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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동아토목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허수아비
처음이란건
뭐든지 설레기 마련이다.
첫 등교,
첫눈,
첫만남,
첫사랑....
그런데
올 첫 겨울 산행은
설레임 보다는
걱정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산행 구간이
이화령에서 시작하여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조령(鳥嶺)산과 새재이기 때문이다.
조령은
주흘산과 마주보며
남으로 조령산
북으로 마패봉과 신선봉을 거느리고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을 경계로
우뚝 솟아 있다.
조령산에서
마패봉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기묘한 괴석의 전시장(展示場)으로
수 많은 봉우리들의 집합(集合)이며
그 중에 신선암봉은
최고의 경관(景觀)을 자랑한다.
신선암봉에서
원형(圓形)으로 조망(眺望)되는 마루금은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여
발길을 붙드는 곳으로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북쪽방향 신선봉에서 마패봉
월악산 영봉과
주흘산에 이르는 마루금은
포암산과 대야산을 곁들여
아련한 옛 생각 떠 올리게 한다.
내가 이조령산에 다시오나 봐라.
이 말은
오늘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조령산은 이번이 두번째다.
아마 십여년 전 일이니
기억은 아득하지만
그래도
그때 그친구가 생각이 난다.
내 친구 영만이????
조령산 봉우리들은
높이가 1,000M를 넘나들지만
칼날처럼 뾰쪽한 곳이 많아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으로
산행(山行)에
주의하여야 할 구간이 많다.
문경에서
일박을 한 우리는
새벽04시에 기상,
라면 한그릇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조령 제삼문으로 이동.
하산후 승차할 차 한대를
조령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주차시킨후
엄형의 차로 갈아타고
이화령으로 이동했다.
이화령에 도착하니
아직도 어둠속이다.
장비를 추수리고
화장실을 다녀온뒤
07:00 어둠이 가시기도 전
조령산으로 향하여
첫 걸음을 시작한다.
문경새재
문경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을 걸어보는길이다.
문경새재는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고개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루를 넘는 새재는
조선시대 영남과 기호 지방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상의 중심지였다.
사회, 경제, 문화 등 문물의 교류지이자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문경이란 지명은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길은
한반도 우측의 소백산맥에 있는 죽령,
좌측의 추풍령
그리고 가장 중심부의 문경새재
세 갈래 길이 있었는데
문경새재가 가장 단거리 이기도 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 처럼,
죽령은 우후죽순 처럼
우수수 떨어 진다는 속설이 있어
문경새재 길을 가장 선호 했던 바
과거를 급제한 연후에도
그 기쁜 소식을
고향에 가장 먼저 전해 줄 수 있는 곳이
이곳 문경 땅이였다고 한다.
조령산(鳥嶺山 1,017m)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을 나누는
백두대간 마루능선을 이루는 산이다.
조령산은
신선봉(神仙峯 967m), 마패봉, 주흘산(主屹山 1,106m) 등
경관이 수려한 산들로 주변이 이루어져 있으며,
조령산과 신선봉 사이 안부에는
그 옛날 영남지역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다니던 가장 유명한 큰 고개의 하나인
조령(鳥嶺)이 있다.
조령산은
충북 쪽으로 암벽이 발달하였고
경북쪽은 주흘산과 마주하며
그 사이에
문경 제1, 제2, 제3관문을 만들어 놓았다.
조령은
대간 상에 최초로 뚫린 고갯길인
하늘재(계립령)를 대신하여
조선 태종 14년(1414)에
열린 새로운 고개로 새(new) 고개라는 뜻의
새재(New Road) 라고도 부른다.
조령산이란 산 이름을 낳게한 조령(鳥嶺)은
와전된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조에 조령은
속칭 초재(草岾)라 기록되어 있다.
초(草)는 억새 등을 말하는 새이고
재(岾)는 우리가 만든 한자로서
음은 재 또는 점으로
초재는 새재이고,
우리말인 억새가
새가 날아다니는 새로 변해
조령이 되었다.
