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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7권
5. 사법품 ②
[4지]
4지(智)란,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와 타심지(他心智)와 세속지(世俗智)이다.
[문] 법지(法智)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欲界)의 행(行)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無漏智)와 욕계의 행의 원인[因]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와 욕계의 행의 소멸[滅]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와 욕계의 행을 끊는 도(道)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이다.
또 법지를 반연하는 것과 법지의 지(地)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이니, 이것을 법지라 한다.
[문] 유지(類智)란 어떤 것인가?
[답]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행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행의 원인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행의 소멸을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행을 끊는 도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이다.
또 유지를 반연하는 것과 유지의 지(地)를 반연하는 모든 무루지이니, 이것을 유지라 한다.
[문] 타심지(他心智)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지혜로 닦아서 이루었으면 이것은 곧 수행의 결과[修果]이니, 수행에 의지하여 이미 얻고서는 잃지 않고, 욕계ㆍ색계가 화합한 현전에서 다른 이의 심심소(心心所)와 한 부분의 번뇌가 다른 이의 심심소를 아나니, 이것을 타심지라 한다.
[문] 세속지(世俗智)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유루(有漏)의 지혜를 세속지라 한다.
또 4지(智)가 있나니, 고지(苦智)와 집지(集智)와 멸지(滅智)와 도지(道智)이다.
[문] 고지(苦智)란 어떤 것인가?
[답] 5취온(趣蘊)에 대하여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를 생각해서 일으키는 무루지(無漏智)이니, 이것을 고지라 한다.
[문] 집지(集智)란 어떤 것인가?
[답] 유루의 원인[因]에 대하여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을 생각하여 일으키는 무루지이니, 이것을 집지라 한다.
[문] 멸지(滅智)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택멸(擇滅)에 대하여 멸(滅)ㆍ정(靜)ㆍ묘(妙)ㆍ이(離)를 생각하여 일으키는 무루지이니, 이것을 멸지라 한다.
[문] 도지(道智)란 어떤 것인가?
[답] 무루의 도[無漏道]에 대하여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을 생각하여 일으키는 무루지이니, 이것을 도지라 한다.
[4력]
4력이란,
첫째는 신력(信力)이요,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며,
셋째는 정력(定力)이요, 넷째는 혜력(慧力)이다.
[문] 신력(信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 의지하여 깨끗한 믿음을 심으면 그것에 뿌리가 생기어 편안히 존립하고 견고하여져 온갖 사문ㆍ바라문이나 그리고 모든 하늘ㆍ악마ㆍ범(梵)이거나 그 밖의 세간의 어떤 이라도 모두가 법답게 끌어당기며 빼앗을 수 있는 이가 없나니, 이 믿음의 힘[信力]을 신력이라 한다.
[문] 정진력(精進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이미 생긴 악한 법[惡不善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욕(欲)을 일으키고 근을 일으키어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한 법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일으키어 정진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善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일으키어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며,
이미 생긴 착한 법에 굳게 머물러서 잊지 않고 닦아 원만하게 하고 갑절 더 불리며 광대하게 하고 지혜로 증득하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일으키어 정진해서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나니, 이렇게 정진하는 힘[精進力]을 정진력이라 한다.
[문] 정력(定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의 악한 법[欲惡不善法]을 여의고 거친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어서 이생희락(離生喜樂)이 있는 초정려(初靜慮)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르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제4 정려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르나니, 이 선정의 힘[定力]을 정력이라 한다.
[문] 혜력(慧力)이란 어떤 것인가?
[답]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고 사실과 똑같이 분명하게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라고 사실과 똑같이 분명하게 알며,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라고 사실과 똑같이 분명하게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라고 사실과 똑같이 분명하게 아나니, 이 지혜의 힘[慧力]을 혜력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힘[力]이라 하는가?
[답] 이 힘으로 인하고 이 힘에 의지하며 이 힘에 머물러서 온갖 결(結)ㆍ박(縛)을 끊고 부수고 깨뜨리기 때문에 힘이라 한다.
[4처]
4처(處)란,
첫째는 혜처(慧處)요, 둘째는 제처(諦處)며,
셋째는 사처(捨處)요, 넷째는 적정처(寂靜處)이다.
[문] 혜처(慧處)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薄伽梵)께서 『변육계기별경(辯六界記別經)』에서 구수 지견(池堅)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지혜[最勝慧處]란, 곧 누진지(漏盡智)이니, 그러므로 필추는 마땅히 누진지를 성취하여야 한다. 만일 누진지를 성취하면 가장 훌륭한 지혜를 성취했다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지혜를 혜처라 한다.
