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2005년 5월호
月刊朝鮮 誌上展
유화와 디지털화의 만남
* 그림 추가 * <「오리」90.9cm×72.7cm의 유화를 사진 찍어 컴퓨터에 저장한 뒤 마우스로 그림을 확장했다.>
서양화가 金點善(김점선·59)씨는 30여 회의 전시회를 열면서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해 왔다. 2002년 어깨 통증으로 붓을 못 쓰게 되자,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畵」를 그리기 시작했다. 올해 어깨가 완치되어 다시 붓을 잡게 된 金화백은 유화와 디지털畵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인물연구] 『인생을 걸면 그림이 나온다』
金點善 화백은 33년 동안 그림만 그리고 살았다. 오십견으로 붓을 못 들게 되자 그녀는 디지털 그림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金點善 화가 1946년 개성 출생. 경남여고·이화女大 교육공학과·홍익大 대학원. 1987~1988년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저서 「나, 김점선」, 「10cm 예술」, 「나는 성인용이야」, 「10cm 예술·2」. 개인전 50여 회 개최.
李根美 月刊朝鮮 객원기자 (www.rootlee.com)
두 개의 마우스를 동시에 조작하는 화가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화가가 몇이나 될까?
金點善(김점선·59) 화백과 함께 빵집에 갔는데 사인을 해달라고 종이를 내미는 이들을 여럿 만났다. 사람들은 『그림이 너무 좋아요. 존경합니다』라고 했다.
『그림이 좋다』는 말은 「화가 金點善」에게, 『존경한다』는 말은 「인간 金點善」에게 보내는 찬사다. 金點善 화백은 네 권의 수필집을 펴냈다. 그녀의 진솔한 글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서울 광장동 워커힐 아파트 그녀의 자택을 찾았을 때, 金화백은 그림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거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아들은 눈을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는 나를 「디지털리스트」라고 부릅니다. 내가 왼손으로 光(광) 마우스를, 오른손으로 펜 마우스를 만지는 걸 보더니, 「두 손으로 컴퓨터를 조종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 엄마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아들의 얘기여서 기분이 좋았죠』
金화백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月刊朝鮮 화보 면에 실을 그림을 선정해 기자의 메일로 보내고, 디지털 그림에 덧칠을 하고, 자주 드나드는 홈페이지를 찾아 여러 코너를 클릭했다. 하루에 3∼4점씩 그린다는 디지털 그림 저장 공간에는 눈이 부실 만큼 밝은 원색의 그림이 가득했다.
金화백의 디지털 그림은 각각 독립된 그림이지만, 한꺼번에 수십 점을 붙여 놓은 연작으로도 만들어진다. 개인전 때는 독특한 전시 기법으로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金點善 화백의 디지털 그림은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金화백은 디지털 그림을 그리는 최초의 화가이다. 개인전을 30회 이상 개최한 화가가 디지털 그림을 시작했다는 건, 권위를 버리고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다.
디지털 그림을 시작한 것은 느닷없이 찾아온 오십견 때문이었다.
『3년 전에 아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갖고 싶다며 그냥 드로잉(단색의 線畵)만 해서 좀 싸게 팔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요청에 못 이겨 한 가지 색깔만 칠한 10호짜리 담채화를 한 달 동안 20점이나 그렸어요. 너무 무리를 했는지 어깨가 탈나서 팔을 들 수 없었어요. 영혼이 빨려들 만큼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어요.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당시 쉰여섯 살이었는데 완전히 컴맹이었어요』
이후 많은 사람들이 金點善 화백의 그림을 쉽게 소장할 수 있게 됐다.
디지털 그림은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사동 하나아트갤러리, 예술의 전당 아트숍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金화백의 디지털 그림을 판매하고 있다.
2002년 4월부터 가로·세로 각각 10cm인 태플릿 위에서 마우스 펜으로 디지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金화백은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빠져들었다. 그해 12월 가모갤러리에서 첫 디지털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文人들이 대거 관람을 왔다. 시인 金龍澤(김용택), 소설가 申京淑(신경숙)씨 등이 디지털 그림을 구입했다.