.
.
.
내 친구 영만이 넘은
불우한 가정 형편이 고려되어
일등병을 달기 바쁘게
흔히들 말하는 의가사 제대를 하곤
관광회사에 입사를 하였다.
약 일년간을 다니며
어머님이 결혼 자금으로 주었던
오천만원을 투자하여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서
인바운드
즉 국내여행권을 취득하고
상호를 그대로 쓰면서
별도 법인을 설립,
30대 초반에 사장에 취임 하였다.
생긴
쌍판데기와는 달리
무슨 재복이 그리 많은지
삐까뻔쩍하는 관광뻐스가
자고 나면 증차가 되기 시작하여
일취월장케 되었는데
예상했던 바
결혼생활은 원만치가 못 했던 가 보다.
꼭두새벽에
차량을 배차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차량 입고를 확인해야 하는 영만이는
주로 새벽밥을 먹어야 되는데
밥 달라고
디비 자는 예팬네를 깨우면
한쪽 눈만을 비시시 열고는
예팬네가
일갈을 한다고 한다.
야! 임마.
전자밥통에 밥 있고
냉장고에 반찬 들어 있어
한놈만 일어 나서
쳐 먹고 나가면 될 일을
무엇땜에
두 년놈이 일어 나서
부산을 떨어야 하냐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만이 넘이
결혼을 한 이후에
술만 쳐 먹으면
혼자서 중얼 중얼 거리는 말이
다름 아닌
어떤 개새낀진 잘 모르겠지만,
전자밥통 이란 걸 만든 새끼를
만나기만 하면
때려 죽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놈의 예팬네가
사흘이 멀다고
처녀 시절 친구들을
신사동 네거리에서 만나선
술에 꼭지가 돌아야
집꾸석에 들어 오는데
서방 이라고
잔소리 라도 할려고 들면
부엌으로 들어 가서
부억칼을 들고 나와선
행패를 부려 댄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불운한 결혼 생활 덕분에
평탄치 못한
유년 생활을 보냈던 영만이는
차마
이혼이란 걸 할 수는 없고
이리 저리
고민을 하다가
북한산 어느 덕 높은 스님을 친견하여
자문을 구 하니
당신의 현재 재복은
거의 부인 덕 인지라
복덩어리로 생각하고
부인이 술 먹고 들어 와서 곤히 주무시거든
아무 소리 말고
부인을 향해
삼천배를 올리라고 말씀하여
실제로 여러 번이나
삼천배를 올렸다고 한다.
허지만
그느무 돈도 좋지만,
별별 심정이
아니 들 수야 있었겠는가?
그러던 중
은행원 남편과
엘에이로 도피 행각을 했던
영만이의 옛 애인 불여우가
우연한 기회에 고국엘 들렸다가
동대문시장 입구에 있었던
영만이 회사 간판 전화번호를 보고선
인사나 할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전화 응대를 하는 여직원 말이
지금 사장님께선 외근 중이시라며
연락처를 남겨 달라고 한다.
머~어
사 사장이라고?
이미 엘에이에서
은행원 남편으로 부턴
단물이란 단물은 다 빨아 먹은
불여우의 눈깔이 디집어 진다.
마포에 있는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마침내 도킹을 하는 그 순간,
정과 사랑에 굶주린 영만이 넘은
불여우의 간교한 계략에
여지 없이 한방에 넘어 가게 된다.
머리 회전이 빠른 불여우가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 어린 눈빛으로
시종일관 그날 했던 말은
크게 두가지로 보면 된다.
첫째는
당신과 재회를 하게 되면
일평생 당신을 위해서
따스한 밥상을 잘 차려서 올릴 것이며
두번째는
당신과의 연애 시절
대천 해수욕장
허룸한 텐트에서의 하룻밤이
성숙한 여인이 되고난 이후
남정네와의 첫 밤이란 것이다.
