군.” “아니면-.”
“아니면?”
“그 태풍의 코에 고삐를 꿰어 사막으로 끌고 가게 해 주시던가!”
“하하 우리 여호수아가 멋진 상상을 했네. 매우 생산적인 상상이야. 건설적이기도 하고-. 지구 위에서 누구도 굶는 사람이 없게 할 원대한 꿈! 정말 그 2049㎢의 사막을 옥토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도 나라와 나라 사이, 사회와 사회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가진자가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못 가진 자에게 나누어 주면 굶주리는 사람없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
“아, 그래요?”
“문제는 욕심이야. 성경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셨지.”
“아, 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 태양과 달을 머무르게 명령한 여호수아처럼 폭풍우에게 태풍에게 “태풍아! 너는 전 세계 모든 사막위에 쏟아져 비옥한 옥토가 되게 하라!” 하고 외쳐 보고 싶은, 그래서 내 말대로 되는 것을 보고 싶은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어요.
어쨌든 나도 여호수아, 오 자 성 하나가 더 붙어 오여호수아가 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그런 기적 일으킬 능력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 에세이
창조와 타락과 회복
김 철 교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을 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하나님을 닮은 이마고데이(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자유의지를 사탄의 유혹에 따르는 방향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한계였다. 인간의 DNA에 죄의 인자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때부터 그 후손인 인류의 무의식에 죄성이 쌓여가는,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생산되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앙망하며 살고자 해도 언뜻언뜻 죄에 이끌리어 가고 있는 것이다.
칼 융에 의하면, 무의식에는 집단무의식과 개인무의식이 있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의 시작부터의 경험이 쌓여 왔고, 개인무의식에는 개인의 탄생이후부터 경험이 쌓여 있다. 인간에게는 죄의 DNA가 있어 이러한 무의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의 DNA에 암 인자가 있으면 쉽게 암에 걸리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여 생활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DNA에 죄의 인자가 살아있어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에, 우리가 죄의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얼마 전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 사원이 화마에 휩싸였다. 앞으로 불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 아닐까. 불길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언론들은 영적인 의미를 외면한 채, 귀중한 문화재인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이 불에 타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그 가시관은 진위를 불문하고 문화재이기 이전에, 우리 영성의 뿌리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과 감성은 있으나 영성이 결핍된 현대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인간들이 점차 이마고데이를 상실해 가는 것이 걱정스러워,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셨다. 성경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도와 찬송을 그치지 않아야, DNA가 조종하는 무의식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이마고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된다. 언뜻 생각하면 마치 하나님이 이 세상의 황제처럼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긴장을 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우상의 뒤를 쫓아가기 쉽기 때문에, 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랐을 때, 잠시를 참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고 숭배했던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죄 지은 자들을 벌하셨듯, 앞으로도 불의 심판이 있어 타락한 세상을 청소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펼치실 것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죄악 세상에서, 자신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 즉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 말씀을 따라 배에 들어갔던 사람들과 동물들이 살았듯이, 말씀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DNA에서 죄의 인자를 제거하셔서, 완전한 이마고데이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주님 나라가 속히 임하소서. 예수님 어서 이 땅에 오소서’기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앞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새로 열리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그 일단을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곳곳에서 보게 된다. 금은보석으로 휘황찬란한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단순히 세상적인 금은보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나의 가치관과 나의 인생관에 의해, 나의 믿음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릴 수 있는 천국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수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가장 이상적인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그 이상적인 나라가 누구에게나 똑같다면 자유의지를 허락해 주신 창조주의 뜻이 아닐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보다 더 광대한 하나님 나라에는 모든 사람이 그리는 천국을 다 수용해 주실 것이다. 천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는 각기 다른 천국이 존재할 것이다. 지옥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나라, 그것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그곳이 지옥일 것이다. 즉, 천국과 지옥은 각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각 사람의 천국은 각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살고 싶은 나라, 각 사람의 지옥은 각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살고 싶지 않은 나라일 듯싶다.
나는 나의 천국론을 써 보려고 한다. 나는 천국을 보기를 기도해왔지만 아직도 꿈속에서 천국을 보지 못했다. 다만 내가 본 환상으로 기억이 각인 되어 있는 것은, 세례를 받기 위한 전 단계인 학습을 받을 때, 세 명의 어린 천사가 찬송을 불러 주었던 꿈을 꾸었고, 장로 임직 받을 전날 내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빛이 나에게 쏟아지면서 항상 앞서가려하지 말고 두 번째로 가려고 노력하라는 음성을 들은 듯싶다.
내가 꿈꾸는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천로역정과 신곡과 천국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고 믿음의 선배들이 쓴 천국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빈약하지만 내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서 나름의 천국을 그려보고 싶다. 나는 죽음을 절실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내 손톱 밑에 가시만큼의 신경을 쓴 적도 없다. 그러나 천국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죽음을 마주하고 그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늙기는 늙었나 보다.(*)
□ 수필
헌책방
임 한 용
모처럼 무심천 둑방길을 걷는다. 11월 중순, 늦가을의 무심천 둑방길은 왠지 스산하기만 하다. 빨간 벚나무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초생달이 살포시 보인다. 무심천 바닥에서 마음껏 자란 억새가 바람결 따라 스르럭 스르럭 소리를 낸다.
저 억새를 바라보고 손목인과 고복수는 가을의 정취와 사랑의 아픔을 절묘하게 역어낸 1930년대 서정가요의 대표곡인 “짝사랑” 걸작품을 만들어 냈었지!
아∼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구슬픈 고복수님의 노래가 스쳐지나간다.
어떤 이가 한강은 서사적인 강이라면 무심천은 서정적인 강이라고 했다. 무심천은 바라볼수록 정감이 가는 내이며 강이다. 아기자기하게 흐른다. 정을 담고 흐른다. 밝은 햇빛을 받아 흘러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노라면 고요한 정이 다가온다. 그래서 청주 사람들이 정이 있고 착한지도 모른다.
서원대학정문에서 우측으로 약 40~50m의 둑방길을 걷고 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헌책방”이 하나 있었다. 서원대학교. 충북여고. 운호중•고가 있어서 90년대 까지만 해도 이 곳 “헌책방”에는 사람들이 매일 북적 북적대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문을 닫았다. 전국적인 현상이라지만 긴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따라 이곳을 지나며 바라보니, 큰 딸과 저 “헌책방”에서 지난至難했던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오빠가 고3이다. 동생이 중2였었다. 다행이 집은 내 집이었지만 월급 40만원을 받아 수입에 맞추어 도시생활을 하다 보니 가정경제가 매달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싱雪上加霜으로 어머님이 4년 째 중풍병으로 몸져 누워계셨으니…….
지금 기억으로 나의 1985년 9급행정직 6호봉 면서기 월급이 30만원으로 기억된다. 보수가 좋은 직장을 살펴보니 같은 조건인데, 중등교사 월급이 10만원이나 더 많았다.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 직장을 학교선생님으로 옮겼다. 00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1986년 3월, 4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하숙비 10만원을 제하면 30만원 이다.
큰 딸이 00여고에 진학을 하던 해였었다. 청주에서 실력이 있는 00여고에 배정받아서 좋아하는 딸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새 사전을 못 사주고 헌 영어사전을 사준 추억이다.
가장 예민할 때다. 조금 불만은 있어 보이는데, 딸은 헌사전을 받아들고 “아빠 고맙습니다”. 한다.
그때 나는 돌아서서 천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 숨지었던 기억이 오늘따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당시 가난한 공무원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말들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쪼들리기는 대등소이大等小異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식들을 학원에 보냈지만 내 월급으론 보낼 수가 없었다. 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내가 “성문기본영어”를 저녁마다 가르쳤다. 잘 따라온다. 2학기 때 부터는 나를 추월하는 것이 보인다. 2학년부터는 성문종합영어로 들어갔다. 고3을 거쳐 00대학에 응시했는데 그만 낙방을 한 것이다. 머리를 떨구고 들어오던 아이에게 “후기를 보면 되지 걱정말거라” 위로를 해주고 후기 00대학 영어교육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딸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3학년 때 부터는 00영어학원에 출강하여 동생 등록금도 해결해주었고 편찮으신 할머니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효성이 지극한 손녀딸이었다. 졸업하던 해에 경남도교육청에서 시행한 중등영어교사 임용고사에 응시했었다. 1차에 합격해서 좋아했는데, 2차에 떨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던 아이에게 “괜찮아, 00교대 편입시헙을 보자”. 경쟁률 101:1 되는 00교대에 합격하여 1년을 공부하더니 “아빠 이번 11월 중등영어교사 임용고사를 볼까요” 한다. “좋다, 보자” 고했다”
밤샘까지 하며 공부를 하던 딸이 갸륵하기만 했다. 시험은 잘 보았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일이다. 충청북도교육청에서 중등영어교사 5명을 뽑는데, 딸은 3등으로 합격을 한 것이다.
