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에서 이원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서대리 입구에 내려 약 1㎞정도 길을 따라 걷다보면 그 옛날 서당이 많았다 하여 서당골이라 이름 지어진 마을에 닿게 된다.
둥그렇게 모두어진 1백호 남짓되는 집들을 뒤로 마을 동산위에 온갖 비바람에 시달려서인지 허름해만 보이는 집 한채, 그것이 바로 박세환 효자문이다.
박씨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904년 고종 14년에 한평반의 목와조다포집 효자정문을 세우게 된 것이다. 봄빛을 받으면서 자란 파릇한 잔디의 싹으로 곱게 단장된 앞 길과는 달리 초췌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는 대문을 비롯, 모든 것이 세월의 역경인 듯 하다.
박세환 효자는 평소에 부모님 모시기를 한번도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적이 없고 항상 기쁘고 편안하게 봉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한때는 아버지가 병으로 몹시 앓게되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정성껏 간호를 했으나 별다른 효염을 얻지 못하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일념으로 한겨울에 밥을 싸들고 석달동안 저수지를 전전긍긍한 끝에 결국 잉어를 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을 고아드렸더니 병환이 낫게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그후 묘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효행이 조정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한평반의 효자문을 건립, 지금까지 함양박씨 문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지금의 이 효자정문은 6.25때 소실된 곳을 다시 건립한 것으로 박세환 효자의 산소는 동이면 적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효자정문 모든 것이 낡은 상태로 보수를 요하고는 있지만 재정관계로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이분에 대한 예의라고는 매년 10월14일에 제사 한 번을 지내는 것이 전부이지요." 못자리판을 일구다 말고 박세환 효자문의 관리를 맡아 오고 있는 박정근씨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건낸다. 이기주의로만 치닫고 있는 현대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효'라는 존재는 옛이야기로 묻혀버린 지 이미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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