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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 중권
12. 해혜보살소설경(海慧菩薩所說經)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보살이 계율을 범하여도 6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음을 해설하였으며,
반야바라밀의 깊은 이치와 성문의 경중(輕重)을 비교하여 해설하였다.
처음 보리심의 보배로서 삿된 마군의 장애를 극복하고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음을 해설하였다.
신ㆍ구ㆍ의가 짓는 3업(業)으로 6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을 해설하였으며,
관행(觀行)으로 6바라밀의 염문(染門)을 성취하는 것을 해설하였다.
여덟 가지 공덕과 번뇌가 조화롭게 뒤섞여 있음을 비유하여 해설하였고,
네 가지 선행문(善行門)을 해설하였으며,
보살행문에 열두 가지 마군의 장구(障鉤)가 있음을 해설하였다.
그때에 어떤 천자가 문수사리동자에게 말했다.
“문수사리시여, 처음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아끼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보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끼고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곧 아끼고 인색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써 중생들의 마음을 성숙시키는 데 베풀어 쓰기 때문에 곧 단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만약 계율을 범하고도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을 거두어 보호하고 성숙시키기 때문에 설령 계율을 구족하지 않아도 시라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인욕을 버리고도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외도(外道)의 행을 버리고 전적으로 위없는 보리의 법인(法忍)을 익힌다면 찬제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자신을 높이고 교만해도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벽지불이나 아라한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바야지(薩婆若智)를 드러내어 드날리기 때문에 대승(大乘)을 좋아하여 게으른 마음이 없고 좋은 생각으로 위없는 보리를 쌓거나 모아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정진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산란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선바라밀(禪波羅蜜:선정바라밀)을 얻거나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더 나아가 잠을 자면서까지도 벽지불과 아라한과를 좋아하지 않고 전적으로 위없는 보리를 구하여 선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수행하는 어떤 보살이 어리석어 지혜가 없으면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지혜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지혜가 부족하여 세속에서 주술로 도깨비를 부림과 저주(咀呪)하는 것과 시체를 일으켜 요란케 하여 다른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혼란하게 하는 것을 보나니,
보살에게 방편으로 구호(救護)할 지혜가 없지만 보리심을 위하는 까닭에 부처님의 지위를 섭념(攝念)하여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여래께서 문수사리보살을 찬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참 좋은 말이다.
문수사리야, 진실로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그대는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잘 분별하였으니, 닦고 익혀야 하는 행업(行業)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제 반야바라밀의 원만한 해탈에 대해 간략히 설할 터이니, 그대는 잘 들으라.
문수사리야, 비유하여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 굶주림을 참을지언정 독이 든 밥은 먹지 않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차라리 인색하게 굴면서 계를 지킬 마음이 없고 성내고 태만(怠慢)하여 섭념(攝念)의 마음이 없을지언정 성문과 연각의 도를 좋아하여 수행하지는 않는다.
만약 마음으로 6바라밀의 행을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닦으면 곧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서 보살은 마땅히 액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자가 세존께 말했다.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은 진실로 번뇌를 두려워하며, 성문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천자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목숨이 살아 있는데 문득 상해를 입게 되면, 곧 머리를 잘라야 하겠느냐, 신체의 일부만 자르면 되겠느냐?”
천자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만약 생명을 보존하고 싶으면 차라리 신체의 일부분을 자를지언정 머리를 자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가 있다면 그래도 공덕과 좋은 업을 닦아 모을 수 있을 터이니, 좋은 업으로써 하늘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머리를 자르면 좋은 업도 함께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다.
차라리 위의와 계행을 버릴지언정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차라리 번뇌와 서로 호응할지언정 성문의 지위에 들어가 번뇌의 문을 끊지는 않는다.”
천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이 이와 같이 행업(行業)을 닦고 행하면 세간에서 희유하여 매우 믿기 어렵게 되겠습니다.
성문이나 연각의 행업을 부지런히 닦는다면, 곧 수행하는 보살에게는 계율을 범하는 것과 같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
비유하면 가난한 사람의 집에서 항상 먹는 밥을 만약 전륜왕이 잠깐 동안 조금이라도 맛보면 마치 독약을 먹은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성문이 번뇌를 제거하여 없애기 위하여 견고하게 정진하는 것을 수행하는 데에 비유하면 보살이 계행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생업(生業)을 구하면 한 몸을 가꿀 수는 있지만, 한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는 없다. 하물며 그 밖에 다른 세간 사람들이겠느냐?
성문도 또한 그러하니 자기의 번뇌의 마음만을 제거하려는 까닭에 비록 정진(精進)을 행하지만, 염부제(閻浮提)의 중생들을 유익하게 하기도 부족할 것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세간이겠느냐?
