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성글다. 아버지는 나를 젖 먹여 기르지도 않고, 기저귀를 갈아주지도 않고, 똥오줌 가리지 못하고 밤새 울어댈 때도 다독거려 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만 나돌아서 엄마만큼 가깝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철들고 나서부터였다. 철없을 때도 엄마는 마냥 좋았지만, 아버지는 마음에 들 때보다 무서울 때가 더 많았다. 내가 아버지에서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가난이다. 열다섯에 조랑말 타고 장가간 우리 아버지는 조선 왕조가 무너져 가던 구한말에 윤씨 가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동학란 언저리였다. 신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농사꾼이자 완고한 유생이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검은 옷을 입고 왜놈 학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대노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검정색 교복을 불태우고, 손자에게 한학만 익히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당시의 풍속에 따라 일찍 장가들었으나, 우리 ‘큰어머니’(첫째 부인)는 딸 하나 낳고 아기집에 탈이 나서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열다섯 해를 그냥 살겠다고 버티다가 제사 지내 줄 아들 하나 낳지 않는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짓이라는 집안의 등살에 못 이겨 술집에서 주워 온 우리 어머니를 스물아홉에 만나 나까지 아들만 아홉을 내리 낳았다. 그러니 살림이 펼 겨를이 언제 났겠는가. 그래도 아들들이 똑똑하다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자식을 낳으면 한양으로 보내라.”는 옛말에 귀가 솔깃해 서울로 이사했다가 ‘6·25’로 자식 여섯을 날려 보내고 나머지 자식 셋을 살리겠다고 전란 속에 다시 고향 근처로 내려왔으나 그때는 이미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내 ‘가난의 유산’은 이때 생겼다. 이 유산은 내게 비길 데 없는 큰 자산이다. 유산상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 시대에서 가까운 예를 들어 살펴보자. 실명을 들어 미안하지만, 소설 쓰는 김성동과 이문열의 삶을 견주어 보자면, 김성동은 남로당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다가 붙잡혀 대전형무소에 갇혔다가 6·25 전후로 학살당한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 아비에 연루되어 ‘국민학교’(초등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학력별무’로 ‘출가’까지 했던 김성동은 아버지의 삶을 한 번도 부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쓴 소설에 아버지의 행적과 그 떳떳함과 올바름을 그려내려고 한평생 애써왔다. 그러나 이문열은 달랐다. 김성동과 거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월북’한 아비 탓에 제 힘으로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뒤이어 고시를 보아 출세를 하기를 꿈꾸던 그는 좌절을 맛보았다. (겉으로는 연좌제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가 고시 패스나 육사 입학 같은 출세의 지름길에서 부역자의 자제들 발목을 잡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이문열은 이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를 살아가는 데 방해만 되는 것으로 여겨 아버지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 아버지를 인정한 체제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따지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아비의 행적이 이렇게 알게 모르게 아들의 유산이 됨을 밝히려고 하는 이야기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팔병이 형은 부산에서 거지합숙소에 들어가 있었고, 나는 군대에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늙은 딸에 기대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인근 사단에 찾아가 화장을 부탁할 만큼 자식들에게 남긴 것이 없었던 아버지의 가난한 넋을 팔병이 형과 나는 가장 큰 유산으로 받아들이고 ‘이 일을 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다.
첫댓글 가시죠! ^^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