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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음식이란 무엇인가? 한국음식라 불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음식는, 그 음식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식생활 관습과 더불어 지리적·역사적 환경에 가정 적합하도록 우리 조상들이 창안·발전시켜 온 민족적
이렇게 해서 나타나게 된 한국음식의 특징을, 한국음식자체가 갖는 특징과 식생활제도상의 특징으로 크게 나누어서 각각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① 주식과 부식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② 곡물류의 가공·조리법이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다 ③ 저장식품이 발달했다 ④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를 중히 여긴다 ⑤ 절후에 따라 시식(時食)을 즐긴다 ⑥ 자극적인 음식을 즐긴다 ⑦ 간을 중요시 여긴다 ⑧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식생활관을 엿볼 수 있다 (2) 식생활 운영상의 특징 ① 대가족 중심의 가정에서 어른을 중심으로 모두가 독상(獨床)이었다. ② 음식은 처음부터 상 위에 전부 차려져 나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③ 식사의 분량이 그릇에 중심이었다. 상을 받는 사람의 식사량에 기준을 두는 것이 4. 상차림과 식사예절
1) 상 차 림 한국음식의 특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식사법은 준비된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모두 차려 놓고 먹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식사예절에서는 상차리기가 (1) 반상(飯床) 밥을 주식으로 하여 차리는 상을 반상이라 하며, 한사람이 먹도록 차린 반상을 외상 ※곁상(곁반) :
국수를 주식으로 하여 차리는 상을 면상이라 하며 점심으로 많이 이용한다. 주식으로는 (3) 주안상(酒案床) 이름 그대로 주류를 대접하기 위해서 차리는 상이다. 당연히 안주가 따라야 하는데, 안주는 술의 종류, 손님의 기호를 고려해서 장만해야 한다. (4) 교 자 상 명절이나 잔치, 또는 회식 때,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할 경우 차리는 상이다.
① 면(온면·냉면) ② 탕(계탕·어알탕·잡탕) ③ 찜(영계찜·육찜·우설찜) ④ 전유어 (5) 돌 상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첫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차리는 상으로 장수·부귀·다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그 각각을 상징하는 열러가지 특별한 음식이나 물건을 상에 놓는다.
〔돌상에 놓는 물건〕 ① 쌀 : 식복이 많을 것을 기원하는 뜻. 이상의 것을 백반·곽탕(미역국)·푸른나물(미나리 등을 자르지 않고 긴 채로 무친 것)· (6) 큰 상 회갑이나 혼례와 같은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 그 경사로움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7) 제상(祭床) 이름 그대로 제사를 모실 때 차리는 상을 말하는데, 그 형식은 소상(小祥)·대상(大祥)·
일반 음식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제사음식은 정성을 들여 정갈하게 장만해 온 것이 ① 메 : 제상에 올리는 밥을 말하는데 젯메 또는 멧밥이라고도 한다. 제사 모시기
①제상의 진설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할 만큼 지방에 따라, 또 가풍에 따라 달랐다.
사찰음식의 정신 절에서 밥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그 맛의 담백함과 깔끔함을 잊지 못한다. 맛에 둔한 사람도 인공조리료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그 은은함을 잊을 수 없게 된다. 사찰음식의 유래 불교 초기에는 모든 출가승려들은 와발, 혹은 철발을 들고 산 속의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나와 성안으로 가서 걸식을 하였다. 부자나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고 그릇에 가득 차지 않더라도 적당한 양이면 돌아와서 오전 중에 식사를 마쳐야 한다. 주식은 건반(말린 밥), 맥두반(콩과 보리를 섞어 지은 밥), 초(미숫가루), 육(고기), 병(떡) 등 다섯가지였고 부식으로는 식물의 가지, 잎사귀, 꽃, 과일 및 우유나 가타 명제품, 꿀이나 석밀등이었다. 특별히 음식에 대한 금기는 없었는데 고기는 아무 고기나 먹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병든 비구에 한해서는 삼정육, 오정육, 구정육 등을 허락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종정육(五種淨肉 - 위 삼종정육 포함) 구종정육(九種淨肉)
이러한 유래를 거쳐 사찰의 식습관이 세속과 달리 독특한 소식습관을 형성한 시기는 기원 1세기 전후이다. 불교 전래시 초창기 중국에서는 술과 고기를 먹었지만 양무시대 이후 점차 소식으로 바뀌어 갔다. 중국 사원에서는 주식이 대부분 죽이었으며, 부식은 승려들이 직접 재배 생산한 채소나 두부, 버섯 들이었다. 또한 대승불교가 흥기한 시기에는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의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찰음식의 특징 사찰음식의 특징을 들자면 독특한 조리법이 사찰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산야초를 음식으로 먹고 그리고 육식과 오신채 및 인공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식 만드는 과정을 오로지 또 다른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무엇을 먹을까는 큰 문제가 아니다. 첫째,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계율상 차이는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채소 중에서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다. 파, 마늘, 부추, 달래 등은 몸에서 냄새가 나고,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하게 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수행인에게는 절대 금한다. 셋째, 사찰음식은 약리작용을 갖고 있다. 승려들은 양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산약초를 먹기 때문이다. 산초장아찌는 구충제 역할을 하고 보온효과가 있는 것을 예로 알 수 있다. 넷째, 무엇보다도 시원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고 다시마, 버섯, 들깨, 날 콩가루의 천연 조미료를 쓰고 있다. 다섯째, 제철에 따른 음식이 발달해 있다. 예를 들자면 지리산 화엄사에는 죽순나물과 갓김치, 김부각 등이 있고 여천 흥국사에는 쑥떡, 머위당이, 합천 해인사에는 찹쌀죽과 고수나물무침 등이 발달되어 있다. 수원 용주사에는 국화전과 두부소박이가 발달했다.
