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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7:24-30 “차별이 없는 은혜”
과거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입은 신세(?)는 분명 고마워할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경제적으로는 잘 살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고, 민주적인 사회이며 나라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차별이 없는 기회의 땅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살거나 자주 가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유색인종의 차별은 21세를 달리고 있는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하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함으로 그 임기가 시작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라고 착각할 정도로 널리 퍼져있고 스스로가 자부하고 있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니,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단인 kkk단은 과거 종종 흑인들을 죽이거나 테러를 가하거나 동네에서 내 몰기도 했습니다.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흑인여성육군사관생도를 배출해도 차별의 문제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는 것은 그 심각성의 수준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나 문화는 그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얼마나 공평하시며 우리가 편리주의에 의해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것이 끔직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차별이 없는 주님의 은혜를 정확하게 경험하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22절)
주님께서는 잘못된 전통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에게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 곳이 두로와 시돈지방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주로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부정함을 주제로 올바른 교훈을 주신 예수님은 곧바로 이방인 지역을 방문하심으로써 음식물이나 인종 때문에 부정하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을 허무시려는, 차별이 없어야 함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아니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택함 받지 못한 민족, 신에게 버림받은 미족, 그렇기 때문에 개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으며, 한 지역에서 사는 것도 어려웠고, 함께 식사할 수 도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몇 몇 사람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이러한 것을 마치 국법처럼 지키며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 그런 여인이 22절에 가나안 여인이 나와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은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구약시대 때 몰아냈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살아도 결코 같이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 이 여인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헬라 여자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헬라인 즉 헬레니스란 표현은 ‘이방인’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흔히 헬라인이라고 하면, 헬라지역에 거주하거나, 헬라어를 사용하거나, 또는 헬라교육이나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수로보니게 족속입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로’에 속한 ‘보니게’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수로’는 오늘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시리아에 속한 보니게지역 출신으로,※ 철저한 이방인입니다.
결코 이 여자는 유대인인 예수님을 소리 질러 부를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차별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차별을 해도, 차별을 당해도 무방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외침에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크게 소리 내어 예수님을 불렀던지 제자들이 듣고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녀를 보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충 고쳐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란을 잠재운 예수님의 한 마디가 들립니다.
24절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선민 중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백성을 찾기 위해 왔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거절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명히 차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왜요? 그녀는 이방인이니까요!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렇게 해도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당시의 관례였고, 풍습, 전통, 법이었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역사적 선민은 아니었습니다. 이름 모를 민족, 우상과 조상을 철저히 섬겼던 민족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 결코 매달릴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멸시받아 마땅하고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과 우리는 적대적 관계 속에서도 힘이 없었기에 철저한 차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조센징! 바가야로!” 등으로 불리며 차별을 치욕적인 숙명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이런 아픔의 역사를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받은 차별을 교훈으로 남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보다 못한 약자에게 우리는 어떤 차별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2.포기하지 않고 구하였습니다.(25절)
아무자격 없는 이방인 여인이 지금 간절히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통 중에 있는 딸을 가진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왜 자신이 거절당할 것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자신이 개, 돼지 취급을 받는 신분의 민족인지를 모르고 있겠습니까? 유대인들과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왜 모르고 있겠습니까? 차별받아 마땅하고 거절 받아 당연하다는 것을 그동안 왜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대인 예수께 나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 받을 자격이 안 되지만 그녀는 은혜를 받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오직 자신과 딸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실 분이 예수님뿐이라는 절박함과 확실함을 가지고 나와서 믿음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명예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주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나와 부르짖고 있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께서 더욱 철저히 거절을 표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떡’은 일차적으로는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 생명의 주님 혹은 구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는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끈질김의 간구에도 예수님은 더 깊고 확실한 거절을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신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유대인들 위해 부름 받았다고 하십니다. 즉 유대인들이 선교의 우선대상이기에 유대인과 다른 이방인인 여인과 그 딸에게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에게 은혜를 받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은 개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이방인이며, 차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27절에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굴욕적인 답변에도 그녀는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무자비한 반응에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수긍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상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고 말함으로서 유대인들과 같이 자신들도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부스러기는 약자를 위한 배려입니다. 구약에서도 추수하고 남은 곡식일부를 그냥 밭에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 즉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구원을 구하고 있느냐 그렇치 않느냐? 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①여인에게 이방인을 위해 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②자녀인 유대인들에게 갈 구원의 은혜를 개와 같은 너희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두 차례의 가혹한 외면과 거절에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꺾을 수 없습니다. 구할 자격조차 없는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오직 구원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구원만이 이 여인과 딸을 살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입장,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이 중요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생명을 구하고 있느냐가 핵심입니다.
3.차별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28절)
포기하지 않고 온 열정과 진심을 다해 믿음으로 매달리는 여인에게 주님은 마침내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정말로 간절한 마음이 있는지? 이 시대적 상황에서 차별을 거두어 내고 은혜를 베풀어도 될 여인인지, 시간을 두고 상황 속에서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28절에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하는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 구원의 순서까지도 뛰어넘는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부스러기만으로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는 주님으로 믿으니 어찌 믿음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녀는 비록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지만, 그녀의 믿음은 칭찬받아 아 마땅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에게 이 여인의 출신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은 이 여인이 주님 자신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의 외형적 모양이나 배경이 아닌 주님을 향한 마음을 보시려고 했고 마침내 그것을 보셨습니다.
비록 구원의 은혜를 결코 받을 수 없는 처지와 신분의 여인이었지만 간절함과 확신의 찬 믿음으로 구할 때 주님은 차별과 냉소를 거두시고 구원의 순서까지 바꾸시며 마침내 치유와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선포하심과 동시에 그 귀신은 그녀의 딸로부터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표현을 더 확장해 보면 그녀의 딸로부터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 여인과 소녀에게 임재 했다! 주님의 차별하지 않으시는 은혜가 주권적으로 역사했다! 는 뜻입니다.
여인은 가장 절박한 문제를 틀림없이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은 미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임할 자세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기준은 우리가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겉모습이나, 신분이나, 형식이나, 물질이나, 권력이 아닌 진실 된 마음, 곧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차별이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분을 보고, 출신지역을 보고, 학력을 보며, 실력을 봅니다. 재물을 보고 권력의 크기도 봅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서 평가하고 대우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차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서 있는 저와 여러분 자신의 현재의 모습만으로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권력이 없어도, 나의 가족이 아직 믿지 않고 있어도, 내 열심이 부족해도, 많이 드릴 수 없더라도...다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오시기를 축복합니다.
차별이 없는 은혜의 가장 큰 수혜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통해 주님을 알리려 했습니다. 병원을 짓기도 하고, 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사회를 계몽하기도 했습니다. 차별 받아 마땅하고 버려져도 할 말 없는 이 민족을 위해 하나님은 구원의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복음의 씨앗을 뿌려주시고 자라게 하시며 동시에 값진 열매도 맺게 하셨습니다.
그런 사랑과 은혜 속에 일어난 이 나라와 이 땅의 교회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차별이 없는 은혜를 받았기에 똑같이 차별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역과 학연으로, 세대 별로, 다양한 교단으로 갈리고, 산업의 일꾼으로 꿈을 안고 오는 이주 노동자들을 여전히 차별하는 진영의 논리에 갇혀있습니다. 주님처럼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과 드러나는 현상들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본문 속의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부르짖었고, 주님은 그런 이방여인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차별의 시대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걷어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을 구하고 차별이 아닌 이해와 사랑으로 대할 때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시고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