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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 제3권
[연기법에 들어가되 일체의 치우친 소견을 멀리 여의는 것]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연기(緣起)를 아는 그 뛰어난 지혜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을 멀리 여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연기라는 것은 의지할 것이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아무런 일이 없고 성취할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덧없음과 괴로움과 나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고요함이 곧 연기이고,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수명도 없고 기르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보특가라(補特伽羅)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어린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니라.
또 지닌 것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고 공(空)하여 상(相)이 없고 고요하여 행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는 이것을 일컬어, 희론이 없는 법이라고 하니, 생하는 그대로가 바로 생하는 것이고 멸하는 그대로가 바로 멸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수명도 없고 기르는 것도 없고 보특가라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어린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어떠한 법을 인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니라.
그 모든 것에 나라는 주재자(主宰者)가 없기 때문이니, 마치 저 초목과 장벽(墻壁)의 그림자처럼, 일체의 법이 또한 그러하니라.
바깥의 모든 법이 생할 때에 생하는 존재가 없고 멸할 때에 멸하는 존재가 없는 것과 같이, 안의 법도 역시 생할 때에 생하는 존재가 없고 멸할 때에 멸하는 존재가 없을진대, 연기의 법을 제외하고는 사실 그대로 생함도 멸함도 없기 마련이니라.
이와 같이 서로 상응하여 관찰한다면 그 모든 치우친 소견을 다 벗어나게 되느니라.
다시 치우친 소견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단멸한다는 소견[斷見]과 항상한다는 소견[常見]이 그것이니라.
생했을 때도 생한 것이 아니요, 멸했을 때도 멸한 것이 아니니,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 저 단멸한다거나 항상한다고 하는 치우친 소견이 저절로 청정하게 되며, 저절로 청정하게 됨으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이 다 청정하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연기를 아는 그 뛰어난 지혜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여래의 인으로써 인을 맺어 진여의 끊임없는 뛰어난 지혜를 지닌다는 것]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여래의 인(印)으로써 인을 맺어 진여(眞如)의 끊임[間斷] 없는 뛰어난 지혜를 지닌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래의 인이란, 끊임이 없고 생함도 없고 변함도 없고 취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게 할 수도 없으므로, 일체 세간의 사람이나 천인이나 아수라(阿修羅)들로서도 감히 건드릴 수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여래의 인은 바로 구경(究竟)의 생함이 없는 인이고, 구경의 공한 성품의 인이고, 구경의 무상(無相)의 인이고, 구경의 무원(無願)의 인이고, 구경의 함이 없는 인이고, 구경의 욕심을 여읜 인이고, 구경의 진여의 인이고, 구경의 실제(實際)의 인이고, 구경의 허공의 인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여래의 인(印)은 마치 허공에 인을 맺는 것처럼 볼 수 없어서 5안(眼)으로도 광명의 모습을 볼 수 없느니라.
오직 그 본래의 인으로써만 그것을 맺기 때문이니, 내지 이와 같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체의 법도 다 여래의 인으로써 그것을 맺은 것이니라.
이에 비해, 저 인식과 경계의 법은 다 만들고 짓는 법이므로 아무리 그 법을 안락하게 세우려고 하여도 할 수 없으니, 진여의 인으로써 인을 맺는 것만이 끊임이 없느니라.
또 진여에 대해 끊임[間斷]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모든 법을 분별하여서 상ㆍ중ㆍ하의 차별을 둔다면 그것이 곧 끊임이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법에도 분별이 없어야만 끊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니라.
즉, 아무리 많은 분별을 내더라도 저 진여에 대해서만은 무너뜨리거나 어지럽게 할 수 없으니, 마치 유정들이 허공을 다니더라도 저 허공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유정들이 진여 속을 다니더라도 진여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지혜를 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그 모든 물질과 법에 대해 진여의 인으로써 그것을 맺으니, 진여에 무너짐과 끊어짐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여래의 인으로써 인을 맺어 진여의 끊임이 없는 뛰어난 지혜를 지니는 것이니라.
[법계의 깊고 깊은 이취에 드는 것]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법계(法界)의 깊고 깊은 이취(理趣)에 드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일체의 법과 그 모든 법계를 두루 다 평등한 한 가지의 성품으로 보는 것이니라.