가난한 공무원 애비가 헌책방에서 사준 헌 영어사전으로 고등학교 3년, 대학4년을 그 사전으로 공부하여 딸은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 된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는 펄쩍 펄쩍 뛰며 좋아했고 그리곤 조용히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드렸었다. 아내의 100일 기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딸은 이듬해 2000년 3월 1일자로 음성 00고등학교 영어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그 해 8월 18일 최초의 한문소설 김시습의 “금오신화 담론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겹경사가 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딸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은 이루며, 금왕공고. 문의 중. 가경중에서 영어교사로 성실하게 근무를 했다. 교사생활 19년.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했었다. 드디어 딸에겐 장학사獎學士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2019년 6월 논술시험과 심층면접시험을 치루었다.
아내가 조용히 부모가 할 일을 제안한다. 금식기도다. 시험 보는 이틀간은 물 한 모금 없이 금식하며 기도를 한 것이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딸은 1차에 장학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렇게 기쁠 수가 있나? 우리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지난 9월 1일자로 제천시교육청으로 장학사발령을 받았다.
팔월 말일이다. 아내와 딸과 함께 생활도구를 챙겨가지고 의림지가 있는 제천으로 달려갔다. 이상하게 내가 처음 제천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했던 곳인데 딸은 평교사가 아닌 장학사로 근무하게 되다니!
제천시 하소동 높은 언덕에 위치한 제천시 교육청. 딸 책상위엔 「장학사 임 00」명패가 걸려있었다. 아! 이 얼마나 학수고대하던 명패란 말인가? 아, 이 기쁨과 감사를 어떻게 표현하리!
교육청에서 내려다보이는 제천시가 다정하게 다가온다. 20여개의 중학교 교육지도, 조사, 감독에 관한 일을 하게 될 텐데, 딸은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이 있을까? 물론 처음엔 다소 어색하고 긴장도 되겠지만…….
딸이 생활할 아파트에 짐을 풀어놓고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조용하고 괜찮다.
30여년 만에 온 제천이다. 변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의림지를 빙 돌아보았다. 우람한 소나무 사이로 빛을 받은 의림지의 못물이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의림지”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오셨군요” 하는 것 같았지.
띠릭하고 전화가 온다. “어디에 계세요?” 아내의 전화다. “예, 나 옛날 서원대 부근에 있었던 헌책방 앞에 있어요.” 아내는 “예∼∼”한다. 내 눈은 지금도 저 헌책방에 꽂히어 있었다.
□ 수필
빛은 하늘에서
박 신 배
바람이 세차다. 황사 실은 된 바람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밖으로 나오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도 따뜻한 바람이 혹 불어올지 기대하며 한의원으로 간다. 거기는 병든 사람들이 오는데 사연이 많아서 갖가지 삶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그곳에 서 있었다. 나이 들수록 병원에 자주 다니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말하는 운전사, 이 십년 택시 운전을 하며 경희대에서 위궤양으로 수술을 하다가 염증으로 갈비뼈를 하나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침을 맞으며 낫기를 바라지만 힘든 상태에서 그저 웃음을 띄우기도 한다. 택시를 운전하다보면 손님이 없으면 두 배나 힘들다는 것이다. 카카오 앱을 깔아 시대에 맞추어 손님을 끌어보려 하지만 그것도 허사, 빈차로 오래 다니는 것은 고역이라 한다.
이 한의원은 침상이 두 대라 같이 침을 맞으며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지, 침상에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사는 재미가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가지며 위로받으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랜 환자 맞이 베테랑 의원님은 노세하여 그만 일을 두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어서 계속 진료를 나오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환자를 돌보는 침술활동이 더 건강하게 하시는 듯 아침으로 걸어 출근하시고 저녁에는 택시로 퇴근하는 것 같았다. 아침 10시 나오셔서 저녁 4시 반까지 진료를 하신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는 효자인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중풍 맞으신 곳에 침을 맞게 하려 온다. 아들은 앞으로 3년이 지나면 신호등이 없어지고 자율차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로봇, 전자차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천지가 될 것이라 말한다. 백두산에 화산이 터지면 엄청난 피해를 가지며 활화산이기에 조만간 터질 것이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아서 십 만 이나 되는 도시가 한 해에 아이 한 명만 낳았다는 것이다. 광진구에는 서울인데도 학교 하나가 폐교된다는 것이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데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없고, 동네 사람들이 없어서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제일 아이가 없는 곳이 부산일 것이라고 하면서 그곳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운동화 공장이 있어서 일거리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구가 서울에 4000천만으로 내려갈 것이고 그래서 지금 남양주 쪽에 아파트가 비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파트는 계속 짓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국민일인당 소득 3만 불 이상의 시대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세대 풍조라는 것이다. 노령화 사회가 되고 나라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대세론을 이야기하는 희망 없는 사람들 속에 그래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꺼리를 찾아본다. 베트남은 젊어지고 있고, 젊은 사람들이 많은 나라여서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축구대회에 우승을 하여, 한국 박항서 감독으로 인해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국 국기와 베트남기가 동시에 휘날리며 응원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뉴스 속에 대학가와 정가에는 세상 출세의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진 것을 보며 서민들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법망을 피해가며 출세가도가 교육현장에 있다고 보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편법을 사용하여 명문 대학에 입학시키고, 세상 출세 길을 교묘하게 알아 권력과 부를 축척하고 먹이사슬을 만들어 움직이는 한 교수 부부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내려앉게 하였다. 그래도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대세라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모습이다. 여의도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머리싸움이 연일 이어지고 북한은 핵개발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속해대고 미국은 경제제재를 한다하며 항공모함을 동해바다 쪽에 댄다하고, 미중 무역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더 악화될 것이라고 한다. 세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종말론이 기승을 하여도 우리는 살 만한 이야기를 찾아서 빛이 오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빛은 하늘에서 온다. 하늘에서 오는 그 빛을 바라보려고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 한다. 소망은 하늘이다. 희망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 빛을 나누는 동안 살기 좋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살기 힘든 이야기 속에 비춰지는 어려움에도 가끔 좋은 소식은 그래도 우리가 살 만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오니 종종 걸음으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발길들이 모인다. 찬바람 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거칠어도 따뜻한 인정이 있는 곳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는가. 부모님이 천국의 집 빌라 일 층에서 오랫동안 사시길 기도하며 이 층 아들내외가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계단을 오르며 기원한다. 빛은 하늘에서 오리라.
□ 수필
한해를 뒤돌아보며
박 월 지
지난해 그 모진 겨울을 보내고 찾아왔던 봄!
온 대지에 전령을 일깨워줄 때. 맨 먼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매화와 산수유가 화사하게 피고. 개나리, 제비꽃, 민들레, 연산홍, 벚꽃, 복숭아, 배꽃이 낙화할 때쯤. 나뭇가지의 연록 새잎으로 세상은 온통 활기찼다.
아카시아, 라일락, 박태기꽃, 감꽃, 그리고 이내 정열의 꽃 장미가 주택가와 아파트 담장에 드리우면 세상은 지상 천국이 된다. 어느 탈북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 모습을 보고 대한민국이 지상낙원에 별천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6월이 되면 하얀 밤꽃이 산자락 가득 피고. 바알간 석류꽃, 능수화, 자귀나무꽃이 자연 순리에 거스르지 않고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배롱나무꽃은 약 3개월 동안 피어 일명 목백일홍이라 한다. 초록빛 가운데 피어서 유독 돋보인다.
여름철 우렁찬 매미소리와 뙤약볕, 무더운 긴 장마를 견디노라면 어느덧 풀벌레 소리. 신선한 바람을 피부로 느끼며 들판 황금물결의 결실에 각종 과일이 탐스레 주저리주저리 열려 우리에게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고마움과 행복도 잠깐.