『지금은 아주 좋은 종이에 복사를 하지만, 그때는 광화문 카피 집에서 일반용지에 복사를 했는데도 다들 좋아했어요. 그때 그림 한 장에 10만∼20만원에 팔았어요. 문인들은 내 그림을 소장하고 싶었는데 싼값에 사게 되어 잘 됐다며 좋아하더군요. 누구든 쉽게 그림을 가질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꼈습니다』
金點善 화백이 2003년 두 번째 디지털 그림 전시회를 열었을 때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인터뷰를 70번 정도 했을 겁니다. KBS 위성에서 내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여러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었어요. 디지털 그림도 신기하지만, 아픈 데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걸 높이 평가한 것 같아요.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 컴퓨터를 겁없이 다룬다는 것에 관심들이 많더군요』
3년간 손가락만 움직여 디지털 그림을 그리는 동안 어깨가 저절로 나아 金화백은 올해 초부터 다시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요즘 유화에다 디지털 그림을 덧입히거나 확장하는 작업을 합니다. 유화는 한계가 있지만 디지털 그림은 수없이 변주를 할 수 있죠. 유화를 포토샵으로 조절하여 색다른 그림을 만들어 내는 거지요』
『나는 영원한 비트族』
어린 시절 金點善은 친구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려 주고, 언니의 그리기 방학숙제를 대신해 주었다. 무위도식하는 동네 화가에게 실망을 느껴 화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일찌감치 이화女大 진학을 결심하고, 학과를 꼼꼼하게 선택했다. 컴퓨터공학과가 없던 1964년, 교육공학과는 최첨단 학과였다.
『그림과 영화에 대한 과목이 대부분이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첨단 영화를 빌려 와 우리가 직접 상영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이 교실 한쪽에서 우리 수업을 참관할 정도로 앞서가는 학과였죠. 당시 영사기로 실험영화도 찍고 각종 기자재를 능숙하게 만질 수 있었어요. 대학 시절 최첨단 기계와 문화를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도 컴퓨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거죠』
이화女大에 다닐 때 金點善은 얌전한 학생이었다. 다른 학생과 다른 점이라면 영어공부에 남달리 열중하고, 외모 가꾸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부산 경남女高 2학년 때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비트문학에 심취해 소위 「비트적인 삶」을 동경하게 되면서 비롯된 일이다.
『비트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내 경우는 운동화와 옷 두 벌로 평생을 사는 「심플 라이프」의 추구, 돈이나 출세에 관심이 없는 순수 이상주의에 끌렸어요. 10代 때 「나는 영원한 비트族이다」라고 스스로 선언했는데, 지금도 그때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金點善 화백은 사시사철 운동화에 면양말을 신고, 아들이 고등학교 때 사용하던 가방을 메고 다닌다. 대부분의 옷은 작고한 남편과 아들의 것이거나, 주변 사람들이 준 것들이다. 『옷을 사 본 기억이 없다』는 金화백은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늘 흰 수건을 목에 감고 다닌다.
자신이 직접 자른 짧은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맨 그녀가 아들의 남방셔츠를 입고 여성잡지 컬러면을 장식하면, 사람들은 신선한 감동을 받는다. 2003년 개인전 때 기자는 처음 金點善 화백을 만났다.
당시 그녀는 구멍 난 바지를 입고 있었다. 金화백은 『오프닝에 구멍 난 바지, 어울리지 않냐?』라며 껄껄 웃었다.
인생을 바꾼 사건
대학 다닐 때 비트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영어를 열심히 익혔다. 졸업할 때쯤 비트 정신이 히피문화로 변질된 것에 실망해 유학을 포기하고, 이화女大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까지도 그림을 그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이화대학신문에 소설을 응모했다가 낙방하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영문학과 羅英均(나영균) 교수로부터 『넌 천재니 계속 소설을 쓰라』는 얘기에 힘입어 매년 신춘문예를 노크했다.
대학원은 필수과목 수강을 거부하는 바람에 한 학기 만에 제적당했다.
그 일을 안타까워한 某 교수의 주선으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2년 반 정도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통역할 때 고등학교 교사 월급의 네 배나 벌었다. 매년 신춘문예에서 낙방하고, 비트문화도 사라져서 심드렁하게 지낼 때, 인생을 바꾼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친한 친구가 집에서 결혼을 재촉한다면서 죽고 싶다고 하더군요. 셋이서 그 친구의 하소연을 듣다가 다같이 죽기로 약속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20代였으니까 가능했다고 봐요. 다음날 촛불을 켜놓고 음악을 들으며 독약을 먹기로 했죠. 한 친구가 「죽기 전에 자신의 恨이 뭔가를 발표하자」고 제의했어요.
