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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 (찬송 시편 23편)
금, 2016-9-2
시편 23편은 우리 성도들이 애송하는 시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된 나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목자의 비유를 통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시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 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 되신다 (1-3절)
(1절) 시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라고 하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목자는 양이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돌보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입니다. 목장에 많은 양들이 있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양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모든 양들이 제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고, 장점과 단점이 다릅니다. 목자는 각각의 양들의 특징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양들마다 각자의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니 각각의 양들이 모두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하며 목자 되신 하나님이 참으로 선하고 신실하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람 목자들은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지혜도 부족해서 양의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합니다. 게을러서 양을 함부로 방치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면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십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한결같이 신실하게 하나님은 좋은 목자 되실 것이라는 믿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또한 시인과 같이 나의 하나님 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직접 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직접 깨달아서 자신의 마음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절) 2절부터는 목자가 양을 돌보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누입니다. 푸른 초장은 풀이 많은 목초지입니다. 양들이 먹기에 좋은 신선하고 여린 풀들이 많은 곳입니다. 여기서 양은 낮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거닐며 마음껏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풀을 먹으면 목이 마를 것이니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서 물을 먹여 줍니다. 쉴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이 흐르는 개울입니다. 물살이 세면 양으로서는 편안하게 물을 마시기도 힘들거니와 자칫 잘못하면 물에 휩쓸려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목자는 양의 처지를 잘 헤아리고 안전하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배가 고플 때와 목이 마를 때를 미리 알아서 가장 좋은 곳으로 양을 인도합니다.
여기 2절에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같이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점을 주되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을 구하고, 업무를 수행하고, 집을 마련하는 등의 모든 일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실제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배불리 먹이실 것입니다.
(3절) 목자는 양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양이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기력이 쇠잔해져서 죽을 것같이 됩니다. 이때 목자가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해주면 기력을 회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목자가 양을 잘 돌봐 주어야만 양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 고난들 앞에 마음이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셔야만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소생시키신다는 말은 본래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새 힘을 얻는다는 말 속에 회개의 어조가 은근히 깔려 있습니다. 죄로 물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쳐 주셔서 회개하고 새롭게 하시는 일을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또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양의 입장에서 옳은 길은 목적지에 바로 도달할 수 있는 똑바른 길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험한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십니다.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면 안전한 길은 말 그대로 의를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목자의 이름은 1절에 나오는 “여호와”입니다. 출애굽기 34:6는 이 이름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처럼 참으로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증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로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시다.
2. 하나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양들을 지키신다 (4절)
(4절) 4절에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3절까지는 목자와 양이 초원을 뛰노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는데 여기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지만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지옥과도 같은 깊은 어두운 지경에 들어가는 일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고백한 것은 항상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하는 낙관적인 말이 결코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에도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해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옥같은 어두움 가운데 있어도 누구도 나의 몸과 영혼에 해악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 가운데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늑대의 위험 가운데에서도 양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고난받는 성도의 곁에서 함께 계실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홀을 뜻하고, 막대기는 노인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뜻합니다.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사나운 야수를 쫓아버리고 어둠 속에서 양의 길을 인도하듯이 하나님도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 4절에서 목자를 가리키는 말이 ‘주’라고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1절에서는 여호와, 2절에서는 그, 3절에서는 자기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제3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3절까지는 시인이 독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나온 ‘주’는 너, 당신과 같이 대화하는 상대방을 직접 부르는 말입니다. 시인은 지금 고난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지만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는 더 가까이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고난 가운데에서도 낙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23편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23편은 목자가 양을 멀리 데려가서 풀과 물을 먹이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2절에서 먹고 마셔서 기운을 차리게 한 뒤에 3절에서 집으로 가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5-6절에서 집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보면 4절에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6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기 전에 반드시 지나와야만 하는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호와의 집에서 여러분이 누릴 상이 큽니다.
3.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백성들을 귀하게 대접하신다 (5-6절)
(5절) 5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드디어 빠져나와서 목자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목자는 내 앞에 놓일 음식상을 준비하고 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몸을 단장시킵니다. 양을 환영하는 큰 잔치가 벌어지는 광경입니다. 이 잔치는 4절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4절에 이어서 여전히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 고난 가운데 맺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앞에서 내게 음식상을 베푸신다고 하여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에게 해를 끼치려 했던 자의 위협을 잘 견딘 것에 대해 보답해 주시는 것을 알려 줍니다.
시인은 1-4절까지는 분명히 자신을 양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되어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양같이 어리석고 비천한 존재에 불과했던 자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큰 성숙을 이루고 목자가 준비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잔치가 얼마나 풍성했던지 나의 잔이 넘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기세가 등등하여 나를 해하려 했던 그 원수는 이 잔치에 결코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원수는 자기가 나온 그곳으로 돌아가 영원한 어둠 가운데 갖혀 지낼 것입니다.
(6절) 6절에서는 진실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동안 나를 따른다고 합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인애 또는 신실하심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목자로서 선하고 충성스럽게 인도해주신 것 같이 앞으로도 평생 내 뒤를 따르며 지켜주겠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목자로서 앞에서 인도했는데 여기서는 뒤따른다고 하면서 내 앞과 뒤를 둘러싸고 지켜주실 뜻을 보이십니다. 나의 평생의 삶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게 나를 돌보시는 분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만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해당되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선과 인애라고만 되어 있고 높임말은 없어서 주어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고 시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선한 목자로 인도하시고 고난 가운데에서 지키시고 큰 상을 주셨으니 나 또한 평생에 하나님께 선과 신실을 행하며 살겠다 하고 다짐하는 말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잘 길러서 양이 목자를 닮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시인이 행하는 선과 신실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에서 하나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행하시는 가장 큰 선과 신실은 시인과 함께 거하며 시인을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드릴 선과 신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길 기뻐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따른다는 말과 영원히 거한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머물러있는 사람을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이 구절은 우리가 여호와 집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앞으로도 나는 인생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신실하게 계속해서 나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나 또한 선하고 신실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은 어떤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바로 그분의 집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인생을 살면 우리의 모든 삶이 여호와의 집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이 좋으니까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교회에서 예배만 드려야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삶의 터전에서,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아서 살면 그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이 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절에서 한 번, 6절에서 한 번입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1절과 6절을 연결시켜서 보게 됩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을 먹이시고,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4절에서 고난 가운데 처했을 때에도 나를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5절에서 고난을 이기고 나온 뒤에는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과 나는 선하고 신실한 교제를 친밀하게 나누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1절로 돌아갑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하는 고백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가 만족한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다 하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사람은 계속해서 2절부터 6절까지의 인생길을 걸어 나갑니다. 고백하고 살고, 산 것으로 다시 고백하면서 나와 하나님의 교제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부르면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