어느덧 들국화가 들판 가득 가을 정취인 억새, 갈대가 핀다. 그리고 가을이 언제 다녀갔는지 모르게 서리가 내린 겨울 문턱에 들어선 지 오래다. 지나온 사계의 파노라마, 자연에 감사하며 조용히 한해를 뒤돌아본다.
2월 어느 날 기차역 계단을 내려오다 갑자기 왼쪽 무릎이 탁! 하고 꺾여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이 있었다.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직행. MRI, X-ray 등 모든 검사를 끝냈다. 집에 환자(남편)가 있어 입원할 형편이 못 되어 연골주사 등의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며 몇 달 동안은 모든 활동을 접고 치료에 전념했으나 회복이 늦었다. “왜 이렇게 오래 가냐?”는 물음에 “나이 탓”이라 답하는 의사의 답, 할 말이 없었다. 무쇠도 70~80년 쓰면 녹슬고 부식되는데 하물며 인체인들….
죽을병 아니면 고민 말고 죽을병이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리에 그나마 절뚝이며 느리게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끊임없는 연골주사, 물리치료, 또 한방치료, 쑥과 쑥뜸, 부항, 심지어 뼈에 좋다는 각종 민간요법과 약물로 무던히 노력 중이다.
자유롭게 가고픈 곳 어디든 갈 수 있었음에 행복했고, 또 걷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기도 했다. 그간 전국은 물론 해외도 참 많이 여행했으나 이제 너무 나이가 들어서일까? 안타깝다. 문득 중국의 속담이 생각난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가는 세월을 누가 거역할 수 있으랴.
베란다에서 늘 바라볼 수 있는 뒷산! 아침 햇살과 향기로운 꽃들, 변화무쌍함을 지켜보며 올해 봄은 왠지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척 기다리기도 했다. 해마다 찾아와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줘 내가 살아 있음에 무척 행복했었는데…. 혹 길을 잃었을까? 삶이 끝났을까?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날, 오월 중순쯤에서야 ‘뻐꾹 뻐꾹’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기다림 끝에 들려온 반가운 소리에 “여보, 여보 뻐꾹새가 왔나 봐. 당신도 저 소리 들리지”하고 창문 활짝 열어 두고 아름다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퍽 행복했던 시간. 철새도 다 떠난 지금 겨울 새찬 바람이 창문에 스친다. 지나온 한해를 뒤돌아보며 나에게 주어진 내 삶에 후회 없이 살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이 위암 수술을 한 지 4년 차. 그런대로 잘 견디다 척추관협착증 탓으로 걸을 수 없어 날로 쇠약해지는데 이제는 수술한들 회복을 기약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뜻에 약물 외의 치료를 포기한 상태다. 본인 말로 당뇨 40년에 팔순이 넘도록 살았으면 참 오래 살았다고 한다.
제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해 100세 시대라 하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유전자가 다르듯 인간 수명은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라 믿고 삶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올해는 우환도 잦았다. 남편이 합병증에 6월 말에 서너 번 병원을 들락거렸다. 어쩌다 집에서 낙상해 구급차로 대학병원 응급실행. 검사결과 갈비뼈에 금이 간 채로 꼼짝없이 자리보존. 그러나 나에겐 확고한 믿음이 있어 눈물 흘리며 주님께 매달린 애탄 기도가 있었기에 많이 회복한 상태다. 주님! 감사합니다.
인내로 견디노라면 내년은 새로운 희망이 전개될 것이란 믿음과 은총이 있기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해 뜨고 지는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세상사 모든 것이 저울추와 같지 않을까? 이것에는 저것이 따른다. 고통이 있으면 행복이,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으니 말이다.
그간 나에겐 각종 모임이 잦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 접고 몇몇 친구 모임만 남았다. 그것도 당일 코스에만 참석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신조라고 할까, 스스로 한 약속이라 잘 지키고 있다. 부부 중 누가 먼저 세상 떠날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동안 내 삶은, 약 20년 동안 국가의 녹을 먹었고 간병인 생활, 자영업으로 50년 넘게 사회 활동을 해 왔으나 지금은 가정에 충실하고 있다. 예전에 자주 갖지 못했던 남편과의 담소와 지나온 세월 이야기가 있어 여유롭고 행복하다. 요즘은 카카오톡으로 들어오는 지인들의 고마운 좋은 글, 건강 정보, 음악과 동영상 등을 보며 행복에 젖어 감사와 감동으로 살아간다.
창밖에 그 아름답고 화사했던 봄도 덥다, 덥다 하던 여름도 짧디짧은 가을도 정취를 느끼기 전에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혹한의 겨울이 왔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앙상한 나뭇가지에 12월의 첫눈이 내리고 있다.
□ 수필
대만에 다녀와서
권 희 일
나이가 들어서인지 특히 허리 다리가 제일 아프다. 더 심해지면 정말 외국여행 한번 못해 볼 것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내친김에 남편과 여행사를 찾아갔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가기로 하고 대만으로 정했다.
3박 4일 동안 필요한 물품을 챙긴 가방을 끌고 메고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혼여행이라도 가는 기분처럼 설렌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일찍 서둘러서인지 제일 먼저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부부 두 팀이 나타났다. 초면이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탑승할 시간이 임박하니 동행할 일행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모두 16명으로 연령대가 70, 60, 50대였다. 우리 부부가 연령이 제일 많아서 은근히 걱정이 된다. 젊은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비행기에 탑승하고 서서히 고도를 높이자 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진다. 10년 전 괌에 갈 때도 하얀 솜덩이 흰 구름 위를 둥실 떠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이 그날 같아 새롭게 추억 속에 잠겨 본다. 괌은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수영장이 많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리알처럼 투명한 물속에서 맘껏 즐겼던 일들이 꽃잎처럼 피어오른다. 대만도 더운 곳이어서 그럴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창밖에 보이는 흰 뭉게구름과 내 마음이 동화되어 둥실둥실 떠가고 있다.
잡지와 신문을 뒤적이다보니 벌써 대만 비행장에 착륙할 것이라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서둘러 소지품을 챙겨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지열이 올라와 대만의 날씨를 직감할 수 있었다.
가이드와 우리 일행들은 서로 한참 애를 먹고서야 겨우 찾았다. 가이드는 화교 출신이라 한국말을 잘했다. 점심시간으론 좀 늦었지만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가이드말로는 한국 여행객이 많이 찾는 식당이고 우리 입맛에 잘 맞을 거란다. 중국의 소동파 시인이 즐겨 먹었다는 돼지고기 삼겹살로 만든 음식이었다. 느끼한 맛을 줄이려고 공을 들여서인지 고소했다. 무를 빨갛게 물들인 깍두기와 곁들여 먹으니 개운하니 먹을 만했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에 강행군의 시작이다.
먼저 타이페이 시에 있는 고궁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생명력이 넘치는 짙게 푸른 숲은 아예 정글 속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버스가 힘차게 달리는 동안 산악지대여서인지 비가 세차게 내린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지만 사정없이 퍼붓던 소낙비도 그치고 한 시간 넘게 달리던 버스도 멈추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게 불쾌지수가 높다. 대만의 전형적인 날씨이지 싶다.
고궁 박물관 건물 안에 들어서니 목재와 상아 뼈의 2개 동으로 지어져 있다. 많은 유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기계도 없던 시대에 수작업으로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정교함에 놀라웠다. 특히 황제가 사용하던 생활 용품들은 수요가 많을 뿐더러 사치스럽고 현란하여 눈길을 많이 끌었다. 가이드 설명으로 유물이 68만 점이나 돼 날마다 유물들을 바꿔서 진열해 놓는다 해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유물들을 보려니 숨이 차서 후유~하고 한숨이 쉬어진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많은 보물들을 운반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리라 짐작이 간다. 보물로 인해 관광 산업이 각광을 받기도 하려니와 시대가 지날수록 그 가치가 높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궁박물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용산사에 들렀다. 이곳 역시 2개 동으로 불교, 도교로 지어져 있었고 신(神)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셔져 있었다. 신도들이 상에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간절히 불공드리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신도들이 향을 한껏 피워대니 짙은 향 내음과 매캐한 연기로 불난 집인지 기도 도량인지 불쾌감마저 들었다. 건물은 온통 검은 용의 문양으로 수만 마리가 조각되어 있어 살아 꿈틀대는 모습으로 금방 내 몸을 휘감을 것 같은 두려움에 오싹 소름이 돋기도 했다. 이곳도 전신이 중국이어선지 건물이라든가 백화점 선물 코너에서도 크고 작은 용의 형상들을 볼 수 있었다. 건물의 간판이 한자로 되어 있고 언어, 문화, 음식 모두 중국풍이어서 큰 집에서 살림 낸 작은 집 같았다.
