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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집경 제5권
[한 모양을 본받는 법]
이때에 혜명 대목건련(大目揵連)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나는 법집(法集)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보살은 법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견(我見)이 있는 사람은
‘나는 설법할 수 있고 저 사람은 법을 듣는다’고 마음을 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아상(我相)을 멀리 여의면, 이런 사람이
‘나는 설법하고 다른 사람은 법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저 두 가지를 보지 못하면 두 가지만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다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법을 따라 분별심을 내어 이것을 실제로 있다고 말하지만, 이 법은 허망하여 실제가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보살이 저 법에 분별을 내지 않으면 이 법은 실제로 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분별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실제로 있다고 말합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은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음이 허깨비가 하는 말과 같은 것을 압니다.
세존이시여, 대개 허망이란 것은 실제로 없지만 있는 것 같으니 이와 같은 법은 공(空)함에 수순하고 인연을 어기지 않습니다.
수순하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러한 사람은 공한 법과 인연을 어기지 않습니다.
수순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여러 가지 분별을 버리고 여의면 나[我]와 나라는 견해[我見]가 끊어집니다.
모든 그릇된 견해를 멀리 여읜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이 허망한 줄 알고 세간을 수순하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허망한 법을 말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면, 이것을 법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떠한 법을 말하면 법집이라 여기겠습니까?
모든 법은 모두 다 한 모양[一相]을 본받는다고 말할 것이니, 이와 같은 법집이라야 이것을 미묘한 법집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말씀드린 법집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목건련아. 네가 말한 것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
[집착이 없는 법]
이때에 혜명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복을 구하기 위해 법집을 말한다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곧 꾸짖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와 내 것이란 상(相)에 집착한다면, 이러한 사람이 짓는 죄행(罪行)과 복행(福行)과 부동행(不動行)은 그릇된 견해를 여의지 않고 짓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지 못하는 줄로 압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이 같은 법집을 알지 못하면, 이런 사람은 죄행과 복행과 부동행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이 법집을 안다면, 이러한 사람은 5음(陰)이 모이지 않고 또한 5음이 모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18계(界)도 모이지 않고 또한 모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12입(入)이 모이지 않고 또한 모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은 중생을 취하지 않고 또한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도 취하지 않고 또한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실제도 취하지 않고 또한 허망함도 취하지 않으며,
경계도 취하지 않고 또한 경계를 여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취하지 않고
또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여읜 것도 아니며,
세간을 취하지 않고 열반을 취하지도 않으며,
송사(訟事)를 취하지 않고 또한 묵연함을 취하지도 않으며,
공함을 취하지 않고 또한 그릇된 견해를 취하지도 않으며,
무상(無相)을 취하지 않고 또한 각관(覺觀)을 취하지 않으며,
무원(無願)을 취하지 않고 또한 취하지 않음도 아니며,
모든 부처님의 법을 취하지 않고 또한 범부의 법도 취하지 않으며,
법도 취하지 않고 또한 법 아님도 취하지 않으며,
거룩한 승가(僧伽)도 취하지 않고 또한 외도승(外道僧)도 취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을 알기 때문에 구경처(究竟處)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살은 모든 법은 구경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살은 해탈을 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의 본성품은 적멸(寂滅)하여 해탈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살은 한 법도 좋아하지 않고 또한 한 법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법이 자법(自法)이 아니고 또한 타법(他法)도 아니며,
한 법도 취하지 않고 한 법도 버리지 아니하는 것임을 압니다.
만약 취할 것이 있거나 버릴 것이 있으면 꾸짖어야 합니다.
실천하거나 머물지 않지만 만약 실천하거나 머물 것이 있으면 또한 꾸짖어야 합니다.
기뻐하거나 근심하지도 않지만, 만약 근심과 기쁨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말씀드린 법집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야, 네가 말한 법집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
[여실한 법]
이때에 혜명(慧命)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에게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이 있어, 이 두 상에 의지해 설법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은 무명(無明)에 머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법이 아닌 것을 여실하다고 보면 곧 이것이 참된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법이 아닌 것을 여실하다고 보면 곧 이것이 진여(眞如)입니다.