사내 자식들이란?
처음처럼(이슬이가 아님)에
뿅 가지 않는 인간이 별로 없다.
어리 버리한 영만이는
이 처음처럼에
확 맛이 가고선
그 즉시
커피숍과 연결된 엘리베이트를 타고
그 불여우와 함께
호텔 객실에 발을 드리 밀었는데
다음 날
출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약 일주일 간을
같은 호텔에서 먹고 자고 하여
마침내 영만이의 걸음걸이가
갈 짓자로 걸을 지경 까지
만들어 놓은 불여우는
황급히
엘에이 행 비행기를 탄다.
유능한 변호사를 사선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쌈빡하게
이혼 소송을 끝낸 불여우는
지체 없이 귀국을 하여
영만이가
미리 장만해 둔 아파트에 여장을 풀곤
큼직한 냉장고에
미국 마트에서 파는
온갖 음식 부스레기와
건강 보양 음식을
켜켜이 쌓아 두고선
영만이에게 이혼을 종용한다.
영만이가
밍기적 거리는 말투로
자기 부인에게
처음으로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때
그 즉시
식칼이 날아 올 것이란,
여러 사람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 진다.
머~
이 이혼?
니깐 놈 마음대로 한번 해 봐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부인은
그 자리에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협의 이혼 서류에
도장 부터 찍어 준다.
80년대 후반
노 태우 대통령의
6.29 민주화 선언이 있은 이후
국내가
파업과 노동운동으로
몸살을 앓던 시절
영만이는
당시 돈으로
팔억 사천만원을 받은
관광회사를 비롯하여
국내에 있는 팔 수 있는 재산이란 재산은
모두 처분을 하곤
그 돈을 갖고
불여우와 함께
엘에이로 잠행을 하게 된다.
행복한 나날 이였느냐구요?
모 명문여대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불여우는
미국 본토 사람 뺨 치게
비지네스 영어가 유창하여
제법 큰 세탁소를
여러 개 운영하게 되었는데
콩구리쉬 수준도 못되는 영만이가
무슨 할 일이 있었겠는가?
불여우가 델고 온 남매와
영만이가 델고 간 남매
도합 네 명의 학생들을
어렵게 운전면허를 따고
통학이나 시켜 주고 나서는
세탁소에
먹통들이 맡긴
청바지 물 빠질까봐
디집어서 세탁기에 넣다가
운 좋으면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동전 몇 개 집어 드는 일이나 하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세시 경이면
뜬금없이
나를 비롯한 몇 몇 친구들에게
전화질을 해 댄다.
그 시간이면
엘에이는
아마도 잠 드는 시간인 가 본데
침대 머리맡에서
쏘세지에
깡쐐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후
조경사업,
자동차 수리업을 비롯해서
좌우지간
손을 댔다 하면
엎어 먹기가 일쑤란 말 만을 들었을 뿐인데
세월이 지나며 연락마져 끊어 버려
근황을 모르고 지낸 지도
무척이나 오래 된 봄날.
여기 저기서
영만이가 귀국을 했다고 하는데
혹시
나 한테
연락이 오질 않았냐는 것이다.
이쪽 저쪽
귀동냥을 해 보니
이미 미국에선
이혼 소송이 거의 끝이 난 상태이고
문제는
영만이가 미국으로 잠행할 무렵
휴전선 근처에 있어서
팔지 못 했던 철원땅과
서울 시내에 있었으나
악조건으로 도무지 팔리지 않았던 땅이
몇 필지 있었는데
불여우가 이 땅마져
가압류를 걸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영만이 넘은
바지 가랭이에 낑겨 다니는
감자 두 쪽 밖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
식칼을 들고 덤볐어도
타고 난 재복이 많았던
옛 여편내가
아무래도 영만이 에겐
조강지처가 틀림 없었나 보다.
참고로
쓸모가 없어서 버려 두었던
서울 변두리 땅엔
요즈음 아파트가 들어 설
예정이라고 한다.
