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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대안반수의경 하권
[깨달음과 아는 것]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깨닫고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아니, 바로 그 때가 각(覺)이 되고 그 다음이 지(知)가 된다.
각(覺)은 숨의 길고 짧음을 깨닫는 것이요,
지(知)는 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거칠고 미세함과, 더디고 빠름을 아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진(盡)과 지(止)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날숨과 들숨을 깨달아 때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진(盡)이 되고,
또한 만물과 몸이 생겨났다가 다시 멸함을 헤아리는 마음은 의지(意止)가 된다.
공(空)을 보고 관(觀)한다는 것은,
도를 행하여 관(觀)을 얻어서 다시 몸을 보지 않아 문득 공(空)과 무소유(無所有)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뜻에 집착한 바가 없는 것이다.
뜻에 집착한 바가 있으면 이로 인하여 소유(所有)가 있으니, 6입(入)을 끊으면 문득 현명(賢明)을 얻을 것이다.
현(賢)은 몸을 말하고, 명(明)은 도를 말한다.
어느 곳에서 나오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비유컨대 돌을 생각하다가 돌에서 나와 나무에 들어가면 돌은 곧 소멸하듯이 5음(陰)도 또한 그러하여,
색에서 나와 통양(痛痒)에 들어가고,
통양에서 나와 사상(思想)에 들어가며,
사상에서 나와 생사에 들어가고,
생사에서 나와 식(識)에 들어가니,
이미 이것을 분별한다면 마침내 『37품경』을 따를 것이다.
무엇이 무위도(無爲道)를 사유(思惟)함인가?
사(思)는 헤아리는 것이고, 유(惟)는 듣는 것이며,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설한 대로 행하는 것이며,
도(道)는 얻음이 되기 때문에, 무위도(無爲道)를 사유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흑백(黑白)을 분별함이 되며,
흑(黑)은 생사가 되고, 백(白)은 도가 되며,
도는 소유가 없는 것이니, 이미 소유가 없음을 분별했다면 곧 소유가 없는 까닭에 무위도를 사유한다고 말하지만,
만일 소위(所爲)와 집착한 바가 있다고 계교(計校)한다면, 사유가 아니다.
사(思)는 또한 물(物)이 되고 유(惟)는 뜻을 이해함이 되니, 뜻을 이해하면 문득 12인연의 일을 알게 된다.
또한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헤아림이 된다.
[4신족]
생사를 끊고 신족(神足)을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생(生)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사(死)가 되니,
신족(神足)을 얻은 이는 능히 날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족을 얻음에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희(喜),
둘째는 신(信),
셋째는 정진,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통(通)이다.
4신족에서 염력(念力)이 다하지 않으면 5통(通)을 얻고,
염력이 다하여 자재(自在)로우면 6통으로 향하니,
도인(道人)으로서 4신족을 한다면 5통을 얻고,
뜻을 없앤다면 가히 6통을 얻을 것이다.
뜻을 없앤다는 것은, 이른바 만물을 뜻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는 신(信),
둘째는 정진(精進),
셋째는 의(意),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지혜[黠]이니,
이 다섯 가지가 4신족이 되고, 생각이 힘이 되는 것은 여섯 가지 일이다.
신(信)을 따르는 것은 4신족념(神足念)에 속하며,
희(喜)를 따르고 정진을 따르고 정을 따르고 지혜를 따르는 것은 5근(根)에 속한다.
희정(喜定)에 따름을 도를 믿는다고 하고,
역정(力定)을 따름을 정진이라고 하며,
의정(意定)을 따름을 의념정(意念定)이라 하고,
시정(施定)을 따름을 도를 행한다고 한다.
종자가 되기 때문에 뿌리가 있으니,
함이 있는 것은 모두 악이 되므로 문득 상(想)이 생긴다.
능히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선(禪)을 얻음은 바로 인(因)이 힘이 되며,
또한 악이 능히 선한 뜻을 이기지 못함을 말한다.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힘이 되니,
역정(力定)이란 악한 뜻이 오려고 해도 능히 선한 뜻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역정이 되는 것이다.
