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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경 하권
9. 요계품(了戒品)[1]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경을 설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즐겁지 않는 세 종류의 사람]
“이 경을 설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즐겁지 않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계를 깨트린 비구이며,
둘째는 증상만(增上慢)인 사람이며,
셋째는 부정한 설법을 하는 자와 자아(我)에 탐착하는 자이다.
이 사람은 이 실상(實相)에 수순하는 깊은 경을 멀리 떠나고, 나면서 장님인 무리가 구족하고 충만하다.
이 까닭에 사리불아, 나는 이 경으로써 거듭 너에게 부촉한다.
왜냐 하면 이 경은 여래가 멸한 뒤에 능히 청정한 계를 지닌 비구로 하여금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깊은 경은 청정한 계를 지닌 자가 항상 거두어 지니는 것이며, 계를 훼손하는 자는 항상 멀리 떠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진실하고 바른 말을 설함을 듣고서 곧 이로써 괴로움을 삼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계를 깨트린 비구가 이루는 모양에 대해서는 여래가 이미 자세하게 설하였다.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의 법은 마땅히 계율을 지닌 율의(律儀)의 생활을 즐기지 않으며,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를 기뻐하지 않으며,
간탐(慳貪)의 사람은 보시를 설하는 것을 듣기를 바라지 않으며,
증상만(增上慢)인 자는 이 교만함이 없는 법을 듣기를 바라지 않으며, 만약 들으면 마음은 곧 근심하고 고뇌한다.
만약 즐겨 외도의 경서(經書)를 읽는 자는 곧 그 중에서 내용이 굳어버린 생각을 내고, 말에 탐착하는 자는 즐겨 산란(散亂)함을 설한다.
글을 꾸미고 말을 아름답고 교묘하게 꾸미는 것을 즐기는 자는 부처의 제일의(第一義)에 대해 곧 맑은 마음이 없다.
또 이 법에 대해 공경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완전한 남성(男性)이 아닌 사람은 남자로써 쓸모가 없고 남자 가운데 이르러서는 남자가 아닌 생각을 내며, 그러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이 여러 사람들은 나와 같아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즐겨 외도의 경서에 집착하는 자는 항상 즐겨 글을 교묘하고 아름답게 꾸미며, 부처의 제일의에 대해서는 마음에 공경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청정한 경을 설하면, 이 사람은 그 곳에서도 또한 공경하지 않고 청정한 계를 지닌 비구를 가벼이 여긴다.
왜냐 하면 사리불아, 외도의 경서에는 진실한 말이 없고, 외도의 법은 마땅히 교만하고 높이 받들고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이 일을 염리(厭離)라고 하지 않으며, 적멸(寂滅)이라 하지 않으며, 도를 얻음이라 하지 않으며,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 사람은 믿음 등의 선근(善根)을 훼손하는 까닭에 일체처(一切處)에 공덕이 있음을 믿지 않고, 완전하지 못한 남자가 여러 사람 가운데서 모두가 자기와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천적 장님의 비유]
사리불아,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이 여러 가지 빛깔, 이른바 검은 색, 흰색을 보지 못함과 같다.
검고 흰색을 보지 못하는 자는 좋은 색을 보지 못하며, 나쁜 색을 보지 못하며,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홍(紅)ㆍ자색(紫色)과 옥색[縹色]을 보지 못한다.
길고 짧고 거칠고 가늘고 깊고 얕은 색들을 보지 못하고 해와 달과 별들을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장님은 곧 이러한 생각을 한다.
‘검고 흰색이 없으면 검고 흰색을 보는 자가 없다.
좋고 나쁜 색도 없다.
청색과 황색과 자색과 옥색과 길고 짧고 거칠고 가늘고 깊고 얕으며, 해와 달과 별의 색이 없으면, 내지 해와 달과 별을 보는 자가 없다.
다른 사람도 모두 또한 이와 같다.’
장님의 마음은 전도되어 일체처 모두에서 어두움을 말한다.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와 증상만인 사람과 외도의 논(論)에 떨어진 비구도 또한 이와 같아서 깊은 불법에서 마음으로 믿지 않고 즐겁지 않으며 통달하지 못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여러 사람은 너희들을 두려워해서 삿된 경계의 안에 들어가 정법을 얻지 못한다. 이 정법을 가져 이름하기를 진실한 사문(沙門)이라고 한다.
네가 얻은 법을 이 사람이 믿지 않음이 마치 장님이 검고 흰색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
[들여우와 사자의 비유]
사리불아, 이 사람은 이와 같이 삿된 경계 안에 들어 외도의 논을 구하고 온갖 번잡한 말을 즐기며 번뇌와 나쁜 성품과 나쁜 법을 증장(增長)한다.
이 사람은 모든 법의 공함을 믿지 못한다. 하물며 통달함이겠느냐?
사리불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들여우가 사자가 되어 전에 짖듯이 지금 짖는다면 마땅한 짖음이라 하겠느냐?
