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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아버지와 많은 이별을 하며 살았다.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민족일을 하신다며 집을 자주 비우셨고 그래도 아버지가 집에 계신 것은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부산대에 계실 때였다. 5.16후 아버지가 서울로 가신 후 미결수로 1년, 기결수로 교도소생활 4년을 보내시는 동안 나는 대학을 다녔고 내가 졸업후 1년동안 부산에서 교편생활을 할 동안 아버지는 서울에 머물러 계셨다. 그 후 집에 돌아오셔서 양산의 개운중학교일을 하실 때 나는 또 미국으로 떠나 있었다.
4년간 일주일에 한번 면회를 했다하지만 간수의 삼엄한 감시하에 대화내용이 일일이 기록되고 있어 특별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도 편지왕래가 있었지만 그것도 후에 말씀하시기를 검열에 걸릴가봐 내용을 극히 제한하였다고 하시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는 편지 검열이 삼엄하여 최장집(崔章集 고대명예교수)도 고려대학 다닐 때 방학 때 고향인 강릉에 가 있으면서 서울에 있는 친구와 서신 교환을 하며 울분을 토하다가 내용이 불순하다며 64년에 구속되어 고초를 겪은 일이 있다. 집안으로 멀리 걸리기도 하고 그 어머니가 재경 동래여고 동창회 무슨 간부로 대단한 활동가라 나도 그 모자(母子)를 몇번 본 일이 있다. 어쨋든 편지 내용도 대단히 조심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편지를 잘 안하니 대신 이메일이나 전화가 도청된다고 들었지만. 하긴 현재 인터넷 까페들도 폐쇄되고 그 까페주들이 구속되는 일들이 허다하긴하다.
69년 9월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는 집에 계셨고 나는 드디어 그 때 아버지와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다음 달 10월 내가 결혼할 때까지 그 한달 간 아버지와 나눈 말들이 내 전체의 삶동안 나눈 것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말귀가 열리지 않았으니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고. 그러고보면 그 한달이 유일하게 내가 아버지와 진정한 '만남'을 가졌던 기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시집간다'라는 비 민주적인 표현을 아주 싫어하시어 꼭 남녀평등인 '결혼한다'라고만 표현하셨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이었을 뿐 실상 나는 평생 시집살이를 톡톡히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에 가 있었으면서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나라에 돌아와 준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해 하셨다. 나는 그 '한달간의 대화'에서 그동안 궁금하던 많은 것을 여쭈어 보았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이병도같은 매국학자에게 심부름을 시키시었나' 등에서부터 대학시절 혼자 공부하던 서적의 이해할 수 없던 부분까지. 아버지는 농담으로 나를 '수제자'라 하시면서 온종일 강의를 풀어 놓으시었다.
들으면서 가만히 보니 아버지는 가르치면서 대단히 행복해 하시는 것 같아 맹자의 삼락이란것이 괜한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버지는 부산대에서 강의하던 옛 추억을 되살리며 삶의 어떤 의미와 힘을 얻고 계시는 듯 하였다. 한용운선생과의 만남, 3.1운동과 동경 2.8 유학생 독립선언서, 이수병과 그 외 안양교도소 동지들 얘기, 민자통 등등 말씀하시다 보면 하루해가 짧았고 한달도 금방 지나갔다. 한번 하신 말씀을 자꾸 반복하시어 어떨 때는 좀 지루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써비스라고 생각하고 참아 드리기로 하였다. 요즘 나도 우리애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러면 '아이 그 말은 전에 한 거잖아요'라고 당장 나오는것 보면 참 세월따라 많은 것이 변하는구나 싶다.
내가 지금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어느 날 한참 말씀하신 후 끝에 '통일된다면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다 아버지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는 침통하게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고 계셨다. 그 후 그 말씀에 대해 나는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바로 그 어느쪽편에도 완전히 서지 않았던 그 순수한 민족만을 생각하신 자세때문에 그래도 집에서 눈을 감으실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이미 아버지는 자주 '아버지 동지들은 다 갔고 아버지만 살아남아있다'라고 쓸쓸하게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에 서면 다른 쪽으로 부터 핍박을 받아 죽고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완전히 자기 쪽이 아니라며 죽이기까진 안 하더라도 회색이라며 핍박을 하고. 이래저래 서러운 한국의 운명이다.