장개석 총통의 민주기념관을 올라가는 층계는 89층계로 그분의 나이로 되어 있었다. 기념관을 건립할 때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했기 때문에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으로 대만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수행원 몇 명과 찍은 사진이 반갑게 눈에 들어왔다.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잘 살게 만든 위대한 통치자였기에 반가웠을 것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위대한 통치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장개석 총통이 탔던 주인 없는 전용차만이 세월을 말해주듯이 한 편에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에서 나올 때 군대 20만 명, 유물 68만 점과 많은 금을 가지고 섬나라인 이곳 대만에 정착하였다. 대만은 국토의 80%가 산악지대이고 농토는 별로 없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며, 원주민은 체구가 작고 검으며 눈이 큰 것이 특징으로 화련(花蓮)에서 농사를 전업으로 하며 짐승 사냥도 하면서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이라 정부에 불만이 많다고 한다. 자기네들이 원주민임을 주장하면서..
화련 태노각 협곡에는 웅장한 절벽의 높이가 3,800미터나 된다고 한다. 크고 작은 절벽들이 금강산의 만물상 같아 보였다. 협곡에서 굴러다니는 돌들도 값진 보석들이다. 무한대의 대리석과 보석이 매장되어 있는 산은 마치 보물함 같아 보였다. 이곳은 원래 장개석 총통이 전쟁 중 퇴각할 수 있는 길로 만들기 위해서 대리석 산을 깎아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타이페이를 벗어나 타이완 북 해안에 자리한 야류 지질공원을 찾았다. 해수욕장과 온천,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파도와 바람에 의한 차별침식을 받아 버섯바위, 촛대바위, 여왕머리바위, 희귀한 여러 모양의 바위가 많았다. 특히 제일 눈에 띈 것은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표고버섯 모양의 바위들로 표고버섯 재배 농장을 방불케 했다. 지질공원은 교육, 관광, 휴양지 기능을 갖춘 명소로서 학생들의 학습과 수학여행지 필수 코스인 곳이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자연이 빗어낸 풍광을 카메라에 담느라 야단법석을 떤다. 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바다와 가까워서 단체로 사진을 찍을 때 매우 조심해야 되는 수심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예전에 서로 몸과 몸이 밀착된 상태에서 한 학생이 중심을 잃고 쓰러져 도미노 현상으로 한 무더기의 학생들이 빠졌다고 한다. 이때 낚시하러 왔던 청년이 용감하게도 바다에 뛰어들어 학생들을 모두 구하고는 힘이 달려 그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안타까움에 그 장한 청년의 동상을 넋을 잃고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자기가 학생들을 구해내야만 한다는 의무나 책임도 없는데 목숨까지 던져가며 물속에 뛰어든 위대한 청년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대형 사고를 낸 세월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 당일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선장이나 선원 해경들은 각자 책임을 회피한 비굴한 사람들이다. 안타까움에 유족들은 절규했고 온 국민들은 분노에 들끓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죽든 살든 함께 가는 게 사람이건만 그들은 도망쳐 나오기에 급급했다. 그러고도 만인 앞에 어찌 얼굴을 들 수 있단 말인가? 대만 청년의 의롭고 숭고한 정신을 우러러 받들며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대만 3박4일 여행에서 볼거리 즐길 거리도 많았지만, 제일 뇌리에 남는 것이 국토 면적의 80%가 산악지대이다 보니 하늘을 치솟는 협곡들의 경이로운 웅장함과 수많은 협곡에서 굴러다니는 대리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리석 공장 견학에서도 산더미처럼 대리석들이 쌓여 있어 매장량이 무궁무진하리라 생각된다. 대리석은 건축자재로 일본,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고 있어 크나큰 자원으로써 국가 부흥에 빛을 발하리라 생각하니 나도 힘이 난다.
대만은 좋은 여행지였고 오래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 수필
아우열전 대화(大和) 유희상 박사
이 상 일
대화(大和) 유희상 박사는 필자가 늘 존경하는 직장 상사였다. 필자보다 10년의 연장자이시지만 아우열전(雅友列傳)에 빼놓을 수 없는 스승같이 느끼고 있는 귀한 벗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실제일교회> 장로
석안유심과 예수님 사랑 듬뿍
언제부터인가 막연하게 ‘이 분의 가슴이 참 따뜻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어 유희상(柳熙相, 56)과장님을 밀착취재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필자가 15여년을 님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렇게 멋진 분을 좀 더 일찍 주변 분들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필자의 우둔함에 당황 할 정도였다.
혹시 이분을 이미 알고 계신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회고하시어, 주변 지인들에게 알려져 유희상과장님의 귀한 삶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고맙겠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회의 장로입니다. 물론 현직에 있는 공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허나, 제가 살아오면서 혼신을 다 바쳐 해 온 하나님의 사업 또한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 분의 충실한 충복이 되어 있습니다., 해서 저는 누가 제게 직업을 물으면 먼저 교회의 장로라고 대답을 드립니다.”
필자가 번연히 알면서도 직업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냐고 물어보니 그 대답부터가 만만치 않다. 지금 현직은 서울특별시 토목 사무관. 구로구청 토목과장이다. 그러나 퇴근하면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린단다. 대학에서 측량학을 가르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홍후회 회장 등 그 직책만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에서는 장로님, 학교에서는 교수님, 사무실에서는 과장님, 신우회의 회장님, 서울시 토목직 사무관모임인 서토회의 회장 등 일인 몇 역인가.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필자가 이렇게 나서서 굳이 지면상으로 유희상 과장을 모셔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오늘 날 조금 성공한 남자라면 시쳇말로 다 그 정도는 하고들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뭐라고 꼭 꼬집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주변 보통사람과는 다른 면이 많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큰 느티나무라고도 부른다. 아마 그 품속에서 포근히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어서 인가 보다.
유희상과장에게는 지금까지도‘대통령 과장’이라는 재미있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인격은 청장, 키는 대통령’… 몇 년 전 강남 구청에 근무할 때였다. 7월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인해 막대한 비 피해를 입은 일부 주민들이 부실한 재난대비로 피해를 과중하게 입었다면서 구청에 몰려와 보상을 요구하며 구청장 실을 점거하고 구청장을 몰아붙였다.
혼비백산한 구청장이 담당과장만 남겨둔 채 자리를 피하자 모든 책임은 담당과장인 본인이 지겠다며 멱살제비를 당하면서도 주민들 속에 뛰어 들어가 눌변으로 담판을 지우고 사태를 무마하자 주위에서 지켜보든 동료 과장들이 혀를 내두르며 그의 작은 키를 빗대어 한 말이다. 그때 받아넘긴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보쇼. 키로 한다면야 대통령이지.” 당시 대통령의 키가 작았나 봅니다 그려.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86년 서울시가 아시안 게임을 유치해 그 준비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 그의 아래 직원이 정비 사업을 감독하다 순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개청 이래 처음으로 장례를 구청장(區廳葬)으로 치루었다. 당시 상부에서 관례를 앞세워 반대를 하자 그는 사표를 써서 만약 이 요구가 관철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배수진을 쳐가면서까지 구청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냈던 것이다. 인터뷰 중 당시를 술회하며 ‘그때 고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곤 그것밖엔 달리 없었죠.. 이미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셨지만 명예라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내 지시에 의해서 열심히 책임을 다 하다가 몸이 망가져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도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입니다. 당시엔 정말 죽기 살기로 열심히들 했지요.’ 금방 님의 눈엔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 제게 신념이 하나 생겼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 밑에 있는 직원은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입니다. 일례로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와 저의 직원들이 한 일에 대해 지적했을 때도 정말 고의성이 없는 업무상 과실이라면 전 어떻게든 감사관을 이해시켜 그 직원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몇 해 전에는 모 감사관이 끝까지 이해를 하지 않아 그가 직원대신 직접 자기이름으로 사유서를 써 주었다는 일화는 앞에서 말한 ‘느티나무’나 또 다른 ‘우산 속’이라는 닉네임이 실감나게 한다. 감사 지적에 대한 사유서는 그 자체가 개인 신분상 불이익을 암시하는 사항이라 공무원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피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직원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고 요즈음은 주례섭외도 자주 받는다했다. 벌써 십여 명이 결혼식에서 그의 주례를 시작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잘 살고 있다한다.