또 비유하면 큰 부자 상인이 모든 권속과 친척,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지런히 베풀기를 좋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다.
천자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자비를 닦고 익히며 비심(悲心)으로 정진한다.
이런 까닭에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나니,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로써 널리 중생들에게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베푸느니라.”
그때에 장로 마하가섭(摩訶迦葉)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성문이 도를 닦아 함이 없는 과[無爲果]를 증득하였고, 수행하는 보살이 아직 함이 있는[有爲] 데에 머물러 있는데도
어떤 이치가 있기에 수행하는 보살이 무위의 과를 증득한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그대를 위하여 비유를 들어 말하겠다. 지혜로운 이는 비유를 들어 말하면 그걸 듣고 속히 깨닫느니라.
비유하면 사대해(四大海)에 소(酥:우유의 일종)를 가득 채웠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소의 털 하나를 뽑아다가 그걸 백 개로 나누고 그 나눈 한 개의 털끝으로써 한 방울의 소(酥)를 취한다고 할 때 가섭아,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 하나의 털끝에 묻은 한 방울 소의 양이 저 사대해의 소보다 많겠느냐?”
가섭이 아뢰었다.
“그렇지 않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 두 곳의 소에서 어떤 것이 최고의 상품이고 최고로 소중하며, 최고로 많고 최고로 귀하냐?”
가섭이 아뢰었다.
“만약 한 털끝의 소로써 큰 바다의 소에 견준다면 억백천 분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 소가 진실로 최상이요 최고로 소중하며, 최고로 많고 최고로 귀하여 그 한 방울의 소로는 견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비유하면 백으로 나눈 털끝에 찍어 취해 얻은 소와 같을 것이니라.
만약 성문의 작위가 없는 지혜[無爲智]를 부처님의 지혜에 견준다면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행하는 보살은 작위가 있는 공덕을 닦고 익혀 작위가 없는 행과 서원으로 널리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느니라.
가섭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모기와 개미 따위는 오직 한 알갱이의 음식 맛만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3월에 넓은 밭에 씨를 뿌린다면
가섭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어느 것이 수효가 더 많겠느냐?”
가섭이 아뢰었다.
“3월에 뿌린 씨앗은 만약 가을이 되어 거두어들인다면 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중생들을 풍족하고 이롭게 할 것입니다.
한 알갱이 곡식으로는 자기를 이롭게 하지도 못할 것인데 어떻게 중생들을 다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비유하면 모기나 개미가 한 알의 음식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성문도 또한 그러하니라.
만약 3월에 널리 씨를 뿌리면 수확하는 것이 매우 많을 터이니,
수행하는 보살이 6바라밀과 아울러 4섭법(攝法)의 일에 대한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만약 성숙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유익하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로 널리 쾌락을 베풀고 더 나아가 위없는 열반까지도 성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백천 마리의 낙타에 유리구슬[琉璃珠]을 싣고 성읍(城邑)에 반입하는 것과 또 한 알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을 큰 바다에 떠 있는 배 안에 싣고서 아무런 장애가 없이 염부제에 이르기만 하면,
이 구슬로 염부제 중생들을 골고루 부유하게 만들어 주어서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에게 널리 요익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가섭아, 저 백천 마리의 낙타에 실은 유리구슬이 지닌 가치가 한 알의 보배 구슬보다 더 났겠느냐?”
가섭이 아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모든 유리구슬은 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니, 성문이 닦아 작위가 없는 해탈에 드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가섭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비유하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이 오히려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실려 있는데,
만약 장애가 없이 염부제에 가져오기만 하면, 곧 일체 중생들을 모두 부유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삼보의 종성(種性)이 계속 서로 이어져 끊어짐이 없어서 위없는 보리를 일으킬 수 있느니라.
비유하건대 보배 구슬을 얻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해혜(海慧)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여 처음 보리심을 일으킨 보배가 인욕(忍辱)하여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여 보리심의 보배가 장애가 있게 되겠는가?
해혜여,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이 이미 보리심을 내었기 때문에 악지식(惡知識)을 만나거나, 혹은 마왕 파순(波旬)과 마군의 권속을 만나거나, 혹은 마군의 일을 만나고 마군이 행하는 바에 머물러 그에게 마음의 괴로움을 당하거나, 착한 마음을 겁탈 당하느니라.
수행하는 보살은 마음에 의혹(疑惑)이 있으면, 삿된 마군이 와서 보살을 괴롭힐 것이다.
보살은 이때에도 마음이 물러나거나 산란함이 없고 위없는 보리와 격리되지 않느니라.
