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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형 전업농부·작가
뜬모 한 포기, 곡식 한 대접
물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간다. 모판에서 찢어낸 모 뭉치를 손에 들고 서너 포기씩 뜯어내 논물의 빈자리에 꽂는다. 좌우로 여섯 줄까지 살피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뜬모’를 하는 중이다. ‘뜬모’란 모가 제대로 심어지지 않아 ‘둥둥 뜬 모’를 가리키는 말로, 모의 빈자리를 때우는 일을 “뜬모 한다”라고 말한다. 올해는 모가 죽은 자리가 많아서 뜬모 일거리가 몇 배나 늘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뜬모에 사용할 모 뭉치.
아침마다 옆사람은 논물을 보러 나간다. 물이 줄어든 논엔 물을 대주고 물이 넘치는 논은 물꼬를 터준다.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는 옛말이 있을 만큼 이 무렵 논물 관리는 중요하다. 어린 모가 왕성하게 새 뿌리를 내리는 시기라서다.
주변의 다른 논들보다 우리 논의 물이 훨씬 방방한 건 논물을 깊이 댔기 때문이다. 물이 깊으면 논바닥 풀씨들의 발아가 어렵고 이미 솟아난 풀이라도 수면 아래서 우렁이한테 먹힐 확률이 높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초기 풀을 억제하려다 보니 수위 조절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흙이 드러난 자리엔 풀이 빠르게 솟는다.
작년까진 물의 깊이를 조절하면서 갈등을 많이 겪었다. 물을 깊이 대면 모가 잠겨서 죽고 물을 얕게 대면 풀이 무섭게 솟으니, 적당한 선을 맞추려고 애쓰다가 그만 풀 지옥에 빠졌다. 모는 살고 풀은 죽는 ‘적당한 물 높이’는 논바닥이 고르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하다. 써레질로 최대한 수평을 잡았다지만 논바닥은 그다지 균일하지 않다. 바닥 흙이 높은 곳부터 순식간에 풀로 뒤덮이고 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논 저 논을 돌며 물꼬를 텄다 닫았다 노심초사했지만, 동시다발로 치솟는 풀을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단 풀이 수면 위로 솟으면 우렁이도 감당하지 못한다. 우렁이는 수면 아래로 다니며 물에 잠긴 풀들만 먹기 때문이다.
논바닥을 돌아다니며 풀을 먹는 우렁이
올핸 방법을 바꿨다. 모가 일부 죽을 것을 각오하고 물을 깊이 댄 것이다. 물이 깊으니, 논바닥이 낮은 곳의 모들은 물에 잠겼다. 키가 작은 모들도 물에 잠겼다. 모의 이파리가 수면 위로 충분히 올라온 것들만 살고, 잠긴 모들은 다 썩어버렸다. 모가 잠길 정도니 갓 나온 풀들도 잠긴 채 우렁이한테 먹혔다. 모내기 후 2주가 지났는데 아직 수면 위로 풀이 안 보인다. 작년 이맘때는 논이 잔디밭 같았는데 말이다. 작년과는 완전히 다른 논을 보며 ‘물 깊게 대기’의 효과를 실감하고 있다.
풀로 뒤덮인 작년 이맘때 논.
벼의 생육단계로 보면, 모내기 후 1주일가량 물을 깊게(6~10cm) 대고 그 다음부턴 물을 얕게(1~2cm) 대는 것이 정석이다. 그래야 모의 분얼(모포기가 새끼를 쳐서 늘어나는 것)이 왕성해진다. 관행농은 모내기 2~3일 전 써레질할 때 1차 제초제를 치고, 물을 얕게 대는 이 시기에 논 상태를 보아 2차 제초제를 친다. 벼를 제외하고 나머지 풀만 죽이는 ‘선택성 제초제’다. 제초제로 풀을 이긴 덕에 들판은 벼의 초록 물결로 뒤덮인다.
제초제를 치지 않는 우리는, 물을 얕게 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풀이 무서워 그럴 수가 없다. 작년에도 이 시기에 물을 얕게 대지 못했고, 심지어 여름 한 철을 다 바쳐 풀을 매느라 ‘중간물떼기’도 못했었다. (중간물떼기란 벼꽃이 피기 한 달 전쯤 논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논을 말려서 벼를 강하게 키우는 방법이다.) 해마다 짓는 농사지만 해마다 정석을 따르지 못했고, 격렬하게 힘들었다. 어쩌겠나. 지금의 우리로선 깊은 물로 풀을 이기는 수밖에 없는 것을.
논바닥이 낮은 자리는 모가 많이 죽었다. 뜬모 하려고 모 뭉치를 갖다놓았다.
작년과는 달리 풀이 못 올라오니 좋긴 한데, 그 대신 죽은 모가 많다. 생각보다 훨씬 많다. ‘뜬모’ 할 양이 작년보다 서너 배는 늘어났다. 그래도 괜찮다. 뜬모를 아무리 많이 한들 풀 매는 고생에 비할까.
