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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고개’도 ‘긴고개’ 아닐까.
- 진고개 어원 재고찰ㅡ
ㅡ 종남산
<2009. 7. 27>
1. 들어가는 말 ㅡ통설에 대한 의문
‘진고개’ 어원과 유래에 대해 기존 통설은 “한자말 ‘니현(泥峴)’에서 찾고있다.
“니현,泥峴”을 그대로 풀어 ‘땅이 질다’는 뜻에서, ‘땅이 진 고개’로 보았으며,
그 ‘진흙니(泥)’가 들어가 있는 간접적 정황들에 의지하였다.
즉 “이계 홍양호(1724~1802)가 ‘니현(泥峴) 밑에 ‘니와(泥窩, 진굴)’를 지었다”,
“동주 이민구(1589~1670)가 ‘니현(泥峴)’에 ‘굴정(窟井, 굴우물)’을 팠다”는
이야기를 덧붙여 설명하는 식이다.(서울시 고개, 서울시, 1998)
그러면서 “현재의 충무로2가 마루턱을 이루던 긴 고갯길이 비만 내리면 진흙투성이가 되던 터라
‘진고개’를 ‘니현’이라 불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 중국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고개’로서
‘그곳 땅이 아주 질었기 때문에 1906년경 이곳에서 맨 먼저 하수도 도랑공사가 시행되었다’고 부언한다.(서울시 지명사전, 서울시, 2009,/ 김영상, 서울 600년,1997)
최창조 교수는, ‘종로구 운현궁’을 소개하면서, “‘동명연혁고(1)’에 보면, 운현궁 바로 남쪽에 있는 교동초등학교 뒤의 고개는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척거렸으므로 ‘구름재’라 불리웠다고 한다. 또는 ‘진골(泥洞)’이라고도 하였다. ‘질척거리는 땅에서 구른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시 한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 ‘운현(雲峴)’으로 바뀌고, 이것이 운현궁의 지명 연원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2001.1. 31.) 그는 ‘운현>니현>니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어디까지나 짐작과 추론일 뿐이다.
‘진고개’ 자체가 ‘땅이 진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했음을 직접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나 역사적 사례는 없다.
또한 ‘종로구 니동(泥洞)’ 사례를 ‘중구 니현(泥峴)’ 사례에 유추시킬 수도 없다.
현재의 중구 남산부근 쪽을 ‘니동(泥洞’)으로 표기한 사례가 전무할 뿐더러,
그곳 동네가 ‘유독 진흙탕으로 유명했다’고 말해주는 기록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지도에는 단지 “니현”이라고 표기되어 왔을 뿐이다)
한편 ‘땅이 진 동네, 진흙길’과 연관된 ‘니동 (泥洞, 진골)’ 사례로는
‘종로 운현동’에 합쳐져 ‘종로 운니동(1914.4.1.)’으로 변경되었던 ‘종로 니동’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 나아가 살펴보면, ‘땅이 진 동네, 진흙땅’은 서울이나 전국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고지대가 아닐 바에야, 또한 일부 예외적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대부분 주거지는 비가 올 때면 배수가 제때 제대로 안 된데서
다들 엉망진창 진흙탕길이었던 것 아닐까.
“서울 거리의 진흙길은 너무나 질퍽거리므로 주민들은 그 길을 자유로이 걸어다닐 수 있도록
바닥보다 15cm가량이나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데, 이 때문에 걸음걸이가 매우 부자연스러워서
마치 목발 위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 같다. 서울에는 바로 ‘진흙길 마을’을 뜻하는
‘니동(泥洞)’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이름은 차라리 서울 전체에 붙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한 이태리 영사였던 ‘카를로 로제티’의 목격담이다.
(카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 나무, 1996.)
여하튼간에 기존 통설은 ‘땅이 질어서 진고개’라는 것이나,
오히려 그 반대사정을 말해주는 기록들도 있다. 진고개가 께끗하다는 것이다.
경의선을 부설할 당시 조선에 온 프랑스인 토목기사 ‘에밀 부르다레’는,
1901년부터 러일전쟁 직전 1904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진고개 동네가 가장 청결한 점이 유난히 눈에 띈다, 거리에 폐허같은 곳은 전혀 없고...이 일본 동네는 분명 시내에서 가장 쾌적한 곳일 것이다 ”라는 목격담을 남겼다.