또한 중생들의 해탈을 단절하지 않나니, 크게 자비한 마음 때문에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아 모으느니라.
또한 삼보의 종성을 끊지 않고 일체 부처님의 행도 끊지 않으며, 또한 32상(相)과 80종호(種好)도 끊지 않고,
차례대로 수행하여 모든 공덕의 자량을 드러내며,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어 나타내느니라.
선법(善法)을 보호하고 유지하여 닦고 익히며 배우는 까닭에 마침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중생들을 성숙시키며,
세간의 쾌락을 좋아하여 거기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느니라.
수행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대비와 인욕으로 그 마음이 견고하며,
다른 이가 업신여기거나 천하게 여기거나 꾸짖고 욕을 해도 개의치 않을 수 있으며,
매를 맞는 고초를 당해도 다 참고 받을 수 있으며,
중생들의 무거운 짐도 대신 짊어져서 잠기지도 않고 오그라들지도 않으며,
정근(精勤)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그 마음이 용맹하여 피안에 이르게 된다.
또한 피곤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닦아 지니고 정진하며 방편심을 일으켜서 전심(專心)으로 견고하게 하면,
다른 이가 아무리 괴롭혀도 자신은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때리고 꾸짖어도 자신은 다른 이에게 성내지 않나니, 대승(大乘)의 이치 때문이니라.
세간과는 특별히 다르니 이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좋은 길을 잘 생각해서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삼계를 수순하여 실천하느니라.
내가 지금 부지런히 역행(逆行)을 구하면 삼계의 중생들도 나를 어기거나 순종하기 때문에 나는 마땅히 그들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여 화합하느니라.
이들 중생들이 성내는 마음이 거세면 나는 인욕을 구하고 마음으로는 수순하기를 생각하느니라.
세간의 중생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속이고 유혹하더라도 나는 지금 오직 지혜가 원만해질 것을 생각할 뿐이다.
만약 시방에서 중생들이 와서 모이되 각각 칼과 창 따위의 무기를 가졌으나 나를 따라서 실행하므로 각자가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할 때에도 보리심을 일으키나니,
그때에 보시하는 마음을 내고 계율을 지키려는 마음을 내며,
인욕하려는 마음을 내고 정진하려는 마음을 내며,
선정의 마음을 내고 지혜의 마음을 내며,
경전을 배워 익히려는 마음을 내고 공덕을 닦아 유지하려는 마음을 내느니라.
수행하는 보살이 이러한 마음을 생각할 때, 저희들은 당장 그의 머리를 베고 몸을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그 크기가 대추 잎과 같게 하고자 할 것이며,
이 중생들이 외곬으로 분노를 품고 사람을 죽일 뜻이 있어도
그때에 수행하는 보살은 오롯한 마음으로 스스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느니라.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
나는 인욕하기 때문에 원수로 여기거나 나쁘게 여기는 일이 없다.
무슨 이치 때문인가?
나의 지금 이 몸은 시작이 없는 삼계에서 지금까지 가히 계산할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생사(生死)를 거듭하며,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다니지 아니한 데가 없고 괴로움을 받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혹 사람 가운데 태어나도 오욕(五欲)을 탐닉한 까닭에 그 오욕을 잠깐도 버림이 없었고, 어떤 때는 법답지 아니한 것을 듣고 다른 이의 마음을 따르고 순종하였다.
이 인연 때문에 목숨을 잃고서 뼈마디가 흩어져 백 조각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이 괴로울 때에도 피차간에 유익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지금 이미 내 몸을 잘라 동강동강 분리해서 내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내가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만약 능히 미래의 겁(劫)이 다한다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니, 나는 항상 위없는 보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무슨 이치 때문인가?
내가 지금 받은 머리를 잘린 일이나 뼈마디가 흩어지는 괴로움은 참기 어렵지만, 지옥의 고통에 비교한다면 이 고통보다 백 배나 더할 것이다.
나는 지옥에 들어가서도 보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서원했으니, 큰 자비로써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조그마한 마음을 가지고도 커다란 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세간의 중생들에게는 나쁜 벗은 아주 많고 착한 벗은 매우 적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나쁜 벗과는 친구가 되지 말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나와 중생들은 원수를 지거나 나쁜 일이 없고, 원한의 마음을 내지 않으며,
다른 이는 사람들과 함께하지만 나는 다른 이와 함께하며,
다른 이는 오직 사람들에게 성내고 질투하지만 나는 오직 자비롭고 참은 것만을 다른 이에게 줄 것이다.
