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마늘 한 접이 발효수행에 들었다 콩콩 찧어 끓는 국솥에 넣은 순간에도 펄펄 살아 손끝 아리게 하던 성깔이 결과부좌로 앉은 밥솥 안에서 며칠째 잠잠하다 하지만 천천히 올라간 온도가 정수리에 닿자 온 집안을 발칵 뒤집는다 뚜껑 열고 뛰쳐나와 파계를 선언할 듯 종일 쏟아낸 욕설 같은 혈기가 옷가지며 커튼에 켜켜이 스몄다 사람의 오장육부를 곤고히 다스리겠다던 초심은 비루하게 뒷걸음쳤다 맵고 독한 생것이 어질어지기까지 돕는 것도 마음이고 훼방 놓는 것도 마음이어서 아홉 번 죽어 아홉 번 다시 살아 깨닫는 저 검은 고요
헛꽃
산수국이 피었다
좁쌀만 한 꽃망울 가장자리에 배란기를 가늠 수 없는 무성화 피었다 대가 끊기기 전에 시앗을 들여야 한다고 재우치는 문중 어른들의 목소리가 문밖까지 새나왔다
고모는 불안한 자궁을 가지 종부였다 표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건넌방에 도배를 새로 하고 새 이부자리가 들어왔다
꼬박꼬박 달거리를 하면서 헛구역질에 입을 틀어막고 부엌을 뛰쳐나갔다 자꾸 졸음이 쏟아진다고 했다 커다란 잉어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꿈을 꾼다고 했다 대문 밖 칠월은 절절 끓는데 12월 마녀의 젖꼭지처럼* 아랫배가 시리다고 했다
고모의 배는 몇 달이 지나도 불러오지 않았다 꽃은 어두워졌다 손목의 맥을 짚어 본 소슬바람이 자궁은 텅 비었다고 했다
풀에 사는 물고기가 있어 / 조개 청문회 / 세한의 봄 / 입하 꽃 / 트라우마 / 동병상련 / 선잠 / 꽃다발의 계절 / 농부의 시계 / 자목련 필 무렵 / 용도폐기 / 흑마을 평전 / 여섯 번째 우화 / 가장 비싼 옷 / 조지 윈스턴의 숲을 보다 / 아버지 언어 / 엔젤트럼펫 / 두릅 / 장맛비 / 거북목증후군 / 벚꽃 지다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성명남 시인이 3년만에 첫 시집 ‘귀가 자라는 집’(한국문연, 현대시 시인전 56)을 선보였다. 시집 ‘귀가 자라는 집’은 3부로 구성돼 있으며 신춘문예 당선작인 ‘얼룩진 벽지’와 ‘봄, 다시 쓰다’, ‘풀에 사는 물고기가 있어’, ‘폐경’ 등 작품 63편을 실었다.
'아래층에 이사 온 여자가/ 소리를 수거해 가기 시작했다/ 무심히 낭비한 소리가/ 귓바취에 가파르게 쌓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목조목 파냈다/(중략)/인터폰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바닥이/ 공학적 히스테리에 빠진 타코마 다리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위층과 아래층 사이엔 천장만 남았다/ 소심한 고양이도/ 발꿈치를 들고 걷는다’(‘귀가 자라는 집’ 중)
이 시에서는 윗집과 아랫집 사이에 발생하는 층간소음을 소재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관찰자 입장에서 장면을 발견한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세로 현실을 표현한다.
이런 시편은 성 시인의 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개인의 체험이 아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고백이다.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시편이 감동을 전한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시평을 통해 “성 시인의 시는 감각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서정시의 전통”이라며 “작고 여린 것, 사회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는 것에 눈길을 주며 주변적인 존재를 따스하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 평론가는 “한 편의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은 서정시, 특히 ‘감정’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이라며 “언어 이상의 무엇으로 읽는 사람과 교감하는 시, 이것이 성 시인이 보여주는 시”라고 설명했다.
한편, 성명남 시인은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태어나 현재 지역 동인 ‘삽량문학회’와 지역 여성 시인 동인 ‘이팝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산시민신문 2015년 11월 10일
양산 성명남·김하경 시인 첫 시집 펴내
활동 15년만에 ‘귀가 자라는 집’·‘거미의 전술’
양산시 여류시인 모임인 이팝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성명남(여·53), 김하경(여·50) 시인이 첫 시집을 최근 출판했다.
