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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론 제5권
8. 행문품 ②[2]
[공처정]
4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제4선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허공정(虛空定)에 노닐며 색계를 초월한다.
또 다시 “색정(色定)은 거칠고 허공정은 미세하다”라고 사유하면서 그 좌선인은 색의 과환을 보고, 또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무엇이 색의 과환인가?
무기나 몽둥이를 들고 서로 때리고 싸우며, 이간질하고 거짓말하고 손발을 자르는 등의 갖가지 일이 있고, 눈이 아프고 병이 나고 덥고 춥고 목이 마르는 등 갖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색욕(色欲)의 과환이라 한다.
무엇이 제4선의 과환인가?
이것은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고, 색사(色事)를 의지하는 까닭에 이것을 거칠다[麤]고 한다. 여기서 즐거움에 집착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하기에 허공에 의지해 적적한 해탈을 이룬다.
그리고 이 정에서 거칠음을 이루면 색에서 제4선의 과환을 보고,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이것이 그 대치이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색을 보고 제4선의 과환을 보고 나서,
허공정의 공덕을 보고 나서, 염으로 제4선에 들어가 무변허공정을 밝히고,
이 정으로부터 일어나 지일체입의 상을 없애고, 허공정을 닦아 지상(地相)이 없어짐을 이루며,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끝이 없다고 작의한다.
만약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지상이 없어지고, 지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허공으로 초월하게 되며, 허공입(虛空入)의 상이 자재함으로써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그 좌선인은 이미 일체의 색상(色相)을 초월하고 유대상(有對想)이 소멸하며, 갖가지 상(想)을 작의하지 않는 까닭에 무변공처(無邊空處)를 정수하여 들어가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색상을 초월한다”에서 무엇이 색상인가?
색계정에 들었을 때의 상지(想智)ㆍ정지(正智), 이것을 색상이라 한다.
“초월[越]”이란 이것으로부터의 초월이다.
“유대상이 소멸한다”에서 무엇이 유대상인가?
색상(色想)ㆍ성상(聲想)ㆍ향상(香想)ㆍ미상(味想)ㆍ촉상(觸想), 이것을 유대상이라 한다.
“소멸”이란 그 갖가지 상이 다하는 것이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에서 무엇이 갖가지 상인가?
정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의계가 화합하거나, 혹은 의식계가 화합하거나, 상지ㆍ정지가 있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문] 어떠한 까닭에 상을 초월한다고 설하는 것에서 그치고, 수ㆍ행ㆍ식은 설하지 않는가?
[답] 만약 상을 초월한다면 그 일체를 역시 모두 초월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상을 떠나지 않으면, 마음이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세존께서는 색사(色事)를 초월하는 것을 설하고자 하시면서,
“색상(色想)을 초월하라”고 설하셨으니,
일체 정의 일들은 모두 상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문]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색정에 들어도 유대상ㆍ갖가지 상은 없는 것이 아닌가?
[답] 어떤 사람이 색계정에 들어도 유대상과 갖가지 상이 있으니, 끊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 어떠한 까닭에 거기에서 도를 닦지 않는가?
[답] 색을 싫어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거기에게서는 소멸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선에 들었을 때는 소리[聲]가 그 자극[刺]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색을 싫어하기 위해 도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서 끊음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끊는 까닭에 무색정ㆍ부동행상(不動行想)ㆍ적적해탈상이 있으니,
가란ㆍ울두람불이 무상정에 들어 5백 대의 수레가 이전과 같이 오고가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처에서 소멸을 말한다.
여기에서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색계법을 끊고, 유대상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계법을 끊는 것을 말한다.
또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색계를 얻는 것을 말하고,
유대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정의 외란(外亂)을 끊고 무동(無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의 내란(內亂)을 끊고 적적해탈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문] 무변허공에서 무엇이 공인가?
[답] 이것은 공입(空入)ㆍ공계(空界)ㆍ공혈(空穴)이다.
4대에 저촉되는 바가 아니므로 이것을 공이라 한다.
공에서 마음을 바르게 안정시켜 무변에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을 무변이라 하다.
무변공이란 무변공입(無邊空入)이니 허공처에 든 심법과 심수법, 이것을 허공입이라 한다.
허공입이란 무슨 뜻인가?