나는 지금 반드시 죽이지 않겠다는 인욕의 힘을 드러낼 뿐 성내는 힘을 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목숨을 버릴 수만 있다면 빠른 시간에 보리를 증득하며 장애가 없을 것이다.
몸은 오욕에 대하여 탐하고 애착하여 물드는 것이니, 목숨이 끊어져 다하면 성내는 마음도 저절로 없어지느니라.
만약 사각(捨覺)을 일으켜서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면 반드시 법의 문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곧 일체 중생들에게 시달림을 당해도 참아내며, 중생들과 함께하고 단절하지 않으며, 항상 세 가지의 고뇌를 인욕하느니라.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첫째는 몸으로 겪는 괴로움을 참는 것[身惱忍]이요,
둘째는 입으로 겪는 괴로움을 참는 것[口惱忍]이며,
셋째는 뜻으로 겪는 괴로움을 참는 것[意惱忍]이니라.
또 어떤 것이 몸이 겪는 괴롭고 어지러움을 참는 것인가?
만약 몸이 베어짐을 당해도 잘 참고 받아들이면서 오직 마음으로 세간 중생들의 몸이 베어지는 것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라면 지혜와 방편으로 몸이 잘림을 당할 때 6바라밀을 관하고 생각하나니,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여 목숨과 재물을 버리면, 신명(身命)을 버린 까닭과 몸에 대하여 인색하지 않나니, 그런 까닭에 곧 단바라밀의 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만약 해침을 당할 경우에도 비심(悲心)이 두루하여 비록 고초와 아픔이 있지만 마음에 산란함이 없으면 곧 지계바라밀의 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만약 몸을 베어 분해되는 때를 당해서도 이 사람을 제도하기만 소원하고, 참고 받아들여서 보복하려는 뜻이 없으면 곧 인욕바라밀의 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만약 견고하게 정진함으로써 보리심(菩提心)을 버리지 않는 까닭에 세간을 싫어하지 않고 모든 공덕을 닦으면 곧 정진바라밀의 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만약 몸을 베어 분해되는 때에 반드시 생각을 다잡아 이 몸은 초목(草木)이나 기왓장이나 돌이나 그림자나 벽과 같은 것이며, 허깨비 같고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아(無我)이며 잠깐 동안에 파괴되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곧 지혜바라밀의 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해혜(海慧)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훌륭하고 좋은 방편을 이와 같이 사용하면,
곧 6바라밀의 행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니,
곧 이런 보살은 몸으로 인욕하는 행[身忍辱行]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어떤 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입으로 겪는 괴로움을 인욕하는 것인가?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꾸짖음을 당해도 대들지 않으며, 일체 싸우거나 다투거나 성내거나 싫어하거나 천시 당하거나 매를 맞거나 삿되거나 따지거나 해도 맞서지 아니하며,
다른 이가 하는 악담을 들어도 성냄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고 다 잘 참고 받아들이면
곧 이런 보살은 입으로 하는 인욕행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어떤 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으로 겪는 괴롭고 어지러움을 인욕하는 것인가?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훌륭하고 좋은 방편과 지혜가 서로 호응한다면 사람들이 헐뜯거나 험담을 하거나 꾸짖거나 욕을 하거나 성을 내거나 책망해도 맞서지 않으며, 보살이 듣고서 마음으로 잘 인욕하면
곧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으로 인욕하는 행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또 해혜야, 어떤 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훌륭하고 좋은 방편과 지혜가 원만하여 6바라밀의 관행(觀行)을 성취할 수 있는 염문(念門)인가?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다른 이에게 꾸지람을 당하거나 듣기 어렵고 참기 어려운 일이거나 악담이나 성냄과 질책을 들어도 따지지 않고 마땅히 이렇게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지금 나를 꾸짖는 이 사람은 응당 과거에 인색하고 질투심이 많아서 좋은 인연을 만나지 못했었고 배움과 가르침을 받지 못했었으며, 일찍이 삼보(三寶)에 공양 올린 적도 없었던 사람이다.
나는 지금 당연히 저 사람의 번뇌와 분해하고 성내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을 제거해 주리라.
내가 이제 원망하고 혐오하며 시기하는 마음을 버려서 탐내고 아끼는 것이 없으니,
선지식을 구하여 바른 길을 닦고 배워 친히 좋은 사람을 모시고 입이 짓는 허물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삼가리라.’
이렇게 하면 곧 단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은 계율을 범한 죄의 허물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으니 당연히 성내어 흔들리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죄를 지어 받는 과보에 대하여 관찰하리라.’
이렇게 하면 곧 지계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의 습성은 성냄과 악함이 많은 까닭에 나를 꾸짖는 것이니,
나는 지금 그를 원망하지 않고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리라.’