[문] 제처(諦處)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육계기별경』에서 구수 지견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진리[最勝諦處]란, 곧 부동해탈(不動解脫)이다.
진리[諦]는 사실대로[如實]의 법이요 거짓[誑]은 허망(虛妄)한 법이다.
그러므로 필추는 마땅히 부동해탈을 성취해야 한다.
만일 부동해탈을 성취하면 가장 훌륭한 진리를 성취했다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진리를 제처라 한다.
[문] 사처(捨處)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육계기별경』에서 구수 지견을 위하여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먼저 집수(執受)한 무지(無智)와 무명(無明)과 바른 길을 벗어난 법[趣正路法]을 이제 마땅히 버려야 하고 뱉어야 하며 없애야 한다.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버림[最勝捨處]이란, 곧 온갖 의지[依]를 버리고 애욕이 다하여 물듦[染]을 여의면 영원히 사라진 열반인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필추야, 마땅히 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만일 이 열반을 성취하면 가장 훌륭한 버림을 성취했다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버림을 사처라 한다.
[문] 적정처(寂靜處)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육계기별경』에서 구수 지견(池堅)을 위해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탐염(貪染)은 마음을 괴롭히면서 해탈하지 못하게 하고, 진염(瞋染)은 마음을 괴롭히면서 해탈하지 못하게 하며, 치염(癡染)은 마음을 괴롭히면서 해탈하지 못하게 한다.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탐냄[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을 남김없이 영원히 끊고 뱉고 없애 버리며 애욕이 다하고 물듦을 여의면 영원히 사라지고 고요히 없어지는 진실한 고요함[寂靜]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필추야, 마땅히 진실한 고요함을 성취하여야 한다.
만일 진실한 고요함을 성취하면 가장 뛰어난 고요함을 성취했다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고요함을 적정처라 한다.
[4온]
4온(蘊)이란,
첫째는 계온(戒蘊)이요, 둘째는 정온(定蘊)이며,
셋째는 혜온(慧蘊)이요, 넷째는 해탈온(解脫蘊)이다.
[문] 계온(戒蘊)이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삼온기별정(辯三蘊記別經)』에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설하는 배울 것이 있는 이의 계율[學戒]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계율[無學戒]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非學非無學]의 온갖 착한 계율은 모두가 계율의 쌓임[戒蘊]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계온이라 한다.
[문] 정온(定蘊)이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삼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설한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선정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선정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선정은 모두가 선정의 쌓임[定蘊]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정온이라 한다.
[문] 혜온(慧蘊)이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삼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설한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지혜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혜와,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지혜는 모두가 지혜의 쌓임[慧蘊]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혜온이라 한다.
[문] 해탈온(解脫蘊)이란 어떤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변삼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필추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설한 배울 것이 있는 이의 해탈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해탈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해탈은 모두가 해탈의 쌓임[解脫蘊]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해탈온이라 하느니라.
[4의]
4의(依)란,
첫째는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思擇] 마땅히 멀리 피하여야 한다.
둘째는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받아 써야[受用] 한다.
셋째는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
넷째는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참고 받아야[忍受] 한다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이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멀리 피해야 한다는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방제루기별경(防諸漏記別經)』에서 말씀하시되,
“너희 필추들은 마땅히 사나운 코끼리, 사나운 말, 사나운 소, 사나운 개, 사나운 물소 등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며 생각하고 간택하여 그것들을 멀리 피해야 한다.
또 그루터기, 독가시, 구덩이, 해자, 낭떠러지, 골짜기, 우물, 뒷간, 강물 등에 대하여 마땅히 자세히 살펴 생각하고 간택하여 그것들을 멀리 피해야 한다.
또 악한 행실[惡行], 악한 위의[惡威儀], 악한 벗[惡友], 악한 동아리[惡伴侶], 악한 행동하는 곳[惡行處], 나쁜 침구[惡臥具] 등에 대하여 마땅히 자세히 살펴 생각하고 간택하여 그것들을 멀리 피해야 한다.
나쁜 침구란, 만일 그러한 침구를 수용하고 있으면 범행(梵行)을 함께하는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마땅히 분별하지 않아야 할 데서 분별을 하게 되고,
마땅히 헤아리지 않아야 할 데서 헤아리게 되며,
마땅히 시기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데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나니,
이와 같은 침구이므로 나는 그것을 나쁘다고 한다.