그는 아울러 ‘카톨릭 사제관쪽 진고개와 동쪽 끄트머리 남산 비탈쪽 장충단’을 함께 언급하면서 ‘남산 진고개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긴 고개길이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에밀 부르다레, 정진국 역,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진고개와 장충단)
또한 1894년경 청일전쟁 때 한국에 온 일본기자 ‘사쿠라이’의 취재기에도
달리 “땅이 유별나게 질어서 진흙탕길 진고개”라는 식의 언급은 없다.
“서울의 일본 거류지는 남산 기슭을 점령하여 조선인 가옥들 사이에 흩어져있다.
길은 좁고 울퉁불퉁하여 냄새가 지독하고 부산 인천 두 항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 지역을 진고개(泥峴)이라고 부르는데,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종로의 큰 길에서 상당히 떨어져있다,
이곳 진고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140호에 700여명 정도 있다..이곳 일본인들은 모두 사치할 대로
사치하여 일본본토의 상인들에 비하여 생활정도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개화백경’에서 재인용)
또한 1894,3월에 입경한 ‘비숍’ 여사가 목격했던 서울 진고개의 모습이다.
“남산 비탈에 단조하고 수수한 백색 일본공사관 건물이 위치하고,
그 앞쪽에는 근 5000여명이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다. 다방도 있고 극장도 있고,
각종 편의시설도 갖추어져있다. 그곳은 조선인 거리와는 대조적이다.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는
깨끗하고 말끔하다”.(‘개화백경’에서 재인용).
2. 잘못되거나 논란되어지는 어원 재검토
우리 주변에는 그 어원이해를 잘못 착각하는 경우가 꽤 많다.
대개는 한자말 뜻풀이에만 맞추어 한글로 기계적으로 풀어버리는데서 그 실수가 잦다.
① 설렁탕- ‘선농단’ 행사에서 온 ‘선농탕’이 아니다. 몽고어 ‘슐렁, 슈루, 수라’에서 왔다.
② 백마강 - 원래는 ‘백강’인데, ‘백마강’으로 ‘마(馬)’가 보태지면서 ‘백마강 전설’까자
나중에 새로 생겼다.
③ 양귀비 - ‘당 현종비 양귀비’가 아니다. 고어 ‘양고미’에서 왔다.
④ 애오개(아현)·배오개(이현)·구리개(동현)-한자말과 우리말의 차이점이 몰각되고있다.
애오개는 ‘작은 고개’, 배오개는 ‘볕이 드는 밝은 고개’, 구리개는 ‘구린 내나는 고개,’라 한다.
(한편 ‘땅이 질어서 구리개’라는 견해도한다. 구리개를 한자말로 동현(銅峴)이라고 표기하지만
“구리 동(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仇里古价“라는 표기도 있었다, 운현, 구름재라고도 했다.
- 서울지명사전)
⑤ 송현 - 소나무가 많아 ‘송현’이라는 설도 있지만, ‘솔(좁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다.
⑥ 이포 - 한자말 ‘이포(梨浦)’로 표기되나 ‘배(梨)나무’와 전혀 관계없다.
‘배(舟)나루’일 뿐이다.
⑦ 모전교 - 우리말 ‘모퉁이’와 한자말 ‘시전’이 결합된 것이다.
⑧ 잠수교 - 이름이 ‘잠수교’라 하여 언제나 ‘잠수’되는 상태도 아니다.
⑨ 죽령 - 한자말 ‘죽령(竹領)’이나 ‘대나무’와는 관계없다.
‘크다’는 ‘대(大)’를 ‘대 죽(竹)’의 ‘竹’에서 취하여 옮겨 쓴 것이다.
⑩ 산림동 - ‘살리문골’에서 유래했다. 그 형세는 천변의 평지마을이고,
달리 산림(山林)이 우거진 산동네 지역이 전혀 아니었다.
ㅡ예장터 - 임진왜란 당시의 ‘왜장터’가 ‘예장터’로 잘못 바뀐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예장터’였다.
위와같이 여러 논란되는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한자말의 평면적 풀이에만 손쉽게 기대서는 아니된다. 땅이름 연구에서 필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땅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썼기 때문에 ‘땅 이름의 한자 풀이식’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다. 또 땅이름을 ‘순수 언어학적 풀이’에만 의존할 경우,
어휘가 다양한 우리말의 갈래와 음운체계를 확대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정형화된 음운법칙이나
고어 변천체계가 아닌 한, 전단(專斷)된 풀이는 지양하여야 한다. 땅이름 연구는 그 땅이름에 관한
역사적 변천과정등 고증을 거쳐야 하고, 언어학적·음운학적 방법으로는 부족하며, 지리·역사·민속·
풍수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검토해야 한다.” (강길부, 땅이름 국토사랑, 1997.)
