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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5권
6. 계경건도(契經揵度)
또 세존께서 “나의 제자 중에 첫째가는 비구는 높은 바위에 거처하며 산이나 물가로 행각(行脚)하나니 높은 바위에 거처하는 바나가바차(婆那伽婆蹉)라고 하는 이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이는 “삼매에 자재(自在)함을 얻어 앞의 삼매를 버리고 다시 그 밖의 삼매에 들며, 다시 그 삼매를 버리고 다시 딴 삼매에 드나니 그와 같은 것을 높은 바위에 거처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역순(逆順)삼매에 들어 그와 같이 높은 바위에 거처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표건도(標褰度)삼매에 들었으니 그러므로 높은 바위에 거처한다”고 말했다.
또 모든 은자들이 높은 바위에 거처하는데 그 무수한 가운데에서 해탈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높은 바위에 거처한다.
또 세존께서 “여기에 네 사람의 비구가 있는데, 어떤 이는 자신만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어떤 이는 남을 이롭게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어떤 이는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한 남까지 이롭게 하며, 어떤 이는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또한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니 거기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자신만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한 이란, 자신만 평등에 처해 있고 남에게는 평등에 있게 하지 아니함이니 비록 남에 의하여 평등에 처해 있으나 그는 그 중에서 평등한 뜻을 얻지 못한 것이다. 남을 이롭게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하지 못한 이란, 남에게는 평등에 대한 뜻을 내게 하면서 자신은 평등에 처해 있지 아니함이니 비록 남에게 설법하여 법의 생각[法想]이 있으나 조금 있는 평등은 남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까지 이롭게 하는 이란, 자신이 평등에 처해 있으면서 또한 딴 사람까지 평등에 있도록 하나니 비록 그가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라도 그에게 두 인연으로 평등을 말해 주어 얻게 한다. 또한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한 이란, 자신도 평등에 처해 있지 아니하고 또한 남에게 평등에 처해 있도록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또 세존께서 “여기에 네 사람의 비구가 있는데, 혹 어떤 사람은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하여 다시 딴 결박을 받지 아니하며, 혹 어떤 사람은 딴 결박은 다하여 받지 않으나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한 것은 아니며, 혹 어떤 사람은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하여 받지 아니하고 딴 결박도 또한 다하며, 혹 어떤 사람은 태어나게 되는 것도 다하지 못하고 받지 않을 딴 결박도 또한 다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씀하신 그 내용이 무엇인가?
[답]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하여 딴 결박을 받지 아니함이란, 중반열반(中般涅槃)함이요, 딴 결박은 다하여 받지 않으나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한 것은 아니라 함이란 무색계(無色界)에 나는 아나함(阿那含)이요, 태어나게 되는 결박이 다하여 받지 아니하고 딴 결박도 다함이란 아라한(阿羅漢)이요, 태어나게 되는 것도 다하지 못하고 받지 않을 딴 결박도 또한 다하지 못했다 함이란 그것은 배울 것이 남은 사람이며 또한 범부들이다.
또 세존께서 “여기에 네 사람의 비구가 있는데, 혹 어떤 사람은 몸의 고통을 받고 목숨의 고통을 받지 아니하며, 혹 어떤 사람은 목숨의 고통을 받고 몸의 고통을 받지 아니하며, 혹 어떤 사람은 몸의 고통을 받고 또한 목숨의 고통을 받으며, 혹 어떤 사람은 몸의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또한 목숨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씀하신 그 내용이 무엇인가?
[답] 몸의 고통을 받고 목숨의 고통을 받지 않음이란 욕계와 색계에서 목숨을 마친 무색계의 아나함(阿那含)이요, 목숨의 고통을 받고 몸의 고통을 받지 않음이란 무형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곧 반열반(般涅槃)하는 사람이요, 몸의 고통을 받고 또한 목숨의 고통을 받음이란 욕계와 색계에서 목숨을 마치는 괴로운 아라한이요, 몸의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또한 목숨의 고통을 받지 않음이란 위의 사실을 제외한 그 밖의 사실이다.
또 세존께서 “여기에 네 사람의 비구가 있는데, 혹 어떤 사람은 현재 법 안에서 반열반을 행하고 몸이 무너지며 반열반 아니하는 것이 아니며, 혹 어떤 사람은 반열반을 행함이 없고 반열반 행하는 것이 아니며, 혹 어떤 이는 반열반을 행하고 반열반을 행함이 없으며, 혹 어떤 사람은 반열반을 행함이 없고 또한 반열반을 행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씀하신 그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이는 “마치 어떤 한 사람이 많은 행(行)과 큰 방편과 큰 정성으로써 5하분결(下分結)을 없애고 이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색계에 태어나서 온갖 행과 작은 방편과 작은 정성으로 상분오결(上分五結:五上分結)을 없애면, 그를 현재법 안에서 반열반을 행하고 몸이 무너지며 반열반을 행함이 없는 것이라고 이른다.
둘째의 것은 이 세계에서 작은 것이며, 저 많은 것은 셋째의 것이며, 둘다 함께 크지 않은 것은 넷째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그 사람이 삼매에 의하여 행하고 반연하여 오하분결을 없애고 이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 반열반 삼매에 의하여 상분오결을 없애면 그를 그 사람이 반열반을 행하고 몸이 무너지며 반열반을 행함이 없다고 이른다.
둘째의 것은 현재법 안에서 반열반에 반연하여 몸이 무너지고 행(行)에 반연함이요, 셋째의 것은 둘째의 함께하는 이로서 행에 반연함이요, 넷째의 것은 둘다 함께 열반에 반연하는 이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계에서 오하분결을 없애고 색계에나 무색계에 나서 낙을 누리며 상분오결을 없애면, 그를 그 사람이 반열반을 행하고 반열반을 행하는 것이 없는 이라고 이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계에서 낙을 누리고 오하분결을 없앴으나 저 세계에 나서 고통을 받으면서 상분오결을 없애면, 그 사람은 반열반을 행함이 없다고 이른다”고 말했다.
어찌하여 그 사람이 현재법 안에서 반열반을 행하고 몸이 무너지고 반열반을 행하는 것이 없으며, 셋째의 것은 둘다 함게 괴로움이 되며, 넷째의 것은 둘다 함께 즐거움이 됩니까?
또 그 사람은 어리석나니 범부로서 하분결(下分結)을 없애고 저기에 나면 재빨리 지혜를 얻어 상분결(上分結)을 없애게 되나니 그 사람이 현재 법 안에서 반열반을 행한다고 이른다. 둘째의 것은 이 세계에서 재빠르고 저 세계에서는 미련하여 셋째의 것은 둘 다 함께 미련하며, 넷째의 것은 둘 다 함께 재빠르다.
무슨 까닭으로 아라한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성취했는데도 고법인(苦法忍)이 아닌가?
어떤 이는 “고법인을 버리지 아니할 때는 수다원(須陀洹)을 얻을 때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世間第一法]은 없애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 그것 역시 내가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고법인을 버렸는데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 아닌가?