집에 가서 식구들이 잠든 방문을 열고 작별을 고한 다음 내 방에 누워 「나에게 맺힌 恨이 뭔가」를 생각했죠. 그때 떠오른 게 그림이었어요. 그림을 못 그린 게 내 生의 아쉬움으로 떠오르더군요. 다음날 아침 바로 미술학원에 등록했지요. 다른 친구들은 나를 기다리다가 그날 못 죽어서 지금까지 다 살아 있어요(웃음)』
26세에 美大 대학원 진학
美大에 학사편입을 하려고 했으나 대학마다 전공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대학원도 美大 출신이 아니면 응시할 수 없었다. 홍익大 대학원만 전공이 다른 학생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6개월 동안 준비를 하여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홍익大 대학원에 합격했다. 8명을 뽑는데 800명이 지원했던 것이다.
1972년 봄학기 입학을 앞둔 예비 대학원생 金點善은 석사논문을 뭉크에 관해 쓰기로 결정하고 맹렬하게 공부했다.
『노르웨이에 있는 친구에게 뭉크 관련서적을 보내 달라고 해 37권을 원서로 독파하면서 요약을 철저하게 했어요. 현대미술관을 다니면서 다른 화가들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문예사조와 철학도 공부했습니다. 대학 때 전공을 안 한 만큼 대비를 해야겠다는 각오로 미리 준비한 거죠』
개강을 하고 수업에 들어갔을 때 某 교수가 프랑스에 갔다 온 얘기, 아내에게 외제 옷 사다 준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너무 화가 나서 교수님이 들어오기 전에 탁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어요. 교수님이 들어왔을 때 「내가 그런 얘기 들으러 학교에 온 줄 아느냐」고 소리를 꽥 질렀죠. 학구열에 불탈 때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교수님이 틀린 이론을 말하면 내가 지적하기도 했어요. 아주 껄끄러운 학생이었죠』
괄시받던「非전공자」에서「천재」로
입학하자마자 金點善은 온종일 그림에 빠져들었다. 학교 바로 옆에 하숙집을 정하고 오전 6시면 실기실로 달려가 밤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눈곱만 떼고 학교 가서 종일 그림 그리다가 중간에 수업을 받고 와서 다시 그리곤 했지요. 대학 다닐 때는 그래도 깔끔했는데, 대학원을 다닐 때 머리는 산발을 하고 아무 옷이나 걸치고 다녔어요. 길거리에서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고, 여자인가 아닌가 확인받은 적도 있었어요. 내가 몽롱해 보인다며 주머니를 뒤져 마약을 찾는 경찰도 있었죠』
신장이 170cm나 되는데다 깡말라서 눈빛만 형형한 金點善의 당시 별명은 「베트콩」이었다. 간혹 다른 학교에서 온 강사들은 수업 전에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저 사람 학생 맞아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에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을 뽑는 제1회 앙데팡당展 공고가 붙었다. 상급생들이 슬슬 실기실로 몰려들었다.
『선배들이 나에게 중요한 준비를 해야 하니 실기실에서 나가 달라고 하더군요. 「너 물감도 갤 줄 모르지?」라고 말한 선배도 있었습니다. 오기가 나서 빈 교실에 들어가 출품작을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제1회 앙데팡당展 입상
당시 「관념미술」과 「극사실주의」 두 분야의 작품을 공모했다.
金點善은 관념미술 분야를 선택했다. 150호짜리 캔버스 세 개를 사 와서 하얗게 칠했다. 그런데 밤중에 날아든 하루살이들 때문에 흰색 캔버스가 회색이 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한여름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옷을 다 벗고 작업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흰색을 몇 번 칠해 밑판을 만든 다음, 빨간색 광택 에나멜 페인트를 중앙에 부었다. 페인트 무게 때문에 캔버스가 축 처지면서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無定形(무정형)의 웅덩이가 생긴 겁니다. 중간은 아주 빨갛고 바깥쪽으로는 색깔이 옅어서 아주 독특한 느낌이 났어요. 용달차에 작품을 실어 경복궁에 있던 현대미술관으로 보낼 때 뿌듯했지요』
8월15일자 신문에 1300명의 출품작 가운데 뽑힌 8명의 입상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金點善의 이름도 거기 들어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은 비디오 아티스트 白南準(백남준)씨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가 李禹煥(이우환)씨였다. 일체의 인맥을 배제하기 위해 在外 예술가를 심사위원에 앉혔던 것이다.