3. ‘진고개’에 관한 전국적 사례
1) ‘길다(長)’에서 온, ‘긴 고개’
① 양양(주문진) 오대산 진고개
“진고개는 ‘큰고개(대령·대관령)’, ‘긴고개’에서 왔다.
현재의 대관령 옆에 있는 ‘진고개’는 순토박이 우리말이 그대로 남은 경우이다.”
· 배우리, 대령·대관령·진고개는 모두 ‘큰고개’의 뜻, (월간 산, 2006.8.)
· 신희철, ‘역사·지리와 동행한 백두대간’ (보경문화사, 2006.10.25.)
· 방민호, 문명의 감각, ‘영서교통로 여섯고개’ (2003.9.20.)
② 부산 동삼동 진고개
· 이영미, 2004.9.17. ‘부산 잘먹고 잘사는 법’
③ 충북 단양 죽령 진고개
· 민촌 이기영 문학연구
④ 진고개 민박집 -
· 김주영, ‘아라리 난장②’
⑤ 개성땅 진고개
2) ‘길다(長)’에서 온, ‘긴 골목’
① 대구 중구 진골목
“진골목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긴 골목’이라 는 뜻이다.”
- 한겨레 2008.6.21. ‘대구 골목투어에 가보니’
- ‘골목을 걷다’ (진골목, 달성 서씨가 살았던 대구 최고의 부자동네, 김기홍 외 2008.)
② 전남 장흥 진골목(泥洞) - 한겨레 2007.7.4. 땅이름칼럼, 허재영
3) ‘길다(長)’에서 온, ‘긴 내’
- ‘진내을’은 ‘긴 냇물’이다.
한겨레 2007.10.3. 땅이름칼럼, ‘금산과 진내을’, 허재영
4) ‘길다(長)’에서 온, ‘긴 산’
“우리 마을 이름은 앞산이 길어서 ‘긴 뫼’입니다. 사람들이 ‘긴 뫼’로 발음하다 보니 ‘진메’가 되었고,
일제 때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마을 이름이 ‘긴 장, 뫼 산’ ‘장산리’가 되었습니다.”
-한겨레 2008.12.15. ‘진메마을’, 김용택
4. ‘긴 스트리트 (long street)’개념으로서 진고개의 역사성
서울의 개화는 ‘남촌’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상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1885년경에 본격적
집단적으로 남산 진고개쪽으로 정착하면서 상가를 이루었다.
‘신(新)문명의 등장에 사람이 몰리는 진고개’라는 표현도 있었다.
그때 당시를 기록한 개화풍경이, ‘한국근대문학과 도시문화(이성욱,2004)’에 소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상가가 즐비하게 길게 늘어선, 긴 고개길 스트리트’였음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본정통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인 세야마 악기점과 우측으로 시자키문구점에서
시작하여 산안약국, 대화헌 과자옥, 환일 오복점, 대택 사진기점, 차마옥 가방화점, 히노마루 잡화점등
일본상점들이 총총히 들어서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일지출옥 그림엽서점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명치정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에는 점포들 외에도 음식점, 제과점, 끽다점, 카페등이 많았다.”
“진고개로 들어서면, 좌우로 벌려있는 뭇상점들은 점두장식이라든지 상품진열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어수산란하게 만들고, 이곳저곳에 있는 축음기상회에서는 새로나온 유행곡 선전이 굉장했다.”
“진고개에 사람사태가 났느니, 진고개의 밤거리는 불야성이라니, 네온사인과 일루미네이션이
그 거리의 자랑거리로 회자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점포·상가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① 서점(책사) - 월탄 박종화의 회고담, / 한설야의 ‘황혼’ - ‘진고개 책사’
② 요리집 - 일본인 화월루(1887), 송병준의 청화정
③ 음악 악기점 - 홍난파 회고담
④ 상·하수도, 도로개수 - ‘이현(泥峴)교번소’, 오늘날의 ‘충무파출소’격이다.
⑤ 제과점·알사탕·양과자 - 현진건의 ‘빈처’- 과자가게, ‘진고개 눈깔사탕’
⑥ 반지·보석가게 - 피천득의 ‘인연’, 채만식의 ‘태평천하’-반지가게
⑦ 전시관 - 나혜석의 그림전시회(1935) - ‘진고개 조선관’
⑧ 커피점 - 1920년대 최초의 커피하우스- ‘명치정 이견, 진고개 금강산’
⑨ 우체국 - 이인직의 ‘귀의 성’ - ‘진고개 우편국’
⑩ 네온사인·불야성·전기 -1901,8 진고개 상가 전등 등장
⑪ 양복점· 구두점· 모자점
⑫ 백화점, 목욕탕, 전당포
⑭ 가스-1909, 일한와사주식회사
이런 ‘진고개 스트리트’ 지역은 우리의 근대소설등 문학공간과 ·배경에 자주 등장하였다.
