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거정이 쓴 <동국여지승람>에는 두모포가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고 했다.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한강가를 부르던 땅이름이었다. 그 동네는 옥수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옥수동의 유래는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그 유래를 정리하였다.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는 마을 이름이 옥수동으로 붙여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두뭇개ㆍ무멧개ㆍ두물개 또는 두모주ㆍ두모포라 불렀으며
영조 27년(1751)의 기록에 의하면 한성부 남부 두모방(성외) 두모포계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남서(南署) 두모방(성외) 두모포계의 두모동이 되었다.
일제 점령 초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라 했으며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에 의하여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가 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제식 명칭인 옥수정이 되었으며,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실시에 따라 성동구역소 관할 아래 있었다.
1946년 군정법령 제 108호에 의해 경성부가 서울시로 고쳐지고,
서울시헌장 제 1조에 의해 옥수정을 옥수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옥수동 일부가 한남동으로 편입된 바 있다. "
본류와 중랑천의 ‘두 물이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두뭇개’라 불렀다.
두뭇개를 한자로 옮기면서 두모포(豆毛浦)라고 쓰이게 되었다.
이 두뭇개에는 문정왕후와 친동생 윤원형 그리고 그 첩 정난정이 빚어낸 희극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조선시대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신 정치를 했다.
그에 따라 문정왕후에게 엄청난 권력이 쥐어졌고 따라서 문정왕후의 가족도 엄청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정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이었다. 윤원형은 첩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난정’ 이었다.
난정은 매년 2~3번 씩 두모포에서 물고기에 밥을 주며 복을 빌곤 했다.
어느 날 두모포에서 어부 한 명이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크기가 배(舟)만 하였다.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보고 윤원형이 곧 죽을 징조라고 생각했다.
윤원형의 형(衡)은 행(行) 자와 어(魚) 자가 합쳐진 말이다.
큰 물고기가 한강에서 와서 죽은 것이 이름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들 말했다.
실제로 몇 일 후 문정왕후가 죽었고 때문에 권력을 잃은 윤원형도 곧 죽음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1501년에 윤지임의 딸로 태어나 1517년 중종의 세번째 왕비로 간택되어
1530년대까지 공주만 3명을 생산하다가 1534년 34세에 아들인 명종을 얻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이때 인종은 이미 20살로 장성한 세자였고, 명종은 갓난아기에 불과하였다.
1544년 중종은 병이 깊어져 57세의 나이로 중종38년에 승하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조선 역대 왕들 중 가장 최연소 정치를 한 인종이다.
인종은 장경왕후의 아들로 중종의 적장자이면서 효혜공주의 남동생이었다.
인종은 30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병약했다. 그래서 물론 후사도 있질 못했다.
그때 경원대군은 9살에 가례를 올렸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에 사사된 인물들 가운데 서로간의 당파를 막론하고
어진정치를 펼치려 애를 썼지만 재위한지 8개월여만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경원대군인 명종이다.
그때 명종의 나이 12세.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나이다.
그러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당시 인종의 비였던 인성왕후 박씨(왕대비)도 있었지만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을 하는 것이 왕실내의 분위기였고
결국 문정왕후는 1545년 45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왕실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으로 나뉘었다.
대윤(大尹)은 윤임을 필두로 한 인종파
소윤(小尹)은 문정왕후와 그 남동생인 윤원형을 필두로 한 명종파였다.
문정왕후가 돌아간지 얼마 안되어 그의 친정 살붙이인 동생 윤원형도
그의 기첩 정난정과 함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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