또한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든 어려운 일만 생기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현재도 서울특별시 전체사무관 모임의 간부직을 맡고 있으며, 필자와 인터뷰 중에도 전화가 수도 없이 울려 그가 여전히 얼마나 바쁘게 생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공직에서 얻은 35년의 실전경험을 살려 이론과 현장 기술이 접목된 살아 숨 쉬는 수업을 한번 해보겠다. 이론에 편중된 작금의 대학수업형태를 과감히 탈피하여 학생들이 졸업 후 현장에 뛰어들더라도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수업방법을 실전경험에 많은 비중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대학출강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자 처음 출강 당시 모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 기사가 난 지면을 내놓으며 그 특유의 따스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변을 대신하는데 그 내용 중에 ‘공학도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감성의식도 심어줘야 된다’는 것과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친구들에게는 충실하게, 신에게는 진실하게, 그리고 내가 걷는 길에 향기로운 한 송이 꽃이 되리라.’고 하는 기사가 그의 향기 가득한 인간 내음을 한껏 풍겨주고 있었다.
대개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사회생활이 원만하면 가정생활은 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상례인데 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가정생활도 신앙생활의 일부분으로 보고 있지요.’ 필자가 은근히 바쁜 사회생활(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여 4시간밖에는 수면을 취할 수 없음) 때문에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기대를 하며 말문을 열자 전혀 어려움이 없단다.
온가족이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선생은 장로이고 어머님과 부인인 이혜정 님은 권사다. 3남매가 있는데 모두 그렇게 신앙생활에 열심일 수가 없단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지만 어릴 때 선생께서 자식들에게 쏟은 애정은 주위에서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당시도 지금처럼 바쁜 생활로 새벽출근과 심야 퇴근이 빈번하여 아이들 얼굴보기가 힘들었는데 그러면서도 한 번도 아이들 숙제를 챙겨주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늦은 밤이거나 아니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아이들이 해놓은 숙제를 검토하고 일기장도 꼬박 꼬박 읽어보고는 밑에다 아빠생각을 적어놓고 출근을 하고 다시 다음날 확인하고… 이렇게 수년을 같이 하면서 성장을 하다 보니 가족모두가 전부 서로의 마음을 훤하게 알게 되고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척척 알 수가 있단다.
그런 그들이 몇 달 전에 돈을 모아 선물을 한 아름 준비해 왔을 때, 반갑기에 앞서 그들이 나의 그늘을 벗어나가는 것 같은 서운함이 먼저 느껴졌다는 말에 필자도 가슴 한 구석이 찡하는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필자는 취재 도중 한 순간 유희상 과장에 대한 카리스마가 확 허물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그랬었구나. 님도 역시 뒤엔 그 누구들처럼 훌륭한 내조자가 있었다. 부인인 이혜정 권사님이 한 평생을 촛불처럼 온몸을 태워 거름이 되어 느티나무를 키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 사모님이 더 대단하신 분이랍니다. 아마 20년도 더 지난 일일 거예요. 두 분이 결혼을 한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아주 오래 전부터 같이 신앙생활을 했다는 교회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이 하신 말씀이다. 매달 가져다주던 월급봉투가 어느 날부터 갑작스레 반으로 줄어졌단다. 그 사실에 대한 해명은 없고 해서 처음엔 사모님이 설마 하면서도 바람이 나서 두 집 살림을 하는가하며 의심까지도 했단다. 그래도 서로가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사이라 억지로라도 참고 지냈다는데, 몇 달 후 그 월급의 반이 000라는 전과자의 재활을 위한 지원금으로 떼어준 사실을 알고는 “참, 지금 생각해도 당시 무척 힘이 들었어요. 공무원 월급이 지금도 적은 편인데 그땐 정말 적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또 반을 훌쩍 떼고 들여 주니… 둘째가 막 태어난 시점이라 더 애를 먹었죠.”
이 권사님은 당시를 술회하며 눈길을 한동안 허공에서 떼지를 못하고 있다. 이 권사님은 당시 그런 사실을 알고는 당신이 더욱 적극적으로 그 재소자를 후원하게 되어 월급은 다시 반에 반으로 줄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몇 년이 지나서는 살던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옮겨가기도 했단다. 그러나 몇 년 동안 기울인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 재소자는 결국 방탕한 시절에 얻은 신병이 악화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 권사님은 너무 허망한 나머지 잠시나마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도 했단다. 역시‘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라는 말이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도 유희상 과장의 재소자 갱생 지원 사업은 계속된다.
현재에도 살인전과가 있는 박선국(가명 58세)의 후원자로 온갖 풍상을 다 겪어 가고 있다.
“글쎄요. 우리인생이라는 것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그 결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 벌써 50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 뭐 더 바라고 싶은 것이야 있겠습니까만, 한 가지 말씀드린다면 이 세상이 온통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 되시어 모든 사람이 가슴 가득 따듯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 평생 최고의 소원입니다.” 하면서 말을 맺는 님에게 덕담 한 마디를 부탁드리자 유희상 선생은 “오직 하나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서로가 배려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을 맺는다.
필자가 현직시절 모잡지사의 객원기자로 활동할 때 벗을 취재하여 기고한 글이다. 다시 보아도 정말 나의 벗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벗과 처음 연을 맺은 곳은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던 1985년 겨울철이다. 서울시 기술직 공무원이 3년마다 정기인사를 하였던 그 해… 강남구청 토목과에서 벗을 계장님으로 모셨다. 그 인연이 구로구청에서 과장으로 다시 만나고 국장으로 다시 만났다.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바쁜 시기에 20년 근속휴가를 허락해 주어 미국 여행을 할 수가 있었고. 아프리카, 터어키, 그리스, 스페인과 포루투칼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그런 귀한 벗이다.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다는 조언을 주면서… 필자가 지하철본부에서 구로구청으로 발령을 받아왔는데 보직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멀쩡히 있는 보직자를 타부서로 옮겨 버리면서까지 나에게 보직을 줬던 님이다. 그 연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필자가 처음 책을 발간하고 마련한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해주었고, 다시 6년이지나 2017년 두 번째 책이 만들어져 강원도 횡성 어답산 자락에 자리한 필자의 집필실에서 있은 두 번째 출판기념회 행사에도 불원천리 멀다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서 축사를 해 준 벗이다.
“위선(僞善)도 선(善)이다.”
언젠가 점심을 같이 하고 한가한 시간에 필자가 물었다. 지하철본부에 근무할 때 동료가 보인 행동에 대하여… 시청 앞 지하도에서 노숙 인에게 돈을 꺼내주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놀랐다고 했다. 같이 현장에 간다며 동행하는 기회가 많았는데 한 번도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인 바가 없었기에… 그날은 왜? 이유가 있었다. 일행이 여럿이었고 상사도 같이 있었다. 그 정황을 전하며 그가 여러 직장동료에게 보인 행동은 주위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가식이 아닐까? 하면서 벗에게 물었다.
위선도 선인가요? 하고. 필자는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으로 기대를 하면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었다. 답은 위선도 선이다!라는 것이다. 이유를 설명 했다. 그 노숙자는 상대가 측은지심으로, 불쌍히 여겨, 적선으로 자기위안, 그 생각이 무엇이던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배고플 때, 라면 하나 사 먹을 수 있으면 그 가치는 같다고 했다. 배고픈 자 한 끼 식사로…, 상대가 부여한 의미는 그 노숙자에겐 이미 의미가 아니란다. 교회신자들이 헌금한 돈이 부처님께 시주한 돈이, 전국민이 모금한 재난 구호금이 다 그렇다고 했다. 누가 어떻게 어떤 연유로 내었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이 결국엔 선이었다는 것.