① 염상섭 - 삼대 - 찻집 - - 만세전 - ‘진고개 헌병사령부’
② 이태준 - 복덕방, 무서록
③ 박태원 - 청계천변, 구보씨의 일일
④ 현진건 - 빈처 - 과자가게
⑤ 방정환 - 슬퍼거나 우습거나, 없는 이의 행복(수필집), 칠칠단의 비밀
⑥ 이인직 - 혈의누 - - 귀의 성 - ‘진고개 우편국’
⑦ 채만식 - 태평천하 - 반지가게
⑧ 최인호 - 타인의 방 - 황금정 욕장
⑨ 한설야 - 황혼 - ‘진고개 책사(서점)’
⑩ 홍성유 - 장군의 아들 김두한(3) - 음식점, 제과점, 다방, 악기점, 레코드점
⑪ 이인화 - 영원한 제국 - 진고개(충무로)
⑫ 김구 - 백범일지
⑬ 조정래 - 아리랑5 - 경성, 진고개 왜년 기생집
한편 ‘진고개를 오고간, 진고개 입구에 온, 도시 산책자’가 ‘도시 고현학’의 관점에서 따로 주목되었다.
먼저 박태원의 “구보씨”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진산이”가 있었다. ‘진고개에서 산보하는 자’를 말한다. ‘종산이’는 ‘종로를 구경 다니는 자’이다.
일제 시대에 ‘진고개의 찻집,우동집,카페를 전전하는 모던걸, 모던보이들’을 흔히 “혼부라당, 차당”등으로 불렀다. (종산이·진산이, 창석생, 별건곤, 1929.9월호/ 이성욱, 도시군중과 산책자 문제, 한국근대문학과 도시문화,/ 박경룡, 개화백경.)
5. 서울시 지도와 도면
한자 “니현(泥峴)”은 조선시대의 "서울,한성,경성을 그린 지도"에 늘 표시되는 반면에 남산골쪽에 ‘니동’은 없었다. (‘정도 600년 서울지도’ 참조)
그 한자 표시옆으로 ‘가로길 가로망’이 길게 그려져있다.
한글 ”진고개“지명은 1892년경의 “슈션전도 (연세대박물관 소장본)”에 이르러
등장한다. 그 한글 표시 옆으로 ‘가로길 가로망’이 길게 그려져있다.
<긴 고갯길 구간을 명시적으로 표시해준 도면자료들>
① 도면- 협정된 일본인 거류구역
- 위 도면에는 ‘긴 고갯길’이 ‘가로’ 형식으로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 ‘니현(泥峴)’으로 기재되어 있다.
(손정목, 한국 개항기도시 변화과정연구, 1982.)
②도면- 한성부 시대의 가로망과 일제시기 형성된 가로망
- 위 도면에는 ‘조선시대에 형성된 가로망’으로 ‘긴 고갯길’이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 ‘진고개길’이라
기재되어 있다. (서울건축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9.)
6. 맺음말ㅡ “ㄱ - ㅈ 구개음화 현상”이다.
요컨대, 어원적으로 ‘진고개’는 ‘긴(長)고개’에서 왔다고 판단한다.
‘ㄱ→ㅈ’로 변하는 ‘구개음화’ 현상의 결과이다. 즉 경상도·전라도 사례처럼,
‘진’은 ‘긴(長)’의 구개음이다. (‘진고개와 긴고개’, 허재영, 땅이름칼럼, 한겨레신문, 2007.7.4.)
진고개 어원에 관한 두 입장, 즉 ‘진(泥)고개 說’과 ‘긴(長)고개 說’ 사이에는 지역현장성 연구에 있어
천양지차의 간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기존의 “진흙동네, 진(泥)고개 설‘이 내세우는 이야기들, 홍양호의 ’니와‘, 이민구의 ’굴정‘ 이야기들은 기실 그 신빙성이 크게 부족하거나 전혀 없을 지 모른다. ’비만 오면 엉망진창이 된다는 진흙동네‘에 선비의 거소로 그 무슨 ’니와(泥窩)‘를 짓겠으며,, 깊고 깨끗한 우물로 ’굴정(窟井)‘이 계속 남아있다는 말인가?