아버지와 내가 각각 다른 길을 걷고 방황하다 어느 때 잠깐 집에 돌아온 그 공간, 그 잠시동안 한달간의 만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수많은 영겁의 세월 속에 한 인연으로 잠깐 만났다 스쳐간 아버지와 나는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나던 나는 나의 아뢰야식으로 아버지를 당장 알아볼 수 있을것만 같다. 바라옵건데 다음 생에선 인간으로서 당할 수 없는 그런 혹독한 고문을 안 당해도 되는, 아버지가 그리도 바라시던 통일된 조국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시기를.
아버지와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도 곧 다시 오랜 이별이 올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실지로 다음 달 결혼 후에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했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내가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방학 때 외갓집에 다니러 갔을 때 아버지는 말씀도 어눌하게 하며 누워 계셨다.
88년 진주에서 서울로 이사가기 전 나는 한 이틀 시간을 내어 아버지를 찾아 뵈웠다.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하고 아버지는 누워서 대부분 듣기만 하셨다. 떠나는 마지막 날 아버지는 내게 띄엄띄엄 말씀하시기를, '우인아.. 너는 진흙속의 진주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썩지않을.. 것이다' 라 하시었다. 나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 말씀은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유언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혼탁한 환경에 물들지 말고 깨끗하게 남아 있으라는 부탁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마 나는 내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조차도 '아버지, 아버지가 보시기에 나의 삶은 그냥 괜찮았나요?'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계신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뵙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평생 민족을 위해 일하시고 고통을 받아오셨는데도 마지막까지도 이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시느니 환자본인도 그렇지만 16년간이나 병수발하시는 어머니도 힘드신데 이제 그만 영원히 쉬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가슴아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누군가 아버지 병문안을 왔을 때 어머니께서 그분께 '선생님이 공사(公私)간에 오래 사셔야 할텐데..'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아 어머니는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그 입장이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짜증이 좀 나지나 않았을까 싶어 어머니께 고개가 숙여졌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어떤 사명을 그렇게 완수하고 계셨던 것 같았다.
바로 그 해 얼마 전엔 서울서 고은(高銀)선생님이 아버지를 뵈러 먼 길을 찾아오셔서 저녁때부터 밤 새도록 세 분이 함께 얘기를 나누시었다 하여 ‘아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통탄하였다. 나는 더 이상 여고생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대화에 참가할 수도 있었을텐데 싶어.. 어머니 말씀이 고은선생님은 '불같은 정열이 타오르는 분'이더라 하셨는데 아버지는 선생의 방문에 틀림없이 큰 위로를 받으셨을 것으로 믿는다.
74년 아버지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선생의 유적과 이수병 생가를 찾아보고 오시다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가슴이 꽉 막혔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왜 그 때 쓰러지셨나를. 평소 아버지가 그토록 존경하시던 백산선생, 그리고 젊은 이수병.. 두 사람은 모두 조국의 광복과 통일을 위해 몸바쳐 일하다 구속되어 일년간이나 고통을 받다 타계하였다.