논마다 크기는 다르지만, 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대략 100m쯤 된다. 한 걸음씩 뜬모를 하면서 가니 한 시간쯤 걸린다. 작년에 풀을 맬 땐 대여섯 시간을 가도 저 끝에 도달하지 못했었다. 벼를 뒤덮은 풀더미 속에서, 논물 속에 엉거주춤 허리를 굽히고 서서, 해도 해도 끝이 안 보이는 아득함에 기진맥진했었다. 그 무력감이라니….
뜬모 하기는 다르다. 한 시간 정도면 논 끝에 도달해서 되돌아올 수 있다. 성과가 눈에 보이니 막막하지 않다. 나름 재미도 있다. “교정지의 오자 잡는 것 같잖아. 적성에 맞아!” 논 가운데서 농담도 한다. 내 손 안의 작은 모포기가 어여쁘다. 빈자리에 모를 꽂을 때면 이 한 포기가 곡식 한 대접이구나, 생각한다.
나눠 먹는 거지, 세상 이치가!
뜬모를 하러 논에 들어가면 논물의 일렁임을 감지한 거머리들이 굼실굼실 헤엄치며 몰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에 쥔 모를 뜯어 빈자리를 메꾼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물장화를 신고, 엄지손가락을 걸어서 팔꿈치까지 감싸는 팔토시를 하고, 그 위에 장갑까지 끼었으니 철통방어다. 거머리 서너 마리가 고무장화를 한참 더듬거리다가 흡혈에 실패하고 떨어져 나간다.
논일을 할 땐 물장화를 신는다.
논일을 할 땐 피부가 노출되지 않도록 늘 조심한다. 긴팔옷에 장갑만 끼고 논에 들어갔다가 손목 사이로 침투한 거머리에 강제 헌혈을 당한 적이 있다. 철철 흐르는 피만 보면 크게 다친 것 같지만 통증은 전혀 없다. 거머리의 침엔 마취 물질과 혈액 응고를 막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물려도 통증을 느낄 수 없고 상처의 피도 쉽사리 멎지 않는다.
헤엄치는 거머리.
작년 모내기 때의 일이다. 모내기 마치고 들어온 옆사람의 젖은 바짓자락에 검붉은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바지에 뭐가 묻었네?” 했더니 그 역시 “뭐지?” 의아해하며 바짓자락을 걷어 올렸다. 정강이에 손바닥 크기만 한 핏자국이 있고, 흘러내린 피가 양말의 반을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에! 당신 피잖아!”
모내기할 때 물장화 대신 일반 장화를 신었는데, 모판을 싣느라 논물과 이앙기를 오르내리는 사이 장화 속으로 논물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거머리가 피 빠는 것도 몰랐단 말야?”
그는 태평하게 웃었다.
“나만 잘 먹고 살면 되나. 서로 나눠 먹고 그러는 거지, 세상 이치가!”
철벅거리며 끌고 다닌 그의 장화 속엔 그와 피를 나눈 살찐 거머리가 3마리나 들어 있었다.
놀라운 생존력, 풍년새우 알
논에서 일하다보면 논에 사는 생물들이 잘 보인다. 모내기 직후 풀어 넣은 어린 우렁이는 벌써 자라 알을 낳기 시작했다. 논둑엔 어른 참개구리가 뛰어다니고, 뒷다리 갓 나온 올챙이며 꼬리가 삐죽한 청소년 개구리들이 물달개비 밑에서 첨벙거린다.
물미나리 줄기에 우렁이 알이 붙어 있다.
우리 논엔 미꾸라지도 많다. 뜬모 하려고 놔둔 모판 속에 미꾸라지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물달팽이, 실지렁이, 늑대거미도 보인다. 소금쟁이는 스케이트를 타듯 수면 위를 종횡무진하고, 송장헤엄치개는 드러누워 사냥감을 탐색한다. 얼마 전엔 수면 위를 우사인 볼트처럼 내달리는 땅강아지 여럿을 봤다. 흙 속에 사는 땅강아지가 논물 위를 내달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논물에 초록 새우가 무수히 헤엄치고 있다. 작고 투명해서 알아채기 어렵지만,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다 보인다. 수면 아래 푸르고 투명한 것들의 바쁜
풍년새우가 논물에 가득하다.
움직임, 바로 ‘풍년새우’다. 이 새우가 많이 발생한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해서 풍년새우라는 이름이 붙었다.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풍년새우가 많다는 건 풍년새우의 주된 먹잇감인 논흙 속 유기물도 그만큼 많다는 얘기니까.
풍년새우는 갑각이 없다. 몸이 투명해 속이 환히 보인다. 녹조류를 먹은 수컷의 몸은 맑은 초록이다. 암컷의 뱃속에는 흰 알들이 가득하다. 머리 양쪽으로 새까만 두 눈이 또록또록, 꼬리는 주홍빛으로 날렵한 V자형이다. 풍년새우는 등을 아래로 한 채 여러 개의 다리를 움직여 배영으로 헤엄친다.