이 허공은 무변성이고, 이 무변성이 공처이니, 이것을 허공의 뜻이라 한다.
그리고 천처(天處)에 거주하는 것을 천처라 하는 것과 같이, 그 허공처정을 허공처라 한다.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허공처정을 얻어 색사(色事)의 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거주하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허공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공덕으로 허공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허공처를 닦았기에 목숨을 마친 뒤 허공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니, 수명은 2천겁이다.
[식처정]
허공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그 좌선인은 허공처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식일체입정(識一切入定)을 일으켜 허공일체입을 초월한다.
그리고 허공정이 거친 것을 사유하고, 식처(識處)가 미세한 것을 본다.
또 허공의 과환을 보고, 또 식처의 공덕을 본다.
무엇이 허공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색과 가깝고, 허공정에서 이 일은 거침을 이룬다.
유대상이나 갖가지 상[種種想]과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기에 그 염에 집착하게 되어 승분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식일체입의 공덕을 보고는 그 대치로서 무변식정을 밝힌다.
그 좌선인은 이미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이미 식처의 공덕을 보고, 느긋하게 입(入)을 염하며, 느긋하게 기(起)를 염한다.
그리고 허공식을 닦아 가득케 하고, 작의하여 식을 무변케 하고, 식처상을 말미암아 마음을 수지(受持)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허공처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식처로 초월하고, 식처상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그 좌선인은 일체허공을 초월하는 까닭에 무변의 식을 사유하며, 일체식처에 들어가 정수(正受)를 성취하여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하고, 허공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초월이란 올바로 분별[正度]이니, 이것은 일체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무변의 식이란 오직 그 허공을 식으로 작의하여 끝없이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변식처라 한다.
[문] 색법과 비색법 중에서 무엇을 무변으로 삼는가?
[답] 오직 무색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무변을 이룬다. 왜냐하면 색 아닌 법은 변제(邊際)가 없고, 가히 얻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또 허공이 무변한 까닭에 무변을 설한다.
무변이란 무변이라는 생각을 짓는 까닭에 무변을 이루며, 이러한 까닭에 방해를 받지 않는 식이다.
입처(入處)란 식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식처라 한다.
식처란 무슨 뜻인가?
이 식이 무변인 것을 식무변이라 한다.
식처는 천(天)의 거주처를 천처라 하는 것과 같고, 이 식을 이미 수지한 정(定)을 식처정이라 한다.
처에 들어 정수(正受)한다는 것은 그것을 얻은 자가 식처정에서 허공사(虛空事)를 초월해 3분을 성취하고, 세 가지 선으로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식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식입(識入)을 일으킨 공덕이란 식처입을 수행하여 목숨이 마친 뒤 식처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4천겁이다.
<식입을 마친다.>
[무소유정]
무변식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식처의 자재를 얻고 나서 무소유처정을 일으켜 식처를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식처정은 거칠고, 무소유처정은 미세하다”고 사유한다.
또 식처의 과환을 보고, 또 무소유처정의 공덕을 본다.
무엇이 식처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허공과 가깝고, 식사(識事)가 거칠며, 무변상을 사유함으로써 그 염착을 이루어 승분을 얻지 못하는데, 무소유처의 공덕은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식처의 과환을 보고 나서 다시 무소유의 공덕을 보고,
식처정으로부터 느긋하게 일어나 그 식을 다시는 닦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소유처상(無所有處相)이 자재함을 보고 나서는 수지하기를 마음으로 원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식처상으로부터 일어나 무소유처상으로 인해 그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무변식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의 식처를 초월하여 무소유를 보고, 그 처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식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이 식을 초월해 올바른 분별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체식처를 초월하는 것이라 한다.
무소유란 다시는 수행하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되고 무소유만 보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정에 든 심법ㆍ심수법,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란 무슨 뜻인가?
이 식은 성(性)이 없으니, 이것이 무소유이다.
무소유처란 무소유라는 말을 수지하고 정정(正定)을 수지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들어가 정수하고 머문다는 것은 무소유정을 얻게 되어 3분의 식사(識事)를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마땅히 정을 닦은 과보로 적적함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무소유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무소유에 태어나는 공덕이란 무소유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무소유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6천겁이다.