세존이시여, 참된 법은 와도 온 곳이 없고 갈 곳이 없으며, 법은 사람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사람을 멀리하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으며, 법은 처소에서 또한 멀고 가까움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이러한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상근기 중생에게는 실천하게 하고, 하근기와 중근기 중생에게는 실천하게 하지 않겠다. 하근기와 중근기 중생에게는 실천하게 하고 상근기 중생에게는 실천하게 하지 않겠다.’
세존이시여, 법은 비상(非相)으로 이름을 얻고 또한 비비상(非非相)으로 이름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성인께서는 있는 바의 상(相)을 보시는 것은 모두 속박으로 보시는데 비상도 또한 속박입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여읠 것도 아니고 또한 수행할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능히 법을 아는 이는 여읨과 수행을 멀리 여읩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아니며 또한 스스로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고자 함에 따라 이로운 것이 같지 않으니 짓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모든 부처님께 친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어리석은 범부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분별하거나 희론[戱論]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법은 부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범부를 멀리하지도 않지만, 실천하는 것에 따라 법을 얻음이 같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법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말씀드린 법집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하가전연아, 네가 말한 것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
[참된 법]
이때에 혜명 대가섭(大迦葉)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적정을 구하기 위해 법집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곧 법집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적정을 여의지 않았으니 둘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법이라는 것은 둘을 알지 못합니다.
심의(心意)와 의식(意識)의 지혜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한 법이라는 것은 또한 둘을 구하지 않으니 법을 구하고자 함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한 법이라는 것은 또한 둘이 아니니 지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적정은 곧 두 가지 법이 아니니, 두 가지 법이 아니란 것은 모든 법을 여읜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두 가지 상(相)이 아니니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자성은 상이 없으며, 자성은 바라는 것이 없으며, 자성은 실천하는 것이 없으며, 자성은 나거나 죽지 않으며,
맑고 깨끗한 상도 아니지만 또한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깨끗하지 못한 상이 아니지만 얻을 수 있으며,
아끼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베풀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계율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성내거나 한탄하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인욕하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게으르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정진하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산란하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선정에 들지 않는 사람도 얻으며,
어리석지 않은 사람도 얻으며, 지혜롭지 않은 사람도 얻습니다.
만약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을 곧 진실한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만약 모든 법에 얻을 것이 있다면 곧 얻지 못합니다.
실천함에 경계가 있는 사람은 곧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 경계를 행한 사람은 두 법을 행한 사람이며,
법을 있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과, 법에 의지하는 사람과, 법을 구하여 증득하려는 사람과, 번뇌를 여읜 사람과, 구경(究竟)을 구하는 사람과, 부처님을 뵈려는 사람과, 법과 스님을 뵈려는 사람과, 세간을 보려는 사람과, 열반을 보려는 사람은 곧 이 같은 경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법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법에 당연히 구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에 구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법을 구한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을 바르게 보면 법과 법 아닌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법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마음과 집착함이 없는 것을 멀리 여의면 참된 법이라고 하며,
만약 허망하고 실제가 아닌 것을 멀리 여의면 참된 법이라고 하며,
만약 모든 구하는 것을 멀리 여의면 참된 법이라고 하며,
만약 모든 법이 희론을 여읜 줄 알면 참된 법이라고 하니,
만약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이것을 곧 진실한 법집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말씀드린 묘한 법집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그대가 말한 것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
[다툼이 없는 법]
이때에 혜명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법이라는 것은 다투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투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에게는 법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눈이 빛깔과 더불어 다툼이 없고, 귀와 소리ㆍ코와 냄새ㆍ혀와 맛ㆍ몸과 닿음ㆍ뜻과 법도 또한 다투는 것이 없으면 이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또 무엇을 눈과 빛깔, 이 둘의 법이 다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화합하지 않으니 이 두 법이 서로에게 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와 소리ㆍ코와 냄새ㆍ혀와 맛ㆍ몸과 닿음ㆍ뜻과 법도 또한 화합하지 않고 서로에게 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르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법은 모두 어기거나 다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둘이 없기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둘이 없기 때문에 각기 서로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고 분별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분별을 여의고 나지 않고 없어지지 않으며, 늘어나지 않고 줄지도 않으며,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세간에 물들지 않고 열반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참된 법은, 사람은 법을 얻어도 법은 사람을 위해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나는 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말한다’고 하면
이와 같은 말은 다 허망하게 분별하는 12입법(入法)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입(入)은
‘나는 분별할 수 있다’는 이와 같은 마음이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법을 알면 마땅히 이러한 사람은 물질과 다투지 않습니다.
