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될고 하니 쓰레기 봉투나 되어
남진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수양대군 앞에서 의연하게 자신의 결기를 내보이며 대쪽 같은 지조를 시조로 읊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경남 고성이 고향인 현대시조시인 서 벌 선생 역시 무엇이 될고하니 하면서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
처연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웬일인가.
이제는
서 벌
무엇이
될고 하니
쓰레기 봉투나 되어
버려 버려진
것들 쓸어담아
가렵니다
진귀한
명품들일랑
나의 것 아니어서.
경남 고성이 고향인 서벌 선생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워낙 생활이 어려워 서울로 상경했지. 고향의 한 암자에 머물면서 한자와 한글을 익혔어.” 선생은 워낙 집안이 가난하여 무사독학無師獨學을 하신 것이다. 정선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이었다.
시조 작품을 써서 1965년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응모하여 당선한 이야기도 하셨다. 심사위원인 노산 선생이 결선에 오른 작품들을 읽어 보니 당선될만한 작품이 없었다고 하셨다. 노산은 예선 작품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였단다. 그중에서 뽑은 작품이 서 벌의 「낚시 심서」라고 하셨다. 이 작품을 뽑아 들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셨다고 하였다.
서 벌 선생은 본명이 서봉섭(徐鳳燮)이고 경남 고성에서 출생하였다. 1964년 『시조문학』에서 ‘연가’, ‘관등사’, ‘가을은’ 등이 추천되었다. 문우들 중에서도 선생의 뛰어난 기량이 돋보였다.
낚시 心書
서 벌
냇가에 나와 앉아 낚시를 드린 날은
하늘도 한가득히 못으로 고여 내려
임 생각 올 올 한 갈래 몇 천 가닥 낚시인가
불현듯 찌가 떨려 잡아채는 잠깐 사이
비늘 빛 눈앞 가려 아득한 천지간을 …
임이여 그렇게 들면 내 마음은 대바구니
저승도 내 먼저 가 설레는 물무늬로
이제나저제나 하며 이리 앉아 기다리리
그윽히 꽃수레 몰아 목넘어 올 그때까지.
낚시를 드리우는 강은 현실적인 강이라기보다는 마음속 그리움의 강이다. 그리움의 강물에 사랑의 낚싯대를 드리운다. 낚싯줄 한 가닥은 한 가닥이 아니라 임 생각의 몇 천 가닥의 낚싯줄로 변하였다.
유려한 언어의 가락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유연한 사랑의 노래를 시조로 엮어내는 솜씨가 어디 흔한 일이던가. 간곡한 마음의 정이 낚싯줄에 엉기어 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꽉 찬 날이다. ‘임이여 그렇게 들면 내 마음은 대바구니’라는‘ 종장의 멋들어진 표현은 가히 백미다.
사랑의 마음, 그것은 천지간도 하나요 이승과 저승도 둘이 아니다. 저승도 먼저 가서 설레는 물무늬로 기다리고 앉았다고 하였다. 임이 오시는 그 모습을 그리는 작자의 상장적 세계는 ’꽃수레 몰아오는 임의 모습‘이다.
내가 1980년 초, 서울에서 개최한 한국시조시인협회 모임에 갔을 때 서 벌 선생을 처음 뵈었다. 그때 문우들이 내게 서 벌 선생을 소개하였는데 시조단의 ‘맹장猛將’이러고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서울살이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까. 사람을 만나면 직장이아 일거리를 주선하는 것이 아니라 명함 만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적막한 서울살이 호주머니가 텅 빈 나날을 누가 그 심정을 알리요.
서울. 1
서 벌
내 오늘
서울에 와
만 평 적막을 사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 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 ….
이 시조를 서 벌 선생이 내게 들려주었을 때 나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였다. 지금에 와서 다시 읽으니 먹먹하여졌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삶의 아픔이 그대로 묻어나았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업이 얼마나 그리웠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교직이란 안정된 직업조차 차버리고 나오지 않았던가. 그 일이 얼마나 경거망동하고 철없는 행동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 둔 나 역시 그 후 온갖 생할의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어야 했으니 ….
아버지는 삶의 의기를 잃은 채 술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가 고성 장터에서 고기를 떼 파는 고통을 차마 어찌 보았으랴. 가난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어디, 서 벌 선생의 가족 뿐이었으랴. 많은 사람들은 가난속에서 살아갔으니.
한 가족의 고통스런 삶을 형상화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續思母曲
서 벌
고성 장터 생어물로 청춘 다 판 울 엄매야
독주로 쳐져 앉은 아버지 패망 때문에
모반은 늘 몇천 원어치 눈물 피땀이던가
눈만 뜨면 못산다고 벼락 치던 우레소리
사는 길 지름길이 그다지도 천리던가
무서운 그 울부짖음 뉘 산 메아리 됐노
시방도 고성 장터 이 다 빠진 울 엄매는
다닥다닥 생선 몇 손 千金으로 담아내고
다 못 헬 밀물결 안개 가명오명 울먹이리
생존을 위한 고통의 몸부림이 시조 「서울. 1」과 「속사모곡」에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선생의 시조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서정성에 기반한 단단한 언어의 형상력에 있다. 선생의 시를 읽으면 아프고 슬프면서도 자조적인 슬픔의 저 너머에 무욕의 자리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서 벌
무엇이
될고 하니
쓰레기 봉투나 되어
버려 버려진
것들 쓸어담아
가렵니다
진귀한
명품들일랑
나의 것 아니어서.
자유시의 형태로 행을 나눈 시조작품이다. 서 벌 선생의 말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글을 써서 어찌 부귀영달을 바라리. 서 벌 선생이 서울살이에서 느낀 건, 마음을 내려놓는 일일 것이었다. 그래서 쓰레기 봉투나 되겠다고 하신 것. 명품들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난하기에, 마음을 매려놓는 법을 배우셨으니 오히려 ‘가난’이 스승이 아니껬나 싶다.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엔 돌아가신 줄도 몰랐고 알아도 문상을 갈 형편도 못되었다. 2005년 역시 내겐 고통의 시간이었으니까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표현하여 시, 시조를 쓰지만 서 벌 선생처럼 정제되고 쉬우면서도 격이 높은 시조는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시조와 함께 한 안 생에 대해 사뭇 경건한 마음이 든다.
서 벌 선생은 1939년에 테어나서 2005년에 돌아가셨다. 우리 나이로는 66세이다. 나는 생전에 서 벌 선생을 세 번 만난 것 같다. 한 번은 서울의 시조협회 모임에서였고 또 한 번은 정선에 오셨을 때다. 정선문화원의 최문규 원장께서 서 벌 선생을 초청하였다. 그때 내려오신 선생은 시골 학교에 근무하던 내게 전화를 주셨다. 그래서 백리가 멀다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찾아가 뵌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강릉대학교 시조낭송 모임에서였다.
1980년대 초, 강릉대학에서 실시한 <중앙시조낭송과 강연회>에 이태극, 김남환, 서벌 선생이 오셨다. 나도 말석에 끼어 시조 낭송을 하였던 걸로 기억난다. 정선의 근무지에서 내려온 나는 서벌 선생과 한 방에서 오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이태극 선생이 내려오셨기에 당시 강릉문인협회 회장이신 김원기 시인이 잠깐 다녀가신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야 서 벌 선생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근량이 요것 밖에 되지 않음을 ….
(2023.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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