『현대미술관에 갔을 때 청소부가 내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걸 가장 먼저 뽑았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동안 작품이 조금 변형되어 있었어요. 작품을 세웠을 때 완전히 마르지 않은 빨간 페인트가 아래로 조금 처지면서 더욱 색다른 느낌을 줬던 거죠. 덜 마른 페인트를 관객들이 눌러 보는 과정에서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 참여미술 형태도 띠게 되었죠』
「非전공자」 金點善은 앙데팡당展 입상 이후 「천재」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작품은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지 못했다.
『당시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렸어요. 학교에 가지 못해 언제 출품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시기를 놓쳐 버렸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나는 대학원 다닐 때 그런 정보를 나눌 친구가 없었어요. 당시 나는 학교에서 완전히 「왕따」였어요』
대학원 시절 실험영화 제작
제1회 앙데팡당展 입상 이후에 金點善은 자신만의 그림 분야를 개척했다.
『미술전에 입상하고 천재 소리를 듣던 내가 그룹전에 마치 어린이가 그린 것 같은 도룡뇽 그림에다 글씨까지 써서 내자 「천재는 무슨… 혹시나 했더니 역시로구먼」, 이런 얘기가 들리더군요』
당시 화단은 흑색과 백색이 지배했고, 표현을 극도로 절제했다. 하지만 金點善은 원색으로 소박하고 담백한 정물, 동식물을 소재로 다양한 그림을 선보였다.
제2회 앙데팡당展의 심사위원은 국내 화가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金點善은 주목받지 못했다.
『어떤 모임에서 李禹煥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나에게 「힘들겠지만 열심히 하라. 그림은 창조다. 독자적으로 열심히 활동하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더 이상 앙데팡당展에 기대를 걸지 않고 친구들과 그룹전을 열었습니다.
1973년에 미국문화원에서 친구들과 5인展을 열었는데 슈나이더 美 대사 부인이 내 그림을 보더니 시티뱅크에 소개해 주었어요. 20호짜리 그림을 팔아 생애 최초로 달러를 벌었지요. 얼마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친구들이 사 달라는 걸 다 사주고도 돈이 남아서 막 썼던 기억이 납니다』
金點善은 휴학을 거듭하면서 대학원에 4년간 적을 두고 있었다. 그 기간에 이화女大 친구들과 20분짜리 실험영화 세 편을 제작했다. 실험영화는 프레스센터와 신세계백화점에서 입장료를 받고 정식으로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독일문화원에서 상영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실험영화를 찍을 때 「모든 걸 내놓고 발가벗은 자세로 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金點善은 옷을 완전히 벗고 카메라를 잡았다. 배우는 옷을 입고, 감독은 옷을 벗고 촬영하는 이색현장이 잡지에 보도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金點善은 다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수속을 밟았다. 미국의 10개 대학에 원서를 보내 8개 학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으나 문제는 비자 인터뷰였다. 당시 홍익大 대학원 친구들과 함께 비자 인터뷰를 받으러 갔는데, 다들 헝클어진 머리에 펑키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美 대사관 직원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마약이나 매춘, 폭력을 하기 위해 미국에 가려는 거냐고 묻더군요. 그때 모독감에 젖어 반발할 기운을 잃었어요. 우리 차림새를 우리가 알고 있으니 마약이니 폭력이니 하는 얘기는 이해한다고 쳐도, 매춘은 너무 충격적이었지요. 그때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지요』
이미 서른 살을 넘긴 나이였다. 유학길도 막혀 버린 1977년 무렵, 화가 金相游(김상유)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金相游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봐줄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산다면 구역질이 날 거다. 여기서 돈 벌어서 물감 산 사람 있나. 누굴 위해 언 물에 손을 넣고 빨래하는 사람 있나. 결혼하라. 아기를 낳고 기저귀를 빨기 위해 얼음물에 손을 넣고, 시장에 가서 콩나물 100원 어치를 사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떨어보라. 그런 연후에 예술을 논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결혼하기로 결심했지요. 나에게 예술을, 결혼을 구체적으로 말해 준 사람이 처음이었어요』
그로부터 한 달 후, 선배의 전시회에 간 金點善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결심했다.
『전시회를 축하하기 위해 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두 소절을 듣는 순간 「아! 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전에 본 적이 없었죠.
