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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1837: De la ritournelle 381-433.)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1837년에 대해 본문 속에 구체적 년도의 제시는 없지만 슈만에 연관 있을 것이다. 이 장(제11장)의 마지막 단어가 슈만이고 또한 슈만에게는 여성-되기와 어린이-되기 둘 다 있기 때문이다. 즉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환상소곡집(Fantasiestücke op. 12, 1837)��,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op. 15, 1838)��(추측컨대, 1837). (51MLG)]
탈영토화 과정이 지성의 자기 계층화를 점점 더 세분화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이에 비해 자연의 움직임으로서 풍토와 영토의 이질반복(리토르넬로)에서는 생성의 차원이 어떻게 뭉쳐져 하나의 개체성을 만들까하는 수렴의 운동을 지시해 주는 것 같다. 즉 전자는 상층의 논리가 점점 더 멀리까지 미치는, 즉 질서의 지배를 점점 미시적 세계에까지 적용하려고 하는 측면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심층의 결들이 움직이는데 어디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습을 만들어(생성, 창조)가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인데, 그 예는 생명체의 진화이고, 리토르넬로에서는 느낌의 표출방식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인상주의 등장으로 여기는 반쌀롱전인 1848년으로부터 변곡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가타리는 1837년을 잡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19세기 초반 생명체의 변형설의 논의가 거의 끝났던 시절이다. 생명체라는 종적 발생과정에서 표출 과정은 이미 1730년에서 제기해 보았으니, 개체 발생과정에서 표출 양태에 대해 인간의 지성과 달리 감성이 새의 소리에 주목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며, 이를 질적 반복으로서 리듬을 넘어서 멜로디로 나아간 것은 지성의 발달이라기보다 자연과 공감과 공명을 이루려는 직관(본능)의 확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51NMH).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뢰즈의 배치는 리좀이 탈영토화를 거쳐서 실질적 활용론으로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리좀 전쟁기계]
*** 연대순 배치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Ch. 11. 1837: De la ritournelle. pp. 381-433).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pp. 587-667
Dans le noir, chez soi, vers le monde. - Milieux et rythme. - La pancarte et le territoire. - L’expression comme style: visages rythmiques, paysages mélodique. - Le chant des oiseaux. - Territorialité, agencements et inter-agencements. - Le territoire et la terre, le Natal. - Problème de la consistance. - Agencement machinique et machine abstraite. - Le classicisme et milieux. - Le romantisme, le territoire, la terre et le peuple. - Art moderne et cosmos. - Forme et substance, forces et matériau. - La musique et les ritournelles, la grande et la petite ritournelle.
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587-667
§11.00. 1837: De la ritournelle. 381.
그림: 지저귀는 기계(La machine à gazouiller): Paul Klee, Die Zwitschermaschine, 1922. Coll. Museum of Mordern Art, New York. 381, 587 [클레의 그림인데, 실물 지저귀는 새가 아니라, 추상된 기계의 그림이다. / zwitschern. vi, 지저귀다; 전음(顫音)을 울리다. ]
§11.01. Dans le noir, chez soi, vers le monde. 382. [11.01. 어둠 속에서 또한 자기 집에서, 세계로, 589.]
I. 어둠 속에 한 아이가 있다. 무섭기는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래보려 한다. 아이는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길을 잃고 헤매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몸을 숨길 곳을 찾거나 막연히 나지막한 노래를 의지 삼아 겨우 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382, 589) [첫 두 문장의 표현은 제10장(MP 368, 번 567)에서 나온 것을 반복하고 있다.]
노래는 카오스 속에서 날아올라 다시 카오스 한가운데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래는 언제 흩어져버릴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아리아드네(Ariane, Αριάδνη)는 언제나 한 가지 음색을 울려 퍼뜨리고 있다. 오르페우스(Orphée, Ὀρφεύς)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382, 589)
II 앞에서와 반대로 우리는 이번에는 자기 집안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안식처(chez soi)는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얻으려면 먼저 부서지기 쉬운 불확실한 중심을 둘러싸고 원을 그린 다음 경계가 분명하게 한정된(limite)[peras]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지표와 부호 등 극히 다양한 성분들이 개입된다. 앞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82, 589) [I.에서 무한정자(apeiron)에서 반복이라면, II.에서는 한정자(peras) 속에서 반복이다. 들뢰즈의 두 반복이 여기에서 다시 전개되는데 II.에서 원을 추론하는 것은 플라톤 플로티노스에게서도 마찬가지 일 것 같다. 그러면 다음(III)에는 생성이 나올 것이다. 이 생성은 무작위적이고 자유가 아닐까? (51MKF)]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의 공간을 정돈하기 위해 성분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일시적으로 하나의 중심을 한정하기 위해 성분을 동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리하여 카오스의 힘들(les forces)은 가능한 한 외부에 붙잡혀 있고 내부의 공간은 완수되어야만 할 임무 또는 이루어내야 할 사업의 근원이 되는 힘들을 보호하게 된다. 여기서 선별, 제거, 추출 등 온갖 활동이 전개되며, 그에 따라 대지의 은밀한 힘들, 대지의 내부에 있는 모든 힘들이 침몰하는 일 없이 저항하고, 나아가 그려진 공간을 필터(le filtre)나 체(le crible)를 통해 카오스와 선별해내어 카오스 상태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소리적인(sonores) 는 즉 음성적인 구성물(les composantes)이 매우 중요하다. [그 중의 하나가] 소리의 벽(un mur de son)인데, 어쨌거나 벽의 몇몇 블록(certaines briques)이 소리적(sonores)이다. 한 아이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힘을 집중시키려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한 주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라디오를 켜놓는다. (382, 590)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모든 가정에서 일종의 소리 벽으로서 영역을 표시한다(따라서 소리가 너무 크면 이웃의 불평을 듣게 된다). 도시 건설이나 골렘(Golem)의 제조 등 숭고한 사업을 일으킬 때도 역시 둘레에 원을 그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히 중요한 것은 마치 원무(圓舞)를 추는 아이들처럼 이 둘레를 돌면서 자음과 모음을 합쳐 리듬을 만들어내어 이것을 안에 감추어둔 창조적 힘이나 유기체의 분화된 부분들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382, 590)
III. 그럼 마지막으로 이번엔 원을 반쯤 열었다가 활짝 열어 누군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또는 누군가를 부르거나 혹은 스스로 밖으로 나가거나 뛰어 나가본다. 물론 이전의 카오스의 힘이 밀려들어올 수 있는 쪽에서는 원을 열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원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영역에서 열어야 한다. (382-383, 590-591)
속삭이는 노랫소리에 몸을 맡기고 자기 집밖으로 나서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한 아이의 통상적인 여정을 나타내는 운동이나 동작, 음향의 선 위에서 “방황의 선”이 생겨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리, 매듭, 속도, 운동, 동작과 음향이 나타난다. (383, 591)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진화의 세 계기가 아니라 동일한 사실, 즉 <리토르넬로>의 세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측면은 공포담이나 동화에도 등장하며, 가곡(Lieder)에서도 나타난다. (383, 591) [가곡은 슈만의 것을 말할 것이다.]
파울 클레는 이러한 세 측면과 이들 측면들 간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회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는 검은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고 “회색의 점”이라고 말한다. .. 결국 회색의 점은 우주(cosmos)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떠도는 원심적인 힘의 작용을 받아 기운을 얻어, 자기 외부로 나간다. “사람들은 대지로부터 날아오르려는 충동적인 시도를 반복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 이르면 중력을 이겨낸 원심적인 힘들의 영역에 속해 실제로 대지로부터 날아오른다.” (383, 591-592)
리토르넬로의 역할은 이제까지 여러 차례 강조되어 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토적인 것으로 영토적 배치물이다. 새의 노래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새는 노래를 지저귐으로써 자기 영토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 음악의 선법(旋法)(les modes grecs)이나 힌두교의 음악 리듬(les rythmes hindous)도 자체가 이미 영토적이며, 지방과 지역을 나타낸다. 리토르넬로는 이 외에도 다양한 기능들을 할 수 있다. 연애의 기능, 직업적 기능 또는 사회적 기능, 나아가 전례(典禮)나 코스모스적 기능 등. 어느 것을 취해도 리토르넬로는 반드시 대지의 일부분을 동반한다. (383-384, 592)
성문화 되지 않은 관습법으로서 노모스는 공간의 분배, 이른바 공간에서 분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이 노모스는 하나의 에토스(ethos)인데 이 에토스는 <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로 카오스로부터 영토적 배치물의 문턱으로 나가기도 한다. 방향적 성분과 하위 배치물(infra-agencement)이 그러하다. 또 때로는 배치물을 조직하기도 한다. 방향적 성분과 내부 배치물(intra-agencement)이 그러하다. 더 나아가 때로는 영토적 배치물에서 벗어나 다른 배치물을 향해 나가리고 하며, 전혀 다른 어떤 곳을 겨냥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호 배치물(inter-agencement)이, 그리고 이행 또는 도주와 관련된 성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운동이 한곳에 집중된다. 카오스의 힘들, 대지의 힘들, 그리고 코스모스적 힘들. 이것들은 모두 리토르넬로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다툰다. (384, 593) [심층, 표면, 상층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은 플라톤의 고민이기도 하다. 삶의 영역에서 영혼과 신체가 운명(destination)으로 펼치는 정신의 상층은 코스모스로서 양태이지만, 질서(지배)라는 측면에서 규제적이고 조화(공명, 공감)라는 측면에서 애정적 작동적(자유적 libertaire, humanitaire)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51MLF)]
§11.02. Milieux et rythme. 384 [환경과 리듬, 593]
카오스로부터 <환경>과 <리듬>이 태어난다. 이것은 고대의 우주 개벽설에서 다루던 문제이다. 카오스도 방향적 성분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혼돈 자체를 황홀하게 만든다(ses propres extases).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각각의 경우마다 하나의 성분에 의해 규정되는 모든 종류의 환경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대로부터 빗나간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하나하나의 환경은 진동한다. (384 593) [음악적인 리토르넬로를 구성하기 위하여, 공간이라 부르지 않고 환경이라 부르고, 결(파동)이라 부르지 않고 리듬이라 한다. / 언어에서 반복으로 개념을 추상하기 위해서 존재라는 바탕(수용체) 위에 단위라는 것들을 병렬하는 선들을 추론하는 것이 퓌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에서 수, 플라톤에서 이데아를 성립하게 할 것이다. / 전자에서는 영혼의 활동성이 후자에서 정신의 추상성이 이루어 질 것이다. 전자에서 배치(cosmos)는 혼동(chaos)으로부터 생성이고, 후자에서 우주(univers)는 원의 가장자리에 여럿(다자)으로부터 정돈(질서)일 것이다. (51MLF)]
다름 아니라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통일적(unitaire)인 것이 아니다. [통일성, 제일성은 라이프니츠와 뉴턴에서 거의 끝나고 계몽기에서 벗어나려 할 것인데, 1730년을 사건으로 삼은 들뢰즈가 흥미롭다.] 생물체만이 끊임없이 하나의 환경으로부터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들 또한 상호 이동을 반복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있다. 환경은 카오스에 열려 있으며, 이 카오스는 환경을 소진시키거나 침입하려고 위협한다. 그러나 환경은 카오스에 맞서 반격에 나선다.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카오스와 리듬의 공통점은 “둘-사이(entre-deux)”, 즉 두 가지 환경 사이에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로부터 “카오스-리듬” 또는 “카오스모스(Chaosmos)”가 나온다. “밤과 낮 사이, 인공적으로 구축된 것과 자연적 사이, 무기물이 유기물로, 식물이 동물로, 동물이 인류로 변이하는 사이. 그런데 이 계열은 증가(une progression, 수열數列)과는 무관하며 ...” 바로 이 둘-사이에서 카오스는 리듬으로 바뀌는 것이다. (384-385, 594) [내재성의 운동, 즉 흐름, 진동성은 박자가 아니라 리듬이다. 그리고 멜로디는 분출되지 않았다. ]
카오스는 리듬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 중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물론 리듬은 박자(mesure)나 템포(cadence)가 아니며, 심지어 불규칙적이다. 즉 군대 행진보다더 리듬과 거리먼 것은 없다. 탐탐(Tam-tam, 큰북)은 1-2[하나 둘]이 아니며, 왈츠도 1, 2, 3(un deux trois)가 아니듯이, 음악은 2박자, 3박자가 아니라 오히려 터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47템포(temps premiers, tempo primo, 원래템포로)에 더 가까운 것이다. (385, 594-595)
리듬은 등질적인 시간-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블록들과 겹쳐가면서 작용한다. 방향을 바꾸어가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아주 정확하게 “정말 활동적인(actif) 순간들의 결합(리듬)은 언제나 행위(action)가 일어나는 것과 다른 판위에서 실현된다”고 지적한다. 리듬은 결코 리듬화된 것과 동일한 판에 있을 수 없다. 즉 행위는 특정한 환경에서 일어나지만 리듬은 두 가지 환경 사에서 또는 두 가지 “사이-환경” 사이에서 비롯된다. 리듬은 물과 물 사이 또는 시간과 시간 사이, 개와 늑대 사이, 황혼녘(twilight) 또는 새벽녘(Zwiechlicht)에서 비롯되는 것이다.(385, 595) - <이것임>. 다시 말해 다른 환경으로 이동 중에 있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385, 595) [진화에서는 이동 중에 종들 사이의 변이가 일어난다. 조류와 악어는 같은 환경이고 도마뱀과 구렁이는 유연관계(파생)이 다르다. (51MLH)]
한 가지 특히 중요한 코드 변환이 있다. 어느 코드가 다른 식으로 코드화된 성분을 취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코드의 조각자체를 취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는 잎과 물의 관계와 연관되며 후자는 거미와 파리의 관계와 연관된다. 거미의 코드는 거미집 속에 파리의 코드의 모든 시퀀스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차례 지적되어 왔다. 거미는 마치 파리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파리의 “모티브”를 파리의 “리토르넬로”를 고려에 두고 있는 듯하다. .. 윅스퀼은 이런 코드 변환을 훌륭하게 이론적으로 정리해주었다. 즉 그에 따르면 모든 성분 속에서 대위법을 이루는 선율을 찾을 수 있는데, 한 선율은 다른 선율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며 이러한 관계는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즉 음악으로서 <자연(la Nature)>. 코드 변환이 일어날 때마다 단순히 가산(加算)이 아니라 반드시 잉여가치라는 새로운 판이 성립한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386, 596) [여기서 자연은 스피노자의 권능의 자연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영토(un Territoire)>를 확보하지 못했다. 영토는 특정한 환경이 아니며 여분의 환경도 아니다. 특정한 리듬도 아니며 또 환경 상호간의 이행도 아니다. 영토란 하나의 행위로서 이 행위가 모든 환경과 리듬을 촉발해 “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다. 영토란 환경과 리듬들을 영토화했을 때 생겨난다. (386, 597) [윅스퀼의 환경은 질료적인 측면인데 비해 영토는 생명체의 활동성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들뢰즈가 환경을 생명체와 더불어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리듬이 표현성을 갖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영토가 생성되는 것이다. 영토는 표현의 질료(matière)(질, qualité)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예를 들어 새나 물고기의 색을 살펴보자. 이 경우 색깔은 막의 상태로서, 이 막 자체는 체내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특정한 행동 유형(성행동, 공격성, 도주 등)과 관련이 있는 한 색은 기능적이고 과도기인 상태에 머문다. 이와 반대로 시간적 항시성과 공간적 범위를 획득해 색이 부호 또는 영토화하는 부호로 바뀔 때, 즉 서명으로 바뀔 때 색은 표현성을 갖게 된다.