해서 벗은 애들을 기회만 나면 남을 도우는 습관을 배우도록 해준단다. 지하철에서 잔돈을 애에게 주면서 걸인이 지나가면 주도록 한단다.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다면서…, 그렇게 의미도 뜻도 모르지만 자꾸만 습관이 되면 그것이 몸에 배어 철이 들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또 도와줘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재화를 내어놓더라도 아깝다는 생각이 안들게 된단다.
그날 이후 필자도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학자인 선친에게 훈시를 받고 자란 탓에 진실이 빠져있는 마음 없는 모든 행위는 가식이며 위선이다. 하여 위선을 행하여 이루어진 것은 그 결실까지도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친구도 가려서 사귈 정도로 상대를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대화(大和) 유희상 선생의 말에 그동안의 내 화두가 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필자도 이제는 공사를 막론하고 자주 이 문구를 뱉어내고 있다. 대화(大和), 벗은 정말 멋진 나의 벗이라오.
- 2019. 12. 어답산 우곡사랑에서 도담 이상일
□ 수필
정서가 무디어 간다
진 용 호
감정은 본래 내면적·주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주지주의(主知主義)-일반적으로 감정이나 행동보다는 지성이나 이론, 사유 따위의 지적인 것을 중시하는 이론에서 진리는 이성에 의하여 얻어진다고 보는 합리주의적 사상,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등의 사상에서 보이는 것이다. 주지설과 일맥상통한다.
감정심리학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된 것은 생리적 변화가 정서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주장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감정론이다. 그 후 수집된 증거는 인간의 몸속에 감정을 느끼기 위한 기본 지각장치가 있다는 점에서 이 이론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좀 더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생리적 자극과 지각의 상호작용이 정서 표현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서가 부분적으로 신체반응이 일으키는 지각작용이라면, 이 신체반응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훌륭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한 것은 미국의 생리학자 W. B. 캐넌의 작업이었다.
그는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인간이 주요한 정서를 느낄 때는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계가 흥분하고, 그런 흥분은 확산하는 전도성 때문에 평활근과 분비샘에 특정한 반응을 광범위하게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교감신경계가 흥분할 때 일어나는 특정한 반응은 맥박 증가, 혈압 증가, 장의 연동운동 억제, 땀 분비 증가 등 수없이 많다.
다른 사람은 어떨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정서적으로 불안하여지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기준의 잣대는 내가 정하고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잣대에 어긋나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여 맥박 증가, 혈압 증가, 흥분이 분출되어 과격한 행동(언어폭력)을 일으키곤 한다. 엊그제 교회의 같은 연령대의 모임인 “갈렙회”에서 어느 집사가 북한의 핵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흥분된 발작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하니 “그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겨버릴 것을 왜 그리했는지 하면서 후회하고 있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하며 간격을 좁혀나가는 노력이 헌법정신이라고 하는데 나의 무식이 노출되었구나하고 지금은 마음 아파한다.
엊그제 작고하신 김우중 씨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신 말씀에 덧 붙여서 “세상은 넓어 별일도 많이 생긴다.” 고 말하고 싶다.
외국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어디다 얼마나 쓰든지 상관 할 바 아니지만 혀를 끌끌 찬 일이 있었다. 미국 풀로리다에서 열린 미술장 ”아트젤 마이애미“에서는 평범한 바나나를 은박 박스 테이프로 벽에 붙이는 설치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념 미술 작품이 1억이 훨씬 넘는 가격으로 팔렸고 또 어느 사람이 그 바나나를 벽에서 뜯어 먹고 나니 또 붙여서 다시 미술소장 가 에게 1억4천만 원에 팔았다고 하네요.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일반이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할 말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합당한가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렵게 살아가는 삶에는 생존을 위한 빵도 필요하지만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장미도 필요하답니다. 힘든 누군가가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도 서로 서로 도와가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갖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세상이 예수님이 바라시든 세상이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 사회는 ”확증 편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말입니다. 경제가 급격히 바닥을 치고 있음에도 최저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비 정규직의 무리한 정규직화로 불러 온 경제 현상을 냉정한 진단을 외면 한 채 연일 “포풀리즘”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마지막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지도, 다가 올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냥그냥 오늘을 살면 될까요?
□ 단편소설 연재
민박집 사람들1
신 사 명
1
윤재는 입국심사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은 빨라지고 손에 땀이 찼다. 앞 사람 심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왼손에 쥔 여권과 비자, 노란색 입국신고서를 다시 확인해 본다. 입국신고서를 여권 사이에서 뺐다 넣었다 하다가 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떨어지고 만다.
바닥에 달짝 달라붙은 노란색 종이는 손끝에서 좀처럼 낚여지지 않는다. 엄지와 중지의 힘으로 간신히 들어 올린 종이는 구겨져 버렸다. 허리를 펴자 앞 사람은 이미 가버리고 제복을 입은 공안이 매 같은 눈으로 한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윤재는 땀이 찬 오른손을 바지에 쓰윽 닦으며 왼손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공안의 눈동자는 윤재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윤재는 불현듯 생각이 난 듯 긴장을 감추려는 무표정에서 불쌍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얼른 바꿨다. 베이징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간다고 하니까 충고랍시고 말해준 선배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거기 가서 너무 당당하게 굴면 지는 거야. 특히 제복 입은 사람들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게 현명해.
매의 눈동자는 다시 윤재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으며 도장을 쾅 찍고 여권을 건넨다. 윤재는 공손히 두 손으로 여권을 받으며 목례까지 하고 나니 면접시험에 합격한 기분이 들었다. 수화물을 찾으러 가는 길은 두 번째 난관이었지만 한결 마음이 편해진 상태였다.
윤재는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을 했다. 취준생이라는 딱지보다 대학생으로 불리는 편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했고 대학생활 내내 꿈꿔왔던 해외 어학연수를 꼭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 낮에는 편의점, 저녁에는 동네 교습소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야간 화물운전, 택배 배달까지 밤낮없이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부모가 금전적 보조를 해주는 동기들은 영미권으로 영어연수를 간다지만 윤재는 학비며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처지에서 겨우 6개월 베이징 어학연수일지라도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다 보니 입출국 절차도 서툴렀고, 행여 문제가 생기면 틈틈이 독학한 중국어 수준으로는 혼자 해결 불가능할 거란 걱정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전광판에 수화물 라인 번호를 확인하고 주위를 살피면서 불안한 마음에 크로스로 맨 보조가방 안에 손을 넣어 여권, 현금봉투, 지갑, 펜, 민박집 주소가 적힌 메모장, 민트향 껌, 핸드폰을 차례대로 만져 본다. 여름이라 옷가지 짐이 별로 많지 않아 트렁크 하나 가득 짐정리를 끝냈다. 수화물 라인에는 이미 출고된 캐리어들이 빙글빙글 돌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재는 검정색 대형 캐리어를 끌고 출구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출구통로 난간에 기대어 갖가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일제히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길게 응시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윤재는 몇 걸음 걷자 한글로 ‘고모네 민박’이라고 쓴 흰 종이를 들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보낸 눈빛에 윤재가 고개를 끄덕이니까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남자는 민박집에서 공항 픽업 서비스로 보낸 중국인 기사 아저씨라는 것을 알았다. 윤재는 그의 등 뒤를 따라 묵묵히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흰 티셔츠를 입은 남자의 등은 흥건히 맺힌 땀으로 맨살이 투명하게 비췄다. 아마도 윤재가 도착하기 직전 열심히 뛰어온 모양이었다.
공항 내 에어컨도 땀을 식힐 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시큼하지만 텁텁한 흙냄새가 윤재의 코를 자극했다. 사람들의 땀 냄새가 공기 중에 뭉쳐진 걸까. 맨살에서 나는 냄새와 시골 비포장 신작로에 나풀거리는 먼지의 냄새가 화학적으로 반응하여 나는 냄새 같았다.
남자는 짐을 번쩍 들어 트렁크에 싣고는 능숙하게 운전을 했다. 그는 아예 말을 안 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해봤자 윤재가 못 알아듣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묵묵히 운전만 했다. 윤재도 짧은 중국어로 말을 붙여 괜히 난감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싫어 창밖 풍경만 감상하기로 했다.