뛰어난 감성의 소유자라고 생각되는 그 남자가 1절을 부르고 간주를 할 때 큰 소리로 「나하고 결혼하자」고 소리를 질렀죠. 그 남자도 「좋다」고 응수했고, 그래서 그날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2년 후 아들 상욱이가 태어났어요』
3초 만에 결혼 결심
3초 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그녀의 남편 金晴男(김청남·작고)씨는 가죽공예가였다. 가죽공예가협회장을 지냈고, 미술가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예술가 부부는 신혼 첫해에 싼 집을 찾아 이사를 세 번이나 했을 정도로 궁핍했다. 콩나물 살 돈이 없어 얻어 온 된장에 산에서 뜯은 풀을 넣고 끓여 먹었다.
『집에 연락하거나, 통역을 하면 바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오직 그림만 그리기로 독하게 마음먹었어요. 이틀만 있으면 식량이 떨어질 지경까지 갔어요. 최후까지 깡과 배짱으로 버텼죠. 「쌀이 없으면 죽지 뭐」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러 나가지 않았어요. 이 길 택했는데, 「이걸로 안 되면 죽어야지, 뭘 딴 걸 해」 그런 생각으로 그림만 그렸지요.
하지만 우리 부부는 죽어도 되지만 다섯 살 난 아들은 어쩌나 고민이 되더군요. 그럴 때 그림 하나가 5만원에 팔렸어요. 그 돈을 다 쓰기 전에 다시 그림이 팔려서 죽을 일은 면하게 됐죠』
화가는 자기 그림을 산 사람이 500명을 넘으면 평생 먹고 산다는데 1986년에 이미 金點善 화백의 그림을 산 사람이 500명을 넘었다.
「때 묻지 않은 심성의 화가」
1983년에 첫 전시회를 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 2002년까지 전시회를 30여 회 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이제 金화백 자신도 전시회를 몇 번 했는지 잘 모른다. 2004년에만 전시회를 8∼9번 열었다. 『2005년의 金點善일 뿐 개인전을 언제 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현재 서울 삼성동의 씽크씽크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6월에는 코엑스에서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다.
『붓으로 그릴 때는 1년에 2∼3번 전시회를 했어요. 그때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전시회를 많이 하느냐고 했죠.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면서 전시회를 더 자주 하게 된 겁니다. 하루에 디지털 그림을 서너 점 이상 그립니다. 5분 만에 그리는 그림도 있고 몇 년 만에 완성하는 그림도 있죠』
金點善 화백은 1987년 「삶과 꿈」 11월호 잡지에 실린 홍익大 李逸(이일) 교수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 작고한 李逸 교수는 金화백의 지도교수였으며 미술평론가였다.
『화단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나를 잊은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 내 그림을 주시하고 계셨더군요. 18년 전에 선생님이 쓰신 평이 내 그림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李逸 교수는 金點善 화백을 「때묻지 않은 심성의 화가」라고 평했다.
李교수는 『金點善의 그림이 서툴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때묻지 않고 관습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린애처럼 세상을 보고 그렇게 바라본 세계를 역시 어린애처럼 그려낸다. 어른이 아무런 꾸밈없이 어린애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화가로서의 커다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金點善의 회화작품을 한마디로 서툰 그림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때묻은 선입견의 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보아 서툴게 보이기는 하되, 결코 어설프지 않으며, 간결·단순하면서도 차분한 화면의 짜임새는 이 화가의 뛰어난 회화적 감성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평했다.
그림 형식 무시
미술평론가 김종근씨는 金點善 화백을 『우리나라 여류화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림만 팔아서 먹고 사는 전업작가이자 가장 열심히 작업과 전람회를 한 女傑(여걸)』이라고 평가했다.
김종근씨는 『金點善 회화의 특징은 평면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원근감도 거의 살아 있지 않고, 때문에 그림자는 더더구나 생각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이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는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선과 투명한 색채를 바탕으로 동화적 작품세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김종근씨는 『우리나라에서 천재화가를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金點善을 꼽을 것』이라면서 『그림이라는 어떤 형식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재능과 기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無法(무법)과 筆法(필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라는 이유를 댔다.
