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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밀해탈경 제5권
11. 성자문수사리법왕자보살문품(聖者文殊師利法王子菩薩問品)[1], 여래의 몸ㆍ여래의 말
1. 여래의 두 가지 몸
그때 문수사리법왕자보살마하살이 여래께서 지은 바 머무르는[住持] 업의 차별에 의지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법신]
“세존이시여, 여래의 법신은 어떠한 모습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10지의 바라밀을 여실히 수행하여 몸 바꿈[轉身]을 성취하면 묘한 법신을 얻으니, 이것이 모든 여래의 법신이다.
문수사리여, 그 법신에 두 가지 모습이 있어서 불가사의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법신은 모든 희론을 여의며,
일체 함이 있는[有爲] 모습을 여의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희론과 함이 있는 모습에 집착한다.”
[해탈신(解脫身)]
“세존이시여, 성문ㆍ연각이 몸을 바꾸어 얻는 것은 법신입니까, 법신이 아닙니까?”
“법신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신이 아니라면 어떠한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해탈신(解脫身)이라 하고 법신은 아니다.
해탈신에 의지하여 성문ㆍ연각과 모든 여래는 그 몸이 평등하거니와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되어 수승하다.
법신이란 일체 성문ㆍ연각보다 수승하여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 공덕이 기특하고 수승함이 비유할 수 없다.
분별과 전도를 대치하면 그 사람은 여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응화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세상에 나심에 어떠한 모습이 있습니까?”
“화신(化身)으로 나오시는 모습으로 세계의 모습을 따르며, 일체 종류와 일체 공덕으로 장엄한 주지(住持)의 모습과 상응하니,
이것이 화신으로 세간에 나오시는 모습이다.
문수사리여, 그러나 여래의 법신(法身)은 나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제가 어떻게 하여야 화신이 나타나는 모습을 알겠습니까?”
“일체 불국토ㆍ삼천대천세계 안의 큰 세력 있는 집이나 복밭[福田]인 집으로 일시에 물러나서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나와서는 자라서 5욕락을 받고, 크게 버림[捨]을 행하고, 집을 떠나 고행하고, 보리를 깨치고, 법바퀴[法輪]를 굴리고, 열반에 드니,
문수사리여, 이것이 응화신(應化身)으로 짓는 방편으로 나타나심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2. 여래의 세 가지 말
“세존이시여, 세존은 여래 법신이 머무르는 힘에 의지하여 몇 가지 말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되,
가히 교화할 중생의 성숙하지 않은 이를 성숙하게 하시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을 얻게 하십니까?”
“문수사리여, 여래는 세 가지 말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수다라와 비니(毘尼)와 마득륵가(摩得勒伽)이다.
문수사리여, 이것이 세 가지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수다라이며, 어떤 것이 비니이며, 어떤 것이 마득륵가입니까?”
2.1. 수다라
“문수사리여, 내가 말한 적은 사법(事法)을 수다라라고 부른다.
적은 사법이란 이른바 네 가지 일과, 아홉 가지 일과, 스물아홉 가지 일이다.
문수사리여, 이른바 네 가지 일이란
듣는 일[聞事], 귀의하는 일, 배우는 일, 보리의 일이다.
문수사리여, 이른바 아홉 가지 일이란
시설(施設)하는 일, 중생이 수용을 향하는 일, 나는 것[生]을 향하는 일, 나서 머무름[住作]을 향하는 일, 물들고 청정함을 향하는 일, 가지가지를 향하는 일, 능히 말하는 일, 가히 말하는 일, 권속이 되는 일이다.
문수사리여, 이른바 스물아홉 가지 일이란
번뇌에 의지하여 물든 모든 행을 대치하는 일, 수순하는 일, 이른바 인상을 수순하여 미래 세상에 나는 인을 삼는 일, 법 모습[法相]에 의지하여 미래의 행의 인이 되는 일, 맑은 분에 의지하여 관찰하는 일, 그곳에서 수행하는 일,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일, 현전의 몸으로 즐거운 법행(法行)을 받는 일, 일체 괴로운 관행을 초과하는 일, 여실히 그를 아는 일이다.
이 일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뒤바뀜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까닭이며,
중생의 바깥 모습인 사행(邪行)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까닭이며,
안 마음에 교만이 없이 머무르는 까닭이다.
수행이 머무르는 일, 현전에 증득하는 일, 수행하는 일, 그를 견고히 하는 일, 아홉 가지를 관찰하는 일, 멀리하거나 멀리하지 못하는 방편을 관찰하는 일, 그를 어지럽히는 일, 어지럽지 않는 일, 잃지 않는 일, 수행하되 걸림없는 일, 수행하여 이익한 일, 그를 견고히 하는 일, 그를 향해 실지로 증득하는 일, 구족하게 열반을 얻는 일, 여래가 말한 비니의 법이 세간의 바른 소견이어서 모든 외도들의 일체 수승함을 뛰어나는 일,
그 법을 닦지 않으면 물러나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문수사리여, 만약 여래가 잘 말씀한 비니법에 능히 수행하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니, 삿된 소견의 허물이 아니다.”