만약 물질과 더불어 다투지 않으면, 이러한 사람은 사문(沙門)의 도법(道法)에 수순하며,
만약 사문의 행법(行法)에 수순하면 이러한 사람은 가고 오지 않으며,
실천하지 않고 머물지 않으면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습니다.
모든 법을 보면 곧 법행이며, 모든 법을 보면 곧 해탈행이며, 모든 법을 보면 곧 법계(法界)이며, 모든 법을 보면 곧 구경이지만, 그러나 구경이 있다고 보지 않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모든 보는 바의 법은 오직 이름뿐이며, 오직 허망하고 거짓뿐이며, 오직 허깨비의 행위일 뿐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허망하고 거짓되어 실제가 아닌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을 법을 보았다고 이름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본다고 이름하며, 법이 아닌 것을 보면 부처를 본다고 이름합니다.
부처를 보는 사람은 중생을 본다고 이름하며,
중생이 아닌 것을 보면 인연을 본다고 이름하며,
인연이 아닌 것을 보면 공을 본다고 이름하며,
공이 아닌 것을 보면 보지 않는다고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모든 법을 바로 보는 것이라 이름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바로 보면 마땅히 이러한 사람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고 법에 수순하며 스님들에게 수순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보살이 이 같은 다툼이 없는 법인(法忍)을 얻으면 저 모든 마군과 함께 다투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같이 수행하는 보살과 어기고 다투겠습니까?
만약 함께 다툰다면 옳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의 말은 모두 나의 실천을 성취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당연히 저와 더불어 다투지 않으며
다툼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마침내 다툼이 없는 법을 얻으며,
마침내 다툼이 없는 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보살을 마침내 모든 법을 얻었다고 이름합니다.
모든 법에서 평등함을 얻고 자신이 평등함을 보는 것같이 모든 법에서 또한 이와 같이 평등하게 머물고 평등하게 참음을 봅니다.
이런 까닭으로 마침내 얻었다고 하며, 모든 법은 평등하여 가도 갈 곳이 없고 와도 온 곳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마침내 얻었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마침내 모든 법을 얻으면 보살이 말하는 것은 모두 법집을 말하는 것으로 중생에게 안온함을 줍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말씀드린 법집은 여래의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것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
수보리야, 네가 지금 이 법을 말할 때에 5천 명의 천자(天子)가 번뇌를 멀리 여의었고 법 안에서 깨끗한 눈을 얻었으며, 5천 명의 천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네가 말한 미묘한 법집을 들으면 이러한 보살은 곧자신이 큰 법바다[法海]에 이르렀음을 알고, 이 몸이 헛되지 않고 반드시 묘한 즐거움을 얻은 줄 알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모든 부처님 여래의 제일의 법집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문자인 법]
이때에 혜명 아나율(阿那律)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문자임을 이름하여 법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문자의 성품은 다하는 모양이 없으며, 다함의 모양이 없다는 것은 곧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언어를 오직 문자라고 말할 뿐입니다.