사찰음식의 종류 죽 죽은 일단 안색을 좋게 하고 힘이 넘치고 수명을 연장한다. 안락이 있고 말솜씨가 시원하게 되고 음식물의 소화를 좋게 하고 감기에 잘 안 걸리는 이로움이 있다. 또한 공복감을 충족시키고 목의 갈증을 풀어주고 대소변을 잘 조절하게 한다. 밥 찰밥, 산나물비빔밥, 콩나물밥, 야채밥, 유부밥, 보리밥, 김밥, 김치밥, 무밥, 김초밥, 버섯덮밥, 보리밥, 오곡밥, 야채 영양소밥, 톳나물밥, 연잎밥 등이 있다. 국 무국, 미역국, 우거지국, 시금치국, 감자국, 쑥국, 냉이국, 김국, 거프국(해안가 절), 근대죽, 배추국, 토란국, 두부냉국, 냉콩국, 째가무냉국, 짠오이냉국, 청포묵국, 시래기국, 양해란국(음력 7,8월에 나며 생강잎과 비슷하며 썰어서 기름에 볶다가 쌀뜨물을 풀고 양념간장으로 끓인다) 등 그 종류가 44가자나 된다. 김치 젓갈류, 파 , 마늘을 쓰지 않는 사찰김치는 담백하고 독특한 맛이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역적 특성이 강하다. 나물 및 무침 시금치, 냉이, 비름나물, 더덕무침, 죽순채무침, 꽈리고추무침, 미사무침, 가지나물, 고사리나물 등 31가지가 있다. 조림 감자조림, 우엉조림, 무조림, 고구마, 물엿조림, 꼇질콩조림, 송이버섯조림, 곤약조림 등 27가지가 있다. 붂음 감자볶음, 야채볶음, 호박볶음, 머우볶음, 도라지볶음, 오이볶음, 말린추나물볶음, 죽순볶음 등 25가지가 있다. 찜과 부침류 가지찜, 배추찜, 채소찜, 연두부찜, 호박부침, 당근부침, 표고전, 김치부침, 감자부침, 녹두부침 등 19가지 튀김과 구이 버섯튀김, 깻잎튀김, 쑥갓튀김, 고추튀김, 가지튀김, 늦싸리부각, 들깨송이부각, 산동백잎부각, 아카시아꽃부각, 우엉구이, 표고구이 등 31가지가 있다. 밑반찬류 산초장아찌, 절인고추, 콩장, 무말래이, 절인오이, 짠배추, 무, 오이, 양희장아찌, 감장아찌, 참외장아찌 떡 호박오가니떡, 쑥개떡, 풋고추장떡, 메밀떡, 감자송평, 물호박떡, 호박찰시루떡 등 100여가지가 된다. 다식 율무다식, 찹쌀다식, 콩다식, 깨다식, 녹두다식, 밤다식, 송화다식, 팥다식 등. 한과 유과 유밀과, 강정, 다식전고, 엿강정 등으로 구분 장 된장, 간장, 고추장으로 나누는데 각 사찰의 물맛, 조리법 등에 따라 독특한 맛을 낸다. 차 쑥차, 솔차, 작설차 등이 있다.