하늘은 잔잔한 하늘빛으로 맑았고 가로수들의 여릿한 잎들은 여름 햇빛을 받으며 반짝반짝 흔들거리고 있었다. 베이징의 땅을 밟고 베이징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윤재는 이미 인생의 관문 하나를 통과한 듯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자신감은 6개월간의 고생으로 지불된 결과인 것 같았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윤재를 맞이하러 아파트 1층에 미리 나와 있었다. 아주머니는 기사 아저씨에게 차량비로 돈을 건네주고는 윤재의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며 밝게 웃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지? 학생. 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아주머니는 육체적 노동으로 다져진 듯 단단한 살집과 노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의욕이 어우러져 빛나고 있었다.
아파트 외양은 마치 유럽의 고대 건축물처럼 웅장해 보였는데 실내는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윤재는 이끄는 대로 아주머니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날 고모라고 편하게 불러. 우린 7층 3호이야. 잘 기억해 두고. 마침 유 박사가 집에 와있는데 서로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 유 박사는 중국생활 10년차라 궁금한 거 물어보면 잘 설명해 줄 거야.
조카를 대하듯 친근하고 생기 있는 아주머니의 말투는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끼리 서로 돕고 의지해야 된다는 유대감이 배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중국 노인 한 분과 윤재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살짝 튀어나온 둥글고 큰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눈 밑 지방주름에는 고집과 아집이 서려 축쳐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노인을 애써 못 본 척 어색하게 피해 나갔다.
우리가 복도로 걸어가는 동안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고 우리 쪽을 의심쩍게 노려보고 있었다. 윤재는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가 아주머니한테 주의를 받았다. 학생, 다음에 저 할아버지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 가라구. 자기네 집 전기를 우리가 써서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며 시도 때도 없이 계량기를 보질 않나, 아주 의심 많은 노인네야. 후예예라고 부르는데 지끈지끈 골치 아파. 노인은 아직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유 박사, 방금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야. 반갑게 맞아줘. 아주머니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신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유 박사는 거실에 없었다. 윤재의 방은 화장실 옆에 있는 방이었다. 침대와 옷장, 책상이 크림색 원목으로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께 목례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짐 풀고 나와서 수박 좀 먹어. 50대 후반 정도의 아주머니라 볼 수 없게 명랑하고 발랄했다. 윤재는 트렁크를 열어 옷가지와 책들을 꺼내 옷장과 책상 위에 나란히 배치하고 침대에 대자로 누워본다. 하얀 시트 위로 마른 먼지 냄새가 한 움큼 올라왔다. 아무런 인위적 향이 배어있지 않은 맨살의 냄새라고 할까. 윤재는 대충 정리를 끝내고 창밖을 내려다 봤다.
벤치에 한가하게 앉아있는 사람들, 삼삼오오 유모차를 끌거나 산책하는 노인들이 담소를 나누는 듯 보였다. 그들의 차림새는 편안해 보였고 걸음걸이 또한 슬리퍼를 질질 끄는 듯 느릿느릿 했다. 낮 시간 텅 빈 한국의 아파트 광경과는 달랐다. 한국처럼 정돈되고 단정한 분위기가 아니라 곳곳에 심어진 무성한 나무들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베이징은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도시라기보다 질박하고 맨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크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학생, 나와서 유박사와 인사해. 시원한 수박도 먹고. 윤재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재촉하듯 손짓을 하며 윤재를 거실로 끌어냈다. 그녀는 호들갑스럽기도 했지만 친근한 쪽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윤재는 멋쩍게 먼저 유박사라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박사라 그런지 윤재 눈에도 나이가 들어보였다. 여기 앉아. 어학연수 온 거니? 유박사의 작은 눈은 눈웃음을 지으니 눈동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윤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 박사는 너털너털 웃음소리를 냈다. 웃을 일도 아닌데 유박사는 그렇게 아무 때나 잘 웃었다.
고모님이 자꾸 유 박사라고 부르시는데 사실 난 아직 박사학위를 못 받았어. 계속 박사과정 공부 중이야. 부끄럽지만 내년이면 8년차인데 쉽지 않네. 라며 유박사는 또 너털너털 눈이 안 보이게 웃었다. 아휴, 그 정도 공부했으면 박산 거지. 도사인지 뭔지, 사람을 몰라보는 거 같아. 아주머니가 혀를 끌며 눈을 찡긋거렸다.
도사는 중국에서 ‘따오스(导师)’라고 박사 지도교수를 말한다고 유 박사는 설명해줬다. 한국처럼 교수면 모두 박사생을 지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은 박사를 지도할 수 있는 교수가 구분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따오스 눈에만 들면 입학도 졸업도 어렵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대단한 위치임은 분명했다.
우리 집에서 민박하는 학생이 한 명 더 있어. 중학교 2학년인데 부모는 한국에 있고 혼자 유학하는 친구야. 잘 보살펴 주라고. 어린 게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 이따 올 텐데 저녁 먹으면서 대학생 형이 잘 좀 이끌어주라고. 응? 아주머니의 걱정이 진심으로 전해졌다. 윤재는 갑자기 친교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이니까 안면이 없어도 초기과정은 생략하고 친분을 형성해야 하는 당위성이 존재해 온 것만 같았다.
저, 중국어 학원을 다녀야 하는데 주변에 괜찮은 학원이 있나요? 윤재는 비자 때문에라도 어학원 등록이 시급했다. 근처에 지구촌이라고 중국어학원 큰 게 있어. 거기 한국 학생들 많이들 다니지. 네, 저도 한국에서 듣고 오긴 했는데... 가까우니까 내가 안내해 줄게. 유 박사는 서슴없이 안내자 역할을 자청했다. 윤재는 선뜻 손을 내밀어준 유 박사의 호의가 해외에 사는 한국인의 정이라 느껴지면서 윤재의 경계심도 풀리는 것 같았다.
2
둘은 똑같이 나이키 로고가 들어간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햇볕은 여과 없이 두 남자의 정수리로 쏟아 부었다. 그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한 낮의 더위와 맞서듯 전진했다. 공항에서 맡았던 익숙한 흙냄새가 윤재의 콧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 냄새는 아마도 베이징이란 도시와 함께 후각의 기억 저장고에 입력되어 버릴 것 같았다.
여기서 학원까지 걸어가면 한 20분인데 자전거를 한 대 사서 타고 다녀도 좋고 버스도 있어. 세 정거장이면 되니까 버스가 편할 수도 있어. 버스카드를 만들면 버스비가 더 싸지니까 만들면 좋아. 양박사는 카드 만드는 곳을 가르쳐줬다.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윤재도 내심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서 타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베이징에 오신 지 얼마나 되신 거예요?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석사부터 했으니까 어휴 10년은 된 거 같네. 마흔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이러고 살고 있다. 허허허. 유 박사는 슬픈 말이든 화가 나는 말이든 말을 할 때는 늘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모든 말 속에는 웃음이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윤재는 그의 미소가 상처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마흔이 다 되도록 일도 없이 공부만 하는 모습이 어쩌면 취업 공포에 떨며 중국어라도 배우겠다고 온 자신의 미래 같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유 박사가 짓는 웃음에는 인생 뭐 있니 사람들이 다 똑같이 살아갈 필요는 없잖아, 이런 삶도 그리 나쁘지 않아, 라는 삶의 순응과 달관에서 우러난 관조가 담겨있었다.
윤재는 유박사 덕분에 학원등록을 마치고 비자 신청서류 준비까지 끝낼 수 있었다. 대가 없는 인간적인 도움은 낯선 베이징에 대한 경계심을 호감으로 바꾸기 충분했다. 윤재는 베이징이 좋아졌다. 대학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한 유 박사는 큰 포부를 품고 공자의 나라 중국에 와서 본격적인 유교연구를 시작하려 했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기틀이 잡힌 중국에서 유교사상은 이미 오래된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사상이 중화사상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의 논문주제는 매번 초록발표에서 유예가 되었으니 이제 좀 주제를 바꿀 만도 한데 유 박사는 독립투사처럼 굽힐 줄을 몰랐다. 지도교수 즉 따오스는 그의 유교사상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은 못하고 우회적으로 여러 번 눈치를 주었는데도 유박사의 눈치가 제로인지 졸업에는 관심이 없는지 자신의 강건한 의지가 언젠가는 통할 거라고 여기는지 도대체 그는 주제를 바꿀 심산이 없었다.