2.2. 비니 2 가지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비니의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비니의 모습이란 내가 성문이나 모든 보살을 위하여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와, 바라제목차와 상응하는 법을 말하니, 이것이 비니의 일이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몇 가지 법으로 바라제목차를 섭취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보살은 일곱 가지 법으로 바라제목차를 섭취하니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이른바 보살이 받아 지닐 법을 말한 것을 알며,
바라이(波羅夷) 말한 것을 알며,
허물되는 일 말한 것을 알며,
허물 없는 일의 자체를 말한 것을 알며,
받아 지닐 법을 잃은 일을 아니,
문수사리여, 이것이 보살의 일곱 가지 법으로 바라제목차를 섭취하는 것이다.”
2.3. 마득륵가 11 가지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득륵가입니까?”
“문수사리여, 나는 열한 가지 모습으로 요의경(了義經)을 나타내니 이것이 마득륵가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득륵가의 열한 가지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이른바 세제(世諦)의 모습과,
제일의제의 모습과,
보리분법(菩提分法)을 관찰하는 모습과,
[그 법의 모습과,]
[그 법의 자체인 모습과,]
그 법의 과보인 모습과,
그 법의 말[法設]을 받는 모습과,
그 법의 장애인 모습과,
그 법의 수순하는 모습과,
그 법의 허물된 모습과,
그 법의 이익되는 모습이다.”
[所謂 世諦相, 第一義諦相, 觀菩提分法相, 彼法相, 自體相, 彼法果相, 受彼法說相, 彼法障相, 彼法隨順相, 彼法過失相, 彼法利益相.]
1) 세제의 모습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세제의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세제의 모습은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인상(人相)을 말하며,
분별(分別)의 자체와 모습을 말하며,
모든 법을 관찰하고 생각하여 가지가지 업의 모습을 관찰함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2) 제일의제의 모습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제일의제의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모습에 일곱 가지가 있음이 앞의 일곱 가지 진여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다.
첫째는 비롯함이 없는 행상(行相)인 제일의제요,
둘째는 모습의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며,
셋째는 유식(唯識)의 제일의제이니 함이 있는 행상은 오직 식뿐임을 아는 것이며,
넷째는 집착의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괴로운 진리이며,
다섯째는 삿된 행의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모이는 진리이며,
여섯째는 청정의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멸하는 진리이며,
일곱째는 바르게 수행하는 제일의제이니 이른바 내가 말한 도의 진리이다.
문수사리여, 행상의 제일의제와 집착의 제일의제와 삿된 행의 제일의제의 세 가지 제일의제는 일체 중생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문수사리여, 모습의 제일의제와 유식의 제일의제의 두 제일의제는 일체 법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문수사리여, 청정의 제일의제는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문수사리여, 바른 수행의 제일의제는 묘한 법의 차별됨을 듣고 사마타ㆍ비바사나를 관찰하여 반야바라밀을 섭취하되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3) 보리분(菩提分)의 법을 관찰하는 모습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리분(菩提分)의 법을 관찰하는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보리분의 법을 관찰하는 모습이란,
이른바 일체 종류의 일을 관찰함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그 법의 모습입니까?”
4) 그 법의 모습, 여덟 가지 관법
“문수사리여, 그 법의 모습이란 여덟 가지 관법과 같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여덟 가지 관법입니까?”
“문수사리여, 이른바 실제에 의지하는 진리[諦]와, 머무르는 진리와,
허물과, 공덕과, 통달하는 모습과,
형상[形]의 모습과, 상응하는 모습과, 넓고 간략히 말하는 모습이다.
① 문수사리여, 실제의 모습이란 이른바 진여이다.
② 진리에 머무는 모습이란 이른바 인상(人相)이니,
차별의 자체를 분별하여 한결같이 대답하는 모습과,
물음을 따라 분별하여 대답하는 모습과,
대답을 두는 모습과,
비밀한 일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③ 허물의 모습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모든 법의 물든 허물이다.
④ 공덕의 모습이란 이른바 내가 말한 일체 청정한 법의 무량한 이익의 모습이다.
⑤ 통달한 모습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인가?
이른바 진실한 뜻의 통함이며,
얻음[得]의 통함이며,
말[說]의 통함이며,
두 변(邊)을 떠난 통함이며,
불가사의의 통함이며,
뜻의 통함이다.
⑥ 형상[形]의 모습이란 이른바 3세의 세 가지 함이 있는 모습[三有爲相]과 네 가지 인연이다.