’1906년경에 진고개 지역에 하수구 배관공사를 최초로 했다는 점‘도 ’진흙동네 진고개설‘을 뒷받침하기에도 여러모로 미흡하다. 1890년대 이래로 ’철도,전차,철교,시장,교회,학교,호텔,공원,백화점(미쓰꼬시지점,1906)‘등이 차례차례 이미 들어선 마당이기에 ’1906년경에 이루어진 진고개 하수구공사‘의 성격은
그런 사회적 기반시설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합당하다.
1903년경에는 상수도공사도 있었다. 그 1906년경의 하수구 공사라함은 그곳 진고개의 도로확장을 하면서 상가가로를 정비하는 개수공사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진정 ’엉망진창 진흙동네, 진(泥)고개‘가 맞다면 일인상인들이 정착한 1885년경 초기에 벌써 그런 개수공사를 먼저 해두었야했을 일이다.
혹, 이른바 진고개가 부분적으로 진흙 동네 였을지도 모르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현상였을 것이고, 그 곳 명칭 진고개 (니현,泥峴)는 그곳의 실제적인 지형형태에 착안하여 “긴(長)고개”를 의미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바꾸어 말하면 순우리말 “긴고개”를 듯하는 “진고개”를 한자말로 옮김에 있어 “니현”으로 표기했던 것이, 나중에는 그만 “진흙동네 니현”으로 오해하고만 것이리라.
‘긴(長)고개 설’은 ‘진고개 해당지역’을 ‘진흙동네,니동(泥洞)’이라는 식, 즉 ‘일정하게 한정적인 구획, 영역범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갯길, 가로, 스트리트의 연장으로서 탄력적 구간’으로 파악하게 된다. 이렇게 길게 퍼져가는 남촌 진고개를 두고,
매천 황현 선생은 “포락상남촌 오지사십허리 진위왜촌(包絡上南村 五之四十許里 盡爲倭村)”이라고 기록하였다.
‘서울 진고개’ 구간에는 그 고갯길 양편을 포함하는, ’본정통, 충무로2가, 남산골, 세종호텔 뒤 충무로‘ 구간 정도가 일응 해당될 것이다. ‘동명연혁고(2)는 ’주로는 현 충무로1·2가 구간’이라고 말한다.
여태까지의 ‘서울시 지도’를 보면, 남산쪽 남산골부근 고갯길을 두고 한결같이 ‘니현’으로만 표시하였을 뿐 달리 ‘니동’으로 표기한 사례는 전무했다. ‘니현’ 글자 옆에는 ‘야현’쪽으로 ‘뻗어나간 가로망’이 길다랗게 나타나있다. ‘요즈음의 충무로길 구간’에 해당되는데, 조선시대 내내 ‘그런 가로길 가로망 형태’가 있어왔다.
마지막으로 ‘진고개의 역사적 상징성’을 강조해 본다.
우리의 개화문명은 ‘남촌, 진고개 고갯길의 양편에 길게 즐비하게 들어선 점포’에서 시작되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는 별론으로 하되, 진고개의 역사적 기록을 재정리하여
‘기억의 공간’으로 복원해 볼 필요성이 크다. ‘개화기 신문명 도래의 자취’라는 ‘역사적 유산’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강남 압구정·청담동 상권’ 이전에 ‘중구 명동 상권’이 있었고, 그에 훨씬 앞선 개화기엔 ‘진고개 상권’이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흔적으로는 ‘진고개 표지석’, ‘진고개 음식점(충무로3가,1962~ )’ 정도이다.
거의 잊혀져가는 최희준의 가요 ‘진고개 신사(1963)’, 이제는 영상자료로만 남은, 김진규·엄앵란 주연의 ‘진고개 신사(1964)’ 가 있긴하다.
<참고문헌>
· 동명연혁고(Ⅰ), 종로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8.10.
· 동명연혁고(Ⅱ), 중구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68.10.
· 김영근, 일제하 일상생활의 변화와 그 성격에 관한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99.
· 한겨레신문, 땅이름 칼럼,허재영 -진고개와 긴고개, 전농동과 설렁탕, 금산과 진내울
· 이성욱, 한국근대문학과 도시문화, 2004.
· 에밀 부르다레, 정진국 역,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2009.
카를로 로제티, 꼬레아 꼬레아니, 1996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1994
김영상, 서울 600년(2), 1997
박경룡, 개화기 한성부연구,1995
서울의 고개, 서울시, 1998
서울의 지명사전, 서울시. 2009
박경룡, 서울 개화백경,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