[답] 죽는 처소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의 과과(果果)에 노닌다. 고를 없애는 법인[滅苦法忍]이 아라한의 과과에 노니는 것이 되나니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은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선정[禪]으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껴잡으며 배움[學]으로는 고법인(苦法忍)을 껴잡는다. 아라한이 성취한 것은 배움인 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성취한 아라한은 고법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선정에 의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증득을 취하면 저 선정은 고법인을 껴잡나니 선정으로 하여금 고법인을 성취한다고 하려는 것인가?
[답] 배움은 선정과 고법인을 껴잡으며, 배움 아님은 또한 배움 아님이 아니며, 선정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껴잡나니 그 배움을 버리면 배움 아님이 아니며 또한 배움 아님도 아니다.
[문] 말한 바와 같아서, 만일 선정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껴잡는다면, 그의 선정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을 성취한 셈이 되나니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미묘한 무루법을 얻더라도 혹 성취하지 못하는 수가 있으므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법인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 증가하는 세상의 제일가는 법을 얻더라도 조금도 성취하지 않는가?
또 잠자코 그런 생각을 한다. 또 모든 착한 뿌리로 상ㆍ중ㆍ하법에 반연하면 성취한다고 말해야 된다.
만일 범부가 5하분결(下分結)이 다했다면 그를 한 처소[一處]의 아나함(阿那含)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그러한 말을 하지 말 것이니, 아라한같은 이는 온갖 결사(結使)가 다했지만 아나함은 한 처소에 다하지 못했으며 나아가는 곳에서도 다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라한은 한 처소에서 다하게 되는가?
또 만일 저 성현의 도에서라면 한 처소에서 오하분결이 다한 사다함(斯陀含)이라 할 수 있나니 또한 마땅히 한 처소의 아나함이라고 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범부라면 욕계의 결박이 그 중간에 작아졌더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다.
또 세존께서 “사람이 다섯 가지로 어진 이들을 성내어 비방하나니 입으로 나쁜 말을 하고 성냄이 일정하지 않고 좋지 못한 죄를 짓고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하실 적에 그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그와 뜻이 맞지 않으면 그의 행위는 살펴보지 않고 고의로 의심하여 어긴 이를 비방하나니 그를 ‘그가 저 사람을 비방하고 괴롭힘’이라 이른다.
뒤바뀐 생각을 가지고 추악한 말로 다투기를 좋아하며, 네 가지 범한 바를 제외하고는 온갖 죄를 범하며, 몸이 의혹을 품고 그 중에는 다시 딴 사실까지 범하니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싫어함이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음욕이 더욱 많고 성냄이 일정하지 않아 높고 낮은 이를 가리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미워하거나 싫어함을 받게 되며 남의 앞에서 사기와 홀리는 것을 일삼고 사람을 근거도 없이 참소하고 항상 법답지 못한 짓을 익힌다”고 말했다.
또 저 사람이 정진하려는 생각으로 욕심을 버리며 뜻을 가다듬고 두타(頭陀)를 행하려고 하여 위의와 예절이 항상 어긋나지 아니하므로 사람에게 신뢰를 받으며 저 사람을 찬탄하고 칭송하며 얻지 못한 것을 얻도록 하면, 그를 “그 사람은 마땅히 법을 범했다고 말해야 한다”고 이른다.
그 사람은 계율을 순종하지 아니한 이를 항상 친근하려고 생각하며, 그 중간에 얻은 이것을 또한 찬탄하여 말하며 항상 위의와 예절에 대하여 좋아하지 않고 또한 수행하지 않으며 은혜를 알지 못하면 그를 “그 사람은 마땅히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이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증상계(增上戒)를 성취하지 아니하고 싸우거나 송사하기를 좋아하며 어진 이들을 비방하면 그를 “그 사람은 기뻐함과 성냄이 일정함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사람이면 미묘한 행(行)을 행하는 중에서 계율을 분별하고 금계(禁戒)를 외우며 모든 일마다 배워 알아야 하는데, 계율이 없고 지혜가 없는 이면 그를 “그 사람은 항상 의혹을 품는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이 미묘한 행에서 계율을 분별하고 금계를 외우면, 그를 “그 사람은 사람이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말한다.
우타나야바차라야(憂陀那耶婆嵯羅耶)에서 “존자 바라타사(婆羅墮闍)여, 어떠한 인연으로 이 모든 비구가 나이 젊고 단정하여 집을 떠난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착한 공덕을 닦고 깊은 법에서 즐기고 가르침을 따르며, 모든 감관이 유화(柔和)하고 얼굴빛이 빛나며 피부와 신체가 부드럽고, 고요함을 좋아하고 만족을 알며 들사슴과 코끼리 같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고 만족을 아는가? 그리고 들사슴과 코끼리와 같다는 그 내용은 무엇인가?
[답] 좌선(坐禪)하고 경을 외우며 일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만족을 안다고 말하며 법에 따라 빌어 구하고 또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그것을 들사슴과 코끼리 같다고 말한다.
또 세존께서 “나는 조달(調達)이 털끝만한 착한 짓도 안하는 것을 보고 내가 수기를 아니한 것이다. 조달은 지옥(地獄)에 들어가 겁수(劫數)를 많이 지나도 구제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만일 조달이 골수에 사무치게 부처님께 세 번 귀명(歸命)한다면 저 조달이라고 마땅히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착한 법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착한 법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3존(尊)께 귀명함도 아니요, 성냄이 치성하므로 그러한 말을 했을 뿐이다. 만일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면 말한 바와 같을 것이며, 만일 부처님께 귀명하면 그는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3악취(惡趣)에 가지 않는 것이 말한 바와 같을 것이나, 조달이 지옥에 들어가 1겁(劫)을 지나니 그러므로 저 조달은 착한 법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조달도 또한 착한 법이 있으나 오히려 조달의 죄를 뽑지 못하니 그러므로 그를 구원하지 못함이며, 조달에게는 세 가지 좋지 못한 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저에게 정법(頂法)이 있는 조달이니 그러한 방편으로 말미암아 착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또 세존께서 “나의 제자 중에 첫째 비구는 4공정(空定)에 노니나니 그 이름은 발타바리(跋陀婆梨)며, 4등(等)의 힘을 성취한 그 이름은 승가마사(僧迦摩寺)다”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두 사람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존자 발타바리는 연신호(軟身護)를 얻어서 스스로 즐기나니 그는 그 오락으로써 먼저 호당(護堂)을 얻었으며, 존자 승가마사는 증상호(增上護)를 얻었다. 그러나 많이 조절하거나 익히지 아니하고 그 중에 먼저 호(護)이 힘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존자 발타바리는 4선(禪)과 4등(等)의 마음을 얻어 항상 외우고 익히므로 그 중에서 자재함을 얻어 먼저 호당을 얻었으며, 존자 승가마사는 6선래당(善來堂)에 노니나니 그를 “먼저 뜻을 내어 호력(護力) 성취를 얻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아는가?