세존이시여, 문자라는 것은 자기 몸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이름은 ‘나는 음성을 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문자라는 것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모든 문자가 모든 법과 더불어 그 성품이 평등한 것을 압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이 마침내 모든 법의 음성을 알면 보살은 음성에 걸림 없이 모든 음성을 모두 들을 수 있습니다.
모두 다 부처님의 음성이며 모두 허공의 소리이며 모양이 없는 소리이며 원함이 없는 소리이며 법계의 소리이며 실제의 소리이니, 보살은 한 법도 모든 지혜에 걸림이 없습니다.
이 보살은 부처님의 보리를 여읜 법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이 보살은 모든 법에 다 걸림이 없음을 보고 모든 법이 부처님과 같아서 서로 어기지 않음을 보고,
이 보살은 모든 법이 나아가거나 물러남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보살은 모든 법을 보지 않지만, 항상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법에서 마침내 인(忍)을 얻고, 이 인을 얻은 까닭으로 매우 깊은 요설변재(樂說辯才)를 성취합니다.
어떠한 것이 매우 깊은 요설변재이겠습니까?
모든 보살이 소유한 변재를 수순함인데 성문이나벽지불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 보살이 안온한 요설변재를 얻었으니, 안온한 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안온한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응설변재(應說辯才)를 얻었으니, 응설변재라는 것은 모든 중생이 상응하는 것에 따라 법을 듣게 되는데 저 근기와 성품[根性]에 맞추어 자세하거나 간략하게 설법하는 것이니, 이것을 응설변재라고 합니다.
또 민첩하고 빠른 변재[捷疾辯才]를 얻었으니, 민첩하고 빠른 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빠르게 말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또 총명하고 영리한 변재[聰利辯才]를 얻었으니, 총명하고 영리한 변재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상근기의 총명한 지혜를 따라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빨리 해탈을 얻어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 공상요설변재(共上樂說辯才)를 얻었으니, 공상요설변재라는 것은 설법 중 최상이어서 부처님과 더불어 같은 것입니다.
또 증장변재(增長辯才)를 얻었으니, 증장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한 글자를 말하여 백천만억의 상상(上上)의 변재를 내는 것입니다.
또 경요설변재(輕樂說辯才)를 얻었으니, 어떠한 것이 경요설변재입니까? 어떤 변재의 모양을 따라서 설법하는 것입니다.
또 애요변재(愛樂辯才)를 얻었으니, 애요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법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염족(厭足)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또 조순변재(調順辯才)를 얻었으니, 조순변재라는 것을 지니고 있는 변재가 부처님의 뜻을 어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 유연변재(柔軟辯才)를 얻었으니, 유연변재라는 것은 지니고 있는 변재가 교만함을 일으키지 않고 방일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 적정변재(寂靜辯才)를 얻었으니, 적정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자기나 다른 이로 하여금 적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수순음성변재(隨順音聲辯才)를 얻었으니, 수순음성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중생을 교화하여 성문승(聲聞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또 원리변재(遠離辯才)를 얻었으니, 원리변재라는 것은변재를 따라 중생을 교화하여 벽지불승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 최승변재(最勝辯才)를 얻었으니, 최승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변재를 말하고, 어떠한 변재를 따라 중생을 교화하여 대승(大乘)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또 불공변재(不共辯才)를 얻었으니, 불공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적멸변재(寂滅辯才)를 얻었으니, 적멸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무기혐변재(無譏嫌辯才)를 얻었으니, 무기혐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중생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고 신뢰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력변재(諸力辯才)를 얻었으니, 제력변재라는 것은 변재를 따라 모든 많은 마군과 외도의 그릇된 논리를 항복 받는 것입니다.
또 선설변재(善說辯才)를 얻었으니, 선설변재라는 것은 소유한 변재로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지만 두려움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것을 묘한 법집이라 이름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말씀드린 법집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집에 수순합니까, 수순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나율아, 네가 말한 것은 나의 뜻에 수순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