색이 있는 개체는 영토를 확보하고 있지만 색이 없는 개체는 무리를 짓는다. 분뇨가 영토 표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름 아니라 영토를 나타내는 분뇨는 예를 들어 토끼의 경우처럼 특유의 항문 분비선으로 특별한 냄새를 풍긴다. 또 많은 원숭이들은 망을 볼 때 색이 선명한 성기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성기는 표현력과 리듬을 가진 색채로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한다. 환경의 성분은 동시에 질과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387, 598)
스케노포이에테스 덴티로스트리(Scenopoïetes dentirostris)라는 새는 매일 아침 가지에서 따낸 나뭇잎을 떨어뜨린 다음 색이 흐린 안쪽을 위로 뒤집어 땅과 대조되게 만듦으로써 표시를 해둔다. 즉 반전(反轉)에 의해 표현의 질료가 생성되는 것이다. (387-388, 598)
영토가 질의 지표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표가 영토를 만든다. 하나의 영토 내의 모든 기능 또한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능들은 영토를 형성하는 표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토 그리고 이 영토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여러 다양한 기능은 확실히 영토화의 산물이다. (388, 599)
따라서 우리는 공격성을 영토의 기반으로 삼는 로렌츠 같은 사람의 생각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로렌츠에 따르면 공격 본능이 같은 종의 내부에 생겨 동종의 동물들을 겨냥하는 순간 공격 본능의 계통발생적 진화(l’évolution phylogénétique)에 의해 영토가 만들어 지리라. 그렇다면 영토를 가진 동물이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를 향해 공격성을 보이는 동물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의 종은 하나의 공간 속에서 배분되는 선택적 우위성을 부여받고, 이 공간에서는 하나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하나의 집단이 각자의 자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애매하고도 아주 위험한 정치적 여운을 지닌 주장은 우리에게는 잘못 근거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388, 599)
영토 내부에서는 예를 들어 성 행동이나 사냥과 관련해서도 기능의 다양한 재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예를 들어 집을 짓는 등 완전히 새로운 기능마저 생기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은 이미 영토화되었기 때문에 조직되고 창조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요인 T(le fateur territorialisant, 영토화 요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즉 다름 아니라 리듬 또는 선율의 <표현-되기>, 다시 말해 고유한 질(색체, 냄새, 소리, 실루엣silhouette..)이 나타날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388, 599-600)
§11.03. La pancarte et le territoire. 388 - (11.03. 플랑카드와 영토, 600)
[플랑카드라고 표현하니 그런데, 동물들이 영역(영토)의 표시로 오줌 눈다고들 한다. 플랑카드는 냄새의 오줌과 달리 영역만이 아니라, 유혹의 시각적 효과로서 짝짓기를 불러들이는 효과이기도 한다. .]
이러한 되기, 이러한 출현을 <예술(Art)>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영토는 예술이 가져다주는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 즉 최초의 인간이 경계표(une borne)를 세우거나 표지판(une marque)을 만드는 것이다. 집단의 또는 개인의 소유는 거기서부터 유래하는데, 소유가 전쟁과 압제를 위해서라 할지라도. (388-389, 600) [소유 또는 재산이란 인간의 기술 또는 예술에 기원을 둔다는 것은 흥미롭다. 몸에 지닌 기술이 소유의 기원이다.]
소유란 무엇보다도 우선 예술적인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우선 포스터([une] affiche) 또는 플랜카드([une] pancarte)이기 때문이다. 로렌츠 말대로 산호초어는 “포스터”같다. 표현적인 것은 소유적인 것을 선행하고, 표현적인 질들 또는 표현의 질료들은 필연적으로 소유를 향하며, 존재(l’être) 보다 깊은 곳에 뿌리를 둔 소유(un avoir)를 형성하는 작용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질들이 하나의 주체에 귀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러한 질들을 갖고 있거나 생산하는 주체에게 귀속되는 영토를 이 질들이 그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들이 서명들(des signatures)인데, 서명이나 고유명은 완전히 구성된 주체의 표지판(une marque)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역(un domaine)이나 주거(une demeure)을 구성해나가는 주체의 표지판(une marque)이다. 서명은 한 개인[인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의 우연적인 형성작업(la formation hardieuse)이다. 모든 주거들은 고유명을 갖고 있으며 영감이 불어넣어져 있다. (389, 600)
많은 새들이 단순히 명가수 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술가이기도 하며, 특히 무엇보다 영토를 나타내는 노래를 부를 때 그렇다고 말한 메시앙의 이야기는 옳다(“침입자가 자기 영토가 아닌 곳을 두당하게 차지하려 하면 본래 소유자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훌륭하면 침입자는 떠납니다. 만일 침입자의 노래가 더 훌륭하면 소유자는 침입자에게 영토를 양보합니다.” 리토르넬로가 표현적으로 되는 것은 리듬과 선율이 영토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389, 601)
표현적인 질, 예를 들어 산호초어의 색깔은 이와 반대로 자기-객체적인 것이다. 스스로 그리는 영역에서 객체성(une objectivité)을 띠기 때문이다. (390)
이 객체적 운동(ce mouvement objectif)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의 질료를 표현의 질료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표현의 질료는 무엇보다도 포스터 또는 플랜카드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포스터나 플랜카드를 경유할 뿐이다. 그러나 서명은 스타일이 되어 간다. 사실 표현적인 질들 또는 표현의 질료들은 이 양자들이 함께 유동적인 연관들 속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연관들은 양자들이 충동들의 내부 환경(le milieu)과 상황들의 외부 환경들과 함께 그려가는 영토의 연관을 “표현해 나간다”. 그러나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은 자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스피노자]. (390, 602)
한편으로 모든 표현적 질들은 상호 내적 연관을 갖고 있으며, 이 환경이 영토적 모티브들(des motifs territoriaux)을 구성한다. .. 그러나 영토적 모티브 자체는 “박(拍, pulsés)”을 갖지 않는다. 박을 갖지 않는 이 영토적 모티브는 불변의 형식으로 나타나거나 또는 다른 모티브들이 가변적인 속도나 분절을 보여주기도 한다. .. [예로서] “배가 고프지도 않는데도 개가 사냥감을 상상하는 것, 즉 냄새를 맡고, 뒤쫒아가고, 궁지에 몰아넣고, 입으로 물거나 죽이는 시늉을 열심히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는 큰가시고기의 춤. (390, 602-603)
다른 한편 표현적 질들은 또한 다른 내적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관계가 영토적 대위법이 되는 경우도 된다. ... 예를 들어 적이 접근하거나 침입해 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 등 ... (390, 603)
표현의 질료들의 관계는 영토와 내적 충동 그리고 영토와 외적 상황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 자체에서도 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실제로 영토적 모티프와 영토적 대위법은 내부 환경이건 외부 환경이건 환경의 잠재력들(les potentialité)을 갖고 있다. 동물 행동학자들은 이러한 현상 전체를 “의례화(ritualisation)”라는 개념과 연관지으면서 동물의 의례들과 영토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려고 해왔다. (391, 603) [이 모티브들이 가변성과 불변성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아마도 적응의 문제일 것이고, 생명의 작용하는 권능은 능동적인 대처에서 가변성과 불변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51MMA)]
§11.04. L’expression comme style: visages rythmiques, paysages mélodique.
(11.04. 스타일로서 표현: 리듬있는 얼굴, 멜로디 같은 풍경)
§11.05. Le chant des oiseaux. (11.05 새들의 노래)
따라서 오히려 영토적 모티브는 리듬적 얼굴 또는 리듬적 인물을 형성하고 영토적 대위법은 선율적 풍경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인물, 하나의 주제 또는 하나의 충동에 하나의 리듬이 연결되는 단순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때 “리듬적 인물”이 탄생한다. 그렇게 되면 리듬 자체가 완전히 “인물”화 된다. (391, 604)
이리하여 더 이상 다수의 서명(des signatures)[질들]이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카오스모스]이 나타나게 된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새와 음악적 재능이 없는 새를 객관적으로 구별해주는 것은 이처럼 모티브와 대위법을 구사할 수 있는 소질에서 찾을 수 있다. 모티브와 대위법은 리듬을 명확하게 하고 선율에 화성을 붙임으로써 가변적인 경우건 아니면 불변적인 경우건 새를 포스터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즉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391, 604-605) [질들이 운동의 반복으로 하나의 스타일(카오스모스) 상태로 나타나고 새와 음악에서 표현으로 표출된다면, 그 표출은 생명성의 이중성일 수 있다. 하나는 몸의 소리로 다른 하나는 음표를 통한 악기와 목소리로... / 몸의 소리에서 진화론이, 목소리에서 다른 문화적 양식 또는 스타일로 등장할 것 같다.]
아무튼 바로 이 모티브와 대위법 속에서 [새들의] 태양, 기쁨, 슬픔, 또는 위험은 소리가 되고, 리듬이 되고 선율이 되는 것이다. (392, 605)
인간의 음악도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 예술 애호가인 스완에게는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종종 블로뉴 숲의 풍경 또는 오데트라는 인물과 그녀의 얼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플랜카드처럼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392, 605) .
