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모국어
-서정주의 [自畵像]을 중심으로
성배순
‘한 민족이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될지라도 자기말만 잘 간직하면, 마치 감옥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알퐁스 도데,[마지막 수업]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일 수 있다’ - 유종호.[시인과 모국어]
자연 과학자에게 있어서 모국어는 과학의 탐구 속에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수학언어와 과학언어는 보편언어가 작업현장에서의 도구이자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국어 없는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한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은 모국어 속에서 모국어와 함께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번역시는 시가 아니다. 서정주의 [自畵像]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自畵像] 전문
이 작품은 충격적인 첫 대목부터 시종일관 독자를 압도하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번역된 시를 보면 ①‘애비’를 親父로 번역했다. 親父는 實(じつのちち )로써 ‘친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다. 남에게 자기 아버지를 일컫는 父( ちち ), 혹은 お父( )또는 父親( )쪽이 우리말 ‘애비’에 더 근접한 것이 아닌가 한다. ②‘종’ 도 下人( )으로 번역했는데 이 경우도 下人을 에둘러서 표현한 ( )나 직접적으로 종을 뜻하는 下部( )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리얼리티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③‘파뿌리’에서 ‘뿌리’를 根先으로 번역했는데 ‘파뿌리’( )로 직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④‘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는 그냥 ‘살구를 먹고 싶다고 외쳤다’고 번역했다. ‘풋’이라는 접두어를 빼먹고 ‘꼭 하나만’도 빼먹은 것이다. ‘풋’은 靑( )를 앞에 붙이거나 ‘아직 익지 않은’살구 라고 번역하면 더 낫지 않나 싶다. ⑤ ‘애미의 아들’도 ‘女の せがれ’라고 ‘여자의 아들’이라고 번역했는데
‘애미’를 ‘女’로 번역한 것은 무리가 있다. 아이 주머니를 가진 여자 즉 엄마를 뜻하는 ‘おふくろ’라고 하는 쪽이 좀 더 원시의 의미에 가까울 것 같다. ‘아들’의 번역 ‘せかれ’(자기 아들의 겸칭, 남의 아들이나 연소한 남자를 낮추어 하는 말, 음경의 은어)도 그냥 ‘子’( )라고 직접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 같다. ⑥‘세상은’을 ‘世間’으로 했는데 의미상 혹은 발음상 ‘世の 中’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 ⑦ ‘헐떡어리며’를 ‘詩를 노래부르며’라고 했는데 그냥 ‘헐떡거린다’는 표현 ( )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런지.
대부분의 표현들이 그냥 설명적인 서술로 그쳐 원시의 긴박감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원시의 강렬한 리얼리즘에 기여하는 심상들이 거의 대부분 그 본래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옮겨진 시는 한 시대의 우리의 생활사와 습속과 가난한 생존의 ‘피’와 ‘바람'이 희석된 채 남아 있는 셈이다.
번역을 통해서 우리는 태반을 잃어 버렸다. 8할이 바람으로 사라졌다.
2007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