성명남, 김하경 시인은 시인활동 15년만에 각각 ‘귀가 자라는 집’, ‘거미의 전술’ 시집을 경남문화예술진흥의 지역문화예술사업의 일부지원으로 생애 처음 발간했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성명남 시인의 ‘귀가 자라는 집’ 시집에 대해 감각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서정시의 전통을 따랐고 시집 1부의 작품 대부분은 성찰과 관찰에 근거했다고 논평했다. 또한 시집 2, 3부에는 고래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몇편 실려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는 이미-항상 고래의 짝을 지어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아버지와 고래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하경 시인의 ‘거미의 전술’에 대해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특별히 기원이나 시원에 대한 기억을 노래한 것들이 많으며 마치 시간성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시적 목표라도 되는 듯이 오랜 기억의 지층을 통해 존재론적 근원을 상상하고 사유한다고 평론했다. 이는 시인 자신이 겪어온 절실한 경험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기억의 지층이 녹아 있고 그 안에는 오래 전부터 상상하고 사유해온 그녀만의 기원과 성정이 마디마디 박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양산/차진형기자
경남도민일보 2015.11.15 17:30:37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상의 풍경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 성명남 씨, 첫 시집 '귀가 자라는 집' 출간
성명남 시인(사진)이 노인 홀로 사는 누추한 방에서 얼룩진 벽지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쓴 시가 '얼룩진 벽지'이다.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 짐승의 매화 무늬가 보인 건 /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 노인의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상상력 하나로 좁고 어두운 방에서 정글과 맹수 그리고 삶의 모습을 포착한 이 인상적인 작품은 최근 성명남 시인이 펴낸 첫 시집 '귀가 자라는 집'(현대시시인선 156)에 실렸다.
경남 양산시에 사는 성 시인은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집을 읽고 '일상적 풍경 속의 얼룩들'이라는 해설을 쓴 고봉준 문학평론가의 설명을 잠깐 들어보자. "성명남의 시적 태도는 윤리적이다. 그녀의 화자들은 한결같이 작고 여린 존재에게 마음을 쏟고, 나아가 세계를 관계의 질서로 이해하는 태도를 견지한다.…시인은 작고 여린 것들이 서로를 향해 존재의 촉수를 내미는 것을 '동거'라고 명명함으로써 생명의 원초적인 공동성을 재확인한다."(99쪽) 이렇게 이해하고, 다시 성명남의 시로 넘어가 보자.
'쏙 얼굴 내민 쑥 / 햇귀 연 냉이 꽃 / 모락모락 체온 올린 두엄 옆 / 노란 민들레'('농부의 시계' 전문)
'담장 안의 호박 줄기가 목을 길게 빼고 / 생면부지의 감나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혼자서는 곧게 설 수 없는 줄기의 생이 / 손잡아줄 누군가를 향하여 먼저 다가선 것이다 / 늙은 감나무를 위해 덩굴손의 방향 바꿔 놓고 / 노끈으로 잘 묶어 두었지만 / 이미 뜨거워진 감나무의 가슴에 손을 넣어 본 뒤였는지 / 하룻밤 사이 다시 몸 틀어 곁가지 하나 꼭 잡고 있다 / 그들의 동거가 시작됐다…'('동거' 중)
'동거'라는 시의 끝은 이렇다. '영근 햇볕을 수확하는 계절 / 감나무에서 호박이 편안하게 늙는다 / 호박 덩굴에서 감이 붉게 익는다'
예쁠 것도 없을 법한 일상의 풍경을 시인은 관찰한다. 그런 관찰이 익으면 성찰이라는 열매가 맺힌다. 고봉준 평론가는 "성명남의 많은 시편들, 특히 시집의 1부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성찰'과 '관찰'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금 늦게 가면서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 본다. 그런 관찰이 성찰로 이어져 '밥을 짓는다는 건 / 쌀알들의 모서리를 없애는 일이다'('밥에 대하여' 중)는 생각에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