그러므로 너희 필추들은 마땅히 멀리 피해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그것을 멀리 피해야 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받아 써야 한다는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방제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너희 필추들은 마땅히 자세하고도 법답게 의복에 대하여 생각하고 간택해 그것을 수용해야 하나니,
용맹과 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오만과 방일을 위해서도 아니며,
얼굴과 용모를 위해서도 아니요 단정하고 장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다만 모기ㆍ등에와 추위ㆍ더위며, 뱀ㆍ전갈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만 수용하고,
깊이 부끄러워해야 할 더러운 몸의 형상을 가리기 위해서만 수용하라.
또 마땅히 음식에 대하여 자세하고도 법답게 생각하고 간택해서 그것을 수용해야 하나니,
용맹과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요 오만과 방일을 위해서도 아니며,
얼굴과 용모를 위해서도 아니요, 단정하고 장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다만 이 몸을 잠시 동안 머물러 살아 있게 해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그쳐 쉬고 범행(梵行)을 섭수하기 위해서이며,
예부터 받았던 느낌[故受]을 끊고 새로이 받을 느낌[新受]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죄 없이 살아가고 힘[力]과 즐거움[樂]과 편안히 머무르기[安住] 위해서만 수용하라.
또 마땅히 자세하고도 법답게 침구에 대하여 생각하고 간택해서 그것을 수용해야 하나니,
용맹과 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오만과 방일을 위해서도 아니며,
얼굴과 용모를 위해서도 아니요 단정하고 장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다만 추위와 더위와 바람과 비를 막고, 그리고 가장 뛰어나고도 안온한 적정(寂靜)을 얻기 위해서만 수용하라.
또 마땅히 자세하고도 법답게 의약(醫藥)에 대하여 생각하고 간택해서 그것을 수용해야 하나니,
용맹과 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오만과 방일을 위해서도 아니며,
얼굴과 용모를 위해서도 아니요 단정하고 장엄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다만 아직 생기지 않았거나 또한 이미 생긴 온갖 질병이 그치고 없어지게 해서 착한 업을 닦기 위해서만 수용하라”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받아 써야 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방제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너희 필추들은 이미 일으킨 욕심(欲尋)ㆍ에심(恚尋)ㆍ해심(害尋)을 감추거나 쌓아두지 말고 마땅히 빨리 끊어 없애고 토해 버리며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이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참고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답] 박가범께서 『방제루기별경』에서 말씀하시되,
“너희 필추들은 마땅히 정진을 일으키되 세력도 있고 부지런함도 있으며, 용맹하고 견고해서 착한 멍에[善軛]를 버리지 않아야 한다.
가령 ‘나의 몸이 피와 살이 바짝 마르고 오직 살가죽과 힘줄과 뼈만이 맞붙을 정도로 되어 있다 해도 만일 본래부터 구하던 뛰어난 법을 아직 얻지 못하면 끝내 일으킨 정진을 그만두지 않으리라’라고 해야 한다.
또 정진할 때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해도 끝내 이로 말미암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마땅히 추위거나 더위거나 배고프고 목마르거나 뱀, 전갈, 모기, 등에에 물리거나 바람과 비 등의 접촉을 깊이 참고 받아야 한다.
또 마땅히 몸속에서 맹렬한 고초를 겪고 목숨을 빼앗는 만큼 괴로운 느낌[苦受]을 내는 다른 사람과 비방과 욕된 말을 듣는다 해도 참고 받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것을 하나의 법을 생각하고 간택하여 마땅히 참고 받아야 한다고 한다.
[4법적]
4법적(法迹)이란,
첫째는 무탐법적(無貪法迹)이요, 둘째는 무진법적(無瞋法迹)이며,
셋째는 정념법적(正念法迹)이요, 넷째는 정정법적(正定法迹)이다.
[문] 어떤 것이 무탐법적(無貪法迹)인가?
[답] 무탐(無貪)이란, 욕심의 경계에 대해 모든 탐하지 않는 것과 함께 탐하지 않으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탐내는 종류도 아니요 탐애로 생기는 것도 아닌 것을 무탐이라 한다.
법적(法迹)이란, 곧 탐냄이 없는 것[無貪]을 법(法)이라고 하고, 또한 자취[迹]라고도 하며, 법의 자취라고도 하나니, 이 때문에 무탐법적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진법적(無瞋法迹)인가?