드뷔시는 바그너를 비판하면서 라이트모티브(les leitmotive)[동기]는 어떤 사태의 숨겨진 상황이나 어떤 인물의 감춰진 충동을 나타내는 표식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392, 605)
따라서 모티브는 비교적 강한 항상성을 갖거나 아니면 반대로 증대와 감소, 증가와 감쇠를 일으키며 모티브의 전개 속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모티브에는 박이 없으며, 위치가 결정되는 경우도 없다. 상수들조차도 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상수는 가정된 것인 만큼 점점 더 경화되며, 연속적인 변주에 저항하면서도 결국은 변화를 돌출시키고 만다. 바그너식 모티브가 바로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최초의 선구자 중의 하나가 바로 프루스트였다. 즉 모티브는 더 이상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모티브 자체가 매번 나타날 때마다 그 자체로서 리듬적 인물을 만들며, “실제로 하나 하나가 하나의 존재인 수많은 음악들로 채워진 충만한 음악” 속으로 몰입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려지고 있는 수련(修練, l’apparentissage)이 뱅퇴이유의 소악절을 둘러싸고 이와 유사한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92, 606).
아마도 이것은 예술의 최종 결정권(le dernier mot)[행사]이 아니고, 오히려 새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거기(풍경과 인물)를 거쳐서 자기-전개(auto-développement)를 형성하는 모티브와 대위법을 통과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스타일을 통과한다. 바그너에게서 리듬적 인물의 내재화가 모범적으로 나타나듯이 리스트에게서는 음의 풍경이나 선율적 풍경의 내재화가 모범적 형태로 나타난다. (393, 606-607)
- §11.06. Territorialité, agencements et inter-agencements. - §11.07. Le territoire et la terre, le Natal. -
영토란 우선 같은 종류에 속하는 두 개체 간의 임계적(critique, 臨界的) 거리를 말하며, 이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내 것이란 우선 내가 가진 거리를 말한다. 나에게는 거리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타인과 접촉하고 싶지 않으며, 타인이 내 영토 안에 들어오면 뭐라고 하면서 플랜카드를 세울 것이다. 이처럼 임계적 거리는 표현의 질료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관계이다. 따라서 가까이 다가오는 카오스의 힘을 멀리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마니에리슴(Maniérisme). 에토스는 동시에 거주(demeure)와 방식(manière), 고향(patrie)과 스타일(style, 양식)이다. 소위 바로크적 또는 마니에리슴적이라고 불리는 영토적 춤들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분명 각각의 포즈와 움직임이 임계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사라방드. 알르망드, 부레, 가보트 등) 포즈, 자세, 실루엣, 스텝(des pas), 음성(des voix)을 구사하려면 대단한 기량이 필요하다. (393, 607)
두 정신분열증 환자 ... 거북이의 등딱지와 갑각류의 껍질 ...[예] (393-394, 607-608)
그리고 양자[두 영역 담당 생명체]의 경계선 상에서는 동요가 일종의 변수로서 성립하게 된다. 능동적 리듬, 복종된 리듬, 목격자 리듬? 또는 한 동물이 다른 성의 상대방 동물에게 자기 영역을 개방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이중주에 의한 복합적인 <리듬적 인물>이 형성되는데,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때까치처럼 노래의 교환, 즉 노래를 주고받는 현상이 나타난다. (394, 608)
풍경은 인물로 충족되고 인물은 풍경에 소속되기 때문에 동일 종의 구성원들이 <리듬적 인물>로 변하는 동시에 여러 종이 <선율적 풍경>으로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메시앙의 ��크로노크로미(Chronochromie, 1960)��에서는 18종류의 새가 우는 소리가 복잡한 대위법, 이미 알려져 있는 화음 또는 새롭게 발명된 화음에 따라 자율적인 <리듬적 인물>을 형성하고 범상치 않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394, 608)
예술은 인간을 기다리지 않은 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뒤늦게 인공적인 조건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예술이 오랫동안 예술자체와는 본성이 다른 노동이나 의식(儀式, 의례)에 머물러왔다는 것도 자주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예술은 인간과 함께 시작된다는 지적보다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영토 안에서 두 가지 효과, 즉 기능들의 재조직과 힘들의 재결집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394, 608-609)
영토적 리토르넬로는 직업적 리토르넬로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 직업적 리토르넬로 예를 들어 물건을 팔 때 부르짖는 소리처럼 환경 내에서 뒤얽힌다. 그러나 각각의 리토르넬로는 하나의 영토를 표시한다. .. 예를 들어 한 행상이 보도의 이 부분은 내 것이라고 주장할 때가 그러하다. 요컨대 기능들의 영토화는 기능들이 “노동”이나 “직업”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종간에 한정된 공격성 또는 특수화된 공격성은 필연적으로 영토화된 공격성이게 된다. 이처럼 영토화된 공격성은 영토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결코 영토의 성립을 설명하지 못한다. (394-395, 609)
영토화의 또 다른 효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이 아니라 의식[의례]이나 종교와 관련되어 있는 이 둘째 효과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토는 다양한 환경에 포함된 모든 힘을 결집시키고 대지의 힘들을 모아 하나의 다발(gerbe)로 만든다. (395 610)
“주위 환경은 하나의 단위로서 존재하므로 소박한 직관에 따라서 볼 때는 엄밀한 의미의 대지 자체에 속한 것과 산이나 숲, 호수나 식물처럼 대지를 매개로 할 때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기가 아주 힘들다” 대기나 물의 힘, 그리고 새나 물고기는 이리하여 대지의 힘에 의해 변모해 나간다. (395, 610)
이처럼 바깥에 위치하건 아니면 안쪽에 위치하건 영토는 반드시 이 강도의 중심과 통해있다.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은 고향(patrie)으로서 이 중심은 우호적이거나 아니면 적대적인 모든 힘을 낳는 대지의 원천으로서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교가 영토를 점유하는 것은 바로 이 종교가 노골적으로 영토화를 행하는 미학적 요인에 의존하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95-396, 610-611)
바로 이처럼 영토화하는 미학적[감성적] 요인이 환경의 기능들을 노동의 형태로 조직하는 동시에 카오스의 힘들을 결합시켜 의식과 종교로, 대지의 힘들로 전환시킨다. 영토화의 지표들(les marques territorialisantes)이 모티브와 대위법으로 발전해 가는 것과 기능들을 재조직하고 힘들을 결립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토는 이미 이 영토 자체를 넘어서는(dépasser) 무엇인가를 [묶여있던 고리들을] 풀어놓게 된다. (396, 611)
우리는 끊임없이 이 “순간(moment)”으로 되돌아온다. 리듬이 표현-되기(le devenir-expressif)로 나가고, 표현에는 고유한 질이 나타나며, 나아가 표현의 질료가 형성되어 모티브와 대위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396, 611)
중요한 것은 코드와 영토 사이의 엇갈림(décalage)을 확인하는 것이다. 영토는 자유를 보장한 코드의 여백에서(dans une marge de liberté du code) 출현하는데, 이것(자유로운 여백)은 한정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른 형태로 한정되어 있다. 하나 하나의 환경이 독자적인 코드를 갖고 또 환경들 간에 끊임없이 코드 변환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영토는 반대로 특정한 탈코드화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물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한정된 여백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지만, 이것들[여백들]을 돌연변이들(des mutations)와 다시 말해서 코드 내에서 변화들(des changements)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백들이란] 이번에 중요한 것은 이중화된 유전자들 또는 정해진 숫자를 초과하는 염색체들 인데, 이것들은 유전자 코드 속에 포착되지 않고, 이것들은 기능적으로 자유롭고 변이들(la variation)에게 자유롭게 질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료가 돌연변이와는 무관한 새로운 종을 만드는 일은 이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 개입해 유기체와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증대시키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 (396, 611-612) [리토르넬로에서 생물학적 반복과 변이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새로운 생성은 코드의 변이가 발생하게 영토(환경)의 재료(질료)가 제공되어야 한다. 재료와 코드의 타협물[타협안(un modus vivendi)]. 질료의 능동성이 있다는 점에서 자연의 자발성(또는 자유)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자유가 논리적으로 필연이고 인격적으로 숙명이다. (51MME)]
이 모든 의미에서 탈코드화는 영토의 “음화(陰畫, le négatif))”로 나타난다. 그리고 영토를 가진 동물들과 영토를 갖지 않는 동물들 사이에 가장 커다란 구별은 전자들이 후자들보다 훨씬 덜 코드화되어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612) [탈영토와 더 많은 코드를 활용하기에 전자가 코드화가 적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하자면 후자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른 리듬에 맞는 코드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자들에서 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타당하지..(51MME)]
우리는 카오스의 힘들로부터 시작해 대지의 힘까지 살펴보았다. 환경들에서부터 시작해 영토들에 이르기까지도 함께 살펴보았다. 기능적인 리듬들로부터 시작해 리듬의 표현-되기까지도. 코드 변환 현상들에서 탈코드화 현상들까지. 또 환경 기능들에서 영토화된 기능들까지. 이것은 진화라기보다는 이행(de passage)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다리(de ponts)나 터널(de tunnels)과 비슷하다. 이미 환경들은 끊임없이 서로 서로 통과(이행)한다(de passer). 그러나 이번에는 환경들이 영토 안으로 이행한다. (397, 612-613)
먼저 내부적 배치물(모티프나 대위법)을 봐 두지 않으면 하위 배치물(포스터와 플래카드)을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배치물이나 장소로 통하는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내부 배치물에 관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리토르넬로의 이행>. 리토르넬로는 영토적 배치물을 향해 나가며 그곳에 설치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밖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성립시키고 영토적 모티프나 영토적 풍경으로 발전해 갈 때 이것을 리토르넬로라고 일컫는다(운동, 몸짓, 시각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수많은 리토르넬로가 존재한다). 이보다 좁은 의미에서는 배치물이 소리에 의해(par le son) 소리내는 또는 “지배받는”[소리의 영향권에 있는] 경우에 리토르넬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왜 소리에[소리의 리트로넬로에게] 이 엄청난 특권이 주어지는 것일까? (397, 613) [저자들은 생물학적 변이들의 몸짓과 시각의 문제들에서 생명체들의 소리와 환경 즉 영토화와 탈영토로 주제를 이동시킨다. 전자의 주제들이 중요하지만 후자의 중요성이 영토와 관련이 더큰가? / 다시 몸짓과 운동은 시각인데, 청각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알아차리는 문제가 들어있다. 새들의 경우 청각이고, 인간은 시각을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청각의 발전도 만만하지 않다.] 블
- §11.06. Territorialité, agencements et inter-agencements.
- §11.06-01. Territorialité, agencements et inter-agencements.
그러면 이제 내부 배치물(l’intra-agencement)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은 매우 풍요롭고 또 복잡한 조직을 갖고 있다. 영토적 배치물(l’agencement territorial)뿐만 아니라 배치되고 영토화된 기능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작(燕雀)과에 속하는 굴뚝새(les Troglodytes)를 예로 들어 보자. (397, 613)
수컷 굴뚝새는 영토을 얻게 되면 흔히 있기 마련인 침입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음악 상자 리토르넬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서 영토 안에 직접 집을 짓는데, 심지어 12개씩이나 지을 때도 있다. 암컷이 오면 한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집속을 들여다보는 암컷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하며, 꼬리를 낮추고 노랫소리를 점차 약하게 해서, 결국 노래는 단순한 전음(顫音, trille)으로 축소되고 만다. ... 구애의 기능 역시 영토화되어 있다 (397-398, 613-614)
여기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영토화를 일으키는 이 모든 지표, 영토적 모티브, 영토화된 기능이 완전히 내부 배치물 속에서 동시에 성립하도록 작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름(de consistance)의 문제(une question)이다. 이질적 요소들의 “동시적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 집합이나 인산 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고름을 획득하게 된다. (398, 614)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중단시키거나 다시 제기하는 의문(une autre question)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배치되고 영토화된 기능은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배치물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독립성을 획득하며, 이렇게 해서 새로 성립된 배치물은 정도차는 있지만 탈영토화되거나 탈영토화 중에 있기 때문이다. (398, 614-615)
궁중풍 연애에서와 마찬가지로 색채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애”의 배치물에 속하게 된다. 이 때 영토적 배치물은 구애의 배치물 또는 집단 성원을 고유한 일원으로 인식했을 때 일어나는 일로 영토의 식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대는 고향의 가치를 가진 동물(un Tier mit der Heimvalenz), 다시 말해 “자기 집에 적당한 동물(un animal valant le chez-soi)”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집단 또는 짝의 집합 속에서 개별적으로 식별되지 않는 환경성 집단이나 쌍(des groupes et couples de millieu)과 오직 특정한 영토 안에서만 식별될 수 있는 영토적 집단이나 짝(des groupes et couples territoriaux),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소와 무관하게 식별가능한 사회적 집단과 연인들(des groupes sociaux et des couples amoureux)을 구분할 수 있다. (398-399, 615) (
예를 들어오스트레일리아의 피리새 과에 속하는 새들처럼 수컷이 집을 짓지 않고 그저 둥지를 만들 재료를 운반하거나 집 짓는 시늉만 할 뿐인 경우도 있는데, 부리로 나무 가지 하나를 물고 암컷에게 구애하거나(바틸다Bathilda 속屬), 집짓는 재료와는 별개의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며(네오크미아Neochmia 속), 구애의 초기 단계 또는 구애 이전 단계에서만 풀잎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아이데모지네Aidemosyne 속 론쿠라속Lonchra 속), 풀을 선물로 건내지 않고 쪼아 먹는 경우도 있다(엠블라마Emblama 속). 물론 이처럼 ‘풀잎(brin d’herbe, 새순)을 사용하는 행동은 그저 오래된 습관의 반복 또는 집짓기 행동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배치라는 관념과 비교해보면 행동이라는 관념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수컷이 집을 짓지 않는 경우 집짓기는 이미 영토적 배치물의 특성이 아니라 이른바 영토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399, 615-616)
표현의 질료는 결코 흔적이나 상징이 아니다. 풀잎(brin d’herbe)은 탈영토화된 또는 탈영토화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성분인 것이다. 오래된 습관의 흔적(archaïsme, 인습)도 아니며 부분 대상이거나 과도적 대상 또한 아니다. 풀잎은 연산자(演算者 opérateur)이며, 백터이다. 요컨대 배치물의 변환기(變換機, un convertisseur d’agencement)이다. 풀잎은 하나의 배치물에서 다음 배치물로의 중개역할을 수행하는 이행의 성분으로 기능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 중계성분이란 리토르넬로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저 영토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연애와 사회와도 연관되며, 그에 따라 변화 한다. 새로운 배치물이 성립될 때 “리토르넬로”라는 음향적 성분이 “풀잎”이라는 동작적 성분보다 더 강한 유발력을 갖는 것은 왜일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검토해보기로 하자. (399-400, 616-617) [시각적 움직임의 권력보다 음성적 권위가 영토성을 더 확보해 준다고 해야 할까?]