어떤 이는 “온갖 결박을 버렸기 때문이니 모든 결박이 있으면 곧 태어나지만, 아라한은 결박이 없으므로 태어나지 않는다. 또한 결박이 없으면서 태어남이 있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나니 그리하여 그 중에서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안다”고 말했다.
또 몸ㆍ애욕의 모든 태[垢]가 영원히 다했기에 아라한이라고 말하나니, 그 중간에 무명(無明)과 존재와 애욕이 다시 그의 몸에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중음(中陰)의 안에서는 나아가는 바와 같다고 말해야 하는가? 가되 나아가는 바와 같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가되 나아가는 바와 같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중음은 곧 산신(山神)의 처소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그는 이와 같은 만(慢)이 있나니 비유하건대 아주 검은 양의 털과 같고 또한 캄캄하고 어두운 방과 같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또 그것이 곧 중음의 모양입니까? 또 가되 나아가는 바와 같다고 말해야 하는가? 죽음이 닥쳐오려고 할 적에 선과 악이 함께 중음에 이르며, 또한 그와 같이 따라다니는 선과 악이 각각 그 중음에도 나아가는데, 마땅히 7일을 머물러 지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머물러 7일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머물러 7일을 지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 하면 따라다니는 선과 악이 또한 7일을 지나가는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7일 중간에 태(胎) 중에 있게 되지 못할 적에는 곧 아주 없어지게 되는가?
[답] 아주 없어지지 않나니 그러므로 중음의 몸을 벗어난다.
또 내지 인연이 모이면 함께 머물러 끊어지지 않으며, 만일 태어날 인연을 얻지 못하면 그러기에 오래 머무른다.
산보하여 노닐음과 네 구절과
세속의 범부인 사람들이며
5와 바리(婆利)와 털끝만함과
호(護)와 아라한과 음(陰)이네.
또 세존께서 “여기에 네 비구가 있는데, 잘 기억하는 지혜이며, 선포(宣布)하는 지혜이며, 한 구(句)를 듣고 순종함과 완고함이라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하실 적에 그 내용이 무엇인가?
어떤 이는 “잘 기억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말을 하매 곧 뜻을 알아 교화하기가 쉬운 것이니 만일 비구가 저 법과 같으면 곧 사라지게 됨을 세존께서 또한 아셨다. 선포하는 지혜란, 말하면 곧 이해함이니 말한 바 비구여, 네가 아니니 물질이 네가 아니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네가 아니라 함인 따위이다”라고 말했다.
세존께서 또한 “순종함과 완고한 사람이란, 약간의 행(行)으로써 달래면 곧 순종하는 이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비구에게 물질이 되느냐 하면 온갖 물질과 저 모든 4대이며, 4대로 만들어진 것의 전부이다.
한 구(句)를 듣고도 완고한 사람이란 또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를 말한다.
어떤 이는 “잘 기억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날카로운 근기이니 마음과 마음을 서로 아는 이이며,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중간 근기이며, 순종하는 사람이란 부드러운 근기[軟根]이며, 한 구를 듣고도 완고한 사람이란 능력이 없는 근기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잘 기억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숙명적으로 해탈을 구하는 힘을 지닌 이요, 선포(宣布: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숙명적으로 연해탈(軟解脫)을 구하는 이요, 한 구를 듣고도 완고한 사람이란 숙명적으로 해탈을 구하지 않는 이이다”라고 말했다.
또 잘 기억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말하면 곧 아는 자이니 듣고 곧 묵연(黙然)하는 존자 사리불과 같은 사람이며,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란 분별하여 분명해진 후에야 능히 알게 됨이니, 그 의리(義理)를 살펴서 아는 존자 불가라바리(弗迦羅婆梨)와 같은 사람이다.
순종하는 사람이란, 때에 따라 증상계율(增上戒律)을 배우고 때에 따라 마음과 뜻을 항복시키며, 때에 따라 증상지혜(增上智慧)를 배우는 것을 말함이니, 본성(本性)에 익히는 바가 계율을 차츰 배우고 차츰차츰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받들어 행하는 이로서 차츰차츰 도에 이르는 나운(羅云)과 같은 이들이다. 한 구를 듣고도 완고한 사람이란, 구절의 뜻을 받아 들어도 또한 그 의리를 알지 못하며, 또한 깊은 법을 이해하지 못한 이를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보살이 본래 전생 때에 차례를 뛰어넘어 증득함을 취하지 아니하는가?
어떤 이는 “맹세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그 서원(誓願)으로써 장래에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가 되어 제도 못한 이를 제도시키고 해탈 못한 이를 해탈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보살이 그들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지혜의 뜻으로 항상 원을 세워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어떤 이는 “보살이 일체지(一切智)를 얻어 스스로 구족하였으나 중생 때문에 차례를 뛰어넘어 증득을 취하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또 모든 근기들이 성숙되지 못했으므로 차례를 뛰어넘어 증득을 취하시지 아니했다.
무슨 까닭으로 아나분제(阿羅邠堤) 장자는 네 여래께 공양을 올렸으면서 집을 떠나 저 부처님께 도를 배우지 아니했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맹세한 인연 때문이니 그 서원(誓願)이 그 밖의 여래(如來)께 공양 올리겠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친족의 세력에 의하여 능히 은애(恩愛)의 뜻을 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장자의 뜻이 항상 고요함을 좋아하고 보시하기를 좋아하는 둔한 근기이니 고요함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 공덕이 있어서 어디에서나 위대한 과보를 얻으며, 둔한 근기이기에 집에 대한 환란을 보지 아니했나니 그러므로 출가하여 사문(沙門)이 되지 아니했다”고 말했다.
또 저 장자는 음욕의 생각이 더 많아서 항상 아리따운 여인들 사이에서 일체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은 방편(方便)으로 성현의 도 얻는 것을 좋아했다.
무슨 까닭으로 남자가 되지 못한 이는 법과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이는 “모든 실정이 결핍되고 작으므로 법과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이 만 갈래로 달리어 삼매를 얻지 못하므로 법과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업장인 모든 과보는 실로 숙세에 지은 인연이니 그러한 형상을 받았으므로 지혜에 의지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업장과 결박에 덮인 바가 되었으므로 그쳐짐을 얻지 못하고 마음에도 제 부끄럼과 남 부끄러움이 없다.
또 세존께서 “투바(偸婆)를 만드는 데 세 가지 사실이 있으니 다살아갈아라하삼야삼불(多薩阿竭阿羅訶三耶三佛)이거나, 비구로서 번뇌[漏]가 다한 이거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무슨 까닭으로 배우는 이와 벽지불(辟支佛)은 그 세 가지 사실에 들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이는 여래께서 권하고 가르치시는 말씀이니, 부처님을 말씀한 것은 곧 벽지불까지 말씀한 것이며, 비구로서 번뇌가 다한 이를 말씀하신 것은 배우는 이까지를 말씀하신 것이니 그는 혹 번뇌가 다한 이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또 저것은 역시 그 수효이니 그런 중생들 때문에 그 깊은 뜻을 나타내신 것이니 그것 역시 권하고 가르치시는 말로써 위에 말한 바와 같다.