「서툰 그림」, 「동화적 작품세계」라는 평에 대해 金點善 화백은 이렇게 얘기한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오해한 사물을 자기화하는 거죠. 어떤 자극을 주관화하는 게 예술가의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익지 않아서 서툴게 보일 뿐입니다. 서툴수록 개성적이죠』
金화백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은 「자유」라고 요약한다.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평론가들은 金화백의 그림을 「동화적」이라고 평하지만,
정작 金화백은 「나는 성인용이야」라고 외친다.
2003년에 수십 점의 화투그림이 담긴 「나는 성인용이야」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金화백은 『화투야말로 최고의 민중미술이다. 화투는 친숙한 놀잇감일 뿐 부정적인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金화백은 자신이 성인용인 이유를 『성인들은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무슨 그림을 그리든 영향을 안 받으니까 성인용이라고 하면 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1985년 「샘터」에서 처음으로 청탁이 와서 글을 쓴 이래, 오늘날까지 원고청탁이 끊이지 않는다. 수필집 네 권을 비롯해 朴婉緖(박완서), 崔仁浩(최인호) 등 당대 최고의 작가와 함께 글과 그림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다. 한양大 鄭珉(정민) 교수와는 漢詩(한시)에 관한 책을, 서강大 張英嬉(장영희) 교수와는 英詩에 관한 책을 낼 예정이다. 金화백은 수필집에서 지나온 날들을 가감 없이 보여 줬다.
『자신의 삶을 치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수치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나에게 국한시켜 생각하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지요.
나는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멀리서 객관적으로 나를 보면 창피할 게 없어요.
열심히 바라보고 교감을 해야 합니다.
내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나 자신이 치료되는 걸 많이 경험했습니다』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그린다』
金點善 화백은 「그림으로 밥 먹고 사는」는 몇 안 되는 화가다.
『피카소는 97세까지 살았습니다. 60년 이상 그림을 그렸죠. 재능이 아니라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위대한 화가가 된 겁니다. 오래 살면서 뚝심으로 지구를 덮을 만큼 그림을 그리면 누구나 大家가 됩니다.
나도 30년 넘게 그렸는데, 감정을 쏟아 30∼40년 갈고 닦아서 그림이 나온 거지 재능이 있어서 된 건 아닙니다. 화가는 질시와 비난에 지면 망하는 거고, 칭찬에 우쭐하면 타락하게 됩니다.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그린다, 내 뼈가 썩은 다음에라도 감탄할 날이 있을 거다」 이런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죠. 환경이 좋지 않다고 툴툴거리는 건 시간낭비예요. 오십견이 왔을 때도 그런 정신으로 버텼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그림만 그린다는 자세로 일했다』
현재 金화백의 그림을 담은 컵과 머플러·가방·화투가 판매되고 있고, 인터넷에서 金點善 화백의 디지털 그림을 수집하여 독자적으로 사이버 전시회를 여는 네티즌들도 있다.
金點善 화백이 사이월드에 미니 홈페이지를 개설했을 때 며칠 만에 조회수가 몇백 회를 상회했다. 그림 그리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여서 한 달 만에 폐쇄했다.
「굶어 죽더라도 그림만 그린다는 자세로 일했다」는 金화백은 요즘 아주 신난다고 말했다.
『24시간 그림 그리는 게 내 소원인데, 유화와 디지털畵를 동시에 그리면서 소원을 이뤘어요. 유화만 그리면 팔이 아프고, 디지털畵만 그리면 눈이 아파요. 유화는 실제 크기 캔버스에 팔을 움직여 시원하게 그리고, 디지털畵는 좁은 태플릿 위에서 세밀하게 그려야 합니다.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다가 눈이 아프면 유화를 그리고, 팔이 아프면 다시 컴퓨터로 옵니다. 행복하죠』
극도로 외출을 자제하는 金화백은 집에 있을 때 휴대전화를 꺼놓고 자동응답기가 대신 전화를 받게 한다. 세상과는 이메일로 소통한다.
『다들 극단적으로 색깔을 절제할 때 혁신적인 컬러를 쓰자 주변에서 걱정했습니다. 화단의 핵심에서 멀어지면, 지배하는 힘에 반항하면 굶어 죽는다고 친구들이 충고했죠. 그때 「죽으면 죽지 뭐」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독립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내가 살아남으면 나같이 살라」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미술계 원로와 교류하지 않고, 국전에 출품하지도 않았어요. 나를 끌어주는 사람도, 세력도 없었습니다. 요즘 화단과 교류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화가들이 늘었습니다. 화가는 그림만 그리면 됩니다. 그림을 선택하는 건 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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