아버지는 그 때 가슴이 꽉 막힌 채 돌아오시다 쓰러지신 것이다. 아버지는 부산대 정치과입학 면접 때 의령(宜寧)에서 온 한 학생에게 안희제 선생을 아느냐 물었을때 모른다하여 당장 불합격 시켰다 하셨다. 자기 고장의 대(大) 항일투사도 모르면서 어찌 정치과에 들어올 생각을 하느냐 하시면서. 의령은 안희제 이수병 두 애국투사를 낳은 특별한 고장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문한영선생님은 아버지가 가시고 난 후 7년 후인 97년 4.19국립묘역에서 참배를 마친 뒤 갑자기 심장마비로 급사 하시었다. 평소 지병도 없으셨고 5.16 후 4년 7개월간이나 복역하고 출소하신 이후에도 민자통을 다시 창립하신 후 활발한 통일운동의 중심에 서서 역할을 다해 오신 선생님은 4.19묘소를 참배한 뒤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까운 젊은 피를 쏟은 그 의거는 그 1년 후 군사 쿠테타의 발 밑에 갖다 바친 안타까운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안희제, 이수병 두 애국지사를 방문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쓰러지신 아버지와 4.19묘소의 젊은 애국지사들을 찾아보고 난 후 쓰러지신 문한영선생님과.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생각보다 기(氣)가 많이 쇄진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 올려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에너지가 빠져 나가는 만큼 대신 글에 나의 진실과 기가 실리겠지 하는 바램으로, 또한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도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대선 선거날 밤 나는 거의 죽을 뻔 하였다. 온 몸의 흐름은 모두 막혀 버린 듯 기와 혈이 멈춘 것 처럼 고통스럽기가 말 할 수 없었는데 그런 속에서 나는 아련하게 아버지와 문한영선생님을 떠 올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어선지 잠깐 든 잠 속에 아버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나는 30대 중반으로 진주에 살고 있었는데 꿈에서도 나는 몸이 많이 쇄약해 있었고 아버지 제자 중 한 분이 심부름이라며 아버지께서 내가 힘을 내 일어나라고 보내셨다는 아주 커다란 토종 수탉 한마리를 가지고 왔다. 보통닭 크기의 대여섯배나 돼 보이는 70 만원 짜리라고 하는데 깃털이 길고 너무 영롱하게 아름다워 감히 잡아 먹을 생각을 못하고 감탄하며 경외스럽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버지도 어려운 가운데 편찮으시면서 왜 그렇게 비싼 선물을 보내셨을까 안타까워 하면서. 그 제자분이 전하던 말 그리고 그 아름답던 닭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여 깨고 나서 아 아버지는 내가 힘을 내 일어나기를 바라시는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그 때는 '6.3데모와 음대'편을 막 올린 직후 였는데 그 몇일 후에 일어나 다시 '이병도 박사'편을 쓰기 시작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힘을 내어 글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거라고 믿고 수탉대신 사골곰국을 끓여 먹으며 기운을 내었다. 지나 온 내 인생의 고비의 순간에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내게 두번 메시지를 보내주신 일이 있지만 아버지가 타계하신 후엔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다.
헤밍웨이의 'The old man and the sea' 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물고기와 싸우며 노인이 되뇌이는 말,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시한적 생명은 끝날 수 있어도 인간이 갖는 의지와 투지는 죽지않고 지속된다는 뜻이다.
나는 자주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지하에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자신의 묘소에 참배하고 아버지 이름을 널리 알리며 기리고 잊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다는 아닐것 같다. 아버지 개인의 이름은 잊어도 좋으니 그 정신을 살려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 몸을 바쳐 실천하는 것일게다. '민족'이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개인 개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실천에 있을 것이다. 특별히 반 민족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 함께 싸 안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향해 같이 나아가야 한다. 개인을 배척하면서 민족사랑을 소리친다면 얼마나 위선적인 모순인가.
아버지는 민족의 실체가 바로 이웃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오신 것을 나는 보았다. 가난한 우리 동네 누가 해산을 하면 미역을 사다가 갖다 드리라 하여 언니와 나는 긴 미역을 종이에 싸서 심부름을 가곤 하였다. 그런 심부름은 항상 신나는 것이었다. 바로 뒷집에 아들이 중학에 들어갔는데 입학금을 못 내 단념하게 된 것을 입학금 전액을 아버지가 부담해 다니게 하기도 하였다. 시골 출신인 수일원 아저씨들 세 학생을 우리 아랫채에 와 있게 하며 돌보신 것도 아버지의 그런 제자사랑의 표현 중 하나였다. 그런 실천들이 바로 이론만이 아닌 실제의 민족사랑이라고 본다.
조정래 작가의 말처럼 왜 쓰느냐 는 질문에 '통일 된 후 너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쓴다'라고 하였듯이 혹시라도 나중에 영혼이라도 다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잘 답변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지금 열심히 값진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서울, 부산, 진주, 미국에 살아보았지만 그 중에서 부산은 참으로 특별한 고장으로 기억된다.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등에서 느껴지는 억척스러움과 강한 생활력, 그리고 그 강렬함은 뛰어난 정치의식으로도 통하여 같은 맥락이 흐르는 것 같다.