마치 탈영토화의 힘들이 영토 자체에 작용해 영토적 배치물에서 구애 또는 성욕, 집단이나 사회 등 다른 유형의 배치물로 이행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풀잎과 리토르넬로는 이러한 힘들의 두 인자(因子 deux agens), 탈영토화의 두 인자가 된다. (400, 617)
영토적 배치물은 끊임없이 다른 배치물로 이행한다. 하위 배치물을 내부 배치물과 분리할 수 없듯이 내부 배치물은 상호 배치물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행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부의 배치물은 영토적 배치물로서 성애, 공격성, 군거성 등 여러 가지 기능들과 힘들을 영토화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영토화하는 가운데 변형을 초래하다. (400, 617) [변형은 환경에 맞게 적응, 또는 적합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일까?]
영토성과 탈영토화 간의 이러한 양의성(l’équivoque)은 <타고난 것(le Natal)>의 양의성과 같은 것이다. 영토는 자신의 제일 깊은 곳에 있는 강도의 중심과 통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양의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강도의 중심은 또한 영토의 외부에 위치하고, 서로 온전히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영토들의 수렴점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다. <타고난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을 당혹시키는 유명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것들은 많든 적든 정말 불가해한 경우로 영토로부터 경이로운 이탈을 보여주는데, 영토들에 직접 작용해 영토를 구석구석 관통하는 대규모 탈영토화 운동을 보여준다. 1. 연어처럼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여행을 떠나는 경우. 2. 메뚜기나 피리새들처럼 엄청난 숫자가 모이는 경우(1950-1951년에 스위스의 툰 호수 근처에 수천만 마리의 피리새들이 모여들었다.) 3. 태양이나 자극(磁極)의 방향을 쫓아 이동하는 것. 4. 대하(大蝦)처럼 먼 거리를 떼지어 행군하는 경우. (400-401, 618)
이러한 운동 각각에 어떠한 원인 있건 운동의 본성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 배치물이 존재하거나 또는 하나의 영토적 배치물에서 다른 유형의 배치물로의 이행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401 619
영토는 언제나, 적어도 잠재적으로 탈영토화 중이며 설사 다른 배치가 재영토화(안식처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초래한다)를 초래한다고 해도 다른 배치들로 이행 중이다. ... 우리는 환경에 작용하는 탈코드화의 여백이 있어야 영토가 성립할 수 잇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402, 620)
그리고 여기서는 완전히 동일한 “무언가”(la même “chose”)가 한편으로는 영토회된 기능이 된 내부 배치물에 편입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또는 탈영토화된 배치물로서, 즉 상호배치물로서 나타난다. (402, 620)
따라서 리토르넬로를 아래와 같이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영토를 구하고, 영토를 표시하고, 영토를 배치하는 영토적 리토르넬로.[지배영역] 2) 배치물 속에서 특별한 기능을 넘겨받는 영토화된 기능을 가진 리토르넬로(잠과 아이를 영토화하는 자장가, 성애와 애인을 영토화하는 연가, 직업과 노동을 영토화하는 노동요, 분배와 제품을 영토화하는 장사의 노래…).[반복노래] 3) 같은 리토르넬로가 새로운 배치물을 표시하고 탈영토화-재영토화에 의해 새로운 배치물로 이행하는 경우(놀이에서 빼버릴 사람을 정하거나 술래를 정할 때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comptine, 동요]는 매우 복잡한 경우를 보여준다. 이것은 영토적 리토르넬로로서 노래하는 방법은 구역마다, 골목하다 달라진다. 이 노래는 놀이의 역할과 기능을 영토적 배치물 속에서 배분할 뿐만 아니라 영토를 놀이 배치물로 이행시킨다. 이때 놀이 배치물 자체는 자율성을 가지려고 한다).[술래놀이] 4) 영토의 내부에서 혹은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힘들을 모아 결집시키는 리토르넬로(이것은 대결 또는 출발의 리토르넬로로서, 종종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럼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402-403, 620-621)
밀리칸(Millikan)의 말대로 이 리토르넬로는 저 무한대를 향해 <분자들>의 노래, 막 태어난 기본 <요소들>의 울음 소리와 합류한다. ... (403, 621)
§11.08. Problème de la consistance. - §11.09. Agencement machinique et machine abstraite.
(11.08 고름의 문제. -11.09 기계적 배치
고름의 문제(Problème de la consistance)는 분명 하나의 영토적 배치의 성분들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동시에 각기 다른 배치물이 이행과 중계 성분에 따라 성립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고름의 모든 조건이 단지 잡다한 것, 이질적인 것들이 모두 소환되는 말 그대로 코스모스적인 판에서만 발견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403, 621)
예를 들어 중추신경계에서 시간적-공간적 형태가 코드화된 연쇄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는 틴베르겐(Tinbergen, 1907-1988) 도식을 전형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우선 상위 기능 중추가 자동적으로 활동 상태에 들어간 다음 욕구 행동을 유발해 종에 특유한 자극을 탐구한다(이동 중추 centre de migration). 다음에는 이 자극을 매개로 그 때까지 억제되었던 제2중추가 해방되어 새로운 욕구 행동을 유발한다(영토중추, centre de territoire). 이어 싸움, 집짓기, 구애라는 하위 차원의 중추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극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은 억제-유발, 생득-획득 등 너무 단순한 이항 대립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동물행동학자가 민속학자보다 커다란 이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404, 622)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 이와는 완전히 다른 도식을 암시하는 몇 몇 요인을, 즉 나무형이 아니라 리좀적 방식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이원론을 경유하지 않은 요인을 강조하는 것이 이 보다는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기능 중추(centre fonctionnel)라고 불리우는 것은 위치 결정뿐만 아니라 “케이블망”의 배분에서처럼 선별된 뉴런들을 중추신경에 배분한다. 따라서 중추신경계 전체를 그 자체로서 볼 때(구심신경을 절단하는 실험이 그러하듯이) 거기에서는 상위 중추에 의한 반사 운동(automatisme)보다는 오히려 중추들 사이에, 세포군들 또는 이러한 결합을 유도하는 분자군들 사이에 상호 연계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404, 623)
이리하여 마치 진동하는 분자들 또는 진동자들이 이질적인 중추로부터 다른 중추로 이행하는 듯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중추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중추로부터 다른 중추로 이어지는 선형적 관계는 배제하며, 분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관계들의 다발(paquets de relations)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404-405, 623-624) [벩송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다발(une gerbe)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호작용(l’interaction)이나 연계작용(la coordination)은 긍정적으로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유발이 있는가 하면 억제도 있다). 그러나 선형적 관계나 화학 반응처럼 직접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이 두 작용은 항상 최소 두 가지 결합 부위를 가진 분자 사이에서 일어나며, 각각의 중추는 개별적으로 처리된다. (405, 642) [긍적적 글루타메이터(?) 이온 부정적 가바 이온, 신경세포안에서 분자적 활동은 시넵스 이론을 참조할 수 있다.]
624 여기에는 행동학적ㆍ생물학적 “기계계(machinique)”가, 대규모 분자 공학이 있는데, 이것은 고름 문제의 성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철학자인 뒤프렐(Eugène Dupréel)은 다짐(consolidation)이론을 제창하고, 생명은 중추로부터 외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또는 차라리 퍼지 집합이나 이산집합으로부터 집합의 다짐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다짐은 세 가지(trois choses)를 의미한다. 우선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해 그로부터 선형적 연속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농밀화, 강렬화(intensification), 보강, 주입(des injections) 그리고 밀어 넣기(des truffages)가 삽입 행위(des actes intercalaires)로서 기능한다(“삽입 없이는 성장은 없다”). 둘째로(이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간격(intervalles)을 갖고 불균등한 것들을 배분할 필요가 크기 때문에 때로 다지려면 구멍을 열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셋째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diparates) 리듬의 중첩(superposition), 상호 리듬성의 내적인 분절(articulation)이 이루어지는데 물론 이때 박자나 운율(cadence)의 강제는 피할 수 있다. (405, 624)
고름이란 정확히 다짐이며, ... 삽입, 간격, 겹침-분절이라는 세 가지 요소들(les trois facteurs)를 동반하고 있다. 주거와 영토와 관련된 기법(art)으로서 건축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후적으로 일어나는 다짐이 있는가 하면, 아치의 종석(宗石)처럼 전체 성분으로서 기능하는 다짐도 있다. 그리고 최근엔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재료 덕분에 건축 전체가 나무-기둥과 가지-대들보, 나뭇잎-천장 등을 대응시키는 나무형 모델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콘크리트는 혼합되는 요소에 따라 고름의 정도가 변화하는 다질적인 재료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철근은 특정한 리듬에 따라 넣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철골의 자기-지지(支持)식 표면들(les surfaces auto-porteuses)은 복잡한 리듬적 인물을 형성한다. (405-406, 625)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이나 문학 작품도 건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는 “모든 미립자를 포화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으며, 헨리 제임스도 “멀리서, 가능한 한 멀리서 시작해야 하며”, “가공한 블록들”을 기본 단위로 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질료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재료를 점점 더 세련되고 풍부한 것으로 바꾸어 고름의 정도를 높여야 한다. 그에 따라서 점점 강렬한 힘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406, 625)
그렇다면 다짐이란 고름이 대지와 연관되는 경우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영토적 배치물은 환경의 다져진 상태[다져짐]이며, 즉 시공간의 다져짐, 공존의 다져짐, 계속의 다져짐이다. 그리고 리토르넬로는 세 가지 요소들(les trois facteurs)과 더불어 작동한다. (406, 626)
그러나 고름이 출현하려면 표현의 질료 자체가 그러한 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질들(des caractères)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이점에 관련해 우리는 표현의 질료들이 내적 관계에 포함되는 소질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가 모티브와 대위법을 형성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영토화의 표지가 영토의 모티브나 영토의 대위법이 되며, 서명과 플래카드가 “스타일(un “style”)”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의 질료는 퍼지 집합 또는 이산 집합의 원소들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질료들이 다져지고, 고름을 획득한다.(406, 626)
피리새(le Pinson)의 노래는 대개 서로 다른 세 소악절로 나누어진다. 첫째 소악절은 4개에서 14개의 음을 갖는데, 주파수의 증대와 감소에 의해 성립한다. 둘째 소악절은 2개에서 8개 음을 가지며, 주파수는 첫째 소악절보다 훨씬 더 낮다. 셋째 소악절은 “수식음(une foriture)” 또는 복잡한 “장식음(un ornement)”으로 끝난다. 그러나 획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완전한 노래(full song)”이전에 하위 차원의 노래(sub-song)가 선행되며, 이 하위차원의 노래는 정상적인 조건 아래에서라면 전체의 조성(調性), 전반적 지속, 절마다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래의 뒤쪽으로 갈수록 더욱더 높은 음을 배치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래를 세 절로 구성(l’organisation), 이 절들을 잇는 순서, 장식음의 세부적인 내용은[세 가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406-407, 626-627)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이러한 성분들(ces composantes)이 발전해 실제로 완전한 노래의 모티브와 대위법이 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앞서 설정해둔 질적 균등성이 이라는 조건은 논외로 할 수 밖에 없다. (407, 627)
기계적 오페라(l’opéra machinique) ..