[4성제]
도인이 도를 행하여 아직 관(觀)을 얻지 못했으면 마땅히 관을 얻기를 계교(計校)할 것이니,
있는 곳에서 뜻을 관하되 다시 굴리지 않는 것이 관을 얻음이 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좌선(坐禪)하여 두 가지 법을 관하니,
때로는 몸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을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헐떡거리는 숨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有)를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무(無)를 관하기도 하니,
인연이 있는 곳에서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두 가지 법을 관하면, 악은 이미 없어졌다.
멈추어 관한다는 것은,
도를 관하는 것이니,
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도를 보지 못하며,
악이 이미 없어져야 마침내 도를 관함을 얻는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춤이 악을 앎이 되니,
일체를 능히 제어하여 뜻에 집착하지 않음이 멈춤이 되며,
또한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된다.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바로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는 것이 되니,
악이 이미 멈추면 문득 관(觀)을 얻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을 관함이 되며, 4제(諦)를 얻음이 되며, 정(淨)을 행함이 된다.
마땅히 다시 정(淨)을 지어야한다는 것은,
고(苦)를 알아 습(習)을 버리고 진(盡)을 알아 도를 행하는 것이니,
마치 해가 돋을 때에 청정함이 12문(門)에서 굴러 나옴과 같기 때문에 경(經)에서 도(道)를 좇아 해탈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보는 것이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으니,
비유컨대 해가 돋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서 모든 어둠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어둠이 고(苦)가 되니, 어떻게 고가 됨을 아는가?
걸리는[罣礙] 바가 많기 때문에 고(苦)가 됨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습(習)을 버림이 되는가?
이른바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증득함을 다함이 되는가?
이른바 소유가 없는 것이니,
도(道)는 고(苦)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습(習)을 끊고 증득함을 다하여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증득함을 다한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다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는 줄을 알아 증득하는 것이며,
만물도 모두 마땅히 없어지는 줄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증득함을 다함이 된다.
비유컨대 해가 돋아 네 가지 일을 지음과 같다.
첫째는 어둠을 파괴함이니, 지혜(慧)가 능히 어리석음[癡]을 파괴함을 말하고,
둘째는 소견이 밝음이니, 어리석음을 없애면 홀로 지혜만 있음을 말하며,
셋째는 만물의 색을 봄이니, 몸에 소유한 모든 악로(惡露)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만물을 성숙(成熟)함이니, 만일 해와 달이 없으면 만물이 성숙하지 못하듯이 사람도 지혜와 어리석음이 없으면 뜻이 또한 성숙하지 못한다.
위의 행을 다 행한 이는 행할 바의 일이 이미 행하여졌으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5직성(直聲)을 행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행을 얻은 것이다.
제(諦)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고,
제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생각하는 바에 붙어 있으면,
이것이 문득 생겨나 생사를 구하고,
생사를 얻어 도를 구하며,
도를 얻어 안과 밖으로 행을 따라 뜻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4제(諦)를 좇아 저절로 뜻이 생겨남을 안다면,
이것은 마땅히 태어나지 않고 얻을 수 없음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곧바로 뜻을 제거하여 두려워서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이고,
행하는 바와 생각하는 바가 항상 도에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음이 된다.
이것을 법정(法正)이라고 하니, 제(諦)의 근본을 좇아 근본을 일으켜 뜻에 붙어 있는 것이다.
법정(法正)이란 도법(道法)을 말하고,
제(諦)를 따른다는 것은 4제의 근본에서 일어남을 말하며,
뜻에 붙어 있다는 것은 향하는 바의 생사와 온갖 일이 모두 본래 뜻을 좇아 일어남을 말한다.
뜻에 붙어 있으면 곧바로 5음(陰)이 생기므로 일으킨 바의 뜻을 마땅히 끊어야 하니,
근본을 끊으면 5음도 끊어지며, 때로는 저절로 끊어져 생각하지 않는다.