6.25사변 때 임시정부가 있었고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을 피부로 겪으며 부산시민들은 일찍 깨어나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 뛰어났었던 정치의식도 이제 지역의식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4.19는 부산에서 그리고 5.16후 대학생들의 데모는 서울에서 겪어 보았으나 그렇게 고등학생부터 데모에 온전히 참여하여 강렬한 투쟁을 벌이는 곳은 없었다. 4.14를 기점으로 항도고등학교(당시 학생회장 이형호)를 필두로하여 부산 시내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고등학교는 내가 알기에 한 곳도 없었다.
부산에선 가장 정적(靜的)이고 얌전한 규수의 학교라는 우리 동래여고에서 조차도 4월 20일 부산시내로 걸어나갔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랴. 가끔 두루마기를 점잖게 입으신 영감님들이 우리학교를 찾아오시어 며느리감을 소개해 달라시던, 그 만큼 동래여고는 최고의 부덕(婦德)을 갖춘 규수들의 양반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기미년 동래고보 학생의거 등으로 유서깊은 동래고 학생들은 이미 몇일 전 부산시내까지 데모를 하였고 동래여고학생들은 몇일이 지나 드디어 수업거부를 하고 나가기로 하였다. 학교측에서는 쇠철문을 걸어 잠그고 막았지만 역부족이라 문을 열어주면서 단 선생들 몇명이 호위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동래에서 그 먼 부산시내까지 그 먼길을 걸어 나가면서 우리는 투지에 불타올라 다리 아픈지도 모르고 족히 세시간은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내에서 해산하고나니 일시에 피로가 몰려오는데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차비도 없고 배는 고프고 안그래도 평소 빈혈기가 있던 나는 앞이 노래지면서 그 때서야 야단났다 싶었다. 그래서 나와 같은 한 친구를 데리고 그 당시 국제신보 기자이던 월내(月內)아저씨(배다지씨)를 찾아가 '아저씨, 우리 돈까스 사주세요'라 하였다.
그 때 먹던 돈까스의 맛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다시 있을까. 월내아저씨는 내게 바로 목숨을 살려준 구세주 이상으로 아직도 기억한다. 아저씨는 그 후 자주 반 농담이지만 '우인이 니만 보면 겁난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돈까스 사내라 할가봐' 라며 공격을 하였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예의 없이 군 점은 미안하지만 그 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대신 돌아갈 때 버스비는 그 친구가 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50년대 말 5.16 직전까지의 몇년이 우리 수일원의 가장 전성기였던것 같다. 아버지 제자분들이 수시로 방문하고 한 때는 사상아저씨(김상찬)와 월내아저씨(배다지)가 우리 아랫채에 기거 하고 있었고 얼마 후 김해아저씨(조현종)도 합류하였다. 김해아저씨는 힘이 장사여서 농장 일을 시원시원하게 잘 하시었고 사상아저씨는 하시는 말마다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를 늘 웃기었다. 하루는 농장에서 일하고 두분이 내려오더니 사상아저씨가 김해아저씨에게, "지게 야분대기 세와 노으소" 라 하여 동생 우기와 나는 배를 쥐고 웃었다. 그외에도 "돼지 죽 좠소?" 등 우리는 그 말투를 흉내 내보며 늘 재미있어 하였다.
사상아저씨는 대학 졸업 직 후 충북 영동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는데 그 때 제자들 중 한 명과 편지 왕래가 있다가 60년대 말 30대 말의 노총각이 되어 결혼 상대자로 그녀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별로 내색은 안 해서 몰랐지만 그 전부터 이미 남모르는 애정이 있었던 것도 같다. 나는 두 사람을 붙여 주려고 서울 부산을 오가는 길에 영동에 들려 그 제자분이 근무하고 있던 영동국민학교로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하루는 김해 아저씨가 어느 아저씬가를 대동하고 부산에서 영동까지 일부러 찾아가 그 어머님을 뵙고 대신 청혼을 드렸는데 그 점잖으신 충청도 양반 마나님께서 확실한 대답을 안 해 주고 빙빙 돌리며 완곡한 표현만을 하여 두 아저씨는 할 수 없이 그냥 방을 나와 신발 끈을 매다가 성질 화끈하고 급한 경상도 사나이인 김해아저씨가 그 댁 마루를 주먹으로 꽝 내려 치며 "딸을 줄끼요, 말끼요?" 라 고함을 쳤다.