우리가 기계적이라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서 종합(cette synthèse)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질적인 것들이 표현의 질료인 이상 이질적인 것들 간의 종합자체가 그것들의 고름이건 포획이건 간에 본래적 의미에서 기계적 “언표(un énoncé)” 또는 “언표행위(une énonciation)”를 형성하는 것이다. 동일한 종 속에서 또 서로 다른 종들 속에서 색채, 음, 동작, 운동 또는 자세가 연결되는 다채로운 연관들은 그 만큼 다채로운 기계적 언표 행위를 형성한다. (408, 628)
하지만 여기서 다시 마법의 새 또는 오페라의 새인 스케노포이에테스(Scenopoïetes)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이 새는 선명한 색을 갖고 있지 않다(마치 무슨 억제 작용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 그의 리토르넬로는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미친다(이것은 보상작용일까 아니면 노래의 일차적 요소일까?) (408, 628)
[이 새의 노래 장면 설명 뒤에]
이 새의 노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모티브를 형성하는데, 이 모티브는 이 새의 고유한 음과 노래 사이사이에서 이 새가 모방해서 보여주는 다른 새들의 음에 의해 구성된다. 이리하여 종에 고유한 음과 다른 종의 음, 그리고 나뭇잎의 색깔과 목덜미의 색깔에 의해 “고른” 응고체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생의 기계적 언표 또는 언표행동의 배치물인 것이다. (408, 629)
이와 반대로 부가적인 악절이 완전한 노래에 편입되는 것은 종 상호간에 기생(奇生) 유형의 배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새의 배치가 스스로 선율의 대위법을 실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라디오 방송처럼 주파수를 점유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소프(Thorpe)의 이야기는 크게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영토성의 음성적 측면). 하나의 노래를 모방하기 보다는 상응하는 주파수들을 점유하는 것이 문제이다. (408-409,, 629)
고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표현의 질료는 모티브와 대위법을 형성하는 소질뿐만 아니라 표현의 질료에 작용하는 억제인자(les inhibiteurs)와 시동인자(les déclencheurs)와도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하며 또 표현의 질료를 변화시키는 생득성 또는 학습, 유전 또는 획득 메커니즘과 관련해서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행태학조차도 이러한 요소들(ces facteurs)을 이항적으로 분배하는 오류를 범하고 마는데, 심지어 그리고 특히 두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고 “행동양식들의 나무(arbre comportements)”의 차원들에서 양자를 혼재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409, 630)
중추 속에 코드화되어 있는(생득성, innéité) 자율적 전개를 강조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선천적 지식론자], 말초 감각들에 의해(학습 apprentissage) 제어되는 획득의 연쇄를 강조하는 학자들도 있다[경험적 지식론자]. 그러나 뤼예(Raymond Ruyer, 1902-1987)는 이미 동물은 오히려 “음악적 리듬”과 “리듬과 선율의 모티브”를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바 있는데, 이러한 모티브들은 레코드를 녹음할 때와 같은 코드화나 이러한 모티브들을 실천으로 옮기고 상황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는 연주 운동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순서가 옳다는 것이다. 즉 리듬이나 선율의 모티브가 연주나 녹음에 선행하는 것이다. 우선 리토르넬로의, 작은 곡조의 고름이 있다. (409, 630)
타고난 것에서 생득성은 이동하는 경향을 띠는 것이다. 뤼예(Ruyer, 1902-1987)의 말대로 생득성은 작동(l’acte)에 앞서거나(en avant) 또는 하류에(en aval) 위치한다. 그것은 행위나 행동과 관계하기보다는 오히려 표현자체의 질료와 연관되며, 표현의 질료를 식별해 선별하는 지각 그리고 표현의 질료를 확립하는 몸짓 또는 스스로 표현의 질료를 이루는 몸짓과 관계한다(동물이나 사물이나 상황에 가치를 부여하고, 동물이 그에 알맞은 행동을 실행할 수 있기도 전에 표현의 질료를 흡수하는 ‘임계기periodes critiques’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410, 631)
타고난 것(le natal)에는 생득과 획득의 혼재로는 설명되지 않는 고름이 있다. 이와 반대로 타고난 것이 영토적 배치물이나 상호 배치물에서 나타나는 혼재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행동이라는 관념(la notion de comportement)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배치물이라는 관념과 비교해볼 때 이 관념이 너무 선형적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것은 내부 배치물로부터 외부로 투사되는 중추로 뻗어나가면서 상호 배치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통과해 마침내 <코스모스>의 문 앞에 도달한다. (410, 632)
영토적 배치물은 탈영토화의 선 또는 계수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다른 배치물로의 이행이나 중계와도 분리될 수 없다. 인위적 조건이 새의 노래에 미치는 영향은 자주 연구되어왔다. .. 많은 새는 다른 새의 노래를 임계기에 들려주면 쉽게 그 노래의 영향을 받으며, 결국 나중에 이러한 미지의 노래를 재현하게 된다. (410, 632) - [남아메리카의 어느 새 톱질하는 기계음을 모방하여 낸다. ]
이것이 우리가 제시하고 싶어하는 기계(machine)와 배치물(agencement)의 차이이인데, 즉 기계란 탈영토화 과정에 있는 배치물에 삽입되어 배치의 변화와 변이를 그려내는 첨점들의 집합이다. 기계론적(mécanique, 역학) 효과는 없기 때문이다. 효과는 언제나 기계적(machinique)이다. 즉 배치물에 연결되고 탈영토화에 의해 해방된 하나의 기계에 의존한다. (411, 633)
일반적으로 하나의 기계는 종에 고유한 영토적 배치물에 접속되어 이 배치물을 다른 배치물을 향해 열어주고, 동일한 종의 상호 배치물들을 통과하도록 이끈다. 예를 들어 어떤 새의 종에 고유한 영토적 배치물은 파트너나 사회체(socius)의 방향을 가리키는 구애(cour) 또는 군서(grégarité)의 상호배치물을 향해 열린다. 그러나 같은 기계가 종의 영토적 배치물을 다른 종들간의 상호 배치물을 향해 열기도 한다. 미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새의 경우가 그러하며, 기생 현상에서는 이것이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는 기계가 완전히 배치물을 뛰어 넘어 <코스모스>로의 출구를 여는 일도 생길 수 있다. (411, 633)
실제로 배치물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에서 검은 구멍은 탈영토화의 선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상호 배치물에도 퇴화나 고착의 선이 포함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검은 구멍으로 이어질 수 있고 보다 풍부하고 긍정적인 탈영토화 선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피리새에서 “풀잎”이라는 성분은 일단 검은 구멍에 떨어지고 나서 “리토르넬로” 성분으로 이어진다). (412, 634)
그러나 검은 구멍들이 함께 공명하거나 억제들이 조합되어 서로 반향 하는 경우 고름에서 개방되는 대신 반대로 배치물이 폐쇄되어, 진공 상태에서 탈영토화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직 어린 피리새 집단을 격리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기계들은 언제나 하나의 배치물이거나 영토를 열거나 닫았다다 하는 특이한 열쇠인 것이다. (412, 634-635)
이처럼 표현의 질료들의 고름은 한편으로는 리듬과 선율의 모티브를 형성하는 소질과 관련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난 것의 역량[권능]과 연관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즉 표현의 질료들은 분자적인 것과 매우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기계는 정확히 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표현의 질료들”이란 단어 자체가 표현은 질료와 독창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표현의 질료들은 고름을 획득함에 따라 몇 개의 기호계들(des sémiotiques)을 형성한다. 그러나 기호계의 성분들(les composantes sémiotiques)은 질료적 성분들과 분리될 수 없다. (412-413, 635)
첫째로 원자의 개별적 현상은 통계적인 혹은 확률론적인 집적에 포함될 수 있는데, 그러한 집적은 우선 분자 속에서 그리고 그램분자 생태의 집합 속에서 그러한 현상의 개별성을 제거해버리려 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상호작용에 의해 복잡하게 될 수 있고, 또한 차원을 달리하는 개체들 간의 직접적인 소통을 조성함으로써 우선 분자 속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거대 분자 속에서 개별성을 보존할 수도 있다. (413, 635)
둘째로, 구분해야 할 것이 개별성과 통계성(statistique)이 아니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 따라서 차이는 두 집단 운동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달랑베르(d’Alembert) 방정식에서, 어떤 집단은 확률을 높이고 등질성과 균형이 뒷받침된 상태를 향해 나가는데 반해(발산파와 지연적인 포텐셜), 다를 집단은 확률이 낮은 집중 상태로 나아간다(수렴파와 예비적 포텐셜). (413, 635-636)
셋째로, 분자 내에 한정된 내적인 힘은 집합에 그램분자적인 형태를 부여하면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위치 결정이 가능하고, 선형적이고 기계적이며, 나무형이고 공유 원자가를 갖는 관계. ... 다른 하나는 위치 결정이 불가능하며 초-선형적이며, 기계론적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공유 원자가를 갖지 않는 간접적인 결합. 이것은 연쇄보다 오히려 입체적 특이성을 가진 분별 또는 변별(discernment ou discrimination)에 따라 작용한다. (413, 636)
이런 식으로 같은 차이라도 실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찾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차이는 물질과 생명에 관련되어 있다. 또는 하나의 물질 밖에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원자론적 물질의 두 개의 상태(deux états), 두 개의 경향(deux tendances)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예를 들어 결합된 원자들을 상호 관계에서 고정시키는 결합과 함께 자유로운 회전 운동을 허용하는 결합이 존재한다). (413-414, 636-637)
이와 반대로 고름 집합은 매우 이질적인 성분들이 모여 다져지고, 형상-질료의 규칙적인 연속대신 계층의 단락 또는 역전된 인과관계를 가진 차원들이 나타나 이질적인 재료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마치 기계적 문 즉 탈지층화하는 횡단성이 요소, 차원, 형상과 질료, 그램분자상태와 분자상태를 가로질러 질료를 풀어 놓고 힘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414, 637)
그런데 이러한 구분에서 “생명의 장(la place de la vie)”은 무엇인가를 자문해보면 이것에 의문의 여지없이 고름의 이득이, 다시 말해 잉여가치(탈지층화의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의 장은 수많은 자신을 고르는 집합이나 다짐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에 그램분자적 범위를 부여한다. 생명의 장은 이것만으로도 완전히 탈지층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생명의 장의 코드는 지층 전체에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극히 특수화된 발생론적 선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414, 637)
생명의 장은 틀림없이 아래의 두 가지 것을 동시에 겸하고 있을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한 성층 작용체계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위와 형식, 실체를 전복시키는 고름의 집합을 말이다. 예를 들어 이미 앞에서 생명체가 환경의 코드변환을 어떻게 불러일으켰는지를 살펴보았는데, 환경의 코드변환은 하나의 지층을 구성하는 것과 같이 또 역인과관계와 탈지층화의 횡단선을에 따라 적용하는 것 같이 고려될 수 있다. 생명이 환경들을 혼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토들을 배치하는 경우에도 역시 똑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414, 638) [생명체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고 그 환경이 생명체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지구와 지층은 긴 시간동에 초기 생명체의 변형만큼이나 자기 변형을 만들고 있었다. 지질연대표 참조 (51NKD)]
예를 들어 리토르넬로는 풀잎보다도 강하게 탈영토화 됨에도 불구하고 “한정(détermination)”을 받아들인다. 즉 생화학적인 그리고 분자적인 성분에 직결된다. 이처럼 배치물은 가장 강하게 탈영토화된 성분에 의해 성립되며, 탈영토화 되었다는 것은 비-한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리토르넬로는 남성 호르몬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경우가 있다). (415, 638-639)
여기서 다시한번 스케노포이에테스(Scenopoïetes)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이 새의 어떤 행위는 나뭇잎의 겉과 안을 자신도 식별하고 다른 새들도 식별할 수 있도록 뒤집어 놓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이러한 행위는 “톱니 모양”의 부리에 의한 결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실제로 배치물들을 정의하는 것들이 다음 모든 요소들에 의해 동시에 규정된다. [그 요소들이란] 형식-실체 관계와 무관하게 고름을 획득하는 표현의 질료들. 연쇄반응이 아니라 분별해위나 선택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역인과 관계들 또는 ‘선행된 결정성들’, 탈코드화된 생득성들(des innéismes). 선행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유 원자자가 결여된 결함을 통해 작동하는 분자적 조합들. 간단히 말해서 기호계와 물질계의 겹침을 통해 새로운 “양상(une nouvelle allure)”[파생종]이 생겨나는 것이다. (415, 639)