법계를 일컬어 이욕계(離欲界)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또 불생계(不生界)라고 하는 것은 취집(聚集 : 5蘊)이 없기 때문이고,
또 불상위계(不相違界)라고 하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왕계(無往界)라고 하는 것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래계(無來界)라고 하는 것은 걸림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주계(無住界)라고 하는 것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여여계(如如界)라고 하는 것은 3세(世)가 평등하기 때문이고,
또 무아계(無我界)라고 하는 것은 본래가 청정하기 때문이고,
또 수자계(壽者界)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수승한 이치이기 때문이고,
또 무요별계(無了別界)라고 하는 것은 머묾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아뢰야계(無阿賴耶界)라고 하는 것은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생기계(無生起界)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또 여허공계(如虛空界)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또 여열반계(如涅槃界)라고 하는 것은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것을 일컬어 법계의 이취(理趣)에 든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이러한 이취에 들게 되면, 그가 연설하는 낱낱의 말이 다 법계의 이취에 두루 하게 되니, 욕계(欲界)와 법계(法界)가 둘이 아님을 곧 아느니라.
다시 말하면, 욕성법계(欲性法界)와 진성법계(瞋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진성법계와 치성법계(癡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치성법계와 번뇌성법계(煩惱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번
뇌성법계와 욕계성법계(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욕계성법계와 색계성법계(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색계성법계와 무색계성법계(無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무색계성법계와 공성법계(空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공성법계와 안계성법계(眼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안계성법계와 색성법계(色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색성법계와 안식계성법계(眼識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안식계성법계와 내지 의계성법계(意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의계성법계와 의식계성법계(意識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의식계성법계와 온계성법계(蘊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온계성법계와 지수화풍성법계(地水火風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지수화풍성법계와 내지 팔만사천법온행일체법법계(八萬四千法蘊行一切法法界)가 둘이 아니니라.
보살이 만약 평등한 지혜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법계에 든다면, 곧 그는 능히 일체 법의 평등한 이취를 보게 되리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계의 이취에 드는 것이니라.
[금강처럼 견고한 뜻으로 이 대승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것]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금강처럼 견고한 뜻으로 이 대승(大乘)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열두 가지 법을 성취해야만 금강처럼 견고한 뜻을 얻어서 세간의 천인이나 사람들에게 무너지지 않느니라.
그 열두 가지 법이란,
첫째는 보리의 마음을 더욱 늘리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보시ㆍ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반야를 닦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대자대비를 행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4섭법(攝法)을 지니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키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여섯째는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일곱째는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여덟째는 더욱 선근(善根)을 구족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아홉째는 상호(相好)를 장엄하기 위해 무차시회(無遮施會)를 열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째는 몸과 목숨을 버릴지라도 바른 법을 옹호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한째는 선근을 닦아서 일체 유정들에게 회향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두째는 일체의 부처님 법을 모으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러한 법을 닦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그가 금강처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뜻을 성취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또 그것은 금강 보배와 같아서 온갖 보배를 아우르고 그 자체로도 무너짐이 없느니라.
이처럼 보살은 견고한 뜻을 성취하여서 능히 일체 유정들의 번뇌와 수면(隨眠)을 다 뽑고 그 자체로 무너짐이 없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금강처럼 견고한 뜻으로 이 대승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니라.
[스스로의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처럼 청정하게 하는 것]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스스로의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처럼 청정하게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부처님의 경계란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의 경계를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한 경계이고,
보살의 경계는 스스로의 경계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계로 말미암아 청정하게 되기 마련이니라.
이에 청정한 눈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눈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눈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눈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귀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귀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귀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귀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코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코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코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코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혀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혀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혀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혀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몸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몸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몸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몸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뜻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뜻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뜻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뜻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그밖에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ㆍ12연기(緣起)도 다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려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는 것만이 곧 스스로의 경계를 청정하고 평등하게 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경계가 청정하고 평등한 것이 바로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여섯 종류의 경계가 다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서는 그림자처럼 나타날 뿐 아무런 집착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여래의 경계가 물듦이 없고 걸림이 없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가 걸림이 없고 물듦이 없는 것도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보살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청정한 경계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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