또 세존께서 “이 비구에게 여섯의 아라한(阿羅漢)이 있으니 법에서 물러나는[退法] 아라한과 법을 생각하는[念法] 아라한과 법을 보호하는[護法] 아라한과 겁 동안 머무는[住劫] 아라한과 법을 분별하는 [分別法] 아라한과 법에 의심이 없는[無疑法] 아라한이라고 하셨으니 거기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가지가지 무학(無學)의 근기로서 상(上)과 상의 중(中)과 상의 하(下)와 중중(中中)의 상과 중하(中下)의 하와 상하(上下)의 중이니, 저 하하(下下) 중에서 성취한 이를 법에서 물러나는 아라한이라고 이르며, 하상(下上)에서 성취한 이를 법을 생각하는 아라한이라고 이르며, 중하(中下)에서 성취한 이를 법을 보호하는 아라한이라고 이르며, 중중에서 성취한 이를 겁(劫)에 머무는 아라한이라고 이르며, 중상에서 성취한 이를 법을 분별하는 아라한이라 이르며, 셋의 상에서 성취한 이를 법에 의심이 없는 아라한이라 이른다”고 말했다.
저 성문승(聲聞僧)은 상의 하에서 성취한 이이며, 벽지불(辟支佛)은 상의 중에서 성취하였으며, 다살아갈(多薩阿竭)은 상의 상에서 성취하였다.
어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방편으로 업(業)을 짓는데 정성스럽게 하지 아니하는 이도 있고 또한 둔한 근기도 있다. 그는 방편의 업으로써 정성스럽게 하지 아니하기도 하고, 둔한 근기는 등심해탈(等心解脫)을 구하여 증득하게 된다. 그는 다시 방편의 업으로써 정성스럽게 하지 않기도 하며, 둔한 근기는 등심해탈에서 곧 물러서기도 하나니 그를 법에서 물러나는[退法]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은 방편으로써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둔한 근기인데, 그는 방편으로써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둔한 근기로서 등심해탈을 얻어 증득하게 된다. 그는 방편으로써 정성스럽게 하는 둔한 근기로서 등심해탈을 보호하나니 그를 법을 보호하는[護法]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은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데도 둔한 근기이다. 그는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데도 둔한 근기로서 등심해탈을 얻는다. 그는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데도 둔한 근기로서 등심해탈을 얻으며 또한 더하지도 않고 또한 줄지도 않나니 그를 겁동안 머무는[住劫]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은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근기이다. 그는 항상 방편으로써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근기로서 등심해탈을 얻는다. 그는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근기로서 방편으로 의심 없음을 얻나니 그를 법을 분별하는[分別法]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어떤 사람은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근기이다. 그는 항상 방편으로 구하기를 심히 정성스럽게 하는 날카로운 근기로서 의심이 없는 등심해탈(等心解脫)을 얻나니 그를 법에 의심이 없는[無疑法]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또 어떤 사람은 타력(他力)을 믿고 곧 등심해탈을 얻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등심해탈이다.
병들어 파리한 사람이 조금 일어섰다가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도로 병상에 눕는 것과 같은 이를 법에서 물러서는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등심해탈이 견고하지 못하고 다만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죽어버리려고 칼을 가지고 자신을 해치면, 그를 법을 생각하는[念法]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등심해탈에서 등심해탈을 보호하되, 나는 그를 보호하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키고 수시로 육성하겠다고 하여, 그를 법을 보호하는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등심해탈에서 둔한 근기를 초월하여 중간 근기에 머물기 때문에 등심해탈에서 물러서지 아니하며 또한 더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면 그를 겁 동안 머무는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등심해탈에서 처음은 조금 이익을 얻고 모든 근(根)을 얻으면, 그는 그 밖의 힘을 얻고 의심이 없음을 얻나니 그를 법을 분별하는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써 증상근(增上根)을 처음으로 얻고 등심해탈에 머물러 스스로 시절을 잘 알면, 그를 법에 의심이 없는 아라한이라고 이른다.
또, 세존께서 “아난비사리(阿難鞞舍離)에는 매우 즐거운 낙이 무궁하며 발사부미(跋闍復彌)에서도 매우 쾌락을 누리고 차바라사(遮波羅寺:법 바퀴를 굴린 곳)에서도 매우 쾌락을 누리며 구담미나구려(瞿曇彌那拘驢)에서도 또한 매우 쾌락을 누리고 염부리(閻浮利)에는 약간 종류의 쾌락이 있어 비교할 수 없이 백성들이 번성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무슨 까닭으로 세존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어떤 이는 “바로 앉아 입정(入定)하시어 비구들로 하여금 즐거운 희망을 갖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비사리성(鞞舍離城)에는 매우 즐거운 낙이 무궁하며 곡식이 흔하여 빌어 얻기가 쉬우며, 발사부미에도 매우 즐거운 낙이 무궁하고 백성이 순하며 괴로움과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며, 차바라사와 구담미니구타(瞿曇彌尼拘陀)에는 갖가지 자리와 방석이 많고 한가하여 조용하며, 염부리 땅에는 약간 종류의 동산과 과일이 여러 가지 있고 백성들이 번성하고 지혜가 밝다”고 말했다.
또 세존께서는 또한 다시 모든 속박과 집착을 버리시고 조금의 애욕도 없으시니 그는 애욕이 없어서 영원히 쉬는 이시다.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이며
집 떠난 이와 남자가 되지 못한 이와
세 탑과 여섯 아라한이며
비사리가 최후에 있음이네.
또 세존께서 “비사리(鞞舍離)에 노닐지만 지금부터 차후에는 다시 비사리를 볼 수가 없을 것이며, 부처님께서 다시 비사리에 오시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어떤 이는 “다시는 태(胎)를 받아 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평등한 지혜로 저 죽음의 자취를 없앰은 비사리성에 법을 좋아하는 중생에게 온갖 의심 갖는 일을 풀어 주려고 하심이니 이를 저 시절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세존께서 마하가섭(摩訶迦葉)을 청하여 자리의 절반[半座]을 주어 앉도록 하셨는가?
어떤 이는 “그 당시에 여러 비구들이 가섭을 업신여겨 좋지 못한 생각을 하고, 가섭이 크나큰 법요(法要)에 들어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세존께서 자리의 절반을 주시어 앉도록 하여 비구들로 하여금 마음을 열리게 하고 생각이 풀리어 나쁜 과보를 얻을까 염려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존자는 가지가지 공덕이 있고 세존께서 그를 먼저 교화하신 터이니 여러 비구들이 금계(禁戒)와 죄를 범할까 염려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제일 존중한 존자는 아나율(阿那律)이니 세존께서 그가 가 보고 의지하게 하여 곧 마하가섭을 청하여 자리의 절반을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세존께서 계율을 전해 주시는데 후래의 중생들이 그의 말씀을 믿어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또 제자에게 일찍이 자리의 절반을 주신 적이 없다.