.
.
.
조령산 정상에서
신선암봉을 경유하는 능선길에서
자연의 신비스런 조화를
잠시 훔쳐 볼 기회를 갖는다.
순간 순간
운무가 피어오르고
촌처녀 볼기짝 같은
허연 바위 덩어리가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먼 산 가까운 산이
교대로
시야에서 들어 왔다 나가기를
마치
만화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땀을 흘리고
수고로움을
아낌없이 내 던졌던 이들 만이
누릴 수 있는
과분한 자연의 선물 앞에 서니
잠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무아의 경지란게
바로 이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 매니아를 자처 하며
산을 찾는 이유를
제각각 말한다.
저기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는 분도 있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씀 하시는 분,
땀을 흘린 뒤
시원한 산바람을 맡는
쾌감 때문이란 분,
산엔
남녀가 혼성으로 다니는 통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니시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허지만 허수는
솔직히 말 해서
과도한 체중 덕분에
숨을 헥 헥 거리며 산을 오르는 것은
여~엉 즐거운 일 만은 아니다.
다만
산엘 오르면
속세의 일 들을
비록 잠시 잠깐 이긴 하지만,
말끔히 잊어 버릴 수가 있다는 것이고
덤으로
산행을 마친 이후에
뒷풀이로
걸쭉한 안주에
쐐주 한잔을 곁 드릴 수 있는
그 쏠쏠한 재미 때문이다.
영만이가
옛 부인과 함께 살던 시절
자신의 친구를 이 허수에게
어느 술자리에서 소개 해 준적이 있다.
이 친구는
얼굴이 당나귀 처럼 길쭉해서
너구리 라고 불리기도 하고
요들송을 잘 불러서
매미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참으로
귀하디 귀한 자식이다.
2대 독자 이셨던
매미의 아버님께서
내리 일곱명의 누나들을 낳으신 이후에 본
삼대 독자가 매미이고
매미의 여친은
늘씬한 키에
조막만한 얼굴과
뽀얀 피부에 켵들여
반짝 빤짝 빛 나는 금테안경이
무척이나 조화로운 여인네 인데
행동거지는
만만치가 않았다.
이북 출신으로
모 법대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엄한 아버님 덕에
고등학교 까지는
그럭 저럭 착실한 생활을 했었는데
영만이 옛부인을 만나면서 부터는
상황이 확 바껴 버린다.
술 담배는 기본이고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 오기를 밥 먹듯이 해 대자
완고한 아버님께서
이 딸의 머리를 박 박 깎아 버린다.
머리 정도 깍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자나 깨나 불조심
자는 딸도 다시 보자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요즘 조폭들이 하고 다니는
깍뚜기 머리를 하고선
종로나 명동 거리를 활보 하였었는데
늘씬한 키 덕분에
보는 사람들이
모델들의
뉴헤어 스타일 인 줄로만 알았단다.
좌우간
생긴 것 하곤 다르게
약간 맹한 구석이 있는
매미의 여친을
우리는 맹희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매미 아버님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맹희네 집안이
아마 개신교 집안 이였는지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집전으로 식을 거행 하였다.
원래 목사님께선
말씀이 많지 않는가?
긴 주례사에 이어
찬송가 까정 불러 대는 것 정도는
그래도 참을 만 했었는데
이제나 저제나 끝을 내는 가 하고
기달리고 있으니
찬송가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눈을 감으라고 하신곤
기도란 걸 올리기 시작한다.
사실 결혼이란 건
오늘의 결혼이 있기 까지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
즉 혼주님들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 우선이데
목사님께선
심사가 이미 틀릴대로 다 틀려 버린
매미의 아버님을 앉혀 두고,
매미의 부모님은 온데 간데 없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제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의 은총을 어쩌고 저쩌고 하며
기도 삼매에 빠질 무렵
갑자기
매미의 아버님이 벌떡 일어 나신다.
