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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중종 29)~ 1567(명종 22).
조선 제13대 왕(1545~67 재위). 재위기간 동안 양반 관료층의 분열과 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척 윤원형(尹元衡)의 그늘 밑에서 을사사화·을묘왜란 등을 겪었다. 이름은 환(峘, 자는 대양(對陽).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2번째 비(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고, 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종의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호(岵 : 뒤에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奉城君)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賜死)케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盧守愼)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5~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1553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양(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양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렴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양은 사화(士禍)를 꾀했으나 심의겸(沈義謙)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1567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왕위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선조가 계승했다. 능은 강릉(康陵)이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백과사전 브리태니크자료) |
왕릉역사관 중에서 가장 규묘 있게 지어진 곳이다.
이 전시관에는 임금의 능행도에서 석물까지 그대로 조각하여 놓았기에
학생들한데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강릉 들어가는 입구)
명종임금의 릉은 문정왕후릉에서 1km 떨어진 비공개 지역이다.
일년에 딱 한번 재향일에만 문이열렸는데, 금년부터는 봄부터 가을까지 개방하고 있지만
많은 재악이 따르고 있다. 임금릉 바로 뒷편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기때문이다.
5공시절 이중간지점에 태능선촌이 들어서면서 정부와 문화재청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되면서 2014년이면 원래의 능원으로 되돌아 간다니 퍽 다행스러운일이 아닐 수 없다.
명종임금과 심씨 인순왕후 릉
즉위 9개월만에 인종이 승하 하자 12살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으며
임금이 되어서도 어머니한테 뺨다구를 맞는등 어머니의 위세에 벗어나지 못한 임금이셨는데
릉까지 비공개지역으로 문정왕후 능호인 (태릉)은 알아도 명종임금 능호인 ( 강릉)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전에 있던 (태강릉)이란 표지석도 없어지고 (태릉)만 있으니 죽어서도 어머니의 위세에 눌려있다.
하지만 왕릉 석물은 원형 그대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네요
대부분 특히 문, 무인석이 부분적으로 떨어지거나 손실되어 땜질 형식인데...
명종임금님의 제향때 행사가 끝나고 일반인에게 음식과 술를 맛볼 수있는 기회가 있어서
저도 임금주를 딱 한모금 마셨는데. 둘다 밀밭도 못가는 수준이라 무슨 맛인지 모릅니다.
유네스코 등재이후로는 어느왕릉이나 음식이 똑같이 차려지고 , 전문 MC에 점심을 제공할
밥차가 대기중이며 갖가지 잘조리된 밥상을 먹어보았네요...
앞면만 보았는데 ,뒤태도 옆면도 자세히 보니
이끼만 약간 끼었을 뿐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특히 말꼬리가 밑동까지 직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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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집 큰길 건너편에 있어서 왕릉중에 가장 친숙한 릉입니다.
문정왕후 릉 안쪽으로 들어가면 숲이 우거저 놀 수있는 공간이 많아서 시원하고 참 좋습니다.
다만 명종 임금릉 바로옆에 삼육 대학교가 있고, 홍살문 바로 몇m앞에 국제스케이트장 건물이 막혀있어 공간이 적어서
답사 하는데 어려움이 당분간은 따른다고 합니다,.
왕능답사기 잘보고있습니다
나는 노원구청에서 근무하였고 노원구에살면서도
그냥능이 있구나 가끔 바람이나 쐬고 산책이나하면 갔지
그냥 무심코 보아 왔는데
이렇게 답사하시고 글을 올리시니 대단하십니다
저도역사 사적지답사를 좋아하는데 능은 그냥
하였튼 덕분에 잘감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