따라서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차이는 배치물들과 그 이외의 것 사이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모든 배치물의 두 한계 사이, 다시 말해 지층 체계와 고른판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층들이 경화(硬化)되고 조직되는 것은 고른판 위에서이며, 이 판이 작동하고 구축되는 장은 지층들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양쪽 운동 모두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착실히 반복하여 조직하면서도 실현된다(se construire)는 것도. (415-416, 639-640)
- §11.10. Le classicisme et milieux. - [고전주의와 환경] [여기에서 한 단락이 뛰어져 있다]
우리들은 지층화된 환경에서 시작하여 영토화된 배치물에 도달했다. 동시에 카오스의 힘들이 환경에 의해 나뉘고, 코드화되고, 코드 변환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 대지의 힘들이 이 배치물 속으로 모이는 것까지 더듬어 보았다. 그런 다음 영토적 배치물로부터 상호 배치물들로, 나아가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배치물의 개방까지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대지의 모아진 힘들로부터 탈영토화된 또는 오히려 탈영토화하는 <코스모스>의 힘들에 이르렀다. (416, 640)
클레에 따르면 인간은 “대지로부터 날아오르기 위해 있는 힘을 급격히 사용한다.” 그리고 “중력을 이겨낸 원심력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진정 대지로부터 춤춰 오르는 것이다.”[벩송적이고] 그가 덧붙여서, 예술가는 [우선] 자기 주위를 살피고 모든 환경을 살피지만, 그것은 피조물 중에 남아있는 창조의 흔적을 포착하고,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속에 남은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을 포착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술가는 “대지의 경계”에 자리잡고 현미경, 결정체, 분자, 원자 그리고 미립자에 관심을 갖지만 과학적 정합성이 아니라 운동을 찾기 위해, 오직 내재적 운동만을 찾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416, 640) [분출하여 춤춰 오르는 것은 벩송을 닮았고, 그리고 내재성의 탐구는 스피노자 적이다. (51MLG)](416, 640)
마지막으로 예술가는 <코스모스>를 향해 자신을 열고 “작품”에 코스모스의 힘들을 주입시키려 한다(그렇지 않으면 <코스모스를 향한 개방은 단순히 몽상에 그쳐 대지의 경계를 넓히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아주 간소하고 순수한, 그리고 아이들 장난 같은 수단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인민(un peuple)의 힘들도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모자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이 마지막 힘이 부족하다... 우리들은 인민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우리들은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그것을 시작했다 .. 그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16, 641)
고전주의(le classicisme)라는 말은 형상-질료 관계 또는 오히려 형식-실체 관계를 가리킨다. 실체란 다름 아니라 형식이 부여된 질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416, 641)
계절(les saisons) 또한 환경이다. 거기에서는 두 가지 조작이 공존하는데, 하나는 이항적 구분에 따라 형태를 분화시키며 다른 하나는 환경과 계절 등 형식을 부여 받은 실체적 부분들이 전후 어느 쪽에서 보아도 동일한 계기의 서열에 포함되도록 열어준다. 그러나 이 조작의 이면에서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극단적이고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그는 환경들을 분류하고 나누고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환경들의 혼합을 조절하고 하나의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 이행한다. 이리하여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카오스, 카오스의 힘들, 길들여지지 않은 원재료의 힘들에 직면하게 되는데, 실체를 낳기 위해서는 이러한 힘에 <형식>을, 환경을 낳기위해서는 <코드>를 부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경이로운 미첩성이 요구된다. 바로 이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바로크와 고전주의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었던 것이다.을 (417, 641-642)
“우선 고독한 피아노가 짝으로부터 버림받은 새처럼 슬피 울자 이를 들은 바이올린이 옆에서 노래하듯 피아노에게 답했다. 마치 세상이 새로 시작되는 듯, 지상에는 이 둘밖에 없는 듯했다. 아니 차라리 다른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닫혀 있고 창조자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계에는 영원히 이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이 소나타였다.” (417, 642)
§11.11. Le romantisme, le territoire, la terre et le peuple. - 417
- 낭만주의, 영토, 대지, 인민.
이와 비슷하게 낭만주의(le romantisme)를 간략하게 정의해 보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고전주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외침이 울린다. “<대지>다. 영토와 <대지>다” 낭만주의의 도래와 함께 예술가들은 권리상(de jure)의 보편성에 대한 야심과 함께 조물주의 지위도 포기한다. 그는 스스로를 영토화하고 영토적 배치물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제는 계절들도 영토화 된다. (417, 642-643)
대지는 모든 힘이, 즉 대지의 온갖 힘뿐만 아니라 다른 실질의 힘들이 서로 부딪히며 백병전을 벌이는 장소가 되며, 따라서 예술가는 카오스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과 지하세계에, 바닥이 없는 세계에 직면하게 된다. 예술가는 환경들 속으로 흩어질 위험이 아니라 <대지> 속에 너무 깊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엠페도클레스. ... 이리하여 예술가는 신이 아니라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영웅: <창조하자>가 아니라 <정초하자>, <토대를 놓자>라고. 파우스트는 ��파우스트�� 제2권의 파우스트는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대지의 프로테스탄티즘인 비판주의가 환경의 교조주의(코드)와 가톨릭을 대체한다. <대지>는 깊은 곳에 놓인 또는 투사된 강도의 점 또는 존재근거(ratio essendi)로서 항상 영토에 대한 엇갈림을 포함하고 있다. 영토는 인식조건으로서 또 인식 근거(ration cognoscendi)로서 대지에 대한 엇갈림을 포함하고 있다. <영토>는 독일이지만, <대지>는 그리스적이다. (418, 643)
리토르넬로는 영토의 노래 그리고 이 노래를 뒤집어 고양시키는 대지의 노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형성된다. 예를 들어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1907-1908)��(Fr. Chant de la Terre)의 말미에는 두 모티브가 공존하고 있지 않는가? 선율적인 첫째 모티브는 새의 배치를 환기시키고 리듬적인 둘째 모티브는 영원히 계속되는 대지의 깊은 호흡을 속삭이고 있지 않는가? 말러는 새의 노래, 꽃의 색깔, 숲의 향기만으로는 <자연>을 만들 수 없으며 디오니소스가, 위대한 판(Pan)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644)
[베르크의 오페라인] ��보이체크(Wozzeck)��에서는 자장가 리토르넬로, 군가 리토르넬로, 권주가 리토르넬로, 사냥 리토르넬로, 마지막으로 치기(어린애적) 리토르넬로 등 온갖 리토르넬로가 각 훌륭하게 배치되어 강력한 대지의 기계와 이 기계의 첨점들에 떠밀려간다. 보이체크의 소리에 따라 대지는 소리를 내고, 마리(Marie)의 죽음의 외침이 연못의 수면 위를 달려나간다. 그리고 대지가 울부짖을 때 그 음(B)이 반복되는 것이다.... (418, 644)
“두 시각 사이”, 즉 “정오-자정”.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낭만주의에 의한 근본적인 혁신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형식에 대응하는 실체적 부분도 없고, 코드에 대응하는 환경도 없으며, 형식의 범위 내에서 코드에 의해 질서를 부여 받는 카오스 상태의 질료도 없는 것이다. (419, 645)
낭만주의에 제일 결여되어 있는 것이 인민(le peuple)이다. 영토에는 고독한 소리가 떠돌고 있다. 대지의 소리는 이에 응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명하고 반향 한다. 설령 인민이 있더라도 그것은 대지에 의해 매개되어 땅 깊은 곳에서 나타나 언제 땅 속으로 돌아가 버릴지 모르는 인민이다. 지상의 인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하의 인민이다. 영웅은 대지의 영웅으로 신화적(mythique)인 것이지, 역사적으로 인민의 영웅이 아니다. 독일은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는 타고난 것의 영토를 사막처럼(comme désert) 사는 것이 아니라 인구 밀도와 무관하게 “고독자”처럼(comme “solitaire”) 산다는 천재성(le génie)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인구는 대지로부터 유출일 뿐이며, <혼자(Un seul)>로서 가치 있다. (419-420, 645-646) [독일 낭만주의에 인민이 없고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왜 프랑스에서 혁명이 실화인데 비해,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에서 이야기로 남고 현실에서 벗어나 있을까? / 저자들의 관점은 게르만인이 주변을 황무지를 만드는 종족처럼 그리고 있는데, 이런 관점은 시저(��갈리아 전쟁기��)의 관점이었다고 들었다.(51NLA)]
영토는 민중을 향해 열려지는 것이 아니라, <친구(l’Ami)>나 <연인(l’Aimée)>을 향해 반쯤만 열린다. 그러나 <연인>은 이미 죽었고, <친구>는 불확실하고(incertain) 불안하다(inquiétant). 가곡에서처럼 영토에서는 모든 것이 영혼이라는 <혼자인 하나(l’Un-Seul)>와 대지라는 <전체인 하나(l’Un-tout)> 사이에서 진행된다. 바로 이 때문에 라틴계와 슬라브계(slave)의 모든 나라에서는 낭만주의가 종래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며, 따라서 전혀 다른 서명과 플래카드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인민을 그리고 인민의 힘을 모티브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20, 646)
또한 대지가 인민에 의해 매개되며(mediatisée), 인민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대지는 <사막화된(déserté)> 땅일 수 있고, 불모의 초원 또는 잘려나간 황폐한 영토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결코 고독하지 않고 인구로 가득 차 있다. 인구는 흩어졌다가 다시 결집하고, 요구하고 나섰다가 분한 눈물을 삼키며, 공격에 나섰다가 다시 반격당하며 노마드화 한다. 이때 영웅은 인민의 영웅이지 대지의 영웅이 아니다. 그는 <전체인 하나(l’Un-tout)>가 아니라 <군중인 하나(l'Un-Foule)>와 관계를 맺는다. 한편에 또는 다른 한편에 민족주의가 더 많다 더 적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낭만주의의 온갖 형상 속에 침투해 어떤 때는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또 다른 때는 검은 구멍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이탈리아 파시즘이 베르디를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나치즘이 바그너를 이용한 것과는 비교도 안된다). (420, 646-647)
그러나 지금 서술한 두 가지, 즉 소리라는 요소와 관현악-기악 전체가 그저 단순히 외재적인 관계만을 맺을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이 힘들이 <대지>의 힘들인지 아니면 <인민>의 힘들인지에 따라, 즉 <하나-전체(l’Un-tout)>의 힘들인지 아니면 <하나-군중(l'Un-Foule)>의 힘들인지에 따라 이러한 편성은 변하며, 이에 따라 소리의 역할도 마찬가지로 변한다. 전자에서, 역량의 집단화(les groupements de puissance)를 만들어내 다름아니라 바로 변용태를 불러오는 것이 과제인 반면 후자에서는 집단의 개체화(les individuations de groupe)를 초래해 이것이 변용태들을 구성하고 관현악 편성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량의 집단화는 정말 아주 다양화될 수 있지만 보편성에 고유한 관계로서 그러하다. 이에 반해 집단의 개체화의 경우 이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음악적 관계 그리고 집단 내의 관계 또는 집단 상호간의 이행을 나타내려면 이와 전혀 다른 용어 즉 가분성(le Divisuel)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420-421, 647-648)
드뷔시는 군중(une foule) 또는 인민(un peuple)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바그너를 비판했는데, 그는 바로 이런 식으로 “군중인 하나(l'Un-Foule)” 문제를 정확하게 제기했던 것이다. 즉 군중은 전면적으로 개체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군중을 구성하는 개체들의 개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룹의 개체화에 따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단, 인격이 아니라 인민 자신이 동시적이고 연속적으로 체험해 나가는 변용태들에 따라서, 인민은 개체화되어야 한다. (421, 648)
이러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가장 간단한 예로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바그너(Wagner, 1813-1883)와 베르디(Verdi, 1813-1901)의 관계일 것이다. 베르디야 말로 기악 편성과 관현악 편성에 대한 소리의 관계를 점차 중시했던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 들어와서도 슈톡하우젠(Stockhausen, 1928-2007)과 베리오(Berio 1925-2003)에 의해 이러한 차이에 새로운 형태가 부여되고 있다. 물론 이들은 낭만주의 때와는 전혀 다른 음악적 문제와 씨름하고 있지만 말이다(베리오는 <전체인 하나>의 보편성에서 대지의 외침이 아니라, <군중인 하나>의 개체성에서 다양체의 외침, 개체군의 외침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세계의 오페라 내지 코스모스의 음악이라는 발상(I’idée)은 그리고 소리의 역할은 관현악 편성의 이러한 양극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421, 649) [슈톡하우젠과 베리오 둘은 전자음악을 도입한 음악가들이다.]