좌중을 둘러 보시던
매미 아버님께선
이 중에서
신랑 혼주를 보고 찾아 주신 하객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 나라고 하시더니
일어 나신 많은 하객들을
양몰이 하듯
예배당 밖으로 끌어 내시곤
집으로 횡 허니
발길을 돌려 버리셨다.
이미
결혼식장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고
사색이 된 매미 부부가
얼결에 도망치듯
신혼여행이나 갈려고
김포공항으로 내 달렸는데...
어랍쇼??
제주행 비행기표 예매가
틀림 없이 캔슬 되어 버렸다.
여행사를 하던 영만이가
김포 공항에 파견 나가 있는
직원에게 연락을 하여
정식으로
예매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장난 치곤
넘 심한 장난 이였던 것 같다.
제주행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서도
한참이나
공항 구내에서 머물던 매미 내외는
별 도리가 없게 되자
공항 근처에 있는
허룸한 여인숙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 푼수 대가리 같은 맹희가
남편과 중대사를 치루기 전에
남편 귓볼에 대고
머라 머라 주졀 댔는데
나도
먼 후일 그 내용을 들었다.
여보 매미씨!
당신을 만나기 전에
당신 친구 허수씨를
먼저 만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 이란 것이다.
매미 아버님은
일자 무식으로
일제 때 만주에서
소장사를 하여 거금을 만졌던 분인데
돈을 버는 쬭 쬭
예전 머슴살이 하던
슬픈 심정을 만회하고져
전 답과 임야를 가리지 않고
헐값으로 무진장 사 두셨는데
다행히도 일자 무식인지라
사업 같은 건 하지도 못했으니
한 필지도 팔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해 온 그 땅.
그러니깐,
쌍문동,창동,방학동 일대의 땅들이
상계동 일대가 개발 되면서
엄청난 폭등을 하게 된다.
지방 노가다판에서
근근이 굴러먹던 내가
구겨진 담뱃갑 처럼
풀이 푸욱 죽은 상태로
혹여
친구로 부터 위안이나 얻고져
쌍문동에서 그를 만났다.
이미
누나들과 칼부림을 한 연후에
아버님의 알토란 같은 땅들을 독식하여
이곳 저곳에 주유소를 개설 하곤
비싼 승용차를 사서 거들먹 거리고 있던
매미를 찾아가는
내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이미
딸을 둘이나 본 매미 내외가
쌍문동 일대 소문난 고깃집에서
떡 벌어 지게 한 상을 차려 줄 때
오늘 하루만은 행복하고,
진정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친구를 두었다는 생각만
골똘히 하며
허겁 지겁 소주잔을 들이 키는데
갑자기 매미 넘이
자기 마누라를 향해
벼락같이 큰소리를 쳐 댄다.
야~
이 뜨발 같은 인간아!
너 허수 저새끼
엄청 잘 나갈
큰 인물이라고 주절댔지?
하더니
촌각을 지체치 않곤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하면서
손꼬락을
창날 처럼
내 이마빡에 내리 꽂는 가 하더니
잘~ 봐 허수 이새끼를....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야
똑 바로 봤어?
눈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서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는데
무진장 고생을 하다
간신히
고깃집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청승 맞게
가을비가 부실 부실 뿌리고 있다.
어디로 걸었는지
어느 곳에서
또 술 한잔을 더 마셨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마냥 걸으면서
내 대가리와
가슴만 연신 쥐어 박았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평생지기로 생각해 온 내가
바보란 생각과,
내가 언젠가 능력이 닿으면
꼭히 손을 봐 주어야 겠다는 인간이
딱 한명 있었는데
그 리스트에
매미란 인간,
아니 개새끼만도 못한
어떤 놈의 이름이
한명 더 등재 되었다는 생각 뿐이었다.
후일
카더라 방송에 의하면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이런 봉변을 다 당 하였는데
봉변을 당한 사람들의 유형이
동일 하다고 한다.