[답] 무진(無瞋)이란, 유정들에 대해 손해를 끼치려 하지 않고 그루터기를 품지 않으며, 괴롭히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
더 나아가 이미 과환(過患)을 끼친 것도 아니고 장차 과환을 끼칠 것도 아니며, 현재 과환을 끼치는 것도 아닌 것을 무진이라 한다.
법적(法迹)이란, 곧 성냄이 없는 것[無瞋]을 법(法)이라 하고, 자취[迹]라고도 하며, 법의 자취라고도 하나니, 이 때문에 무진법적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정념법적(正念法迹)인가?
[답] 정념(正念)이란, 곧 벗어남[出離]과 멀리 여읨[遠離]이 생기는 착한 법에 의거하여 모든 기억하고[念] 따라 기억하는 것[隨念]이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마음으로 분명하게 기억하는[明記] 성품을 정념이라 한다.
법적(法迹)이란, 곧 바른 기억[正念]을 법(法)이라 하고, 자취[迹]라고도 하며, 법의 자취라고도 하나니, 이 때문에 정념법적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정정법적(正定法迹)인가?
[답] 정정(正定)이란, 곧 벗어남과 멀리 여읨이 생기는 착한 법에 의거하여 모든 선정[定]으로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자세한 내용은 생락함)……
더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心一境性]을 정정이라 한다.
법적(法迹)이란, 곧 바른 선정[正定]을 법(法)이라 하고, 자취[迹]라고도 하고, 법의 자취라고도 하나니, 이 때문에 정정법적이라 한다.
[4응증법]
4응증법(應證法)이란,
혹은 어떤 법이 몸의 응증[身應證]이기도 하고,
혹은 어떤 법이 기억의 응증[念應證]이기도 하며,
혹은 어떤 법이 눈의 응증[眼應證]이기도 하고,
혹은 어떤 법이 지혜의 응증[慧應證]이기도 하다.
[문] 무엇을 어떤 법의 몸의 응증[身應證]이라 하는가?
[답] 이른바 8해탈(解脫)이니, 이것이 몸의 응증이다.
[문] 무엇을 어떤 법의 기억의 응증[念應證]이라 하는가?
[답] 이른바 전생에 관한 일[宿住事]이니, 이것이 기억의 응증이다.
[문] 무엇을 어떤 법의 눈의 응증[眼應證]이라 하는가?
[답] 이른바 죽고 나고 하는 일[死生事]이니, 이것이 눈의 응증이다.
[문] 무엇을 어떤 법의 지혜의 응증[慧應證]이라 하는가?
[답] 이른바 모든 번뇌[漏]가 다한 것이니, 이것이 지혜의 응증이다.
세 번째 올타남(嗢柁南)으로 말하리라.
세 번째의 네 가지 법에는 아홉[九]이 있으니,
행(行)과 수(修)와 업(業)과 수(受)와 액(軛)과
이계(離繫)와 그리고 폭류(瀑流)와
취(取)와 계(繫)이니, 각각 네 가지씩이다.
4행(行)과 4수정(修定)과 4업(業)과 4법수(法受)와 4액(軛)과 4리계(離繫)와 4폭류(瀑流)와 4취(取)와 4신계(身繫)가 있다.
[4행]
4행(行)이란,
첫째는 고지통행(苦遲通行)이요, 둘째는 고속통행(苦速通行)이며, 셋째는 낙지통행(樂遲通行)이요, 넷째는 낙속통행(樂涑通行)이다.
[문] 어떤 것이 고지통행(苦遲通行)인가?
[답] 정려가 섭수하지 못한 하품(下品)의 5근을 고지통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고속통행(苦速通行)인가?
[답] 정려가 섭수하지 못한 상품(上品)의 5근을 고속통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낙지통행(樂遲通行)인가?
[답] 정려가 섭수한 하품의 5근을 낙지통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낙속통행(樂速通行)인가?
[답] 정려가 섭수한 상품의 5근을 낙속통행이라 한다.
또 4행(行)이 있나니,
첫째는 불감인행(不堪忍行)이요, 둘째는 감인행(堪忍行)이며, 셋째는 조복행(調服行)이요, 넷째는 적정행(寂靜行)이다.
[문] 어떤 것이 불감인행(不堪忍行)인가?