어쨋든 그 덕에 사상아저씨는 그 제자분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되었고 66년 4월 부산 서면에서 가까운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었다. 나는 부산 훈성여중에 근무할 때 였는데 그 결혼식을 위해 <4월의 노래>라는 곡을 작사 작곡하여 서울에서 내 친구 이정지(李靜枝 소프라노)를 특별히 불러내려 내 반주로 축가를 부르게 하였다.
식 후에 예식장 옆 한 중국집에서 약 2,30명의 동지들이 피로연 식으로 모였는데 그 때 이미 모두 30대 후반이었는데도 결혼한 이는 내 기억에 63년 여름에 결혼 한 하동아저씨(하상연) 한분 밖에 없었다. 모두 통일 될 때 까지 결혼을 미룬다며 정열이 충천해 있던 아저씨들은 곧 통일이 될 것으로 염원하던 바와는 달리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곧 이어 김해 아저씨가 장가가셨는데 모두 일당백(一當白)의 아까운 신랑감들이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결혼 제일 조건의 경제력에는 모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있어 신부감들이 모여들지 않은 이유도 있지 않았나 추측한다.
피로연이라며 떠들썩한 가운데 사상아저씨는 아까 그 <사월의 노래>가 참 좋았다며 다시 불러 달라하여 이정지 친구가 일어나 한번 더 불렀다. 실상 그 날 아침에 내가 부산진역으로 그녀를 마중나가 버스 안에서 익히라며 악보를 처음 건내 준 건데 그녀는 작은 소리로 몇 번 불러보고 외운 것이었다.
그 날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이영근 아저씨가 그 모임 중에 심훈(沈熏 1901∼1936)의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하는 시를 너무도 실감나게 절절한 목소리로 읊조려 모두 숙연해 지던 장면이다. 아저씨는 사나이답게 잘 생긴 육중한 모습과 분위기로 평소 별로 말이 없는 분이었는데 목소리에 그렇게 정열과 힘이 배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수일원을 방문한 손의현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느닷없이 '우인아, 그런데 느그 친구는 내인데 비해서 키가 쫌 작드라.' 라 하여 한참 웃었다. 거의 시골 출신인 그 노총각 아저씨들은 요즘 남자들처럼 세련되지 않고 순진무구하여 어떤 면에서는 어린애들 같은 면이 있었다. 하긴 이정지는 좀 작은 편이고 손의현아저씨는 180은 넘었으니 그렇기는 했겠지만 아마 내심 내 친구에게 잠시 관심이 좀 갔던 모양이다.
항상 매력에 넘치고 아름답던 이정지는 내 인연으로 우리보다 두 해 선배인 정치과 출신 박범진(朴範珍)과 결혼하여 평생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3년 전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여태껏 투병 중에 있다.. 우리 주위에 그 부부는 항상 유명한 잉꼬부부로 외동딸도 시집을 잘 보내고 이제 노후를 편안히 즐길 일만 남았었는데 청천벽력같은 운명에 우리 친구들 모두 아연할 뿐이다. 안양교도소 위문에도 함께 참가하였고 학림(鶴林)다방에도 자주 가서 음악을 같이 듣던 많은 추억과 그리고 그 시대 아픈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동창들은 유난히 가까웠던 우리 둘 사이를 잘 아는지라 요즘 나를 더 위로하고있다.
김해아저씨는 서울에서 손의현 김달수 하상연 등과 함께 아버지의 민자통(民自統), 사책당(史責黨) 등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5.16 후 함께 구속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달수(金達洙)는 서대문교도소에서 문한영선생님과 한방에서 오랫동안 수형생활을 하다 문선생님과 아버지와 함께 출옥하여 부산에 잠깐 있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그때 함께 출옥하신 이재춘(李在春 원로여배우 한은진의 남편)선생, 아버지 등과 같이 합세하여 민족일을 하였다. 김달수 아저씨는 본명보다 김백인(金白忍)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하여 그렇게 쓰고 있었는데 백번 참는다는 뜻 처럼 아저씨는 대단히 중후한 인격자로 아버지의 기대와 신임을 받고 있었다. 김백인이란 이름으로 민자통(民自統)일로 구속되어 있을 때 중정(中情)에서는 '중죄인' 김달수를 오랫동안 혈안이 되어 찾아 헤매다가 나중에 코앞에 잡아 놓은 김백인이 바로 김달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아저씨는 분풀이 겸 괴씸죄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는다. 별로 표현을 잘 안 하시는 아저씨는 나중에 '그 때 대기 좀 맞았지' 라며 슬며시 웃으시었다.