매미 넘이
어려웠던 시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현재는
사정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
그렇고 그런 인물.
돈을 많이 벌어서
예팬네를 갈아 치우는
몹쓸 인간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았지만,
지전 몇 푼 움켜 쥐었다고
친구를 물갈이?
매미 넘이
형제들과 칼부림을 벌이며
아버님의 재산을 독식한 땅 덩어리는
90년대 말 돈 단위로
60 억이 넘는 거금이였으니
매미 놈이
뱃때지 훌랑 뒤 집어 지는
환장을 하고도
사실 남을 돈 이긴 하다.
헌데 그 돈
지금도 매미 놈이 갖고 있냐구요?
물론
그 날 이후로
매미놈 낯짝을 본 적이 없으니
정확하게 어떤 사유로
그 많던 재산을
다 말아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들의
후일담을 종합해 보면
매미놈 재산의 반수 이상은
쌍문동 일대에 즐비하게 들어섰던
룸 싸롱 마담년
치마 가랭이속에
쑤셔 넣은 건 틀림 없어 보인다.
그리고
매미 놈의 재산이
가압류다 가등기다 머다 해서
거의 다 넘어 갈 무렵
우연히 매미네 집을 방문했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술이 곤죽이 되어
집꾸석에 들어 온 매미 넘이
부인에게 손찌검을 해 대고 있을 때
안방에서 나온 매미 노모께서
마루 바닥에 털석 주져 앉으시며
대성 통곡을 하시더란다.
매미 이 놈아
귀하디 귀한 내 자식 놈이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면서...
그래
그옛날 여름.
그러니까 십여년전.
조령산 산행을 마치고
날 머리인
수옥정 인근에 오니
맑디 맑은 계곡물이 철 철 거린다.
함께 내려 왔던 두발로님과
약간은 시간이 지체 되었는지라
대충 세면만을 했었는데
난 담배 피울 욕심에
두발로님을
먼저 떠나시게 한 것이
엄청난 화근이었다.
계곡을 막 벗어나
콘크리트 길로 오르니
멀지 않은 곳에 매점 같은 것이 있고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
혹
우리 느림보님들의
뒷풀이 장소가 이곳인가 하며
급한 발걸음을 내 달리는데
어떤 남정네가
내 쪽으로 다가 오는 듯 하더니
자꾸만
피해 가는 내 앞길을
여러 번이나 막는데
난 취객인 줄로만 알고
또 한번 더 옆으로 비켜 서는데
이 남정네 뒷편에
갓난 애기를 안은 어떤 여인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허수씨 맞죠?
허수씨 틀림없자나요?
아마도 내가
자신들을 알고도
모른 척
하는 줄로 알았던가 본데
난 정말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보질 못 했다.
으악
매미 개새끼와
그 예팬네 맹희년 이었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그 많던 재산 다 털어 먹곤
귀촌이나
귀향이 아니라
서울에서 먹고 살기가 힘 들어서
이곳 인근에 있는 농가로
이사를 왔다고 하는데
매미놈은 여태도
무위도식 하며
백수 생활을 하고 있고
부인이
인근 도시에 있는 마트에서
캐셔로 일 하고 있다고 한다.
말문이 막힌다고 하더니
너무심한 충격 때문에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져 빙그시 웃고만 있다가
종내는
딱 두 마디만 했다.
맹희씨!
매미 이 인간
여태도 발기는 잘 되는겨?
웬걸요.
인쟈는 정말 조또 아니네요.
차를 끌고 온 맹희가
자신의 차로
느림보 뒷풀이 장소 까지
데려다 준다고 억지춘양을 부려
할 수 없이 차를 타고 오는데...
맹희 말이
좀 전에
자신들이 있었던 매점 앞으로
느림보 아줌마들이
꽤 여럿 지나 가는 것을 보았는데
허수씨가
어떤 아줌마들 하고
어울려 다니는 지를
꼬옥
직접 확인을 해 봐야 겠다는 것이다.