사자의 행을 짓되 지금 행함을 전처럼 행한다면 마땅한 행이겠느냐, 아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들여우의 몸[色]과 힘과 음성이 사자에게 미치지 못한다. 들여우는 다만 능히 들여우의 소리를 낼 뿐이다.
만약 소리를 내고자 하면 다만 들여우의 소리를 낼 뿐이다. 사자의 소리가 아니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와 증상만(增上慢)인 비구는 스스로 이 일을 가져 으뜸으로 삼고,
부정한 설법자는 니건자(尼犍子)의 논(論)을 받고, 만약 하나의 일을 잡으면 굳게 지니어 버리지 않는다.
세속의 이익을 탐하고 귀히 여기고 경서(經書) 읽는 것을 즐긴다. 모든 법의 실상에 통달할 수 없다.
만약 능히 상(相)이 없는 법을 믿고 받는 자는 이러할 리가 없다.
[비구 중의 용]
사리불아, 만약 나이 든 어떤 비구가 덕이 있으면 비구 중의 용(龍)이며 깊은 지혜가 있다.
이 사람은 능히 소유(所有)함이 없고, 상이 스스로 공한 법과 무아(無我)의 법과 무인(無人)의 법을 믿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온갖 번잡한 말을 즐기지 않고,
독경하고 잠자는 일이 많은 것을 즐기지 않으며,
속인을 위하여 사무를 집행하거나 경영하지 않으며,
사명을 띠고 문서를 갖거나 보내지 않으며,
의술을 행하지 않으며,
의술(醫術)의 처방을 잃지 않으며,
판매하지 않으며,
세간의 언어를 논설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다만 즐겨 출세간(出世間)의 말을 설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사람은 일체 법의 공(空)을 믿는다.
일체 법의 일어나지 않음과 무너지지 아니함에 있어서 이 사람은 곧 진실한 경계를 증득(證得)한다.
곧 능히 여실하게 바른 사자후(獅子吼)를 한다. 들여우의 짖음이 아니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외도의 경의 뜻에 집착하면, 이 사람은 미묘한 불법을 버리고 외도의 언어를 외우고 지닌다.
대중을 위하여 설하나, 다만 들여우의 짖음을 지을 뿐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악인을 이름하여 썩고 무너진 사문이라 한다.
왜냐 하면 이 외도의 뜻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외도의 법에 집착하는 비구는 마땅히 스스로 부처의 제자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사문과 석가모니의 후손은 니건자의 말을 설하지 않으며,
대중 가운데서 오직 부처의 말을 설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부정(不淨)한 말에 집착하여 사자후를 하고자 원하면 다만 들여우의 울음을 낼 뿐이다.
이 사람은 불법의 제일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법, 모든 법의 실상은 끝내 공적하다]
사리불아, 나는 지금 명료하게 너에게 말한다.
만약 사람이 지계와 선정과 지혜를 구족하고 간탐하지 않으며,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아첨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고, 말은 반드시 진실하고 항상 홀로 있는 곳을 즐기고,
잠자는 것을 즐기지 않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의 행을 즐기며,
탐욕을 떠난 마음을 내어 불법의 제일의를 이해하고,
세간의 말을 좋아하지 않아 출세간의 말을 즐기며,
모든 계를 남김없이 지니고, 일체의 나쁜 일과 악지식(惡知識)을 모두 멀리 떠난,
이와 같은 법에 머물면 곧 능히 공과 소유가 없음을 이해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행을 이름하여 대인(大人)의 행하는 바라고 한다.
이는 이익을 탐하고 즐기는 소행이 아니며,
이는 어리석은 보통 사람의 소행이 아니며,
이는 술지게미와 같은 사문의 소행이 아니며,
거짓 이름만인 사문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모든 법의 실상은 끝내 공적(空寂)하여 이것이 곧 불도(佛道)이다.
세간의 재리(財利)를 좋아하고 탐하여 부정한 것을 설하는 자가 미칠 수 없는 곳이다.
사리불아, 이 땅을 곧 지혜를 가진 자의 땅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외도가 탐하고 즐기는 땅이 아니며,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을 설하는 자의 땅이 아니다.
[잘못된 견해]
사리불아, 만약 진실로 자아가 있고 사람이 있다면 자아와 사람을 설하는 자에게 마땅히 실상이 있어야 한다.
마땅히 여실하게 물어야 한다.
만약 자아가 있다면 이를 무슨 색(色)이라고 하겠는가?
청(靑)인가, 황(黃)인가, 적(赤)인가, 백(白)인가?
몸 안에 있다 하겠는가, 몸 밖에 있다 하겠는가?
몸에 있기를 기름이 마(麻)에 있음과 같다고 하겠는가?
사리불아, 마 가운데 기름이 있으면 나와야 하고 나타나야 한다.
만약 자아가 안에 있어서 자아가 있음을 설하는 자는 마땅히 설할 것이며 나타내야 한다.