목차
Ⅰ. 문화로서의 음식습관 역사를 통하여 보면 음식은 인간과 인간사회 전반에 대해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잘 먹지 못한 사람은 일찍 죽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음식이란 생존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삶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곧 인간에게 있어 사회적, 생리적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일생 동안 음식을 접하면서 살아가므로 우리 모두는 음식에 친밀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아마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음식을 둘러싼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평가하고 토론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마도 음식에 대한 주제보다 더 감정적이고 더 강한 의견을 제시하는 주제는 없는 것 같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인간들은 음식에 대해 거의 같은 깊은 관심과 경외를 나누어 왔다. 역사적으로 인간들은 어떤 형태의 음식에 대하여 비슷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식욕을 소유하여 왔다. 이러한 식욕은 크게 생리학적인 것과 유전학적인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서로 다른 집단과 개인이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선택한 특정 음식은, 집단에 따라 심지어 집단 내의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서로 다른 집단은 하나의 주어진 음식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태도를 지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메뚜기는 중동지역에서는 아주 귀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여기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런 곤충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움츠려든다. 미국인들은 신선하고 병아리로 자랄 수 없는 즉, 생식력이 없는 계란만을 먹는다. 그러나 일부 중국인에게는 병아리 태아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계란이 맛있는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인간 집단들은 어떤 음식에 대하여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태도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시간을 두고 터득한 것으로 독이 없고 건강과 행동에 최적의 것으로 입증된 익숙한 음식을 인정하여 왔다. 따라서 사람들의 일련의 태도는 잠재적으로 집단의 환경 속에서 유용한 음식과 관련하여 발전했다. 한 집단,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음식을 선택했을 때는 그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 다른 음식을 선택했을 때는 인정받지 못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미묘한 선택의 결과로 천천히 집단의 음식습관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표준적인 음식체계는 그 집단의 음식습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이상적인 음식을 선택하도록 도와줌으로서 만들어진 공유된 음식습관은 궁극적으로 집단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표현하고 또 그 집단의 경계선을 유지시켜 주는 메커니즘이 된다. 따라서 문화의 대부분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음식습관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가장 유리한 것으로 판명되는 먹는 행동의 집합체로서 발전된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인정된 행동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할 것 없이 생존을 위한 최상의 선택을 위한 하나의 청사진이 된다. 음식습관은 생리적이고 환경적이고 문화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것중 문화적인 요인은 많은 면에서 규정하기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문화적 요인이란 문화와 문화사이에 너무나 다양하게 변화하여 일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음식습관을 이해하는데 있어 주로 두 가지의 이론적 접근방법을 사용한다. 보다 일반적 방법인 에틱(etic)적인 접근 방법은 수집된 자료들과 그 문화의 바깥 사람들에 의해 관찰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크(emic)적인 접근방법은 그 문화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어느 방법이건 간에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또 무엇을 먹어야만 하는가에 대하, 또 어떤 음식을 선호하고 어떤 음식을 기피하는가에 대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1)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조건과 경험을 반영하는 음식습관에 관한 편견을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형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류학자들은 하나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 내부의 현상을 알기 위하여 오랫동안 친밀하게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외부 사람들이 대충 보기에는 비위에 거슬리고 천박하고 기본이 안된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어떤 음식습관도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복잡하고 강제적인 적응 과정을 거쳐 발전된 것이다. 종종 음식습관이 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외부 문화권으로부터 온 전문가들도 자신들의 음식습관을 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음식습관으로 바꾸는 경우가 허다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민족중심주의적 이해는 때때로 재앙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음식습관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자민족중심주의를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그 대신 전문가들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사람들이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더 나올 것인가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이해 방법은 새로운 환경에 접근해서 음식습관과 사람들, 그리고 개방된 마음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Ⅱ. 음식과 사회 : 사회적 음식과 음식적 사회