흰 알을 품은 쪽이 암컷, 그 옆은 수컷이다.
풍년새우는 논에 물을 떼지만 않으면 10월까지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수확 전까지 몇 번의 물떼기 과정이 있으니 마른 논에서 생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갑각도 없는 취약한 개체지만 알 속엔 특별한 생존력이 들어 있다. 풍년새우 알은 바짝 말라도 죽지 않는다. 마치 꽃씨처럼. 1~2년도 아니고 10년이나 생존한다니 꽃씨보다 더 강하다. 완전건조 상태로 때를 기다리다 물을 만나면 꽃씨가 발아하듯, 마른 가지에 물 오르듯, 까만 두 눈을 반짝 뜨고 꿈틀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풍년새우는 농약이나 제초제를 쓰는 논에선 보기 어려운 생물이다. 환경지표종(bioindicator)으로 생태계의 건강성 평가 모니터링에 쓰인다.
긴꼬리투구새우가 있어!
“풍년새우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긴꼬리투구새우도 있을 것 같은데….”
뜬모 하다가 잠시 논 밖에 나와 쉴 때 옆사람에게 말했다.
”긴꼬리? 그게 뭔데?“
“이렇게 동글납작하게 생겼고 꼬리가 길어.”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니 그가 깜짝 놀란다.
“아! 그거 많이 봤어! 어쩐지, 올챙이도 아니고…. 뭔가 했지.”
“와! 우리 논에도 있구나! 내 눈으로 꼭 봐야겠네.”
논바닥을 기어 다니는 긴꼬리투구새우
긴꼬리투구새우는 우리나라 논이나 웅덩이에 사는 토종 갑각류다. 독한 농약 사용으로 한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지만(2005년) 유기농 벼 재배지가 조금씩 늘면서 개체수가 증가해 보호종에서 해제됐다.(2012년) 그러나 여전히 보호가 필요한 귀한 생물이다.
3억 5천만 년 전 고생대 석탄기 화석과 흡사해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긴꼬리투구새우. 중생대 백악기 화석에서도 보인다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것 아닌가. 몹시 만나보고 싶었다. 손으론 뜬모를 하면서 눈으론 논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사진으로 봤던 긴꼬리투구새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긴꼬리투구새우와의 첫 만남.
드디어 발견! 논바닥에서 미세한 흙탕물이 포르르 일어나기에 자세히 보니 긴꼬리투구새우다! 투구를 쓴 듯한 납작한 몸으로 논바닥을 기면서 수십 쌍의 다리로 흙을 휘저어 먹이를 찾는 중이다. 긴꼬리투구새우는 유기물, 작은 곤충, 모기 유충 등을 먹고 산다. 논바닥을 휘저을 때 흙탕물이 일어나 풀의 성장을 방해하니, 훌륭한 유기농 친구이기도 하다.
논물에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에서 파닥거린다. 공룡시대로부터 날아온 과거 생명체와 접촉한 듯 짜릿하고 뭉클하다. 이 생명체의 조상들은 수십년 전 화학농약과 제초제를 피할 길이 없어 멸종의 위기를 겪었다.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그 후손이 파닥거릴 수 있는 건 유전자 깊이 각인해둔 그들만의 특별한 생존 전략 덕분이다.
몸을 뒤집고 수면에서 헤엄치는 긴꼬리투구새우.
긴꼬리투구새우의 개체 수명은 고작 40여 일 정도지만, 알의 생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미가 죽어서 바싹 말라도 어미 몸 안의 알은 수년이 지나 깨어날 수 있다. 사막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은 풍년새우 알과 같지만, 긴꼬리투구새우의 알은 저마다 부화 조건과 시기가 달라, 며칠 만에 부화할 수도 있고, 물이 있음에도 스스로 부화를 늦춰 수년 후를 기다리기도 한다. 극한 조건에서도 전멸을 피해 종을 이으려는 신비한 생존 방식이다.
논 가장자리 수면에서 몸을 뒤집은 채 배영으로 헤엄치는 녀석이 눈길을 끈다. 몸이 아픈 건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산소를 보충하고 수면의 유기물을 섭취하는 행동이란다. 탈피 직후 쉴 때도 누워서 헤엄친다고 한다. 논물에 둥둥 떠다니는 사체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수명 짧은 개체의 숙명이리라.
긴꼬리투구새우의 사체.
태어나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며 생명의 역사는 이어진다.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잠깐 여기 있다. 생명계의 장엄한 명맥 안에선 막간의 삶이되 개체에겐 유일하고 귀한 삶이다. 물에 떠서 분해되는 저 긴꼬리투구새우에게도 논물의 찰랑거림을 느낀 순간이 있었겠지. 한 마리의 긴꼬리투구새우가 한 생애를 의탁했던 논이 우리 논이어서 기쁘다. 옆사람이 말한다. 약 안 치고 농사짓는 보람을 이럴 때 느낀다고.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