이렇게 하면 곧 인욕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은 선행(善行)을 갖추지 못하여 나를 꾸짖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나는 지금 반드시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책망하고 격려하여 일심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보리를 잊지 않으리라.
저 악한 사람들이 나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에 큰 인연을 맺어서
아직 조복하지 못한 자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조복하게 할 것이며,
아직 선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선을 생각하게 할 것이며,
아직 악을 그치지 못한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악을 그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선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수행하는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람은 제 마음대로 행동하고 지혜가 없어, 유상(有相)과 아상(我相)과 중생상(衆生相)과 탐수재상(貪受財相)에 집착하여 보는 까닭에 나를 꾸짖는 것이니,
내가 지금 법답게 스스로 생각하리라.
이 가운데서 누가 욕하는 자이며, 누가 욕을 받는 자인가?
주고받는 자가 다 없거니 이미 나와 남의 구별이 없으면 곧 일체 법상(法相)과 삿된 행을 제거하여 없앨 수 있으며 원망함이 없이 잘 참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곧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해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지혜가 구족한 까닭에 악담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헐뜯거나 욕되게 하는 등 감당하지 못할 말을 들어도 보살은 능히 편안하게 여겨 참고 받는 까닭에 행과 서원이 원만하게 성취되느니라.
바라밀은 결정코 대승(大乘)을 여의지 않게 하며, 곧 능히 입으로 당하는 괴로움을 인욕[口惱忍辱]하는 것을 성취하게 하느니라.”
그때에 해혜보살이 아뢰었다.
“어떤 것이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으로 괴롭힘을 당해도 인욕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마(魔)가 장애하는 것이다.
그 보살로 하여금 보리를 멀리 여의게 하고 후퇴하는 마음을 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일체의 외도(外道)는 이양(利養)을 탐하는 까닭에 삿된 행을 닦고 익힌다.
저 보살로 하여금 보리를 멀리 여의게 하지만, 보살은 이미 바른 행을 깨달아 마음에 산란함이 없으므로 보리를 여의지 않는다.
비록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부처님의 몸이지만 그 마음이 후퇴하거나 동요함이 없다.
다시 큰 힘을 지닌 삿된 마군이 있어서 보살을 나무라고 질책하여 삿된 생각을 내게 하기 위하여 보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힘이 없으니 너는 아무리 대승(大乘)을 모아봤자 끝내 부처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빨리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정진하는 일도 버려라. 보리는 얻기 어려운 것이며, 여래의 거룩한 덕도 또한 구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세간에는 참기 어려운 괴로운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미 열반에 든 이들은 현재 쾌락을 받고 있다. 너는 대장부이니 또한 빨리 열반에 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해혜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은 보리에서 후퇴하라고 권유를 받는 그때라도 다른 이의 마음을 따르지 말고 바른 생각을 버리지도 않아야 하며 이렇게 생각하고 말해야 하느니라.
‘나는 결정코 보리수 아래에 앉아 반드시 삿된 마군의 무리들을 꺾어 항복받고, 결정코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하여 큰 법륜을 삼천대천세계에서 굴려서 부처님의 법을 널리 연설하리라.
나는 이미 일체 중생들에게 정각을 성취하도록 권청(勸請)하고 널리 나에게 청정한 법의 보시 받기를 원하였다.
만약 일체 모든 부처님과 타심통[他心]의 현성(賢聖)이 나의 성심과 보리의 행원을 아신다면 나는 지금 이 보리심 때문에 몸으로 인욕함에 모든 부처님과 현성과 일체 중생들과 나아가 자신을 감히 속이거나 미혹하게 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이 마음을 다잡아 참고 받으면, 대승에서 후퇴하지 않고 보리심의 보배를 끊지 않으리라.
해혜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보리심의 보배를 일으키고 이미 인욕바라밀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다시 정진바라밀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고 두 가지 행을 원만히 할 수 있나니,
이것이 곧 보살이 마음으로 받는 고뇌를 인욕하는 것이니라.”
그때에 해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세간에 계속해서 서로 이어지는 공덕으로서 번뇌와 더불어 고르게 섞여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까?
저희 중생들은 어떤 이치로써 계속해서 서로 이어지는 세간의 공덕과 번뇌가 고르게 섞였다고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간에 계속해서 서로 이어지는 공덕과 번뇌에 고르게 섞이는 것이 여덟 가지가 있다.