뜻이 저절로 일어나면 죄가 되고, 다시 도에 있지 않으면 죄가 되니,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제(諦)의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면 외법(外法) 가운데 떨어지게 되고,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법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생사법과 도법]
5음(陰)은 생사법이 되고, 『37품경』은 도법(道法)이 되니,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5음을 제어하여 범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항상 도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본래 바른 곳이라는 것은,
밖에 있으면 물(物)의 근본이 되고 복(福)이 되며 안에 있으면 모두 『37품경』이 되니,
도를 행함은 한 때의 실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한 바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37품경』의 법을 행하여 만약 차례대로 행을 따르면, 뜻이 사(邪)에 들어가지 않음이 바름이 되기 때문에 본래 바른 곳이라고 한 것이다.
본래 바른 곳은 각자 행이 다르니,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대(對)하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정(正)을 대하며,
무위(無爲)를 일삼음으로써 무위를 대하고,
영원하지 않음으로써 도(道)를 대하며,
무유위(無有爲)로써 대하니,
또한 소유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바름도 없는 것이 무소유(無所有)가 된다.
정각(定覺)으로 몸에 이와 같은 법을 받아들인다.
도설(道說)은 이른바 법정(法定)이니,
도설이라는 것은 좇아 온 바의 인연을 설하여 도를 얻음을 말한다.
음(陰)을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5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들어감이 있다는 것은 5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며,
인하여 생사음(生死陰)이 있다는 것은 정(正)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正)은 도가 스스로 바른 것이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바르게 할뿐이다.
사람들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숨을 세는 것을 얻고, 서로 따름을 얻고, 멈춤[止]을 얻어 문득 환희하지만,
이 네 가지는 비유컨대 나무를 비비면 연기는 날지라도 물(物)을 익힐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무엇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인가?
아직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안반수의에 열여덟 가지 번뇌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니,
첫째는 애욕(愛欲),
둘째는 성냄[瞋恚],
셋째는 어리석음[愚癡],
넷째는 재미와 즐거움[戱樂],
다섯째는 아만(我慢),
여섯째는 의심,
일곱째는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不受行相],
여덟째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
아홉째는 생각하지 않음이다.
열째는 엉뚱한 생각,
열한째는 불만스런 생각,
열두째는 과도한 정진,
열셋째는 미급한 정진,
열넷째는 놀래고 두려워함,
열다섯째는 뜻을 강제함,
열여섯째는 걱정,
열일곱째는 조급하게 서두름,
열여덟째는 뜻을 헤아리지 않고 행하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열여덟 가지 번뇌이다.
이 열여덟 가지 인연을 호지(護持)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니, 호지함으로써 문득 도를 얻는다.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32가지 물(物)을 관(觀)하지 않고, 『37품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받아서 행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열 번째 숨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서로 따름[相隨]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엉뚱한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들이쉴 때 내쉬는 숨을 생각하고 내쉴 때는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엉뚱한 생각이다.
불만스런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첫 번째 선(禪)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두 번째 선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만스런 생각이다.
뜻을 강제한다는 것은,
이른바 앉았을 때 뜻이 어지러워 숨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경행(經行)과 경을 읽어 어지러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뜻을 강제하는 것이다.
정진으로 지혜를 삼아 이 여섯 가지 일 가운데서 달릴 것이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이다.
무엇이 빠른 숨이고, 무엇이 느린 숨이며, 무엇이 기운이고, 무엇이 힘이며, 무엇이 바람인가?
제어하는 것이 뜻이 되고, 숨은 명궁(命宮)이 되고,
기운은 보고 듣는 것이 되며,
바람은 능히 말하는 것이 되니 도(道)를 좇아 굽혔다 펴지며,
힘은 능히 무거운 성냄[瞋恚]을 들어 올릴 수 있다.
반드시 수의(守意)를 좇아 도를 얻을 것이니, 무슨 연(緣)으로 수의를 얻는가?
세는 것으로부터 굴려서 숨을 얻고,
숨을 굴려서 서로 따름을 얻으며,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도 또한 그렇다.