또 세존께서 위대한 덕을 펴보이시려고 하신 일이다.
또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이여, 사문과 바라문이 낮에 밤의 생각이 있고 밤에 낮의 생각이 있어서 그들의 마음과 뜻은 뒤바뀌고 있다. 비구여, 나에게는 낮에는 낮의 생각이 있고 밤에는 밤의 생각이 있어서 나의 마음은 뒤바뀜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말씀하신 그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어떤 이는 “그는 하늘 눈[天眼]을 생각하여 그 밖의 다른 생각을 없애고 밝음을 향하는 생각을 닦나니 낮을 보는 것이 밤의 생각이 있고 밤에 낮의 생각이 있지만, 세존께서는 그러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사문과 바라문이 잠잘 적에 밤에는 낮의 생각이 있고 낮에는 밤의 생각이 있나니 그것이 곧 뒤바뀜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들이 한가로이 있을 적에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서 그와 같은 물질을 관찰하여 선정에 드나, 세존께서는 다니실 때에나 앉으실 때에도 항상 한결같이 선정이 이루어진다.
또 세존께서 “이 비구에게 3여래(如來)가 있나니 그 비구는 현법(現法)에서 실로 의심이 있지 않다. 스스로 지혜를 얻고 또한 남까지도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스스로 지혜를 얻는가?
어떤 이는 “그를 얻을 수가 없다. 허위여서 진실함이 없는데 하물며 진실함을 얻겠는가”라고 말했다.
또 그것은 세존께서 권유하고 가르치시는 말씀이니 “그러한 말을 한 것은 내가 그를 깨우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는 “만일 그가 물질과 마음의 생각하는 법[心所念法]에 집착하여 스스로 칭찬하고 계율을 가장하여 마음대로 꾸며대며 사실을 허위라고 여기면, 세존께서는 그를 가장한 짓을 보인 것이라 관찰하신다”고 말했다.
또 그것은 저 삿된 소견으로서 5음(陰) 안에 내가 실로 머물러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도 또한 그러하시니 딴 음(陰)이 있거나 ‘나’와 내 것[我所]이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으로 외도(外道)가 애욕을 다 없애고 차례를 넘어 증득을 취하게 되는가? 상응하여 물러서자 않는 법은 그를 말한 것인가?
어떤 이는 “그는 2도(道)로써 온갖 결박을 끊나니 혹은 세속의 도로써 끊기도 하며, 혹은 무루도(無漏道)로써 온갖 결박을 끊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선(禪)에 의하여 차례를 넘어 증득을 취하면 저 선을 관찰함에는 곧 도가 생기나니 그는 견제(見諦)로 끊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가 차례를 넘어 증득을 취할 적에 참음과 지혜를 수행하여 평등한 방편을 얻고 그의 힘이 더욱 더한다. 만일 그 힘의 더함이 없으면 그 힘 안에서 물러서지 않나니 그러므로 물러서지 않는다.
또 세존께서 “4쌍(雙)ㆍ8배(輩)가 몇은 과위(果位)를 성취하며, 몇은 과위를 성취함이 없다”고 하셨다.
어떤 이는 “다섯은 과위를 성취하나니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에 나아가는 이와 아라한이다. 하나는 과위를 성취하지 않나니 수다원 과증(果證)에 나아가는 이이며, 두 사람은 혹시 과위를 성취하며 혹시 과위를 성취하지 않나니 사다함 과증에 나아가는 이와, 아나함 과증에 나아가는 이이다.
저 사다함의 과증을 취하는 이는 방편과 욕애(欲愛)가 미진하고 차례를 넘어 증득을 취하나니 마땅히 과위를 성취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아나함의 과증에 나아가는 이는 마땅히 저 과위를 성취한다고 말해야 하나니 함이 없는[無爲] 수다원의 과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나함의 과증에 나아가는 이는, 저 욕애가 다하고 차례를 넘어 증득을 취하나니 마땅히 과위를 성취함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는 다시 사다함 과위를 얻기 때문이다. 아나함의 과위를 구하여 나아가는 이는 마땅히 저 과위를 성취한다고 말할 것이니, 함이 없는 사다함의 과위이다. 그 과위가 함이 있는 것이면 마땅히 모든 뿌리가 무너지고 썩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니, 그를 8인(人)이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세존께서 “4사문(沙門)에 다섯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말씀을 하신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도지(道智)가 곧 여래의 스스로 얻은 증과(證果)가 되고 집착 없이 도를 말씀하시고 청정하게 설법하여 법 바퀴를 굴리시나니 그러므로 도명(道命)을 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지혜를 배우게 하며 모든 의심 그물을 끊게 하셨으므로 도를 비방하는 자가 구경(究竟)인 수행이 없고 계율과 위의(威儀)가 없어 모든 계율에 범하는 이들이 모두 사문이 되어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저 제2 사문은 벽지불(辟支佛)을 포함시킨다고 말해야 하고, 제3 사문은 범부들을 포함시킨다고 말해야 하며, 제4 사문은 외도를 포함시킨다고 말해야 한다. 그 밖의 온갖 거짓 사문이 사문의 복장을 하고 ‘나’라고 헤아려 분별하거나 목숨에 집착하거나 중생이라고 헤아려 분별하는 이들은 모두 도에서 물러난다.
또 세존께서 “물들거나 집착이 없는 것을 계(戒)라 이른다”고 말씀하셨다.
물들거나 집착이 없는 가사(袈裟)이기에
가사 입는 법 처음 마련하였네.
마음의 욕망을 다 얻으려 하면
그 가사는 집착 없음 아니네.
말씀하신 이 말의 내용은 무엇인가?
[답] 세 가지 예탁(穢濁)이 있으니 몸의 예탁ㆍ입의 예탁ㆍ뜻의 예탁이 그것이다. 그가 그를 잘 생각하고 헤아려 분별하면 예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사의 복장으로 속이거나 안일만을 외친다면 신성하게 배우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부당하다. 그를 참음이라고 말하며 또한 이동함이 아니라고 하나니 진실하게 생각하여 뜻에 항상 잘 살펴야 한다.
그가 참지 못하여 꾸지람을 당할 적에, 즉 꾸지람으로 보복하고 구타를 받을 적에 곧 구타로 보복하면 그것은 사문의 법이 아니거늘, 하물며 그와 같은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가사에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저 가사는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또 세존께서 “만일 이미 생겼으면 베고 끊으면 다시는 심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씀하신 그 내용은 무엇인가?
[답] 인식[識]과 상대함에 느낌이 생긴다. 4선(禪)에서 그치는 자리에는 지어감[行]과 때[垢]가 생기는 인연과 만들어지는 것들이 곧 끊어짐이 있다. 와도 상대함이 있지 아니하고 또한 받아 나지도 않는다. 4선에 머무는 자리에서는 또한 나지도 않나니 선택하여 그 긴요한 것만을 취한다. 설령 4선에 머무는 자리에서 근본적으로 행하는 인연이라 하더라도 그를 또한 받지 아니하고 이미 애욕을 버리고 이미 느낌[受]을 다한다.