⑦ 상응하는 모습이란 네 가지가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서로 기다리는 상응과.
능작, 소작의 상응과
생(生)의 상응과
법체의 상응이다.
⑦-1 서로 기다리는 상응이란
이른바 어떠한 인(因)과 어떠한 연(緣)이 능히 함이 있는 행인 명자 따위의 작용을 내는 것이니, 이를 서로 기다리는 상응이라고 한다.
⑦-2 능작(能作)ㆍ소작(所作)의 상응이란
어떠한 인과 어떠한 연이 능히 법을 얻으며, 능히 법을 내며, 능히 법을 내고는 능히 업을 이룩하니,
이것을 능작ㆍ소작의 상응이라고 한다.
⑦-3 생의 상응이란
이른바 어떠한 인과 어떠한 연이 법을 알며, 법을 말하며, 법을 보이며, 능히 이루며, 능히 바르게 깨닫는 것이니,
이것이 생의 상응이다.
⑦-4 법체의 상응이란 요약하여 말하건대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첫째는 맑음[淨]이며,
둘째는 부정(不淨)이다.
문수사리여, 맑음에는 다섯 가지 모습이 있고,
부정에는 일곱 가지 모습이 있다.
[맑음의 다섯 가지 모습]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맑음의 다섯 가지 모습인가?
첫째는 현전에 보이는 모습[現前見相]이며,
둘째는 현전에 보이는 모습에 의지함이며,
셋째는 자신의 모습을 비유하는 모습이며,
넷째는 성취의 모습이며,
다섯째는 청정한 아함(阿含)을 말하는 모습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현전에 보이는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 함이 있는 행은 무상이며, 일체 함이 있는 행은 괴로우며, 일체 법은 내가 없는 세간에서 현전에 보는 법이므로 현전에 보이는 모습이라 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현전에 보이는 모습에 의지함인가?
이른바 일체 함이 있는 행은 한 모습인 까닭이며,
미래의 착하고 착하지 못한 업을 잃지 않으니, 추한 법이 현전에 보임을 의지한 까닭이며,
가지가지 업과 소견에 의지하여 가지가지 중생을 현전에 보는 까닭이며,
착하고 착하지 못한 업에 의지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받는 것을 현전에 보는 까닭이며,
현전에 보이는 법 가운데 비유함이니, 이러한 것들을 현전에 보이는 모습에 의지한다고 한다.
문수사리여, 자신의 모습[自相]을 비유하는 모습이란
이른바 안과 밖의 모든 세간의 현전에 보이는 비유와 인연이니,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모습 인연 비유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현전에 보이는 모습과 현전에 보이는 모습에 의지함과 비유의 모습은 한결같이 그 일을 성취하므로,
성취의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청정한 아함을 말하는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 고요한 열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청정한 아함의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여, 그대는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청정한 모습을 깊이 관찰해야 하며, 깊이 관찰하고는 청정함을 알고 청정을 알고는 수행해야 한다.”
[일체지를 가진 사람의 모습]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몇 가지 법으로 일체지(一切智)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압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다섯 가지 법으로 일체지를 갖춘 사람의 모습을 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어떤 사람이 세상을 넘어서면 일체 하늘과 사람과 세간들이 일체지라 이름하며,
어떤 사람이 필경에 32종의 상호를 성취하며,
열 가지 힘의 법을 얻으며,
능히 일체 중생의 의심을 끊으며, 일체 마군과 원수진 적을 항복받아 설법하되 아무도 장애할 이가 없으며,
설법하는 가운데 8성보리분(聖菩提分)을 잘 말하여 현전에 네 가지 사문의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생(生)에 의지하고,
모습에 의지하고,
의심을 끊고 항복받되 아무도 힐난할 사람이 없고,
현전에 사문의 다섯 가지 법이 나타남을 보니,
이것이 일체지를 갖춘 사람의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문수사리여, 이것은 낳아서 이루는[生成] 상응과, 현전에 보는[現見] 상응과 요량하는[量] 상응과, 비교하는 지혜[比智]의 상응과, 성인의 말씀인 상응에 의지하여 다섯 가지 모습을 아니,
이것이 청정한 모습이다.
[청정하지 못한 모습 일곱 가지]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일곱 가지 청정하지 못한 모습인가?
이른바 서로 같은 소견[相似見]의 모습과,
서로 같지 않은 소견[不相似見]의 모습과,
일체에 서로 같게[一切相似] 보는 모습과,
일체에 서로 같지 않게 보는 모습과,
자신의 비유와 다른 모습과,
이루지 못하는 모습과,
청정하지 못한 아함(阿含)을 설법하는 모습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일체에 서로 같은 소견이 있는 모습인가?