[답] 이른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뱀, 전갈, 모기, 등에와 바람과 비 등의 접촉을 참고 견디지 못하거나,
또 몸속에서 몹시 고초를 겪고 목숨을 빼앗아갈 정도의 괴로운 느낌[苦受]을 주는 다른 사람의 모욕적인 언사를 참고 견디지 못하는[不堪忍] 그와 같은 종류를 불감인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감인행(堪忍行)인가?
[답] 이른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뱀, 전갈, 모기, 등에와 바람과 비 등의 접촉을 참고 견디며,
또 몸 속에서 몹시 고초를 겪고 목숨을 빼앗아갈 정도의 괴로운 느낌을 주는 다른 사람의 모욕적인 언사도 참고 견뎌내는 그와 같은 종류를 감인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조복행(調伏行)인가?
[답] 눈으로 빛깔을 볼 때에 전일한 뜻으로 생각을 잡아매어 눈의 감관을 수호하며 그 마음을 조복해서 번뇌와 악한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와 코로 냄새를 맡을 때와 혀로 맛을 볼 때와 몸으로 접촉을 느낄 때와 뜻으로 법을 알 때에도 전일한 뜻으로 생각을 잡아매어 귀의 감관을 수호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뜻의 감관을 수호하며, 그 마음을 조복해서 번뇌와 악한 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조복행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적정행(寂靜行)인가?
[답]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등각지(等覺支)ㆍ8성도지(聖道支)ㆍ4통행(通行)ㆍ4법적(法迹)ㆍ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를 적정행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이를 적정행이라 하는가?
[답] 만일 이들의 행을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이미 생긴 탐욕(貪欲)과 성냄[瞋恚]과 어리석음[愚癡]과 오만[慢]을 고요하고[寂靜] 함께 고요하며[等寂靜] 가장 지극히 고요하게[最極寂靜] 하나니, 이 때문에 이를 적정행이라 한다.
[4수정]
4수정(修定)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선정을 닦되[修定] 익히고 닦아 지은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획득하게 된다.
둘째는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가장 뛰어난 지견(智見)을 획득하게 된다.
셋째는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 지은 것이 많으면 뛰어난 분별혜(分別慧)를 획득하게 된다.
넷째는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하게 된다.
[문] 어떤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획득한다 하는가?
[답] 초정려(初靜慮)에 속한 이생희락(離生喜樂)과 함께 행해지는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心一境性]에 대하여 익히고 닦되, 굳게 짓고[堅作] 항상 지으며[常作], 부지런히 힘써서[精勤] 닦아 익히는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획득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 지은 것이 많으면 가장 뛰어난 지견을 획득한다 하는가?
[답] 광명상(光明想)과 함께 행해지는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에 대하여 익히고 닦되 굳게 짓고 항상 지으며, 부지런히 힘써서 닦아 익히는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가장 뛰어난 지견을 획득한다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뛰어난 분별혜를 획득한다 하는가?
[답] 느낌과 생각과 거친 생각[尋]과 세밀한 생각[觀]과 함께 행해지는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에 대하여 익히고 닦되 굳게 짓고 항상 지으며 부지런히 힘써 닦아 익히는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뛰어난 분별혜를 획득한다 한다.
[문] 어떤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 하는가?
[답] 제4 정려(靜慮)에 속한 청정한 사념(捨念)과 함께 행해지는 아라한과위의 무간도(無間道)에 섭수한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에 대하여 익히고 닦되 굳게 짓고 항상 지으며, 부지런히 힘써서 닦아 익히는 것을 선정을 닦되 익히고 닦아서 지은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게 된다고 한다.
박가범께서 바라연나(波羅衍拏)의 질문 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욕의 생각과 근심과 두려움을 끊고
혼침(惛沈)과 수면(睡眠)과
악작(惡作)과 도거(掉擧)를 여의면
사념청정(捨念淸淨)함을 얻게 된다.
법륜(法輪)을 우두머리로 삼고
바른 지혜로 해탈을 얻으면
나는 ‘무명(無明)을 끊어서
뛰어난 분별혜(分別慧)를 얻는다’라고 말한다.
[4업]
4업(業)이란,
첫째는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이요, 둘째는 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이며, 셋째는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이요, 넷째는 비흑비백무이숙업능진제업(非黑非白無異熟業能盡諸業)이다.
[문] 어떤 것이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인가?