어떤 사람이 헤매고 있다고 그를 마땅히 배운 것이 없고, 위의가 없고 또한 위 없는 지혜와 열반을 관찰하지 않는 이라고 말해야 한다. 선인(仙人)의 법을 얻으면 그를 위대한 선인[大仙人]이라고 말한다.
처음 가섭(迦葉)은 수면(睡眠)에 있었으나
가장 수승하여 욕심이 없었다.
이미 넷의 가사(袈裟)를 설명했고
모두 단멸하여 다시 나지 않네.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를 배워 지혜 없음에 이르고
항복하여 아주 견고하게 만들며
유루(有漏)가 모두 없어졌으니
그를 범지(梵志)라고 말하네.
말씀하신 그 내용은 무엇인가?
「존자대가섭계경(尊者大迦葉契經)」에서 말씀하신 말이니, 스스로 법을 지니는 비구로서 지혜를 배운 슬기로운 이는 범행(梵行) 지키는 이에게 배우고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이로서 법을 얻고 몸을 수양하니 그것 역시 법이며 계율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이는 잘 알아서 그 중간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마음을 수행하여 깨달아 비추며 두 해탈에 머문다.
그는 잘 생각하여 무명(無明)과 애욕이 없어지고 눈 감관을 해탈하려고 하므로 그것이 사문의 법이니 그러므로 번뇌가 다하여 애욕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범지가 되었다고 말하나니 세존께서는 곧 위대한 범지로서 마음의 때가 이미 다 없어지셨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는 애욕이 있지 아니하나니
애욕이 있으면 큰 두려움이 있다.
애욕에서도 물러나는 일 없으면
그를 열반이 된다고 말하네.
말씀하신 그 말의 내용은 무엇인가?
[답] 지혜와 상응하여 고요해지고 스스로 그것으로써 즐기고 근심 걱정이 없는 그것을 “비구는 애욕이 없다”고 말한다. 일이 없어 청정함은 고요한 사실이고 괴로움은 애욕이 있기 때문이니 저 법을 본 이는 그것을 능히 깨달아 아나니, 그를 “애욕이 있으면 큰 두려움이 있다”라고 말한다.
“애욕에서도 물러나는 일 없다”라고 함은 온갖 때[垢]를 버리고 착한 일이 차츰 더하는 것과 상응함이니 그를 3매(昧)라고 말한다. 온갖 결박이 없어지고 성현의 도를 깨달으면 그를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자삼매(慈三昧)에 들면 그를 상해하지 못한다”고 하는가?
어떤 이는 “모든 하늘들이 그를 호위하여 그의 몸을 보호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 삼매란, 한가하고 고요하여 사고가 없으므로 해침이 그의 몸에 미치지 아니하며 몸도 무너짐이 없다”고 말했다.
또 색계의 4대(大) 몸을 받은 것이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사슴은 들로 돌아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돌아가며
법은 분별에 돌아가고
나한은 열반에 돌아간다.
분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답] 배우는 이를 분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나니 능히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인식을 분별하며 성현의 도까지도 모두 다 분별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생각이 없는 데에 생각이 있고
생각에서 생각이 있지 않나니
그와 같은 변역색(變易色)에서
생각으로 반연해 그 수효가 있다.
변역색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이는 “무색계에 태어난 아나함(阿那含)을 응당 변역색인 생각이라고 말할 것이니 그는 곧 물질[色]을 변역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아라한(阿羅漢)도 그 중에 또한 변역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아라한은 5음(陰)에서 변역하는 바가 있지 않나니 그 수행이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으로 세존께서 조달(調達)을 침을 먹는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떤 이는 “그 때에 조달이 방편을 부려 모든 승가(僧伽)를 파괴하려고 하였으므로 세존께서 그를 꾸짖은 것은 비구들의 뜻이 동요될까 염려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아주 악한 사람을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써 가르쳐 보이셨으나 그가 자주자주 기회를 노리면서 성인 몸[聖躬]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 그의 뜻을 거스리어 부드러운 말로 가르치신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조달이 본래 큰 신통이 있어서 작은 아이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금실[金縷]을 허리에 두르고 아사세(阿闍世) 태자의 품 안에 들어 이리저리 재롱을 부렸다. 그 때 아사세 태자가 그를 안고 희롱하면서 입을 맞추고 침을 빨도록 하였는데, 그 때 조달도 또한 그의 침을 먹었으며 태자도 또한 그가 조달인줄 알았다. 그 때 세존께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 사문(沙門)의 마음에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침을 먹는 자식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조달은 먼저부터 착한 뿌리[善根]가 끊어졌는데, 어찌하여 승가(僧伽)를 파괴한 후에야 그 착한 뿌리가 끊어지게 되었는가?
어떤 이는 “조달은 본래 착한 뿌리가 끊어졌는데 그 후에도 승가를 파괴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에게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고 말하였으니 그러한 맹세로 말미암아 승가를 파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 지금 승가를 파괴함으로써 나쁜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조달이 먼저 승가를 파괴하고서 그 후에 착한 뿌리가 끊어진 것이요, 착한 뿌리가 끊어져서 승가를 파괴하거나 그 겁수(劫數)의 죄를 보상한 것은 아니다. 설령 그가 선과 악의 과보가 없다고 말했더라도 착한 뿌리가 끊어져서 그릇된 짓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승가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착한 뿌리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면, 나쁜 갈래[惡趣]에 가려고 한 짓인가? 세존께서도 또한 “나는 조달이 털끝만한 것이라도 착한 짓이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셨다.
또 조달이 승가를 파괴한 이후부터 착한 뿌리가 근본적으로 끊어졌다. 그가 “나는 구담(瞿曇) 사문과 여러 승가를 파괴하며 법 바퀴 굴리는 것을 끊어버리면 곧 기뻐서 날뛸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그를 마땅히 착한 뿌리가 끊어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로부터 온갖 나쁜 짓만 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뭇 승가를 파괴하여 착한 뿌리가 곧 끊어진 것이다.
어찌하여 착한 뿌리가 끊어지고서 착한 뿌리를 얻게 되는가?
어떤 이는 “만일 지옥에 나더라도 지옥의 고통 받는 것을 알아서 나는 이러한 죄를 지었기에 지금 그러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착한 뿌리를 얻는 것이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와 같이 지옥의 중음(中陰)을 받아도 곧 마음을 관찰하여 그러한 결과가 있으면 마땅히 착한 뿌리를 얻는다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현재법에서 혹 얻음이 있거나 저 선지식(善知識)에게 곧 뉘우치는 마음을 일으키면 차츰차츰 도에 이르는 것이다.
사슴의 장딴지라고 한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차츰차츰 올라가서도 크기가 고르고 일정하기 때문에 사슴의 장딴지라고 말한다.
7합(合)이 가득 차 있다고 한 내용은 무엇인가?