먼저 우리 한국의 음식문화의 발전 과정을 알아보는 것에 앞서 몇 가지의 한국음식에 담겨진 사회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날 떡은 뇌물을 은근하게 말할 때 이용되고 있으니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음식 그 자체가 뇌물로 쓰이는 일도 있다. 1950년대까지 선거판 에서는 표를 얻기 위해 선거민들에게 막걸리와 고무신을 돌렸다. 그래서 ‘막걸리 선거’니 ‘고무신 선거’나 하는 자조적인 말이 거리낌없이 오갔다. 짚신이나 맨발로 다녀야 했던 사람들에게 고무신은 정말로 요긴한 물건이었으며 막걸리는 배를 채울 수 있는 긴요한 식량이었다. 2) 음식은 우리 사회의 숨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의미 체계이다. 어떤 음식을 선호하고 즐기는 가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회적으로 처해온 여건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포식의 수준을 넘어서 탐미의 수중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이 수많은 사회적 지위들을 거친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사회적 급수에 따라 그 내용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동네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과 고급 요릿집에서 먹는 짜장면은 비록 요리의 이름은 같지만 다른 맛과 다른 환경으로 인해 그것을 먹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다르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음식에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먹으면서 살고 있다. 두 번째로 미역국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각종 음식을 두고 복이 있다고 먹기도 하고 복을 없앤다고 하여 기피하기도 한다. 대학 입학 시험을 보러 가는 자식이 있으면, 어머니들은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시험장의 교문에 찹쌀떡이나 엿을 붙이기도 한다. 찹쌀떡이나 엿을 어디에 붙이면 찰싹 붙기 때문에 시험과 연관시킨 것이다. 반면에 미역국은 시험보러 갈 때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으로 통한다. 사실 미역국은 한국인이 줄겨 먹는 국 중 하나이다. 그런데 시험이나 선발 등에서 낙방했을 때 우리는 “미역국 먹었다” 고 말한다. 미역이 지닌 형상이 미끌미끌하여 마치 시험에 낙방한 것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미역국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합이나 중요한 진급이 있을 때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침에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산모에게 미역국은 축복의 음식이다. 미역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소를 많이 섭취하면 그만큼 젖이 많이 나왔기에 오늘날에도 산모에게 미역국은 필수 음식이다. 한국인이면 생일날 아침에 반드시 미역국 한 그릇을 먹어야 한다. 미역국은 한국인에게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한국인은 미역국을 두고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일까? 잔칫상에 김치가 맨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항상 접하는 음식을 특별한 날에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미역국의 그 형상이 미끌미끌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에 미역국을 먹는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운 것이다.3)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조달하기 시작한 우리 조상들은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조리하여 먹고, 정착된 곳에서 스스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러 풍부한 먹거리를 조달하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요구했다. 생산력의 발전은 공동체간의 교환을 낳게 되었고4)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상업과 무역도 발달시킴으로서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동하는 범위도 차츰 넓어지기 시작한다. 반나절 거리에서 하룻길로, 그리고 몇 달 길로 이동반경이 차츰 넓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이동하는 길목을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곳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음식문화의 발달을 기존의 시대별로 나누어 특징만을 열거한 것과 달리 정치?사회?경제적인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 이후부터는 농경이 확립되어 식생활의 안정을 기하게 되었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상층 계급의 주부식 분리의 정착화를 이룩하였다. 또한 삼국시대의 식생활은 종교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살생(殺生)금지를 기본 계율로 하는 불교였다.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는 물론 생선을 잡는 것까지 금하여 곡물과 채소에 의존하게 하였다. 그 결과 더 많은 곡물을 얻기 위해서 농경에 힘쓰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백성은 농민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 체계가 갖추어져 가면서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식생활도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으로 계층화되어 이중구조를 뛰게 된다. 왕족이나 귀족은 쌀을 주식으로 즐길 수 있었고, 쌀의 생산이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당시에 서민들은 잡곡에 만족해야 했으며 그것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차가 제물의 하나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상류층 사회의 기호품으로 널리 보급되게 된다. 이 세대 식생활의 첫 번째 특징으로는 이미 메주를 발효하여 장(醬)을 담그는 방법이 등장함으로써 식생활의 혁신적 전기를 만들었고, 이것이 무장아찌 등 식품의 저장 방법의 발달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5) 두번째 특징으로는 부족국가 시대에 이루어진 주부식의 분리가 정착된 것이다. 주식으로는 쌀밥과 잡곡밥이, 그리고 부식으로는 간장, 된장, 젓갈, 김치(짠지형태)등이었다. 마지막 특징은 주거의 환경이 개선되면서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사를 하는 곳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지방세력의 등장과 중앙집권 체제하의 관계 속에서 귀족과 서민의 신분?계급의 체제 정비에 따른 상류층과 하류층의 식생활이 다른 형태로 정착될 뿐 아니라, 국제간의 교류와 국내 지방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식생활 또한 다양해지고 보다 세련된다. 이에 향토음식이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간 음식의 교류도 활발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2. 고려시대 통일 신라 후기의 제도와 풍속을 이어 받은 고려 왕조는 관료제도의 발달과 불교적 분위기의 심화를 그 특징으로 했던 시대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고 정치상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국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殺生)금기는 물론 물고기를 잡는 것까지 금하던 시대였다. 그 결과 전반적인 식문화는 어육(魚肉)을 이용한 음식이 쇠퇴한 반면 야채와 곡류를 이용한 음식이 발전하였다. 이 시대도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반인들까지 쌀을 밥으로 먹을 수 있던 시대는 아니었다. 