[답] 세존께서 구지(俱胝)의 우계(牛戒)를 지닌 포라나(布剌拏)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원만(圓滿)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에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있나니,
손해 있는[有損害] 몸과 말과 뜻의 행(行)을 짓고, 그는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며,
그는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 있는 자체(自體)를 느껴 얻으며,
그는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 있는 세간(世間)에 태어나며,
그는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 있는 접촉[觸]에 접촉하며,
그는 손해 있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 있는 느낌[受]을 느껴서 한결같이 사랑할 수 없고[不可愛] 한결같이 즐거울 수 없으며[不可樂] 한결같이 기뻐할 수 없고[不可善] 한결같이 뜻에 맞을 수 없는[不可意] 나락가(那落迦)의 모든 유정들과 같다.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나게 되고 태어난 뒤에는 다시 이러한 종류와 접촉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라고 한다.
원만아, 이것을 흑흑이숙업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는다 함은,
이른바 착하지 않은[不善] 몸ㆍ말ㆍ뜻의 행을 짓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착하지 않은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이라 한다.
그는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 함은,
이른바 착하지 않은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멀리 여의지 않는 법[不遠離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멀리 여의지 않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다는 것이니, 이것을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고 한다.
그는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 있는 자체(自體)를 느껴 얻는다 함은,
멀리 여의지 않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지옥의 중유(中有)를 느껴 얻는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지옥의 중유를 말하여 손해 있는 자체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저 중유 안에 머무르게 되면 눈으로 보는 빛깔이나 귀로 듣는 소리나 코로 맡는 냄새나 혀로 맛보는 맛이나 몸으로 느끼는 접촉이나 뜻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뜻에 맞을 수 없으므로 뜻에 맞는 것이 아니요,
뜻에 즐거울 수가 없으므로 뜻에 즐거운 것이 아니며,
뜻에 맞을 수 없는 모양이므로 뜻에 맞는 모양이 아니요,
평등하지 않은 모양이므로 평등한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는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근심과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그는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난다 함은,
이른바 지옥의 중유를 느껴 얻은 뒤에는 지옥의 세계[地獄趣]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지옥의 세계를 말하여 손해 있는 세간이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옥의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눈으로 보는 빛깔이거나 더 나아가 뜻으로 아는 법이 모두 다 뜻에 맞을 수 없으므로 뜻에 맞는 것이 아니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평등하지 않은 모양이므로 평등한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는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근심과 괴로움을 느낄 뿐이다.
그는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 있는 접촉과 접촉한다 함은,
이른바 지옥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지옥의 접촉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지옥의 접촉을 말하여 손해 있는 접촉이라 한다.
그는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한 뒤에는 손해 있는 느낌을 느낀다 함은,
이른바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종류의 느낌을 느끼는 것이니,
예를 들면 순고수촉(順苦受觸)을 접촉할 때엔 반드시 괴로운 느낌[苦受]을 느끼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한 뒤에는 손해 있는 느낌을 느낀다고 한다.
한결같이 사랑할 수 없고 한결같이 즐거울 수 없으며 한결같이 기뻐할 수 없고 한결같이 뜻에 맞을 수가 없다 함은,
이른바 저 괴로운 느낌은 온갖 유정으로서는 모두가 함께 사랑스럽지 않고 즐겁지 않으며, 기쁘지 않고 또한 뜻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없고 나아가 뜻에 맞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락가의 모든 유정들과 같다 함은,
지옥의 세간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유정들을 나타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락가의 모든 유정들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난다 함은,
이른바 그 유정들은 의지할 대상[所依]의 일[事]이 있고 인(因)이 있으며, 연(緣)이 있어서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난다고 한다.
태어난 뒤에는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을 접촉한다 함은,
이른바 지옥에 태어난 뒤에는 또 지옥의 접촉을 접촉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태어난 뒤에도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을 접촉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에 따른다고 말한다 함은,
가령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고, 또는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또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고 또는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기도 하고 혹은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고 또는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있는 세간에 나기도 하고 혹은 손해 있는 세간에 나지 않기도 하거나 또 손해 있는 세간에 나고 또는 손해 있는 세간에 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하기도 하고 혹은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하고 또는 손해 있는 접촉을 접촉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있는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손해 있는 느낌을 느끼지 않기도 하거나 하면, 마땅히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으면 곧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만 손해 있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으면 곧 손해 있는 법을 쌓거나 짓지 않으며,
만일 손해 있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면 곧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지만 손해 있는 법을 쌓거나 더욱 자라게 하지 않으면 곧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는다.