마(麻) 안으로부터 기름을 내고 기름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제일의 중에는 자아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아가 있고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이 사람은 더욱 사문에게 계(戒)가 없음과 같다. 하물며 사문의 지위이겠느냐?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삿된 것에 탐착하는 자는 이른바 아(我)에 집착함이며, 중생에게 집착한 것이며, 수명(壽命)에 집착한 자로서 곧 가장 타락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와 같이 삿된 것에 탐착하는 까닭에 더욱 이익을 탐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한다. 하물며 미세한 번뇌이겠느냐?
사리불아, 공에 통달한 자가 만약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이익에 덮인다 해도 이러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리불아, 나의 마음[心]을 헤아리는 자는 수명이 있다고 말한다. 수명은 인연 때문이며 곧 이익 때문에 이끌리어 도(道)를 장애한다.
사리불아, 아견(我見)을 가진 자와 인견을 가진 자는 나의 법에 출가하여 도를 위한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는 청정한 가운데서 출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니건자(尼犍子)의 출가는 모두가 자아와 마음을 헤아려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소득이 있는 자는 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항상 이 견해가 있었다.
만약 출가할 수 있다 하여도 아직 유(有)를 끊지 못한다.
이를 외도에 인(因)한 출가라고 이름하며, 성스러운 법으로 인한 출가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큰 법을 믿고 즐기지 못하여 청정한 큰 법에 있어서 진실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법을 깨트리는 무거운 죄를 인연하여 재앙이 다하지 않는다. 모든 법의 실상을 믿고 이해하지를 못한다.
착하지 않는 업을 일으키고, 혹은 여덟 가지 곧고 거룩한 길[八直聖道]을 비방하고,
혹은 깨끗한 계를 지닌 비구에 대해 나쁜 마음을 내고, 거짓으로 그 잘못을 들추어내고,
혹은 계를 깨트리고 견해를 깨트리고 목숨을 깨트리며 위의를 깨트린다고 말한다.
혹은 남의 잘못을 보지도 않고서 망령되게 시비를 내고
혹은 흐리고 성내며 질투하는 마음으로 해서 남의 이름을 악하게 설하고,
혹은 불경(佛經)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불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악인은 법을 깨트리는 악업을 성취한다.
부처의 제일의에 있어서 통달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기뻐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무거운 죄의 남은 과보의 인연은 부지런히 정진한다고 하여도 더욱 인연하는 바의 상(相)을 취할 수가 없다. 하물며 얽매인 마음이 능히 도과(道果)를 얻겠느냐?
또 깊이 아견과 인견에 의지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내지 모든 부처도 또한 그 근본을 뽑지를 못한다. 하물며 성문(聲聞)이겠느냐?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이 선하지 아니한 삿된 견해에 탐착하는 자가 있으면 아견ㆍ인견ㆍ수견(壽見)ㆍ중생견(衆生見)ㆍ명견(命見)이라고 말하며,
또 제일의인 공에 대해 놀라고 두려워하는 자는 전세(前世)에 법을 깨트린 죄의 인연을 성취하였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이 악과 삿됨과 선하지 못한 것에 탐착하면 자아를 탐하고 사람을 탐하고 수명을 탐하는 자라고 한다.
이 사람은 백천만억의 모든 부처의 3륜(輪)으로써 시현(示現)하여도, 깨닫게 하고 도의 열매를 얻게 하지 못한다.
사리불아, 오히려 날카로운 칼로써 혀를 끊고, 마땅히 남의 일을 보지 아니하고, 그 잘못을 망령되이 설하지 않고, 계를 깨트리지 않고 견해를 깨트리지 않고 목숨을 깨트리지 않고 위의를 깨트리지 않으려면,
사리불아, 미래세에 마땅히 비구는 능히 250계를 지켜야 한다.
이 사람은 아만(我慢)의 마음이 생기면,
‘나는 곧 계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생각을 하며,
남을 가벼이 여기고 마음에 공경함이 없어
‘나는 곧 다문(多聞)이다. 그는 다문이 아니다’라고 한다.
사리불아, 이 때 많은 비구가 있어 지계(持戒)를 많이 행하고 아란야(阿蘭若)의 행을 귀하게 여기며, 능히 계품(戒品)을 잘 지키고, 설해진 행에 따르고, 마음을 부지런히 해서 경을 읽고 불법에 통할 것을 구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다문(多聞)의 교만함과 아란야(阿蘭若)의 교만함을 낸다.
더욱 성냄을 좋아하고 마음은 항상 때가 묻고 흐리다.
간탐과 성냄을 깊이 품고 마음은 독하고 우둔하며 무지(無知)하다.
작은 인연으로 큰 일을 일으킨다.
이 사람은 성냄으로 마음이 덮여 서로 잘못된 상을 들추어내고 계를 깨트리고 견해를 깨트리고 목숨을 깨트리고 위의를 깨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