귀족들은 쌀밥에 고기 반찬을, 천민은 말할 것도 없고 서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경우도 관료나 지방 호족들의 사전(私田)을 경작하여 전조와 세공 기타 잡세를 바치고 부역을 져야 했으므로 쌀밥을 주식으로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곡물로는 조, 수수, 기장, 피, 콩, 귀리, 팥, 녹두 등이 있었고, 특히 조는 잡쌀이라 하여 싸 다음 가는 식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족의 침략 이후 식생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몽고의 공주가 궁정으로 시집오면서 공주를 수발 들기 위해 함께 따라온 사용인(使用人)들로부터 몽고인의 음식문화가 궁정과 귀족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설렁탕, 소주, 상화(일종의 만두), 포도주, 사탕, 후추 등이 몽고인을 통하여 고려에 들어온 것들이다.6) 이때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밥과 국이 우리 식생활의 기본적인 상차림의 구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채소에 밥을 싸서 먹었으며, 풍부한 과일이 있었으며, 수박은 고려때 처음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식초와 참기름, 중국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들어온 후추등이 조미료로 사용되었으며, 설탕과 우유도 선보였다.7) 그리고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 온 차(茶)문화는 불교를 국교로 하는 고려에서 사원에서 제수로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 크게 발달하였다. 차를 관리하는 관청으로 각종 연회에 차를 롤리는 임무를 가졌던 다방(茶房)이 있었으며, 절에서는 다촌(茶村)을 두고 차나무의 재배를 맡아보게 했다. 한편 이와 같은 식생활의 배경을 가진 고려시대의 사람들은 먼길을 떠나야 하는 동기 또한 다양해지고, 또 빈번해진다. 그 결과 그 들에게 잘 곳과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는 곳 또한 다양해지고 많아지게 된다. 승려들 또한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하루만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없어서 숙박을 해야 했다.8) 또한 벽란도를 중심으로 대외무역이 활발하였으므로 외국상인들과 내국상인들을 위해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는 요릿집과 주점, 색주가 등이 늘어났다. 아울러 주점은 화폐유통에도 활용되었고,9) 서민층에도 술을 팔고 사는 풍습과 주막에 모여 회음하는 풍습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3. 조선시대 육류의 경우 소나 말은 농사와 운반에 필수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금하였으며, 일부에서는 명을 어기고 소고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소고기의 소비가 일반화되어 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나 염소 소시 먹기를 주장하였으나 돼지고기와 염소 고기를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산물 또한 풍부하여 많은 수산물을 식용으로 이용하였으며, 젓갈의 종류도 다양해져 고추와 함께 젓갈이 김치에 이용되기 시작하여 김치가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했다.10) 또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의 왕조 정치가 성립되어 500년의 왕조를 이어 오는 동안 궁중음식이 발달하게 된다. 이렇게 발달한 궁중음식은 양반계급이나 기타 여러 가지 길을 통하여 민가에 전래된다. 이것이 민가의 식생활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고, 양반가의 식생활을 풍부하게 하였다. 16세기이후 장시가 확산되고 도시상업이 성행하여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시장이 생기기 시작하자 장이 서는 날을 중심으로 먹을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장이 파하면 사람들이 다 떠나기 때문에 상설음식점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못되었다. 그러나 포구의 경우는 항상 상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음식점과 술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4.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19세기에 접어드니 서양 여러 나라의 동양 침략이 시작되어 일본과는 강화도 조약을 맺고, 유럽의 여러 나라나 미국에도 개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개화의 물결이 밀어 닥쳤다. 이 무렵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흘러갔고 이를 막기위해 1889년 방곡령을 발표하였으나 곧 폐지되어 한말의 식량정책에 큰 차질이 생겼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본은 각종 자원에 대한 식민지적 약탈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민중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의 좁쌀이나 잡곡으로 때워야 했으며 그마저 없는 경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했으며 아사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만주 일본 등지로 떠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11) 이러한 원인은 1917년 이후 쌀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지주와 미곡상들은 사재기와 한국경제가 일본 경제에 깊이 예속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많은 농민들이 소작인으로 내몰리고, 지주들은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또 조선 총독부가 비공개로 발행한 「조선의 언론과 세상」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은 좋아하는 쌀밥은 다른사람에게 빼앗기고 조밥으로 만족해야 하며, 한 채의 집마 저 잃어버려 방을 얻어야만 하고............(생략).............. 끝내는 조밥에서 초근생활로, 셋방에서 천막으로, 누더기조차 없어 맨몸이 될 지경이다........(생략)”12) 또한 「조선인의 의식주:1916」에 그 당시의 주식 섭취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반면 개화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구미인, 일본인, 중국인들이 들어오고 이들로부터 새로운 음식이 전래된다. 한 나라의 문화는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고 했을 때, 외국 음식의 전래는 우리 음식문화는 한 단계 비약시키는 계기일 수 있었다. 그런데 개화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음식문화의 변화는 바로 양극화였다. 즉 한국식과 서양식, 그리고 저급과 고급의 이중구조를 말한다. 조선 후기 장터를 중심으로 상인과 장꾼들에게 저렴한 음식을 공급하던 주막이 답보 상태를 걷는 반면, 상류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요릿집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즉,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신교육을 받고, 그리고 일제와 손을 잡고 살아가는 친일파들을 위한 식당이 고급요릿집이었으며 은밀한 모임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모던 보이와 걸들이 모이는 까페가 등장하고, 외국인들이 모이는 사교장이 생기고, 외국인들을 위한 일식과 양식, 그리고 중식 음식점들이 등장하면서 서울에서 그 수를 더해갔다.