안의 맥이 평탄하고 바르며 구쇄골(鉤鎖骨)로 되어 있고 일곱 곳[七處]이 원만하고 평탄하게 되어 있으며 그 색깔도 변하지 않는 것을 7합이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사자의 볼이라고 하는 그 내용은 무엇인가?
몸이 높거나 낮음이 없고 앞으로 쏠리지 아니하는 그것을 사자의 볼이라고 말한다.
맛과 맛을 안다고 하는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부드러운 것과 미묘한 것으로서 모든 맛을 다 아는 그것을 맛과 맛을 안다고 한다.
어진 이 기르지 않음과 두려워함과
인자함과 그리고 나아갈 바이며
생각 없음과 생각 있음과 침이며
옛적에는 어떠한 모양인가 함이네.
무슨 까닭으로 새와 짐승들이 옛날에는 모두 말을 했었는데, 지금에는 능히 말하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그 때에는 사람이 죽어서 곧 축생(畜生)이 되었기에, 그 전에 익힌 것으로써 능히 말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지금에 사람이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난 것도 또한 능히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떤 이는 “먹는 것이 사람과 다르지 아니했는데, 지금에는 그러한 먹음이 있지 아니하고 4대(大)가 변경되고 달라졌으니 그러므로 능히 말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미묘한 음식을 먹으면 능히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옛적에는 사람들이 투쟁하거나 송사하거나 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축생들이 사람을 보아도 또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과 함께 살면서 그 말소리를 들었으니 그러므로 능히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지금에도 축생으로 태어난 것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능히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지금에 또한 능히 말할 수가 있으나 다만 해득할 수가 없다. 만일 음향이나 변재를 얻으면 곧 말을 해득할 수가 있다. 그 오랑캐의 말을 해득하지 못함과 같은데, 만일 두 말을 다 해득한다면 그는 곧 능히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옛날 사람은 음향과 변재를 얻어서 곧 능히 알았는가?
또 축생으로서 문자(文字)를 아는 것을 보지 못했다. 혹 앵무새와 원앙은 음향을 듣고서 곧 알기도 한다. 그러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은 틀림없지만, 슬기로운 이가 말한 바를 사람에게 알도록 하는 그러한 사실만은 그렇지 않다.
정진하는 이가 어떻게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는가?
어떤 이는 “아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 이는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를 범할 뜻이 없다고 함이니 그러므로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공덕의 힘을 얻은 것이 잠자는 중에도 착한 뜻을 변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는 곧 ‘나는 목숨이 마칠 때에 좋지 못한 과보가 있어도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진실하지 못한 생각으로 나쁜 갈래에 떨어지나니 또한 나쁜 생각을 내지 않고 거기에 많은 중생이 있어도 나는 그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는 이러한 방편으로 능히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없다. 세존께서 또한 ‘그와 같이 정진하는 이는 깨달아 아나니 또한 자기가 나아갈 바와 자신이 어디에 태어난다는 것을 알며, 나와 같이 정진해서 나아갈 바를 아는 것이 칼로 자신을 살해하거나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했다.
[문] 정진하면 알기는 하지만, 부처님처럼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
또 만일 교계(敎戒)가 있어도 그 교계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나는 나 또한 제 4선(禪)을 얻지 못하고서도 마음에 열반이라는 생각을 두면 3악도(惡道)에 나아가고 7처(處)를 멀리 떠나는 수가 있다. 「대행분별계경(大行分別契
經)」에서도 또한 그러한 말씀을 하셨으니 “마음이 더럽고 혼탁한 중생은 나쁜 갈래에 나아간다”고 하셨다.
세존께서 또한 “백 년 동안 살면서 구족계(具足戒)를 받들더라도 그 계가 부실하면, 능히 나쁜 짓을 뽑아버리지 못하고 사도(邪道)에 떨어진다. 6사(師)의 핍박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구리(拘利) 사람들을 데리고 나쁜 길에 들게 함이니 그를 악(惡)이라 이른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첫째가는 정진을 얻고 그가 또한 세존을 잘 믿으면 나쁜 갈래의 법이 있더라도 그의 지혜는 자재로울 것이다. 삿된 정[邪定]을 가진 그는 모두가 삿된 소견을 성취하는가? 만일 삿된 소견을 성취하면 그는 모두가 삿된 정을 성취하는가?
어떤 이는 “정(定)이 삿된 이는 모두가 삿된 소견을 성취한다. 만일 삿된 소견을 성취하면 그는 모두가 삿된 선정을 성취하거나 5역(逆)이 삿된 소견이 되고 삿된 선정을 성취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삿된 소견을 이룬 사람은 모두가 삿된 정을 이룬다. 혹시 삿된 정을 이루고도 삿된 소견을 이루지 않는 이가 있고, 착한 뿌리를 끊고서도 5역을 이루지 않는 이도 있다”고 말했다.
또 모든 정(定)과 삿된 소견을 지닌 이는 모두가 삿된 소견을 준다.
삿된 소견을 성취하고도 그가 삿된 선정이 아닐 수도 있는가? 생각이나 마음이 삿된 소견을 이루고도 모든 선정과 소견은 모두 평등한 소견을 성취하는 수가 있는가? 만일 평등한 소견을 이루면 그는 모든 정(定)도 평등한 소견을 갖게 되는가?
어떤 이는 “모든 선정이 평등한 소견을 가지면 그는 모두 평등한 소견을 성취한다. 만일 평등한 소견을 성취하면 그의 선정은 평등한 소견이다. 현성(賢聖)의 도는 곧 평등한 소견이니 저 정은 평등한 소견을 성취한다”고 말했다.
또 모든 선정이 평등한 소견을 지닌 그는 모두 평등한 소견을 성취한다.
평등한 소견을 성취하고서도 선정이 평등한 소견이 아닐 수도 있는가? 평등한 마음에서 마음과 생각 모두가 평등한 소견을 성취하는 상류(上流)들은 저 모두가 아가니타(阿迦尼吒)이다. 만일 아가니타 처이면 그는 모두가 상류들인가?
[답] 혹은 상류이면서 아가니타처가 아니기도 하고, 혹은 아가니타처이면서 상류가 아니기도 하며, 혹은 상류이면서 아가니타처이기도 하고, 혹은 상류도 아니며 아가니타처가 아니기도 하다.
어떤 것이 상류이면서 아가니타처가 아닌 것인가?
만일 아나함(阿那含)이 색계에 나서 위의 일을 기억하면, 정하지 않은[不定] 아가니타이다. 만일 욕계에 태어난 아나함이 무색계에 나서 위의 일을 기억하거나 욕계에서 난 것을 기억하면, 그를 상류이면서 아가니타처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아나함이 색계에 나서 위의 일을 기억하면, 아가니타에 정해져 있는 것이니 그를 상류인 아가니타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상류(上流)도 아니고 아가니타도 아니라고 하는가?
[답] 위의 사실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곧 그런 내용이다.