어떠한 것이 그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수행하는 보살의 공덕 자량은 싫어함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세간의 나고 죽음을 즐겁게 받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부처님 여래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고,
넷째는 중생들을 성취시키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일이 없는 것이며,
다섯째는 불법을 수호하여 수행하고 학습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부지런한 마음으로 중생들의 선행을 다잡아 주는 것이며,
일곱째는 깊이 불법을 좋아하여 보리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여덟째는 바라밀행에 얽매여 집착해서 버리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해혜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세간에서 공덕을 상속하고 번뇌에 고르게 섞이는 수행이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수행하는 보살은 나쁜 견해와 번뇌에도 물들거나 집착하는 일이 없느니라.”
그때에 해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러한 모든 공덕이 어찌하여 번뇌와 고르게 섞인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성립된 삼계가 다 번뇌를 원인하여 성취되었으니,
수행하는 보살은 훌륭하고 좋은 방편과 공덕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세간에 머물러 중생 제도하기를 서원하며 항상 삼계에 있으면서 번뇌를 섭수(攝受)하느니라.
보살은 제 자신을 위해서는 동요하거나 산란함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공덕이 번뇌와 고르게 섞이는 것이니라.”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한량없이 많은 보살의 행과 서원은 부처님 여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지혜와 방편을 의지하므로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처음 수행하는 보살을 보니 여래의 지혜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행업(行業)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어려워서 들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기 어렵고 참기 어려움을 수행해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에 사리불이 이렇게 말하여 마치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자 새끼가 아비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겠느냐?”
사리불이 아뢰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수행하는 보살도 만약 보리의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어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중생들과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을 들어도 놀라지 않고 동요하지도 않느니라.
사리불아, 아주 작은 불도 일체의 초목과 거대한 숲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나도 세간의 초목을 태울 힘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작은 지혜의 불을 가지고도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되 일체의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간의 번뇌를 제거하고 없애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일체 중생들의 번뇌를 분명하게 알면 이 번뇌가 곧 지혜의 불을 돕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세간의 일체 풀 나무의 가지와 잎과 뿌리와 줄기가 각기 서로 말하였다.
‘겁(劫)의 최후에 일곱 개의 태양이 솟아오르면 온갖 풀과 나무가 마땅히 불과 함께 싸워서 각기 승리를 취하고자 한다.’
그때에 이 모든 풀과 나무는 마른 풀을 수미산 높이만큼 쌓아 놓고 불에게 말한다.
‘마른 풀을 쌓아 놓은 것이 그 높이가 수미산과 같은데 너희 불은 왜 힘을 모으지 않느냐? 틀림없이 마른 풀이 이기게 될 것이다.’
불이 말한다.
‘우리는 무리를 모으지 않는다. 왜냐하면 풀과 나무는 우리의 벗이기 때문이다. 만약 풀과 나무가 많으면 우리에게 힘이 더 생기고, 만약 풀과 나무가 적으면 우리는 곧 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중생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 때문에 지혜의 불이 맹렬하게 치솟아서 수행하는 보살의 힘이 점점 강성해지느니라.
만약 번뇌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나면 번뇌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의 불이 되느니라.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번뇌를 좋아하지 않고 버리고 만다면 문득 성문이나 연각의 지위에 떨어지게 되리라.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바른 생각으로 일체의 번뇌를 관찰하면 수행하는 보살은 점점 힘이 강해지느니라.
이러한 말을 듣고 나서도 놀라지 않고 동요하지도 않으면, 보살의 교묘한 방편과 지혜가 성취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 수행하는 보살에게 네 가지 서로 호응하는 선행(善行)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6바라밀을 정진하여 닦고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대비(大悲)한 마음으로써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공덕을 굳게 유지하여 원만함을 성취시키는 것이요,
넷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 동안 삼계를 수호하되 피곤해하거나 게으름이 없이 일체 공덕의 자량을 쌓아 모으는 것이니라.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 공덕을 잘 성취하면 곧 보살의 행업을 결정코 이루게 될 것이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해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삿된 마왕 파순(波旬)의 앙구사구(央俱賖鉤)를 아느냐?”
해혜보살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삿된 마군의 장구(障鉤)를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삿된 마군의 장구에서 해탈하는 이치를 듣고 싶으냐?”
해혜보살이 아뢰었다.
“듣기를 좋아하고 원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이 이치를 듣고 나면 곧 삿된 마군의 장구에서 해탈할 수 있고 능히 일체 마군을 꺾어 항복시킬 수 있으며,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성취하느니라.”
그때에 해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이 지금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써 열두 가지 삿된 마군의 앙구사구를 말하려고 합니다. 처음 보살의 도(道)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것이 그 열두 가지인가?