5. 해방이후~5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반면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진다. 그 결과 양식이 한국인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서민들에게 양식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 이유는 도시로 집중된 인구는 막노동으로 토막집에서 사는 토막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구매력이 거의 없어 외식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을 겨냥한 외식업은 노점상이나, 포장마차, 선술집등의 형태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해방이후 중국 음식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중국음식의 한국화가 이루어졌다.14)
7. 1970~1980년대 70년대 식생활관련 최대 변수는 도시가스의 도입으로 연탄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먹거리 메뉴에는 야구르트, 케찹, 마요네즈, 탄산음료, 62년에 시판금지 되었던 쌀막걸리의 부활, 전자렌지, 생맥주, 롯데리아가 최초로 등장했다. 이러한 음식문화는 서양식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며, 정치적 불안이 가속되고 사회혼란이 빚어지던 시절 무력감에 빠졌던 사람들이 맵고 짠 강한 양념 맛의 무교동 낙지골목으로 모여들기도 하였으며, 술에 찌든 사람들이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삼겹살, 갈비등과 같이 고기를 구워먹는 문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1인당 하루 40그람이었던 것이 200그람으로 육류섭취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대형 갈비집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났다. 그 당시 고기를 덩어리째 양념해서 구워 먹는 주물럭이 유행하기도 했다. 얄팍한 불고기에 만족을 못하고 덩어리째 씹어야 직성이 풀리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가든, ~갈비 등의 등의 고깃집들이 도처에서 생겨났는데 주로 큰방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가족뿐만 아니라 잔치, 회식, 친목모임의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 춘천막국수나 닭갈비, 아구찜, 보리밥등 지방 향토음식들이 별미음식으로 상품화되어 서울로 진출하였다. 특히 승용차 보급률이 높아지고 답사문화가 대중화되면서 향토음식은 그 지역의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었다. 결국 80년대는 더 맛있고, 더 간편하고, 더 고급스러운, 그리고 더 새로운 식품을 추구했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8. 1990~현재까지 패밀리레스토랑 역시 외국계 패밀리레스토랑을 고품격 신업소의 출현으로 받아들였다. 80년대의 아담한 레스토랑이 아닌 점포 평수가 최소한 50-60평 이상이다. 자연적으로 사업의 주체는 대기업의 자본이다. 현재 외국계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과 피자집,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은 이제 일반화되어 있으며 강남을 중심으로 퓨전음식과 고급 원두커피 전문점들이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태리풍의 이민족 음식점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한식을 중심으로 건강과 기능지향적인 음식과 향수를 유발하는 향토 전문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식당 간판에도 옛날 ,할머니, 고향 같은 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기도 먹을 만큼 먹어 보고, 서양식 고급요리도 먹어 볼만큼 먹어 본 사람들이 찾게 되는 옛날 그 시절의 맛과 여유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그대로의 건강식과 간편성을 추구하여 인스턴트음식의 선호는 한국식문화의 이중적인 성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Ⅳ. 한국음식문화의 세계화
작년 프랑스 미식 문화의 대명사인 '미슐랭 가이드'에 최초로 한국 음식점이 등장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 식당은 가장 낮은 등급으로 평가됐지만 '미슐랭'에 오른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 기분으로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음식을 널리 알리자는 적극적인 신문기사들을 얼핏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월드컵이 몇 개월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건데 축구는 4강에 들고, 한국의 단결된 좋은 이미지는 보여줬지만 정작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홍보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와 확연히 다른 문화와 인종과 지리적 조건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설득력있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중 음식문화는 가장 쉽고 설득력있게 그들을 매료시킬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됐건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 특성이니 말이다. 이제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하려는 한국음식들이 늘어나고 있다. 몇 해전만 해도 외국인들에게 한국음식이란 이상한 냄새가 나고 독특한 김치 외엔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김치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불고기, 비빔밥, 떡, 갈비등은 외국인들에게 맛있는 한국 음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세계적인 음식, 한국음식 첫째로 대표적인 발효식품인 김치이다. 한국 음식 중 발효식품을 빼놓을 수 가 없다. 그 중 김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한국을 ‘옹기의 나라’라고 할 만큼 시골집 어디를 가도 수십개의 옹기를 볼 수 있다. 옹기는 배가 부르고 운두가 높은 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을 일컫는다. 옛부터 옹기는 한국의 살림집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생활 용구였다. 간장?된장?술?젓갈?김치와 같은 발효 음식을 담는데는 물론이고 부엌에서 쓰이는 각종 양념을 넣는 단지나 소금이나 쌀을 담는데도 쓰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장독과 장독대이다. 집안에서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한가운데나 부엌 옆에 자리를 잡는 장독대는 장을 담는 옹기가 놓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통 간장?