무슨 까닭으로 아나함과 아라한은 겁(劫) 동안 머물러 이동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겁 동안 머무름이란, 세상에 회전하는 바가 되지 아니함이다”라고 말했다.
또 평등한 해탈[等解脫]을 얻은 유연(柔軟)한 하근(下根)은 초월하여 위에 머무나니 그러므로 평등한 해탈은 또한 더하지도 않고 또한 줄어들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머물러 이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나함은 마땅히 머무른 후에 서원(誓願)을 얻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범부인 사람을 마땅히 착한 마음으로 목숨을 마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착하지 않은 마음으로 목숨을 마친다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무기(無記) 마음으로 목숨을 마친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착하지 않은 마음으로 목숨을 마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착한 마음으로써 머무는 곳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죽으려고 할 적에는 착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얻고서 돌이켜 본다”고 하셨으니 그것은 경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는가?
어떤 이는 “만일 나쁜 갈래에 태어날 자는 착하지 못한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게 되고, 만일 천상에 날 자는 착한 마음으로 목숨을 마치며, 최후 마음[最後心]에 머물러 수생(受生)할 이도 또한 그와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무기 마음[無記心]은 스스로 몸 안에 머물러서 정해진 보수(報數)가 있어 끝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만일 착한 법을 닦지 아니했으면 착한 법을 닦지 아니했으므로 후심(後心)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또한 없어지지도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무기 마음으로 목숨을 마친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그러한 말을 하면 반드시 죽는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니 그 때에는 마땅히 목숨을 마치고 피할 곳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아라한은 최후에 착한 마음을 얻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스스로 마음에 머물러서 그 과보를 받고 마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때에는 착한 마음이 없나니 그러므로 착한 마음을 얻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만일 착한 일을 닦았더라도 목숨을 마칠 때는 또한 그 착한 마음에 머무르지 않는다.
또 저 마음이 무기(無記) 본행(本行)에 의지해 쉰다.
또 세존께서 “함께 살아본 후에야 알 수 있나니 혹은 그 안색이 평화롭고 기쁜 것임을 알지 못하는 수가 있다”고 말씀하신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저 사람이 자기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가볍게 그를 신용하여 남의 말을 신용하고 잘 받아들여 비록 안색이 기뻤다가도 손가락 튀기는 순간에 그를 믿어 좋아하며 알고 받아서 위의(威儀)와 예절이 있는 몸이 고요한 것을 좋아하여 기쁨을 얻기도 한다. 밖으로는 치밀하지 못한 것 같고 안으로는 간사한 짓을 품으며, 만일 설법할 적에도 옳지 못한 변재와 법답지 못한 변재를 지니어 그와 같이 진실하지 못하면 그를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또 둘의 등신(等信)ㆍ등계(等戒)ㆍ등문(等聞)ㆍ등지혜(等智慧)ㆍ등시(等施)이기도 하다.
현재전(現在前)할 때에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위대한 과위이며 둘이 함께 청정하고 하나가 함께 청정함인가?
어떤 이는 “두 가지 분별[二分別]이 함께 청정함이니 세존께서 또한 ‘저 비구와 보시하는 집에 둘다 함께 청정한 그것이 단월(檀越)의 첫째가는 덕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문] 어떤 것이 두 뜻인가? 혹은 큰 과[大果]이기도 하며, 혹은 큰 과가 아니기도 한가?
[답] 밭이 좋고 좋은 곡식 종자와 같나니 밭이 좋으니 저 곡식 종자가 좋은 것과 같다.
[문] 밭과 같고 곡식 종자와 같다. 그러나 때[時]를 따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동일하기가 어려운가?
어떤 이는 “둘다 함께 청정하면 벌써 청정함을 얻는다. 그와 같은 보시를 하면 마음에 있는 인연으로 과보의 진실을 얻는다”고 말했다.
[문] 만일 보시함이 수승하면 곧 보시가 평등함이 없을 것이니 마땅히 평등한 보시를 말해야 할 것이다.
또 두 과보가 평등한 것임을 헤아려 평등한 생각으로 행해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저 보시는 둘다 함께 청정하여 과보 진실이 있다.
[문] 위에서 세존의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저 비구에게 둘다 함게 청정하며 단월은 첫째가는 보시이다”라고 하신 그것과 곧 어긋난다.
[답] 많은 두 가지가 함께 청정하며 뜻으로 생각하는 행(行)이 또한 청정하고 마음과 뜻이 평등하매 과보 또한 평등하다.
[문] 어찌하여 살해하는 벌레에서 청정한 법이 생기게 되는가?
어떤 이는 “나라의 풍속이 친우와 벗으로 하여금 뜻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 물결에 움직이는 것과 같다. 세속에 평등한 이는 그가 청정한 행이 있는 자이니 혹은 수행의 과보로써 곧 청정한 행[淨行]에 머무르게 된다. 살해하는 짓을 하면 거기에 나게 되나니 그 중간에서 행했던 과보로 곧 재앙을 받는다.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여 그 법을 받아 지니고 오로(惡露)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그와 같은 것이 살해하는 사람인가?
[문] 어찌하여 청정한 사람에게 검은 법[黑法]이 생기는가?
어떤 이는 “이웃 나라의 풍속이 친우와 벗으로 하여금 그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물결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저 착하지 못한 이거나 청정한 수행을 하는 이가 혹 수행하는 과보로써 착하지 못한 행을 끊어버리고 청정한 수행을 얻으며 그가 태어나는 중간에서 곧 수행의 과보를 받는다. 저 선지식 아닌 이에게 친근하여 좋지 못한 법을 듣고 또한 오로의 행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와 같은 것은 청정에서 곧 검은 법이 생긴 것이다.
또 세존께서 “두 법을 성취하나니 착함이 있지 않고 스스로 정진하지 않거나, 저 정진에서 확고하게 물러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떤 것이 저 정진에서 확고하게 물러나지 않는 것인가?
어떤 이는 “5법(法)으로써 안에서 스스로 살피고 저 정진에서 확고하게 물러나지 않는다. 만일 온갖 위반되는 일과 함께 상응하면 곧 무너짐이 있다”고 말했다.
또 저 비법(非法)을 배워 법에 맞지 않게 범한다. 보기 드문 여의법(如義法)은 그러하지 않다.
무슨 까닭으로 세존께서 성문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떤 이는 “미묘한 법을 나타내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성문의 위의(威儀)를 나타내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법을 옹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모든 비구들에게 용맹한 뜻을 내어 등행(等行)이 구족하도록 하기 위하심이다”라고 말했다.
또 두 가지 인연 때문에 세존께서 성문이 제일인 제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수기를 주시는 내용을 보이시는 까닭이며, 저 해탈에서 변화를 나타내신 까닭이다.
축생이 말함과 정진함과
상류(上流)의 머물러 물러나지 않음이며
범부들의 그쳐 머무름인 그것과
보시에 공양하는 것들의 내용과
검거나 흰 계행 없는 사람이며
이 제자가 제일이라고 함이다.。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6 계경건도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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