만일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으면 곧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나지만 손해 있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으면 곧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는다.
만일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나면 곧 손해 있는 접촉에 접촉하지만 손해 있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으면 곧 손해 있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는다. 만일 손해 있는 접촉에 접촉하면 곧 손해 있는 느낌을 느끼지만 만일 손해 있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으면 곧 손해 있는 느낌을 느끼지 않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마땅히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이라 한다 함은, 이른바 이 업은 착하지 못해서 사랑스럽지 않은 이숙을 받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이 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인가?
[답] 세존께서 구지(俱胝)의 우계(牛戒)를 지닌 보라나(補剌拏)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원만(圓滿)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에는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있다. 손해 없는[無損害] 몸과 말과 뜻의 행(行)을 지으며,
그는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며,
그는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 없는 자체(自體)를 느껴 얻으며,
그는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며
그는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 없는 접촉[觸]에 접촉하며,
그는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 없는 느낌[受]을 느끼게 되어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고 한결같이 즐길 만하며 한결같이 기뻐할 만하고 한결같이 뜻에 맞게 되나니, 마치 단식을 초월한 하늘[超段食天]의 모든 유정들과 같다.
그들은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나게[生] 되며 태어난 뒤에는 다시 이러한 종류의 접촉을 접촉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하나니,
원만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바로 백백이숙업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는다 함은,
이른바 착한[善]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착한 몸과 말과 뜻의 행을 말하여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행한다고 한다.
그는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 함은,
이른바 착한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멀리 여의는 법[遠離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멀리 여의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을 말하여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고 한다.
그는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는다 함은,
멀리 여의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색계(色界)의 중유(中有)를 느껴 얻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고 있는 뜻은 색계의 중유를 말하여 손해 없는 자체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저 중유에 머물게 되면 눈으로 보는 빛깔이나 귀로 듣는 소리나 코로 맡는 냄새나 혀로 맛보는 맛이나 몸으로 느끼는 접촉이나 뜻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다 뜻에 맞는 것이므로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
뜻에 즐거운 것이므로 뜻에 즐겁지 않는 것이 없으며,
뜻에 맞는 모양이므로 뜻에 맞지 않는 모양이 없고,
평등한 모양이므로 평등하지 않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그는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그는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난다 함은,
이른바 색계의 중유를 얻게 된 뒤에는 색계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색계천의 세계를 말하여 손해 없는 세간이라고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색계천의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눈으로 보는 빛깔이나 나아가 뜻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다 뜻에 맞는 것이므로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평등한 모양이므로 평등하지 않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그는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순전히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그는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한다 함은,
색계천의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색계천의 접촉에 접촉하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색계천의 접촉을 말하여 손해 없는 접촉이라고 한다.
그는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 없는 느낌을 느낀다 함은,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종류의 느낌을 느끼는 것이니,
예를 들면 순락수촉(順樂受觸)에 접촉하면 반드시 즐거운 느낌[樂受]을 받는다.
이로 말미암아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 없는 느낌을 느낀다고 한다.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고 한결같이 즐길 만하며 한결같이 기뻐할 만하고 한결같이 뜻에 맞다 함은,
그 즐거운 느낌은 한량없는 유정들이 다 같이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하며 기뻐할 만하고 뜻에 맞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결같이 사랑할 만하며 또한 뜻에 맞는다고 한다.
마치 단식을 초월한 하늘[超段食天]의 유정들과 같다 함은,
색계의 세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단식(段食)을 초월한 하늘의 모든 유정과 같다고 한다.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나게 된다 함은,
그 유정은 의지할 대상[所依]의 일[事]이 있고 인(因)이 있으며 연(緣)이 있어서 그곳에 태어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난다고 한다.
태어난 뒤에는 또 이런 종류의 접촉에 접촉한다 함은,
색계에 태어난 뒤에는 또 색계의 접촉에 접촉하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태어난 뒤에는 다시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 함은,
가령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고, 또는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없는 법을 쌓거나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없는 법을 쌓거나 더욱 자라게 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 없는 법을 쌓거나 더욱 자라게 하고, 또는 손해 없는 법을 쌓거나 자라게 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못하기도 하며,
또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고, 또는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없는 세간에 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고, 또는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고, 또는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 없는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 없는 느낌을 느끼지 않기도 한다면, 곧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이 자기 자신이 지은 업에 따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으면 곧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만,
손해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으면 곧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못하며,
만일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면 곧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만,
손해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않으면 곧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못한다.