작년에 50년이나 흐른 후 드디어 민자통사건 재심에서 민자통 사건의 문한영, 이종신, 기세충, 김달수는 무죄라고 판결이 났다.하지만 62년 당시 29세로 가장 나이 어렸던 김달수가 현재 80세이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셨으니 그 무슨 국가적 폭력이란 말인가. 조용수 민족일보사장, 이수병, 도예종, 하재완, 여정남등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당한 8인의 아까운 민족 동량들을 다 버혀버리고 난 다음 이제와서 무죄라고만 하면 다인가. 그동안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떠들어왔던 한명숙 전총리의 뇌물수수혐의도 아무리해도 증거가 시원찮았던지 몇일 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 판결되었다. 전 대한통운 사장의 인사청탁으로 5만불(5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는데 검찰은 그동안 수백 수천억원 이상을 해 먹어 온 이들에겐 손 끝 하나 건들지 않고 있다.
박노자는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란 책에서 "촛불집회의 시위대에 한파에도 굴하지 않고 물대포를 쏘는 국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국민들을 테러리스트로 여기고 살인적 진압을 하는 국가, 재벌대기업보다 일반중소기업에 더 높은 세율을 메기는 국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 했는데 나는 "분단된 국가에서 평화적인 통일이란 말만 하면 무조건 죄명을 조작해 덮어 씌우고는 잡아다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국가 그리고 수십년이나 지난 후에야 여론에 눌려 할 수 없이 무죄라 하는 국가" 라는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고 본다.
동래 수일원으로 이사간 다음 해 여름엔 집에서 기르던 황구 '스텔로'를 김해아저씨가 우리 산에 데리고 올라가 잡아와서 큰 가마솥에 삶아 아버지 제자들을 초청하여 대접하였다. 우리 공부책상들을 모두 마당에 내놓고 가마니를 깔고 앉아 아버지와 제자들이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드시던 분위기도 생생하다. 포구나무 그늘은 시원하였고 매미는 그 여름 날 내내 울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 대접하는 것을 즐기시는 어머니는 부엌에서 마당으로 연신 음식을 나르며, "더 먹게!" "어서 오게"하며 신이 나 하셨는데 나는 그 때의 즐겁던 기억과 더불어 그 너무나 맛있던 개장국 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개장국'이란 단어가 혐오스럽다면서 60년대에 들면서 '보신탕'이라 하더니 그 후엔 그것도 '사철탕'이니 '영양탕'이라 고쳐 불리우고 있다.
그 맛을 찾아 나는 성인이 된 후에도 유명하다는 보신탕 집을 꽤 다녀 보았는데 왠일인지 어느 집도 그런 맛을 내는 집이 없었다. 게다가 어이하여 음식으로 남녀 구분을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보신탕을 먹는다면서 모두 이상하게 보아 요즘은 눈치가 보여 이래저래 더 이상 먹질 않는다.
나는 나이가 들며 부모 입장이 된 내 자신과 또한 주변 사람들의 부모들을 보면서 아버지같은 분을 내 부모로 가지게 된 자신이 참으로 복이 많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내가 만일 이완용이나 지금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수많은 친일파들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해도 부모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그랬다면 지금 쯤 "안중근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다. 유관순은 여자 깡패다" 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었을 줄 어찌 알겠는가.