첫째는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수행하면 애착을 가지는 물건에 대해서는 아끼는 마음을 내고, 애착을 가지지 않는 물건에 대해서는 멋대로 버리고 남에게 줍니다.
만약 친하거나 잘 아는 이에게는 마음으로 좋아하여 잘 주지만, 만약 친하지 않거나 아는 이가 아니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다 함께 분별을 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에게 첫 번째 장애가 되는 보시(布施)의 마구(魔鉤)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정진을 잘 시행하고, 굳게 계행을 지켜 위의가 구족하되 조금이라도 범함이 있으면, 그 죄를 보고 들어서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게 하고 평등하게 계율을 익힙니다.
만약 정진하는 비구나 바라문(婆羅門)이 공양을 올리고 함께 익히고 배우되 계율을 어기는 것을 보면 곧 성을 내며 나쁘고 천박하다고 싫어하고 한탄하며, 행업(行業)을 닦는 데 있어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두 번째 장애가 되는 지계(持戒)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몸으로 인내하고 입으로 인내하지만, 마음으로 인내하지 못하면 도리어 성을 냅니다.
만약 세상의 호족(豪族)에게 의지하면 곧 그 덕을 드러내어 드날리기 위하여 인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비천한 서민의 무리라면 곧 성내고 원한을 품어 참는 마음이 없으며 비록 잠깐 참아서 마음을 안정시키더라도 거만하고 성냄을 버리지는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세 번째 장애가 되는 인욕(忍辱)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부지런한 마음으로 익히고 배워서 중생들을 교화하되 그들로 하여금
성문승(聲聞乘)이나 연각승(緣覺乘) 가운데 들게 하고 대승들을 가르치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辟支佛)의 지위를 찬탄하고 오로지 속제(俗諦)를 익히게 하며,
승의제(勝義諦)의 법문을 버리고 대승을 덮어 가리고 오로지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닦게 하며,
당(幢)과 번(幡)과 음악과 꽃과 향 따위로 존엄한 얼굴[尊容]을 공양하여 베풀어 명예를 구하며,
대승을 보지 않고 불법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네 번째 장애가 되는 정진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4선정(禪定)과 삼마발저(三摩鉢低)에 들어 편안하게 앉아 고요하게 선정을 성취했으나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처소를 헐뜯고 비방하거나,
불법을 말하는 곳을 헐뜯고 훼방하거나,
중생들이 함께 사는 곳을 헐뜯고 비방하거나 덕으로써 유위(有爲)를 잘 행하는 곳을 헐뜯고 비방하며,
부동한 무위법(無爲法)의 적은 부문이라도 닦아 익혀 선정을 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욕계(欲界)에서부터 무색계(無色界)까지를 보고 무색천(無色天)을 좋아하여 둔한 마음 때문에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만약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면 백천 부처님께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리니,
이러한 사람은 모든 부처님을 만날 인연이 없고 불법을 듣지 못하고 스님들을 만나지 못하며 중생들을 성취시키지 못하고,
또한 여래의 오묘한 법을 만나거나 받지 못하며 공덕의 자량을 쌓고 모음을 만나지 못해서 지혜가 없고 게으릅니다.
만약 무상천에서 수명이 끝나면 다시 인간 세계에 내려와서 태어나더라도 지혜가 적고 허약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다섯 번째 장애가 되는 선정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지혜가 가득 차고 넓으며 습성을 식별하여 인연이 일어남을 알아도 있는 것을 세우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으나 유위(有爲)의 공덕을 헐뜯고 비방하여 마침내 교묘한 방편과 지혜를 잃습니다.
만약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등을 모두 닦지 않고 오직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만을 찬탄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반야가 최고로 뛰어나다’라고 하니,
다섯 가지 바라밀에 대하여 마음으로 분별을 내었고,
4섭(攝)의 일로써 중생들을 거두지 않으며
마음으로 항상 상(相)이 없고 무위(無爲)가 최고로 오묘하다고 하니,
이러한 사람은 아직 지혜가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도리어 삿된 길에 떨어져 버립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여섯 번째 장애가 되는 반야(般若)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아란야행(阿蘭若行)을 닦아 적정 적막하고 고요한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홀로 산림(山林)에 있으면서 좋아하는 것에 집착함이 없고,
멀리 저축해 쌓아 두는 일이 없고 도속(道俗)과 살지 않으며,
공덕과 지혜를 조금만 쓰고 동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안정하며,
또한 깊은 이치를 배우고 익히지 아니하며,
또한 중생들을 성숙시키지도 않고 불법을 듣지도 않으며,
또한 나아갈 길을 비교하여 헤아려 보지도 않습니다.