만일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으면 곧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만,
손해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으면 곧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못하며,
만일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면 곧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만,
손해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으면 곧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못한다.
만일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면 곧 손해 없는 느낌을 느끼지만,
손해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으면 곧 손해 없는 느낌을 느끼지 않나니, 이
로 말미암아 곧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이라 한다 함은, 이 업은 착한 것이어서 사랑할 만한 이숙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이 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인가?
[답] 세존께서 구지(俱胝)의 우계(牛戒)를 지닌 보라나(補剌拏)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원만(圓滿)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한 무리의 보특가라로서 손해가 있고[有損害] 손해가 없는[無損害] 몸과 말과 뜻의 행(行)을 짓는 이가 있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고,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自體)를 느껴 얻는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고,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을 접촉하며,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끼되 서로 끼어들고 서로 뒤섞이니,
마치 인간과 일부분의 하늘의 모든 유정들과 같다.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나며, 태어난 뒤에는 또 이와 같은 접촉에 접촉되나니,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라고 말한다.
원만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흑백흑백이숙업이라 하는 줄 알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는다 함은,
착하고 착하지 않은[善不善]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착하고 착하지 않은 몸과 말과 뜻의 행을 말하여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말한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 함은,
착하고 착하지 않은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지은 뒤에는 멀리 여의고[遠離] 멀리 여의지 않는 법[不遠離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멀리 여의고 멀리 여의지 않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함을 말하여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다고 한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는다 함은,
이른바 멀리 여의고 멀리 여의지 않는 법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인간과 욕계천(欲界天)의 중유(中有)를 느껴 얻는다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인간과 욕계천의 중유를 말하여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自體]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저 중유에 머무르게 되면 눈으로 보는 빛깔이나 귀로 듣는 소리나 코로 맡는 냄새나 혀로 맛보는 맛이나 몸으로 접촉하는 접촉이나 뜻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다 뜻에 맞기도 하고 또한 뜻에 맞지 않기도 하며,
뜻에 즐겁기도 하고 또한 뜻에 즐겁지 않기도 하며,
뜻에 맞는 모양이기도 하고 또한 뜻에 맞지 않는 모양이기도 하며,
평등한 모양이기도 하고 또한 평등하지 않은 모양이기도 하기 때문이니,
그는 이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뒤섞여 느끼게 된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은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난다 함은,
인간과 욕계천의 중유를 얻은 뒤에는 인간과 욕계천의 세계[趣]에 태어나게 된다.
이 이치에서 말하고 있는 뜻은 인간과 욕계천의 세계를 말하여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이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인간과 욕계천의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눈으로 보는 빛깔과 나아가 뜻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다 뜻에 맞기도 하고 또한 뜻에 맞지 않기도 하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더 나아가 평등한 모양이기도 하고 또한 평등하지 않은 모양이기도 하기 때문이니, 그는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을 서로 뒤섞여 느끼게 된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한다 함은,
인간과 욕계천의 세계에 태어난 뒤에는 인간과 욕계천의 접촉을 접촉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에서 말하는 뜻은 인간과 욕계천의 접촉을 말하여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이라 한다.
그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낀다 함은,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종류의 느낌을 느낀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순고락촉(順苦樂觸)에 접촉할 때에는 반드시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한 뒤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낀다고 한다.
서로 끼어들고 서로 뒤섞인다 함은,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이 서로 끼어들고 서로 뒤섞이면서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끼어들고 서로 뒤섞인다고 한다.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난다 함은,
그 유정은 의지할 대상[所依]의 일[事]이 있고 인(因)이 있으며, 연(緣)이 있어서 그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그는 이런 종류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에 태어난다고 한다.
태어난 뒤에는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한다 함은,
인간과 욕계천에 난 뒤에는 또 인간과 욕계천의 접촉을 접촉한다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태어난 뒤에는 또 이와 같은 종류의 접촉에 접촉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말한다 함은,
가령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고, 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몸과 말과 뜻의 행을 짓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고, 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법을 쌓고 더욱 자라게 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고, 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자체를 느껴 얻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고, 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세간에 태어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을 접촉하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을 접촉하지 않기도 한다.
또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고, 또는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접촉에 접촉하지 않는다 해도,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다 같이 손해가 있고 손해가 없는 느낌을 느끼지 않기도 하거나 하면,
곧 이 때문에 나는 저 모든 유정들은 자기 자신이 지은 업을 따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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