된장?고추장 같은 발효음식과 함께 마른 고추와 소금이 장독대에 놓이는 이유는 이것들이 모두 햇볕을 받아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장김치는 땅에 묻힌 옹기에 담겨야 오랫동안 저장되면서 제 맛이 난다. 발효음식들은 발효과정에서 미생물들을 수없이 먹고 뱉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공기의 양이 팽창하게 된다. 이것들이 만약 외부와 완전히 밀폐된 비닐봉지에 담아 주면 아마 며칠만 지나면 폭탄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이런 성질을 지닌 음식은 가능한 한 안팎이 묘하게 통하는 옹기에 담아 두어야 제대로 발효도 되고 맛이 좋아지며 폭발이라는 불상사도 모면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발효음식 중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발명품인 김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냄새라고 하면 시큼한 김치를 떠올릴 정도이다. 김치가 익으면서 나는 이 발효향은 간혹 한국인 마저 질색할 정도로 강하다. 김치 냄새뿐만 아니라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는 한국인의 후각적 인지 구조에서만 구수할 뿐이다. 유럽인이나 미국인의 후각 구조에서는 알 수 없는 화학 물질 냄새로 판단된다. 한국음식에서는 마늘을 많이 사용하는데 중국인들이 튀겨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 생으로 이용한다. 우리가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싫어하는 김치 냄새도 마늘에서 주로 나온다. 이 마늘 냄새 때문에 일본인들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김치를 무척 싫어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한국 김치에 반해 있다고 한다.16) 한국인들의 김치가 이제 당당하게 올림픽 선수촌의 식단에 올라가고 더 나아가 우리 김치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일본인들을 보면 그만큼 김치가 위대한 것이라고 큰소리를 쳐보기도 한다. 우리의 '김치'는 시드니올림픽 공식 음식으로 납품되고 에어프랑스 기내식으로 공급되는 등 세계화에 바짝 다가섰다. 불고기는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음식 이 됐다. 우리의 독특한 음식문화도 얼마든지 세계화할 수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김치는 당당히 한국 민족을 상징하는 민족적 음식이다. 이제 한국인에게 김치가 내는 발효향과 마늘냄새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김치를 먹으면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잇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이는 분명히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발명품인 김치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효능은 김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된장?김치?젓갈로 이어지는 한국 발효 음식의 신비로움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서구 사회를 향해 큰소리 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두 번째는 떡이다. 떡은 역사가 오래됐다. 신라 유리왕때 왕을 뽑는데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가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정하기 위해 떡을 깨물어 치아 수를 세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백설기와 시루떡, 인절미, 절편, 전병 등 다양한 종류를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 이런 우리나라의 독특한 음식인 떡은 쌀을 주원료로 밤이나 콩을 섞거나 고물을 얹어 영양학적으로도 손색이 없고 색과 맛은 외국의 어느 요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조상들은 철마다 또는 행사 때마다 다양한 형태의 떡을 만들어 먹었다. 떡은 생일이나 결혼, 회갑, 제사 등을 치를 때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결혼 등 잔치때나 어쩌다 한번씩 등장할 뿐이다. 피자나 스낵과자 등 지천으로 늘려있다시피 한 각종 먹거리에 맛들여져 있는 우리 아이들 은 떡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떡의 수요도 점차 줄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 내세 워도 자랑할 수 있는 소중한 먹거리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을 가면 선물용 떡을 쉽게 볼 수 있다. 정교하고 화려한 모양과 색깔, 세련된 포장과 높은 가격으로 먹기 아까울 정도이다. 그것이 일본 떡이다. 솔직히 한 입 배어물면 그대로 보는 것이 제일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기만 하다. 우리 꿀떡이나 인절미를 먹어보고 달짝지근하고 쫄깃한 맛에 감탄을 하는 외국인들에게 손쉽게 떡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는 것을 알고 쇼핑가나 명소에 고급이미지로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경복궁 벤치에 앉아 조물조물한 우리의 떡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미지 전달이야말로 몇 배의 말보다 그들에게 우리의 정서와 오천년의 전통을 더 잘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한국의 떡은 세계적인 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비빔밥이다. 비빔밥의 유래의 여러 가지 설을 보면 참 재미있다. 먼저 궁중 음식설이다. 이는 조선시대 임금이 먹는 밥을 일컫는 수라에는 흰수라, 팥수라, 오골수라, 비빔 등 4가지가 있는데 비빔은 점심때나 종친이 입궐하였을 때 먹는 가벼운 식사였다고 유래한다. 두번째는 임금몽진 음식설로 어느 때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임금이 몽진하였을 때, 수라상에 올릴 만한 음식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밥에 몇 가지 나물을 비벼 수라상에 올렸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세 번째는 농번기 음식설로 농번기에는 하루에 여러번 음식을 섭취하는데 그때마다 구색을 갖춘 상차림을 준비하기는 어려우며 또한 그릇을 충분히 가져가기도 어려웠으므로 그릇 하나에 여러가지 음식을 섞어 먹게 되었다는 것에서도 비빔밥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네 번째는 동학 혁명설인데 동학군이 그릇이 충분하지 않아 그릇 하나에 이것저것 받아 비벼 먹었다고 유래한다. 