만일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럼 다른 누구를 택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아도 김구 선생이래 더 나은 분이 떠오르지 않는다. 김구 선생은 나와 연대가 안 맞고 그 외 연대를 떠나서도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 박은식(朴殷植), 이동영(李東寧), 김성숙(金星淑), 이상재(李商在), 이회영(李會榮), 홍범도(洪範圖), 안희제(安熙濟) 등 여러 애국투사들을 나는 항상 존경하고 있지만 내가 정말 이 분이라면 나의 부모라 해도 좋았을 것이라 싶은 분으로 아버지 이상 가는 사람이 없었다. 애국은 우직한 애국심과 뛰어난 사학력(史學力)과 정열만이 아닌 방법론 상으로도 여러 전략과 기지 등이 유기적으로 요구되는 복합성이 필수적임을 비추어 볼 때 그런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몇 천만분의 일이라는 지극히 적은 확률의 행운을 피동적으로 거머 쥔 셈이니 생각할 수록 축복아닌가. 나는 여기서 감히 말하건데 아버지는 김구선생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우뚝 서신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번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 게바라(53세)가 우리나라에 와서 초청강의 할 때 한 말 가운데, "아버지는 진정한 혁명가라면 로맨티스트여야 한다고 말 하셨다. 타인을 존중할 줄 알고 협력을 이룰 수 있고 그렇게 힘을 합쳐야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가진 가장 큰 자질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체는 마지막에 그가 미제 세력에 의해 그런 식으로 체포되어 죽을 줄 충분히 계산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이순신 식으로 마지막에 일부러 거의 자살이라 할 수 있는 형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 두사람은 자신들의 죽음의 형식 또한 그들의 투쟁 경력의 큰 종지부의 과정으로 남을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란이 끝나면 조정 대신들의 모함을 당해 죽을 것을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굳이 따라가서 공격까지 하지 않아도 될 오합지졸의 왜군들이 돌아가는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투구와 갑옷을 벗어두고 따라가 싸우다 왜구의 총탄에 맞아 전사를 한다. 도올은 말한다, "선조 때 이순신을 내 치던 수구 보수세력은 면면히 세력을 이어 와 현재의 친일파 세력으로까지 맥이 닿아 있다. 이순신은 자살하거나 그 때 남은 군대를 이끌고 쿠테타를 일으키거나 하는 두가지 기로에 처해 있었는데, 만일 그 때 이순신이 쿠테타를 일으켰다면 그 후 조선시대는 지금까지 훨씬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왔을 것이다. 쿠테타는 그럴 때 일으켜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다."
대부분의 애국자들이 말기에는 변절을 하고 타협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토록 인정하고 있던 김중태가 작년 시월 어느 날 조선일보 TV채널에서 회담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 나도 모르게 떠 오르는 한탄, "김중태여, 김중배의 금반지가 그리 좋더냐!" 또 몇일 후 이어 "김지하, (부르터스) 너마저!" 라는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들의 민주화투쟁이라는 것은 정말 '영웅심리'에서 나온 것일까..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민족을 위해 투쟁을 하시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고생을 좀 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늘 감사드린다. 나의 언니는 지금까지도 자주 말하기를 "6.25 전란 통에 굶어 죽거나 고아가 된 아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끝까지 우리를 거두어 피란하셨고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 해 우리를 키워 내시었으니 우리 형제들은 참으로 행운아들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라고 진심으로 회고하고 있다.
끝까지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생을 마치신 나의 아버지 산수 이종률을 나는 존경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이유는 과거의 인물로 나의 아버지를 회고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민족의 통일을 바로 눈 앞에 둔 이 싯점에서 과거 어느 때 보다 아버지의 사상이 현실적으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우리 후손들이 받들어 실천해야 할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들의 정신 속에 면면히 살아 계셔야 한다.
우리 한민족은 탁월한 홍익인간 정신으로 다시 이 지구상에 평화롭고 풍요한 인류역사를 세우기 위해 새롭게 거듭날 원시반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근 천년동안이나 다른나라 세력들이 우리영토를 침략하고 엄청난 박해로 우리 한민족을 지구상에서 말살하고 역사를 왜곡시키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 왔으나 우리 민족의 굳건한 맥은 도도히 살아있는 저력으로 버텨 왔음이다. 그동안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세력에 기생하던 자들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잡고 지배하고 있으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있겠는가. 그 세력들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을 반국가단체요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며 희생시켜왔으니, 사실상 통일을 거부하며 타세(他勢)에 기대어 안전하게 부를 누려 온 자들이야말로 반민족주의자들이 아닌가.