게다가 (드뷔시가 그에 대해 뭐라고 말했건)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같은 음악이 군중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도 함께, 그리고 바르토크(Bartók Béla, 1881-1945)의 음악같은 작품이 민요나 통속가요에 기대 개체군 자체를 음악으로 옮기고, 기악적으로 또 관현악적으로 만들 있었는지 그리고 이와 함께 그것이 <가분성(le Dividuel)>의 새로운 음계와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반음계법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함께. 이 모든 것은 비-바그너적 길을 따르고 있다... (422, 649-650)
§11.12. Art moderne et cosmos. -
근대 시대(un âge moderne)가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코스모스적인 것의 시대이다. 파울 클레는 “나는 안티-파우스트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동물과 그 밖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대지에 뿌리를 둔 진정한 애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내겐 전혀 불가능하다. 대지에 속하는 것만큼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배치물을 더 이상 카오스의 힘들에 맞서지 않고, 대지의 힘과 민중의 힘들 속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고 대신 <코스모스>의 힘들을 향해 열린다. 이 모든 것은 극히 일반적이고 또는 얼마간은 헤겔 식의 절대정신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422, 650)
시각적 재료는 비가시적 힘들을 포획해야 한다. 클레는 가시적인 것을 되돌려주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만들어라(rendre visible)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 또한 철학 이외의 다른 활동과 동일한 운동을 따르는 것이 된다. 낭만주의 철학이 여전히 질료의 연속적인 이해 가능성을 보증해주는 형상의 종합적 동일성(선험적 종합, synthèse a priori)에 호소하는 데 반해, 근대 철학은 그 자체로서는 사유할 수 없는 힘들을 포획하기(capturer) 위해 사유의 재료를 가다듬어 내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니체 식의 철학-<코스모스>이다. 분자적 재료는 극도로 탈영토화 되기 때문에 심지어 표현의 질료라고 부르기도 불가능할 정도이다. (422, 650)
화가인 밀레는 언젠가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예를 들어 성물(聖物)이나 감자 자루 등 농민이 들어 옮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확한 중량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후기-낭만주의로의 전환점이었다. 형상이나 질료 또는 모티브가 아니라 힘, 밀도, 강도가 핵심적인 것이 된 것이다. 대지 자체가 평형을 잃고, 인력 또는 중력의 순수한 질료로 변해간다. (423, 651)
이 힘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이렇게 되려면 세잔느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힘들이 필연적으로 코스모스적인 것이 되면 이와 동시에 질료도 분자적인 것이 된다. (423 651)
리토르넬로조차 분자적인 동시에 우주적인 것이 된다. 드뷔시의 경우처럼 .... 음악은 음의 질료를 분자화하지만 그렇게 하는 가운데 <지속>이나 <강도> 등 음을 갖지 않는 힘들(des forces non sonores)을 포획할 수 있게 된다. 지속에 음을 부여하라(Rendre la Durée sonore). (423, 651)
이 시대 여명기에 바레즈(Varèse, 1883-1965)가 걸어온 발자취가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그름의 음악 기계,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가 아니라) 음의 질료를 분자화하고 원자화하고, 이온화하고 코스모스의 에너지를 포획하는 음의 기계(machine à son). 이러한 기계가 하나의 배치물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신시사이저(le synthétiseur)이다. (423, 652)
[이어서] 모듈, 음원(音源)이나 진동자, 제너레이터, 변성기 등 음 처리의 요소를 하나로 묶어 미시적 틈을 조절함으로써 신시사이저는 음의 과정 자체를, 이러한 과정의 생산을 청취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며 또 음의 질료를 넘어선 또 다른 요소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시사이저는 잡다한 것들을 재료 속에서 하나로 묶으며, 매개 변수들을 하나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동시키면서 바꾼다. 신시사이저는 고름을 조작함으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에서 근본 원리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423-424, 652)
이처럼 잡다한 요소들의 종합에도 양가성이 없지는 않다. 아마 이것은 현대에 들어와(la valorisation moderne) 아이들의 그림이나 광인(狂人)들의 문장 그리고 소음 콘서트가 중시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양가성일 것이다. (424, 653)
집합에 작용하는 고름 또는 다짐의 조작을 통해(par les opérations de consistance ou consolidation) 퍼지 집합을 규정하는 것으로는 이 집합을 퍼지적인 것으로 방치하기 쉽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기 때문이다. 즉 퍼지 집합(un ensemble flou), 잡다한 것들의 종합(une synthèse de disparates)은 바로 이 집합을 구성하는 잡다한 것들의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고름의 정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discernabilité, 식별 가능성). (424, 654)
사람들은 종종 지나칠 정도로 아이나 광인이나 잡음 속에서 재영토화 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퍼지 집합을 고르게 만들거나 탈영토화된 재료 안의 코스모스의 힘을 취하는 대신 그저 이 집합을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당신의 데생은 “유치하다(infantalisme)”라는 말을 들은 파울 클레가 대노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소음을 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레즈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클레에 따르면 우주를 “가시적으로 만들거나” 또는 우주의 한 끝을 붙잡으려면 사물이라는 관념에 순수하고 단순한 선을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선의 수를 늘리고 사물 전체를 얻어도 잡음과 소음 말고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바레즈에 따르면, [음의] 방사(la projection)가 고도로 복잡성을 가진 형식을 초래하도록 하려면, 즉 코스모스적 분배를 만들어 내려면, 운동상태로 놓인 단순한 형상(une figure simple en mouvement)과 함께 그 자체로 유동하고 있는 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le bruitage)밖에 되지 않는다. 간결하게 질박하게(Sobriété, sobriété). (425, 654-655)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간결함이란 “아이-되기(devenir-enfant)”의 간결함을 말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 무조건 아이의 되기(le devenir de l’enfant) 같은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간결함이란 “광인-되기”와 같은 것이지, 그 반대로 광인의 되기는 아닌 것이다. 음(un son)이 여행하고, 우리가 음 주위로 여행하려면 매우 순수하고 단순한 음이 필요하며, 화음 없는 방출(émission)이나 음파가 필요한 것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이 점과 관련해 라몽트 영은 아주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대기가 희박할수록 그만큼 잡다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간결한 동작, 고름, 포획, 추출행위에 따라 조작해나간다면 잡다한 것들의 종합(une synthèse de disparates)은 그만큼 더 강할(forte) 것이다. (425, 655)
§11.13. Forme et substance, forces et matériau. -
이처럼 재료(le matériau)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재료는 분자화된 질료이다. 우선 재료는 분자화된 질료이다. 그리고 그것은 포획해야할 다양한 힘들과 관련되어 있다. [게다가] 재료는 재료 자체를 지닌[운반하는] 고름의 조작들에 의해 정의[규정]된다. 결국 분명한 것은 대지와 인민의 연관이 변하며, 이 연관은 더 이상 낭만주의 유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지는 지금 최고로 탈영토화 되어 있다. 은하계의 한 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성운 중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민은 이제 최고로 분자화되어(le plus molécucularisé) 있다. 분자적 인구집단(une population), 진동자의 인민이 되어 수많은 상호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낭만파적 모습들을 (ses figures romatiques) 벗어 던지고 대지의 힘뿐만 아니라 인민의 힘까지도 포기한다. 그는 싸움이 있더라도 다른 장소로 이동해 버린다. 설립된 권력들이 대지를 점령했고 이들은 인민의 조직들을 만들었다.(426, 656) [촛불시위 이후 인민이 다양체로서 흐른다고 했는데, 그 다음의 과정은 손안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인민이 상호 교감작용을 확장해 나간다. 상층의 갑질이 행하는 지도편달과 달리, 심층의 을결은 사방으로 진동으로 퍼져나간다. 정의는 갑질이 정하는 평균이나 비례가 아니라 새로이 생성된 을결들의 조화일 것이다. (51NME)]
기존의 권력은 원자적인 동시에 코스모스적인 차원에 걸친, 이른바 은하계적인 싸움이라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부분적으로 그러한 상황이 확정되기 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다(예를 들어 니체가 그랬다). 예술가들이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새로운 상황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벡터가 이들의 영역을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재료의 분자화와 원자화가 이러한 재료 속에 포획되어 있는 힘들의 코스모스화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다음을 아는 것이었다. 즉 오만가지의 원자적 또는 분자적 “인구집단들(les populations)”(매스 미디어, 통제기구, 컴퓨터, 초지구적 무기들)이 인민을 길들이기 위해서든 아니면 통제하기 위해서든 또는 절멸시키기 위해서든 어쨌든 현존하는 인민을 계속 폭격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분자적 집단이 생겨 이것이 최초의 집단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앞으로 등장하게 될 인민을 출현시킬 것인가? 비릴리오가 말하고 있듯이, 인민의 인구감소와 지구의 탈영토화를 아무 엄밀하게 분석하면서, 이 문제는 “시인으로[윤구병: 농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살인자로 살 것인가?”이다. (426-427, 656-657) [살인자는 거인족을 땅속으로 밀어 넣듯이 인민을 배제된 종족으로 억압하려 한다. 시인은 인민을 해방시킨다. - 인민이 달리 살기를 실천적으로 행하는 농부도 있다. ]
팝 뮤직이 내는 음의 분자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오늘 또는 내일 전혀 새로운 유형의 인민을, 즉 라디오의 지령이나 컴퓨터에 의한 통제에도 또 원자폭탄의 협박에도 전혀 무관심한 인민을 양성하고 있으리라고 단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민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계는 크게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술가는 자기 자신 속에 틀어박힌 <혼자인 하나(l’Un-Seul)>이기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민에게 호소하는 것도, 인민이 마치 기성의 힘인 양 인민을 불러내는 일도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에술가가 인민을 필요로 한 적도 없었는데, 정말 인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이처럼 통감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427, 657)
<책>은 인민을 필요로 한다고 단언한 것은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이고, 문학이 인민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카프카(Kafka, 1883-1924)였으며 또 인민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클레(Klee 1879-1940)였다. 따라서 예술가의 문제는 근대에 들어와서 인민의 인구감소가 열린 대지로 이어지고, 이것이 예술을 수단으로 하거나 또는 예술이 제공하는 것을 수단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과 대지는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코스모스의 사방팔방에서 폭격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끌고 가는 코스모스의 벡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코스모스 자체가 예술이 될 것이다. 인구의 절멸을 코스모스 규모의 인민으로 바꾸고 탈영토화를 코스모스 규모의 대지로 바꾸는 것. 바로 이것이 여기저기에서 어디까지나 국지적으로 존재하는 예술가-장인들의 바람인 것이다. (427, 657-658)
고전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근대(달리 적당한 이름이 없기에 근대라고 부르기로 하자)라는 이 세 “시대”(ces trois âges)를 진화과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또 의미상의 단절을 동반하는 구조들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이 세 시대는 배치물로서, 각각 다른 <기계>를 또는 <기계>에 대한 서로 다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특정한 시대에 속한다고 본 것은 모두 이미 이전 시대에 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힘들이 그렇다. 카오스의 힘들이었건 아니면 대지의 힘들이었건 항상 힘들이 문제이다. 먼 옛날부터 회화는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지적으로 만들려고 해왔으며, 음악도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음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왔다. 어느 시대에도 계속해서 퍼지 집합이 성립해 나름의 다짐 과정을 만들어 왔다. (428, 658-659)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특정한 배치물에 속하는 지각의 경계 또는 식별 가능성의 경계인 것이다. 질료는 충분히 탈영토화되었을때에야 비로소 분자적 양상을 띠며, 오직 <코스모스>이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는 순수한 힘들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각으로부터(de la perception) 이외의 역사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재료는 역사의 질료가 아니라 되기의 질료(la matière d’un devenir)인 것이다. 되기는 기계와 비슷하다. 즉 배치물에 따라 나타나는 방법이 다르며, 하나의 배치물에서 다른 배치물로 이행하고 하나의 배치물을 다른 배치물을 향해 열지만 고정된 서열이나 한정된 계기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428, 659)