이른바 일체 법은 의식(意識)에 의지하여 같은 모습[同相]을 아니,
이러한 것을 일체 법과 같게 같이 보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일체 법에 서로 같지 않게 보는 모습인가?
이른바 법의 모습과 자체의 모습은 업과 법의 인과로서 다른 모습(異相)이니,
하나하나 서로가 다른 모습은 필경에 저들 끼리끼리 서로 대함에 다른 모습이니,
이러한 것을 일체에 같지 않아서 같이 보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자신의 비유와 다른 모습인가?
이른바 저의 같은 소견의 모습(彼相似見相)과 비유 가운데의 일체에 같지 않아서 같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으니,
그 일이 한결같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 나는 이루지 못하는 모습[不成相]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루지 못하는 모습이라면 그 법이 청정하지 못하고, 만일 그 법이 청정하지 못하다면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청정하지 못한 아함의 모습이라고 말하니, 자성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법체인가?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나거나 세상에 나지 않거나 법은 법체와 법계에 머무르니, 이것이 법체의 모습이다.”
⑧ (간략하고 넓은 모습)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간략하고 넓은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이른바 간략히 한 구절을 말하고 그 한 구절과 더욱 많은 구절과 차별되고 무량한 구절과 나아가 마땅히 이를 곳까지를 말함이니,
이것이 간략히 말함이다.”
5-7) 법 자체의, 법의 과보인, 얻는 모습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얻는 모습입니까?”
“문수사리여, 이른바 모든 법의 소견(法見)을 취하여 보리분법을 관찰함이니,
내가 말한 보리분법의 4념처들로서 이를 법 자체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간과 함께하거나 세간을 벗어났거나 물든 모습을 멀리하고, 그 법의 결과로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을 일으키니,
이것이 얻는 모습[得相]이다.
8-11) 장애인, 수순하는, 허물의, 이익의 모습
문수사리여, 그 법에 즉(卽)하거나 해탈 지혜에 의지하여 수용하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널리 남에게 말해 주어 나타내면
이것이 그 법에 수순하여 나타내는 모습이다.
문수사리여, 그에 즉하여 보리분법을 수행하되 도를 여의고 어긋나고 물든 모습은 장애하는 법이라 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수사리여, 저 법이 많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 그 법을 수순하는 모습이라 한다.
문수사리여, 모든 법을 장애하는 것은 허물의 모습[過相]이라 한다.
문수사리여, 그 법의 공덕을 수순하는 것을 이익의 모습이라 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모든 보살을 위하여 수다라ㆍ비니ㆍ마득륵가의 뜻이 일체 외도나 2승과 같지 않은 다라니의 모습과 모든 부처님이 심히 깊은 법을 말씀하시거든 모든 보살이 심히 깊은 뜻을 얻으며, 얻고는 능히 일체 불법에 들어감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그대는 자세히 들으라. 내가 그대들에게 다라니의 뜻을 간략히 말하리라.
모든 보살들이 나의 법을 들으면 능히 나의 뜻을 얻고, 나의 뜻을 얻으면 나의 법에 든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간략히 말한 다라니의 뜻인가?
이른바 내가 말한 일체 물든 법과 맑은 법은
일체 법을 파괴하는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며, 작용이 없는 모습이며, 분별이 없는 모습이며, 아(我)가 없는 모습이니,
이러이러한 법들을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작용 없고 분별이 없고 아(我)가 없다고 말하니, 일체는 깨달음 없고 내가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든 법은 먼저는 물들었다가 뒤에 맑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모든 맑은 법도 먼저는 맑았다가 뒤에 물들었다는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닌데,
우치한 범부는 허망하게 물든 몸에 의지하여 아법(我法)을 집착하고 자체의 모습인 양 계교하며 삿된 소견에 의지하여 내가 있다고 하니,
이른바
내가 능히 보며 능히 들으며 능히 맡으며 능히 맛보며 능히 감촉하며, 내가 능히 알며 내가 능히 먹으며 내가 물들며 내가 청정하다 하여, 이렇듯 모든 사견(邪見)을 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것이 여실히 번뇌를 여읜 몸임을 알면
이 사람은 능히 번뇌 여읜 몸을 얻으며,
모든 번뇌를 여의고 모든 희론을 끊어 필경에는 청정하고 함이 없는 몸을 얻으며,
일체 함이 있는 행이 없어질 줄을 알아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법 본래는 깨끗했다가
나중에 부정(不淨)한 것 되지 않으니
물든 것 그리고 청정한 것에
이러한 모든 법은 아(我)가 없다네.
물든 몸에서 아(我)를 보거나
내가 가진 것이란 생각을 내며
내가 물들었다 청정하다 하며
내가 본다, 그리고 먹는다 하네.
만일 능히 이같이 알면
그 사람은 번뇌를 여의고
물들지 않은 몸 능히 얻나니
그러므로 무위(無爲)라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