세계 금융공황과 핵재앙으로 지금 지구는 종말로 치달아가고 있는듯 하지만 세계는 결국 우리 민족을 통해 매듭이 하나 하나 풀려가면서 잘 극복해 나갈것으로 기대한다. 그동안 우리 동이족의 후손으로서 천손(天孫)의 맥을 지키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온 용감한 선배 조상들의 정신을 우리는 굳건하게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 한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 온 우리 조상들, 그 중에 한사람으로 우뚝한 나의 아버지에게 나는 후손으로서 끝없는 고마움과 존경을 표한다.
아버지뿐 아니라 그 동시대에 동지들이 보여준 그 순수한 조국애를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수천년전에 건너가 살던 우리의 조상 발해인들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무참히 살해 한 그 세력과 민족일보와 인혁당 등을 조작하여 살해 한 세력은 과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내가 어려서 보던 그 한민족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있던 아버지 주위의 애국자들은 그 세력들에 의해 하나 둘 거의 사라지고 이제 우리는 머리털 잘린 삼손처럼 거세된 후손들만 살아 남아있는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동안 얼마나 우리 민족정신을 탄압해 놓았으면 90년대까지도 펄펄하던 그 젊은 기백들이 지금 다 죽어있겠는가.
중국에선 센카쿠열도 섬을 일본이 뺏아가려 한다고 전국적으로 맹렬한 시위를 벌였지만 우리는 일본이 연일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떠들어대도 조용하기만 하다. 일본은 이제 우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듯 하다. 일본은 중국민들의 항의엔 주춤하면서도 한국의 독도문제는 점점 강도를 높혀 본격적으로 '다께시마의 날' 행사를 하고 자신들의 신문광고 등으로 독도는 자기들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국토와 역사를 지키기위해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조들앞에 무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그리고 우리의 땅 대마도와 간도지방을 모두 되찾아 선조들 앞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
현 대학강단을 점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일제식민사관의 복사판이 동북공정이다. 그들은 중국의 역사 침략야욕에 동조하고 있어 중국을 신나게 도와주고 있는 꼴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중국대륙에서 한창 발굴되어 온 거대한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는 바로 동이족의 고조선문화라고 중국학자들이 어쩔 수 없이 발표하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중국땅에 있는 문화는 모두 중국 역사다'라는 주장의 동북공정에 3조원이나 들여가며 모든 유물 유적들을 철저히 왜곡시키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 정부와 교육계에선 별다른 대응이 없는 실정이다. 세계 4대문명보다 특히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서고 있는 찬란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두 눈 뜨고 고스란히 뺏기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통일된 후 그다음에 우리가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릴 곳은 우리의 영토와 참 역사를 되찾는 것이 될 것 이므로.
우리는 하루 빨리 국사 교과서를 새로 써야하며 바른 사학을 가르쳐 국사과목이 암기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되어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옳은 역사를 쓰면 학생들은 우리의 역사시간을 자부심 넘치는 재미있는 과목으로 기다릴 것이다.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라'는 조선총독부의 특명은 그들이 물러간지 칠십년이 되가는 지금까지도 면면히 지켜져 오고 있으니 세계 역사상 이런 비극이 또 있겠는가.
6.25는 우리에게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J 시볼드는 “일본 경제가 한국전쟁으로 뜻하지 않은 대박을 터트렸다”고 말했다. 마쓰시다(松下)의 사장이었던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造)는 공장 폐쇄를 선언한지 2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했고, 일본 정치인 경제인들도 모두 '천우신조'라며 좋아하였다. 한국전쟁은 대전(大戰)에 패망한 일본경제 재건에 일등공신이었던 것이다. 그 일등공신에게 엎드려 사죄의 절은 못할지언정 남의 비극을 딛고 일어난 그들은 그 후에도 우리에게 어찌 행동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동안 우리민족에게 행한 잔인무도한 살상과 범죄에 대한 사과는 고사하고 북한에게 납치당했다는 일본인 몇 사람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 보면 정말 얼굴이 쳐다 보인다.
우리가 이 천년간 외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실은 사차원에서 계획되어 있는 필연적인 단련의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수난의 단련 기간도 거의 끝나가고 이제 우리는 우뚝 일어나야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느낀다. 우리가 조국에 태어나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응당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내 한몸 위해 지구만 오염시키고 간다면 선조들과 인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자신보다 무서운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檀紀 4346 癸巳년 2월 7일 (양력 3월 18일)
아버지 영전에 삼가 이 글을 올립니다
李 雨 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