사실
어울려 다니는게 아니라
단지
제 각각의 사유로
제 각각의 시간에
이곳 느림보 산악회엘 오는 것 뿐인데...
오기 실으면 그만두면 되는 곳인데...
오늘은
내일이 복날이라고 하여
느림보 대장님께서
특별히 보양식으로
황기 백숙을 사주신 지라
많은 느림보 벗님들이
오손 도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며
맛난 백숙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바로 코 앞에
차를 멈춰 세운 맹희씨 왈~
허수씨는 지끔 꺼정도
여자들 보는 눈이
높은 건 그대로네요.
(물론 너희 두 년놈 보단 꼴백배는 낫다.)
허수씨 얼굴도 좋아 보이고
행복하게 사시는 걸 보니
넘 좋아요.
(입이 침이나 발르고 씨부려라.)
오랫만에
사람을 보고선
왜 말이 한마디도 없으세요?
두번째로
나도 한마디 던졌다.
저 이뿐 아줌마들
이 산악회에
왜 나오는질 알어?
다 내 때문이야.
허수씨 뻥 까는 솜씨 또한
그 때 그 대로네요.
그날
버스에서 부터
술이 떡이 되었는데
인천 동암역에 내려
집에 들기전에
또 한잔을 더 마시곤
아마도 엉금 엉금 기었던
기억만 난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모래에 새겨야 한다고들 하지만,
젊은 날 입었던 가슴의 상채기는
세월도 약이 되질 못 하는 경우가
있기는 있나 보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어디에 시시는지도 모르지만,
그때
심한 충격으로
안절 부절을 못 하고 있는 나를 위해
마치
누님들 처럼
옆에서 위로해 주시고
술잔을 권해 주시던
영식님! 텔미님!
그리고 카타리나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
.
.
제3관문에 도착하니 오후4시다.
남들은 6시간이면 종주 한다는데
눈쌓인 겨울산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조령에는
수난의 역사와
치욕의 역사도 함께한다.
임진왜란(1592년)때
왜군의 1군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이
침략군을 이끌고 처들어 올 무렵
이곳을 지키던 申砬신립(1546~1592년)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지키지 못하고
충주탄금대로 물러 나
배수의진을 치고 싸웠으나
전멸당하고 만 아픈사연이 있었다.
그 옛날에있었던 일이 지만
우리의 현시점에서
그때 상황을 돌이켜 볼만하다.
국론의 분열
선조대왕 당시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 당파싸움이 한창일때
전장의 장수들은
사실 그들의 힘을 재대로 써보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뒤늦게 李鎰(이일)을 순변사로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땅에 진을 치게하고
한편으로 조정에서는
함경도 변방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장군을 불러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기마병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 보냈다.
수뇌작적 회의에서
문경세재에 진을 치자는 의견과
새재는
기마병이 싸우기에는 골짜기가 협소하여
힘을 못쓸것이란 의견이 있어
끝내 신라 우륵이 가야금을 탓었다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넓은 평야에서 적군을 맞아 싸웠으나
파죽지새로 밀고오는 적군의 손에는
머스킷(musket)소총이 들려 있었다.
조선의 기마병은
그저 표적 일 뿐 이었다.
역사는
과거에 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시간 시간 기록되어지고 있는데
연평도에서
천안함에서
백령도에서도 쓰여지고 있으니
위정자들과
통수권자들은
역사를 바로 잡는것도
소홀히 해서는 않되겠지만,
지금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 할 것 인가도 중요하고,
통수권자와 지휘관은
급변사태에 대응하는
치밀한 준비와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다.
아침안개 희미한 산자락에 헉헉대며 올라온 산 중턱에서 보면 다 잿빛만은 아니었다. 발그래한 두볼이 아름답다. 큰웃음 한번으로 온갖시름 날아간다. 산을오르는것과 노란은행잎이 되고, 그리움도 우려내면 은근한 주황이 되는걸... 성숙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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