다섯 번째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젯상에 놓은 제물을 빠짐없이 먹는데 옛날에는 대부분 집으로부터 먼 곳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식기를 충분히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결국 제물을 골고루 먹으려면 그릇 하나에 여러 가지 제물을 받아 비벼서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근거를 둔 비빔밥의 유래를 '음복설'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묵은음식 처리설은 섣달 그믐날 새해 새날을 맞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음식을 장만하면서, 묵은 해의 남은 음식을 없애기 위하여 묵은 나물과 묵은 밥을 비벼 먹은 것에서부터 비빔밥이 유래되었다는 것에 근거한다. 다이어트에 매운 음식이 좋다는 바람과 함께 비빔밥이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우리 고추장 속의 캡 사이신이란 성분이 체 지방을 줄여 비만의 예방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되며 식욕 증진과 보온 효과 장내 살균작용 등의 다이어트 식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밥, 고기등의 산성식품과 나물류의 알칼리성 식품이 조화되어 균형 있는 영양식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또한 지금 세계적인 맛의 추세는 매운 맛인데. 비빔밥의 맛을 좌우하는 고추장은 세계 유일의 독특한 소스로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러한 비빔밥이 계속 알려지고 인기 있게 하기 위해선 물론 맛과 영양소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도 좋지만 세계화의 추세에 맞춰 적절한 마켓팅과 사업 전략을 써야 한다. 음식 또한 빠르고 간편하고 일회용을 선호하는 시대인 만큼, 재료의 준비에 따라 햄버거만큼이나 빠르게 제공되고 1회 용기의 사용으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얼마 전부터 우리 젊은이들이 서구의 인스턴트와 인공적인 맛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간편함과 신속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들 속에 숨겨져 내려오는 한국적인 맛을 찾기 위해선 그들이 갈망하는 한국적인 맛에 무언가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퓨전 음식이다. 먼저 퓨전(fusion)이라는 말은 융해, 용해라는 뜻이다. 이런 퓨전의 의미가 보다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요리보다 음악이 먼저 였다. 퓨전 뮤직이란 재즈, 록, 포퓰러 등의 스타일이 혼합, 융화된 1970년대의 백인 재즈 음악가들이 시작한 새로운 감각의 무드 뮤지컬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퓨전은 퓨전 재즈를 의미하지만, 문학 예술 음악 요리 등에서 장르의 구분 없이 우리의 문화 속으로 사용되고 있다. 먼저 퓨전 음식이 발달하게 된 이유를 보면 80년대에 캘리포니아는 아시안계와 스페인계 사람들의 인구가 증가추세에 있었고 미국인들은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서 서양의 고열량 음식에 비해 채소를 많이 사용하고 다양한 조리법을 가진 동양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특히 캘리포니아 주에 많이 정착해 있던 중국식과 일본식을 중심으로 동양요리와 서양요리의 맛과 영양의 장점을 혼합시킨 요리가 선보이게 되었다. 특히 아시아인들이 사용하는 마늘, 허브 등 향료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각종 향신료의 사용이 증가하고 음식을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도 점점 강해졌다. 예를 들어 코코넛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해변에 와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맛을 체험함으로서 단순히 먹는 다는 의미를 떠나서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요리사들은 아시아등지의 다양한 향료와 미국에서 나는 음식재료, 그리고 여러 가지 요리법들을 혼합해서 새로운 맛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러한 음식들이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면 18세기경에 고추가루를 받아들이면서 김치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으니까 김치는 우리나라의 가장 훌륭한 퓨전 음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퓨전 음식은 대부분 김치와 된장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퓨전 음식이라고 해도 가장 한국적인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한 맛과 향을 가진 김치를 퓨전 음식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새로운 발상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치 스파게티, 여러 가지 김치볶음밥, 김치피자등 김치뿐만 아니라 불고기 피자, 라이스 버거등은 여러 세대들이 부담감 없이 먹게 되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가고 있다. 미국에서 들어온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이젠 콜라와 함께 김치나 불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음식이 절대 뒤지거나 하위문화의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김치가 왜 시꺼먼 기름에 쪄든 햄버거에 밀려야만 하는가? 물론 한국음식의 뿌리는 갖고 있어야 하지만 세계인들의 입맛과 이미지에 맞게 변형하고 홍보를 한다면 합리적인 그들은 주저 않고 우리 음식을 선택할 것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나 콜라만 팔라는 법은 없다. 한국의 이름을 걸고 시원한 식혜와 take-out 할 수 있는 김치볶음밥을 팔게 되면 편리함과 호기심에 먹어본 외국인들은 그 맛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한국 음식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멕시코 음식의 양념 맛과 상당히 가깝다. 소비자들이 광범위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상품을 대중화해야 한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 음식을 먹을 때 뭘 시켜야 하는지 에서부터 겁을 낸다. 색채, 맛, 건강성이 어우러진 비빔밥이나 양념 불고기 등은 마케팅만 잘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의 한국음식에 대한 기호도나 인지도를 고려해 전통음식 세계화를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전략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중 우수한 전통음식을 브랜드화 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김치와 불고기뿐만 아니라 한국고유의 전통음식 가운데 외국인이 선호하는 음식을 중점적으로 개발, 홍보, 보급하여 세계적 브랜드화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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