도를 행함은 뜻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니, 마땅히 세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먼저 몸이 본래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관하고 생각하되,
다만 5음(陰)의 행으로부터 왔다면 5음을 끊어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니,
비유컨대 잠깐 동안 맡겨놓은 듯이 할 뿐이요,
뜻으로 풀지 않고 아홉 가지 도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증지(證知)한다.
둘째는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내관(內觀)하여 숨의 나고 듦을 따름이요,
셋째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다가 생각이 사라졌을 때 숨의 나고 듦이 조금 가벼운 것이다.
생각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소유(所有)가 없다는 것을 아는가?
뜻이 정(定)하면 문득 공(空)을 알게 되니, 공을 알면 곧바로 소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쉬는가?
쉬지 않으면 곧바로 죽기 때문이다.
몸은 다만 기(氣)가 지은 바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기가 없어지면 공(空)이 되고,
공을 깨달으면 도(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데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함이요,
둘째는 한 마음을 생각함이요,
셋째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함이다.
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의 통양(痛痒)을 멈춤이요,
둘째는 입의 소리를 멈춤이요,
셋째는 뜻의 염행(念行)을 멈춤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서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경(經)을 의거하여 말하건대 한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가까이 생각함을 몸을 헤아린다고 이르며,
많은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생각을 여의지 않음을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이르니,
몸소 이 네 가지를 행한다면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즉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복(福)이요,
마침내 안온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바로 미래의 복이며,
더욱 오래되어 계속 다시 안정된 것이 바로 과거의 복이 된다.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뜻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죄요,
마침내 안온하지 못하여 어지러운 뜻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미래의 죄며,
좌선하여 더욱 오래되었으나 마침내 안정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과거의 죄가 된다.
또한 몸의 잘못과 뜻의 잘못이 있으니,
몸은 바르되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뜻의 잘못이요,
몸이 굽어서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몸의 잘못이 된다.
좌선하여 스스로 깨달아 뜻을 정(定)할 수 있으니,
뜻으로 기뻐하면 뜻을 어지럽히고,
기뻐하지 않으면 도의 뜻이 된다.
좌선하여 생각과 숨이 이미 멈추면 곧바로 관(觀)하고,
관하여 멈추면 다시 숨을 행하니,
사람이 도(道)를 행하되 마땅히 이것으로 떳떳한 법[常法]을 삼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5신(信)을 설하셨으니,
첫째는 부처님이 계시고 경이 있음을 믿음이요,
둘째는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도(道)를 구함이요,
셋째는 앉아서 도를 행함이요,
넷째는 숨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뜻을 정(定)함이니, 생각할 바를 생각하지 않음도 공(空)이 되고 어려움[難]을 생각하지 않음도 공이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생각하는가?
숨에는 5색(色)과 탐음ㆍ진에ㆍ우치ㆍ애욕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몸 가운데 뜻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이른바 뜻을 몸에 두어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몸 가운데 뜻을 사람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헤아리게 해서 지혜로써 능히 뜻을 제어하고 다시 숨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과 증득하는 것]
무엇이 스스로 아는 것이며, 무엇이 스스로 증득하는 것인가?
5음(陰)을 능히 분별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아는 것이고,
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다.
[무위]
무엇이 무위(無爲)인가?
무위에 두 가지가 있으니,
밖의 무위가 있고 안의 무위가 있다.
눈으로 색을 보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코로 냄새를 맡지 않고, 입으로 맛을 맛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매끄러움을 탐내지 않고, 뜻으로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밖의 무위가 되고,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止] 관(觀)하며 돌이키고[還] 정(淨)하는 것이 바로 안의 무위가 된다.
현재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어찌 무위가 되는가?
몸과 입으로 계(戒)를 삼고 뜻으로 도행(道行)을 향한다면, 아무리 생각하는 바가 있더라도 본래 무위로 나아가게 된다.
무엇을 무(無)라고 하며, 무엇을 위(爲)라고 하는가?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경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일을 가르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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