§11.14. La musique et les ritournelles, la grande et la petite ritournelle.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리토르넬로로 돌아가 리토르넬로에 대한 새로운 분류체계를 제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환경들이라는(de millieux) 리토르넬로들이 있다. 이 리토르넬로는 최소 두 부분으로 나뉘며 한쪽 부분이 다른 부분과 반응한다(피아노와 바이올린). [2] 태어난 곳의(du natal), 영토적인 것의(du territoire) 리토르넬로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부분이 매번 영토에 대한 대지의 엇갈림을 표시하는 가변적 관계에 따라 하나-전체와, 광대한 대지의 리토르넬로와 연관을 맺는다(자장가, 권주가, 사냥가, 노동요, 군가 등). [3] 인민적이고 민속적인 리토르넬로들이 있다. 이 리토르넬로는 그 자체가 변용태들과 국가(國歌)들을 동시에 이용하는 군중의 개체화의 가변적 관계들을 따라 광대한 인민의 노래와 연관을 맺고 있다(폴란드지방의[la Polonaise], 오베르뉴지방의, 독일의, 마쟈르의, 루마니아의 리토르넬로, 또한 <비창>, <공황>, <복수> 등의 리토르넬로도 존재한다. [4] 분자화된 리토르넬로들이 있는데(바다와 바람), 이것은 코스모스의 힘들과, <코스모스>-리토르넬로와 연관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코스모스 자체가 하나의 리토르넬로이며, 귀(耳, 이)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미로라고 간주되어 온 것이 실제로는 모두 리토르넬로였다). (428-429, 659-660)
문제는 이보다는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음의 성분과 시각적 성분을 갖춘 탈영토화 역량 또는 계수를 비교 검토하는 데 있다. 음은 탈영토화될수록 그 만큼 더 정련되고, 특수성을 획득해 자율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색채는 사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더 영토성에 밀착되어 간다. 즉 색채는 탈영토화될수록 용해되고, 다른 성분들에 의해 인도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감각 현상을 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색채-음성의 조응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 음이 선도적 역할을 하고, 실제로 눈으로 본 색채와 중첩되는 듯한 색채를 끌어내고, 그러한 색채에 음에 고유한 리듬과 운동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역량은 기표작용이나 “전달”의 가치들에 의한 것이 아니며(반대로 오히려 가치 쪽이 그러한 역량을 전제하고 있다), 또 물리적 특성에 의한 것도 아니다(이 특성은 오히려 빛에 특권을 부여한다). (429, 660-661)
황홀과 최면(Extase et hypnose). 색깔로는 인민을 움직일 수 없다. 국기들(les drapeaux)는 트럼펫 연주 없으면 무력하며, 레이저 광선(les rasers)도 음에 맞추어 조절되어야 한다. 리토르넬로는 특히 음적이지만 상투적인 짤막한 노래(une chansonette)[참요(讖謠)]뿐만 아니라 극히 순수한 모티브나 뱅퇴이유의 소악절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종종 한쪽이 다른 한쪽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베토벤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이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음악의 잠재적 파시즘. 일반적으로 음악은 회화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기계적 문(un phylum)에 접속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29-430, 661-662) [여기서 기계적 문이란 질료 형이상학의 준원천, 준광선과 같은 것으로 괴물같은 덩이이다. 문은 원초적 자연은 아니지라도, 생명체로서는 가장 원초적 질료에 가까운 덩이일 것이다. 단백질 연쇄...(51NME)]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스스로 매번 문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지 않으면 안되고, 자기 손으로 만들어내는 빛과 색의 몸체(corps)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음악가는 설사 잠재적이건 아니면 간접적이건 일종의 생식적 연속성을 손에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출발해 음의 몸체들을 만들어 낸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창조운동이 아니다. 화가는 신체(soma, 체세포)에서 생식질(germen)로 향하는 반면, 음악가는 생식질에서 체세포로 향하는 것이다. 화가의 리토르넬로는 음악가의 리토르넬로 이면(裏面)과 같고, 다시 말해 음악의 음판(un négatif)이다. (430, 662)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그래서 낮과 밤으로 비유한 것은 동양만이 아니라 이집트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교대이기도 하고 상보적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거울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사진과 음판의 비유는 낮과 밤에 가깝다. (51NME)]
그렇다면 결국 리토르넬로란 도대체 무엇인가? 글라스 하모니카(Glass harmonica)이다. 리토르넬로는 프리즘이며, 시-공간의 결정체이다. 리토르넬로는 음과 빛 등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 작용해 그로부터 다채로운 파동, 분광, 투영 그리고 변형을 끌어낸다. 리토르넬로는 촉매기능도 한다. (430, 662)
따라서 리토르넬로는 결정(結晶) 내지 단백질 유형이 된다. 내부의 핵이나 구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 예를 들어 ��조크(Joke)��에서의 기묘한 역행 운동. 끝에서 중심으로 향하듯, 소거법에 의해 극히 짧은 순간에 집중되는 것도 리토르넬로의 역할에 속하며, 또 이와 반대로 중심에서 끝으로 향하며 추가해 나가는 방법에 따라 전개하거나 또는 전후 양 방향으로 이 두 노선을 거쳐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리토르넬로는 시간을 만든다. 리토르넬로는 언어학자인 기욤(Gustave Guillaume, 1883-1960)이 논하고 있는 대로 “내포시간”이다. 이리하여 리토르넬로가 가진 양가성(l’ambiguïté)이 이젠 좀 더 확실해졌을 것이다. (430-431, 663)
그리고 리토르넬로는 “리듬적 인물”이나 “선율적 풍경”을 만드는 대신 특정한 인물이나 풍경을 환기시키는 상투적인 공식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것이 이른바 리토르넬로의 양극(deux pôles)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극은 내재적인 질뿐만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자의 힘의 상태에도 좌우된다. (431, 663)
음악이 형편없는 또는 평범한 리토르넬로나 리토르넬로의 조악한 사용을 배제하지 않고 역으로 오히려 그것을 유도하고 발판으로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기 짝이 없다. “엄마,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녀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를 가지고…”, “자크 형…”. (431, 664) [왜 작은 유형의 리토르넬로를 버리지 않고 발판으로 거대한 리토르넬로를 만들까, 교향곡이 그러했고, 많은 군가의 형식이나 노동요, 민요가 그러한가! 인간의 평생 삶이 하루의 삶을 반복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살지만, 그게 모두 작은 것은 변용태가 아닐까? 어쩌면 하루살이가 벌레가 여러 방식으로 변주하여 살면 60평생살이가 작은 리토르넬로의 선천적 종합의 삶이라 할 수 있다면, 새로운 생성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수많은 인물들의 활동을 조금씩 모아서 어떤 한 영역의 고원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반도에서 내재성, 질료형이상학, 자연주의 등이 한 덩이로 만들어지기까지 개똥벌레는 말똥을 굴려야 할 것이다. (51NME)]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음악사는 왜 첫째 유형의 리토르넬로, 즉 영토적 리토르넬로 또는 배치 리토르넬로를 필요로 할까, 그리고 왜 이러한 유형의 리토르넬로를 내부에서 변형시키고 탈영토화해 둘째 유형의 리토르넬로, 즉 음 기계에 속하는 코스모스적 리토르넬로를 만들어 낼까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브를레(Brelet)는 바르톡(Bartok)을 논하면서 첫째 유형으로부터 둘째 유형으로 이행 문제를 정확하게 정식화하고 있다. (664) [이 유형은 분류체계 네 가지와 관계없고, 소우주와 대우주, 부분과 전체 관계를 유형이라 한 것이 아닐까? 또는 상층과 심층의 대비관계가 아닐까?]
<형식>의 발전 또는 오히려 <힘들>의 되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테마들(thèmes)”을 창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아주 포괄적인 문제이다. 실로 다양한 방향에서 리토르넬로에 새로운 종이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 종은 다양한 선법(旋法)을 재발견해 소통시키고, 평균율을 해체시키며, 장조와 단조의 경계선을 애매하게 만들어 조성(調性)을 잃게 한다. 조성과 단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조성의 그물코를 빠져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는 비제 만세!라고 외쳤지만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또 똑같은 음악적, 기술적 의도에서 “쇤베르크는 안 된다. 샤브리에(Chabrier 1841-1894) 만세!”라고 외칠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선법이 흔들림 없이 반음계법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성을 소멸시킬 필요는 없다. (431, 665)
음악가의 “아이-되기”는 아이의 “공기-되기”와 짝을 이루고, 양자는 해체 불가능한 하나의 블록을 이룬다. 천사의 기억 또는 오히려 코스모스를 향한 되기를 이루는 것이다. 결정체(Cristal). 모차르트의 새-되기는 새의 세계에 들어가기와 분리 불가능하며, 이 양자는 일체가 되어 하나의 블록을 형성한다. 즉 첫 번째 유형의 리토르넬로에 극히 철저한 작업을 가해 두 번째 유형의 리토르넬로, 즉 <코스모스>의 소악절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협주곡 속에서 슈만은 마치 빛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듯 첼로의 음이 떠돌도록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가진 모든 배치물을 동원한다. 슈만의 작품에서는 선율, 화음 리듬을 교묘하게 가공하는 일관된 작업이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라는 단순하고 간결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431-432, 666)
배치물에서 힘으로, 음의 배치물에서 음들을 만들어 내는 <기계>로 이행할 때, 즉 음악가의 아이-되기에서 아이의 코스모스적인 것-되기로 이행할 때는 당연히 수많은 위험이 출몰한다. 즉 검은 구멍, 폐쇄상태, 손가락의 마비, 환청, 슈만의 광기, 거칠게 변해버린 코스모스적 힘, 당신을 쫓아다니는 어떤 음악, 당신의 몸을 관통할 수도 있는 어떤 음 등의 위험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이미 다른 들어 있다. 즉 코스모스의 힘은 이미 재료 속에, 거대한 리토르넬로는 소박한 리토르넬로 속에, 대규모 조작은 소규모 조작 속에 들어 있다. 그저 우리 자신이 그 만큼 강한 힘이 있는지 확신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선들(des lignes)과 운동들(des mouvements)을 갖고 있을 뿐이다. 슈만(Schumann). (이 장의 마지막 단어, 슈만; 433, 667) [대우주 속에 소우주, 동양 사상의 소우주 대우주든 ... 프락탈을 연상하게 한다. 형상은 달라도 모티브는 유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부분 속에 전체의 반영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부분이 전체에 참여하는 나눔 방식이 노마드이고, 전체를 나눈 부분들의 합이 전체이라는 것은 분배로서 폴리스(로고스)일 수 있다. 부분이 전체에 관여 대 부분들의 합이 전체, 전자가 동적이고 후자가 정적이다. 철학은 두 축이 있고 사이에 양면성이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프리즘같이 다수의 질적 다양체들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눔에서 기부(don), 분배에서 재단법인... / 이틀 전에 동부구치소로 구속된 이명박의 해외자원외교를 통한 부정축제에 대한 여러 방식들이 소규모 조작에서 대규모 조작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주진우 기자의 설명이다. 이런 것을 속담으로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해야 하나...(51NME)]
<참조: 슈만(Schumann, 1810-1856)의 작품은 리토르넬로들, 유년기의 블록들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는 이것을 아주 특수하게 처리하고 있다. 슈만 나름대로 클라라라는 여성-되기. 아이의 갖가지 <놀이들>과 ��어린이 정경(Kinderszenen, 1838)��, 갖가지 새들의 노래 등 음악사에서 리토르넬로의 사선이나 횡단선적 용례의 목록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불안, 공포, 기쁨, 사랑, 일, 산보, 영토 등 모든 것이 리토르넬로의 모티브일 수 있지만, 리토르넬로 그것은 음악의 내용인 것이다.(��천개의 고원�� 10장 1730년, MP 368, 567-568) >
(이전 4:19, 51MKI) (10:27, 51MLF) (15:4, 51MLG) (26:1, 51NKA), (32:16, 51NMD) (36:35, 51NMF. 초완,)
첫댓글 슈만(Schumann), dédoublé en Eusebius, rêveur introverti, et Florestan, passionné et combatif. / Eusebius et Florestan apparaissent tantôt comme auteurs tantôt comme compositeurs), dans la vie des deux jeunes gens la réalité prend l'apparence de la fi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