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도는 인간의 본성을 소로 비유해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을 열 단계로 그린 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를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던 목동이 마침내 도를 깨닫게 되고, 궁극에는 이상향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전체 내용의 흐름이다.
여기 마음 한 귀퉁이에 소를 키운 지 어느새 30년이 넘었음에도 소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며 한꺼번에 방목한 시인이 있다. 31년 5개월 동안 교단에 섰던 오형근. 그에게 소는 삶이었고, 한편으로 우울이기도 했다. 인생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시집 ‘소가 간다’는 ‘소’ 연작 46편과 ‘무제’ 연작 10편으로 구성됐다. 왜 ‘소’와 ‘무제’일까. 시인이 소를 연작으로 쓰게 된 것은 소가 지닌 함의들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소를 닮고 싶은 간절함이 자신을 소로 상정한 후 소의 생태미학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형상화하게 했음직하다.
“그리움마저/ 죄가 될 줄이야/ 누렇게 타버린 소 -‘소1’”에서 시인은 그리움마저 죄가 된다고 했다. 비운다는 생각마저도 비워야 하는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인간은 늘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누렇게 타버리고 말았다. 욕심으로 아파하고 갈등하는 인간세상이 소를 누렇게 타버리게 한 것은 아닐까, 삶을 반성하게 하는 시구다.
시인은 이어 “소의 눈은/ 노승만이/ 낚싯줄 드리울 수 있는/ 호수 -‘소9’”라며 유난히 크고 순박한 눈빛을 지닌 소의 눈을 이야기하고 있다. 탐진치 삼독에 물든 세상에서 시인은 소의 눈처럼 신성한 경지를 몹시도 갈망하고 그런 세상이 되기를 서원하는 마음을 시에 담았다.
구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마음을 소에 이입한 시인은 소를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드러내기도 했다. “소가 간다/ 눈 감고 간다/ 감아야/ 길 환하게 보인다/ 아파서/ 잘 보이는/ 길 -‘소41’”에서 ‘아파서/ 잘 보이는/ 길’은 아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길이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 시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삶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이 시는 희로애락의 한 과정인 아픔을 형상화한 것으로, 언뜻 서늘한 애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소’와 더불어 시집의 한쪽 무대를 장식하고 있는 시제는 ‘무제’다. 제목을 붙이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있음이 없음이요, 없음이 있음’이라는 불교적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비움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제목 없는 시 ‘무제’ 10편은 상당 부분 형식적인 측면이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시가 요구하는 일반적 규정을 벗어나 있다. 시론이 요구하는 긴장이나 함축, 상징, 이미지, 비유 등에 구애받지 않았다.
마음 한 귀퉁이에 소를 키운 지 30년이 넘는 시인이 천착해가는 삶의 길이 소를 통해 진솔하게 빛을 발하는 시집이다. 그 길은 시인의 길 뿐만 아니라 진솔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이기도 하다. 1만원.
첫댓글 ()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쌍계사 심우도가 떠오릅니다 ~ ^*^
가을이네요. 채샘, 멋진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