이번 가을학기에도 초록발표가 예정인데 유 박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도전해 보고 안 되면 학위를 포기할 작정도 하고 있었다. 둘은 근처 슈퍼에서 칭다오 맥수 한 캔씩 사 들고 마시면서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 전체가 울릴 정도의 높은 언성이 들렸다. 옆집 노인 후예예와 아주머니의 실랑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후(胡)'는 성이고 '예예(爷爷)'는 중국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이었다.
아이고, 유박사 마침 잘 왔어.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중국어가 안 되니 당최 이 노인과 말도 안 통하고. 계량기 가리키는 거 보니 또 전기료 운운하는 거 같은데 몇 번을 말해도 고집불통이야. 유 박사는 말도 하기 전에 벌써 반달눈을 하며 웃고 있었다.
후예예, 계량기는 이 집하고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정 의심스러우면 관리사무소나 베이징전력에 직접 연락해서 확인해 보세요. 유 박사는 노인에게 친절한 음성으로 얼굴에는 미소를 품고 정중히 말했다. 후예예는 유 박사의 나긋한 태도에 성질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의심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아주머니 집 전기계량기가 자신의 집 계량기에 합쳐져 전기료를 자신이 모두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억측이었지만 후예예의 강한 믿음 때문에 모두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소란이 잠잠해진다 싶었는지 후예예의 부인이 복도로 나와 미안쩍은 듯 시선을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못하고 후예예 팔을 잡아끌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조용하다 싶으면 한번씩 저런다니까. 노인네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이웃인데 불편해서 살 수가 없네. 아주머니는 화풀이씩 몇 마디를 내뱉고는 저녁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른 나라에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해 불가능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지. 유 박사는 많은 별일들을 겪어봤다는 듯 관조하며 속 편한 결론을 내리는 게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이런 상황이 논란이 될 일인지 납득이 잘 안 된 윤재는 집게손가락 끝으로 머리만 긁적였다. 둘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학교와 집, 도서관과 아르바이트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윤재였다. 이 외에 다른 뭘 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다들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불평도 없었다. 이웃과 눈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며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뒷담화를 하더라도 그 앞에서는 미소로 환대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할까. 후예예처럼 내면의 표정도 거침없이 내비칠 수 있다는 게 더 인간적인 것일까라는 생각이 윤재의 머리를 살짝 스쳤다.
거실에서 저녁 식사하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재는 출출했기 때문에 읽던 책을 얼른 덮고 문을 열고 나왔다.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오는 유 박사와 마주쳤다. 마침 현관문도 열렸다. 고모, 다녀왔습니다. 된장찌개 냄새가 진동하네요. 달걀찜은 없어요?
배고파요. 헌이는 신발도 벗지 않고 입맛을 다시며 밥 타령을 했다. 아들, 오늘도 고생했어. 어서 손 씻고 앉아. 아주머니는 반갑게 맞았다. 아들, 오늘 한국에서 온 대학생 형이야. 친하게 지내. 헌이는 윤재를 보고 넙죽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윤재는 손을 흔들며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셋은 사인용 식탁에 마주 앉았다. 낯선 중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 음식을 다정하게 먹는다는 게 윤재는 인생의 또 다른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듯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헌이는 중학교 2학년 15살 한창 클 나이라 식성도 형들 못지 않았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고 헌이 혼자 조기유학을 와서 중국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서 사고 치는 중.고등생들이 중국으로 도피유학을 온다더니 혹시 헌이가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윤재는 실눈을 뜨고 헌이를 훑어봤다. 거무접접한 피부에 또렷한 눈매, 반곱슬 머리와 건장한 어깨, 바른자세로 앉은 모양새는 윤재의 추측을 빗나가게 할 것 같았다. 아들, 천천히 먹어. 물도 마시면서. 점심 급식 또 제대로 안 먹은 모양이네. 중국학교 간 지 1년이 넘었는데 이제 좀 중국식단에 적응해야지.
아주머니 아드님... 아니죠? 윤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학생, 아주머니 말고 고모라고 부르라고 했지? 헌이가 내 아들이면 좋게? 성격 좋지, 남자답지, 공부까지 잘하니 얼마나 예뻐. 호호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니 내가 엄마처럼 보살펴주는 거야. 헌이는 아주머니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싱긋 웃었다.
전 사실 부모님한테서 내쳐졌어요. 헌이는 밥 한 숟갈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유 박사는 별 말 않고 묵묵히 밥을 먹고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윤재는 당당하게 말하는 헌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혼했던 변호사 아버지가 재혼을 하고 새엄마 사이에서 아기를 낳자 자신을 중국으로 유학 보낸 것이라고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윤재는 초면에 원치 않는 비밀들을 알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헌이를 실눈 뜨고 봤던 자신을 잠시 책망하며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 헌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옆에 앉아 밥의 소중함에 감사한 듯 먹고 있는 유 박사를 바라보니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물방울같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럼 자신은 어떠한가. 졸업유예를 위해 도피연수를 온 취준생 아닌가. 이력서에 중국어 어학연수라는 한 줄을 더 넣기 위해 날아온 자신도 애잔하게 느껴져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 셋은 나이도, 학업의 목적도, 베이징에 사는 이유도 달랐지만 타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트고 서로를 챙기며 한 솥밥을 먹는다는 기쁨을 누리며 지냈다. 윤재는 근처 대형 마트에서 거금을 들여 자전거를 큰 맘 먹고 샀다. 학원까지 통학용이기도 했고 주말에 베이징 시내 박물관이나 관광명소를 둘러볼 때 요긴할 거 같아서였다. 유 박사나 헌이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면 윤재와 동행하거나 베이징 중국요리 맛집을 함께 찾아다니기도 했다. 고모네 민박집에서의 삶들은 모두 익숙해져 갔다.
베이징 여름의 끝은 여전한 더위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온도는 쉬이 떨어질 것 같지 않게 고온으로 이어졌고 구름에 가리지 않은 햇볕은 건조한 공기 속에 그대로 투과되어 그 뜨거움이 배가 되어 살갗에 전해졌다. 한낮의 거리는 지친 매미와 가을을 알리는 잠자리 떼,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 뿐, 중국 사람들의 우슈(午休) 시간을 알리듯 사람들의 이동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고온이지만 건조해서일까. 숨 막히게 덥다기보다는 사막에서 느끼는 갈증처럼 몸이 바짝 말라가는 더위 같았다. 이렇게 덥다가도 갑자기 긴 팔 입어야 할 거야. 국경절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가을이 왔나 싶다가는 어느 틈에 겨울이라고. 아주머니는 에어컨을 틀어도 좀처럼 식혀지지 않는 더위를 향해 얼마 안 남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랜만의 나른한 토요일 오후, 그들 셋은 복숭아를 먹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아동 티브이 채널에 나오는 어린이 만화를 헤죽헤죽 거리며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기름칠이나 된 듯 신나게 돌아가는데, 이곳은 녹슨 시침이 꺼꺼꺼 느릿느릿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윤재는 이런 느린 여유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스스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딩동딩동! 평화로운 오후 2시 고모네 민박집에 방정맞은 벨소리가 연속해서 울렸다. 택배 배달원이라고 하기에는 신경질적인 리듬이었다. 아주머니는 민박집 손님들로 드나드는 곳이니 묻지도 않고 열림 버튼을 눌렀다. 붕어처럼 크게 튀어나온 눈의 옆집 후예예였다. 후예예는 한 발짝 성큼 들어와 수사관처럼 거실 내부를 살폈다. 윙윙 돌아가는 에어컨과 머리가 양쪽으로 돌아가 있는 선풍기를 확인하더니 뭔가 증거물을 확보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고는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순간 예상치 못한 훅이 날아들어 왔다 나간 것 같았다. 순식간의 행동에 아주머니조차 고개를 갸우뚱 하고 문을 닫았다. 신경들 쓰지 마. 좀 독특한 노인네라 생각해야지 뭐. 셋은 다시 어린이 만화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서 대머리 사냥꾼이 두 마리 곰을 쏘려다가 널빤지를 밟는 바람에 오히려 자신이 당하는 장면이 나오자 모두 일제히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