<무소유정을 마친다.>
[비비상정]
무소유처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무소유처에서 자재함을 얻고 나서 비상비비상처정을 일으켜 무소유처정을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무소유처는 거칠다”고 사유하고, 비상비비상처는 미세하다고 본다.
또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처정의 공덕을 본다.
무엇이 무소유정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삼는 식과 가깝고, 분별상과 함께 하는 까닭에 거친 것이 되고, 그것에 염착을 이루어 승상(勝上)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입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의 대치이다.
또 이 상(想)은 근심[患]이고, 등창[癰]이며, 가시[刺]이지만 무상(無想)은 올바름이며, 적적이며, 묘이며, 소위 비상비비상이라고 본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보고 난 뒤 염으로 무소유처에 들어갔다가 느긋하게 일어나 그 무소유처에 대해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무소유처의 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비비상처의 상으로 인해 마음의 편안을 얻는다.
비비상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 까닭에 비비상처를 성취하여 들어가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무소유처의 초월을 이루어 초입정탁(超入正度)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비비상이란 그 무소유처에서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비비상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무슨 뜻인가?
분명한 상[分明想]을 소멸하는 까닭에, 상이 없어지지만 미세한 상[細想]은 남아있는 까닭에 비상비비상이 그 처가 되니, 이것을 비비상이라 한다.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얻어 무소유처의 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축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적적하고 밝은 정을 닦은 과보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나는 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수명은 8만4천겁이다.
[문] 무슨 까닭에 비비상처라고 말하고, 무슨 까닭에 식처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무변의 집착을 떠나는 까닭에, 일으키는 상(想)이 세밀한 까닭에 식처가 되지 않는다.
[문] 무슨 까닭에 이 정에 의지해서 누진(漏盡)을 이루지 못하는가?
[답] 분명한 상을 벗어나도 감히 견도를 얻지는 못한다. 또 이 정은 가장 미세하여 비비상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누진처를 이루지 못한다.
<비비상정을 마친다.>
[산구]
거듭 위의 뜻을 밝힌다.
[문] 이 정처에서 무엇이 산구(散句)인가?
[답] 소위 멸성(滅聲)ㆍ전도(顚倒)ㆍ기(起)ㆍ월(越)ㆍ외행(外行)ㆍ각(覺)ㆍ수(受)ㆍ의(疑)는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된다.
멸성(滅聲)이란 초선에 들어 어언(語言)을 끊는 것이고, 제4선에 들어 출입하는 식(息)을 끊는 것이다.
차제(次第)의 멸성이란 만약 사람이 정에 들면 어떤 음성을 듣거나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에 든 사람은 이식(耳識)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색정에 든 사람은 이 소리로 혼란케 되는데,
세존께서 “선에 든 자에게는 소리가 그 가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전도(顚倒)란 지일체입에 들어 지상(地想)이 아닌 것을 지상이라 여기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가?
[답] 이 4전도의 상과 다르지 않은 까닭에, 이 지상이 바로 그 상(相)인 것을 아는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다.
기(起)란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인연은 위의(威儀)의 고통, 너무 많은 경계, 장애가 생김, 방편의 불평등, 뜻에 따름[隨意]이라는 다섯 가지이다.
만약 무색정에 든다면 경계가 아주 많더라도 일어날 수 없나니, 부동에 머물기 때문이다.
멸선정(滅禪定)에 들고, 과정(果定)에 들었을 때에는 처음에 지었던 행으로 일어날 수 있지 다른 원인으로는 일어나지 못한다.
월(越)이란 다음과 같다.
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분월(分越)과 사월(事越)이다.
색선(色禪)으로부터 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분월이라 하고,
색선으로부터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 또 무색정에서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사월이라 한다.
외행(外行)이란 일체정의 외행으로, 5분을 성취한다.
각(覺)이란 제2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무각무관을 성취한다.
수(受)란 제4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함께 사기(捨起)한다. 어떤 사람은 낙상사무간(樂相似無間)에 있다.
의(疑)란 아직 일체 탐욕 등의 개(蓋)를 끊지 못한 상태에서 비비상처에 머물며 유여(有餘)를 설하는 것이니, 독사를 두려워해 나무 위로 오르는 것과 같다.
네 종류의 사람은 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반드시 악취에 떨어지며, 원인 없이 5역(逆)과 사견을 짓는다.
<산구(散句)를 마친다.>
<지일체입에 대한 설명을 완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