만약 깊은 이치를 강의하는 곳이 있어도 또한 나아가 듣지 않고,
또한 깊은 가르침을 구하거나 묻지도 아니하며,
또한 선지식(善知識)을 찾지도 않고,
아란야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여 뜻을 번뇌에 두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번뇌의 종자와 더 나아가 8성도(聖道))의 길을 열어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수행하는 보살은 비록 홀로 머물고 있으나 다른 이와 자기를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일곱 번째 장애가 되는 아란야(阿蘭若)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심오한 법을 설명해 주면 아름다운 말로 기쁘게 하고 위덕(威德)으로 중생들을 거둡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감당할 만하면 법을 주고 말을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둔한 근기로 어리석은 이가 가르쳐 주어도 감당하지 못하면 곧 불법을 드러내어 보여 줍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여덟 번째 장애가 되는 귀의법해(歸依法海)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세간 외도(外道)들의 논(論)과 소(疏)를 익히고 배우고 대승의 깊은 이치는 버리며, 외도들이 말한 것을 찬양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외론(外論)을 분명히 익혀서 말하고 듣기를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찬탄하면서 덕(德)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때에 그 모임 가운데 여러 하늘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마음으로 대승법(大乘法) 듣는 것을 좋아하여 그 도량에 왔다가
이미 외도의 논과 소를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뉘우치며 한탄하고 괴로워하면서 본래의 궁전으로 돌아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 선남자는 지금 이미 법과 여래의 좋은 가르침을 없애고 있구나.’
이와 같이 수행하는 보살은 법의 대들보요 기둥인데, 왜 가르침을 뒤집어 세간 외도의 논을 가르치겠습니까?
희론(戱論)을 좋아하는 까닭에 대승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는 매우 심오한 법을 위하시기 때문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고, 세속 외도의 희론에 의지하여 보리를 성취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것들을 수행하는 보살은 외도의 여러 가지 언론(言論)을 배우고 설명하면서 여래의 불법을 덮어 감추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부처님의 법에서 등정각을 육성한다면 오로지 단멸(斷滅)만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에게 아홉 번째 장애가 되는 깊고 깊은 불법을 덮어버리고 외도를 찬양하는 희론(戱論)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나쁜 친구를 좇아 선지식이라고 하면서 함께 친구의 연을 맺습니다.
이러한 나쁜 벗은 오로지 보살로 하여금 중생들을 버려서 성숙시키지 않게 하고,
또한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법을 붙들어 보호하지 못하게 하며,
텅 비어 고요한 데에서 작은 공력이 있는 곳에 머물게 하여 자주 성문의 법행(法行)만 가르쳐 줍니다.
만약 대승에 상응하는 심오한 이치가 있어도 선전하지 않으며,
또한 수행하는 보살이 대승을 익히는 까닭에 한적하고 고요한 처소에 머물면서 보리에 나아가려고 하면 나쁜 벗은 장애가 되나니
그 보살로 하여금 세간을 반연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행하는 보살은 세간의 속된 법에 어울리고 반연해야 하며,
만약 세간법을 다른 이에게 상응하도록 가르치고 익히게 하면서
곧 그들로 하여금 적정한 데에 머물게 하고 현재 다른 지위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여
보살이 결정코 위없는 행문(行門)을 드러내어 보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결정된 위없는 행문입니까? 열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입니까?
첫째는 신근(信根)에 의지하여 머물러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요,
둘째는 미묘한 법을 정밀하게 구하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며,
셋째는 좋은 법의 가르침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바른 생각으로 항상 부지런히 닦고 배우는 것이요,
넷째는 정진(精進)하는 데 정근(正勤)하여 이미 지은 법은 그 마음에서 버리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자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중생들을 성숙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법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로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여 모든 공덕을 닦는 자량으로 삼아 싫어함이 없는 것이요,
여덟째는 총지(摠持)의 위엄과 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일체 범속한 세상의 지위에는 마음이 물들지 않는 까닭에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닦고 익히는 것이며,
열째는 일체 성문과 연각의 지위를 초월하여 훌륭하고 좋은 방편과 지혜로 뛰어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열 가지 결정된 보살의 위없는 보살의 행업(行業)이니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익히고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나쁜 벗은 좋은 일은 드러내어 보여 주지 않고 도에 장애가 되게 하기 위하여 보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또한 부지런히 힘써서 수행한 뒤에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여 이루느니라.
그대들이 만약 8겁(劫)이나 더 나아가 10겁 동안 보리를 성취하지 못하면 다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구할 수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고행 정진하다가 다른 이가 도를 장애하는 것을 당하면 물러나 성문의 과위에 들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 번째 장애가 되는 선지식이 아닌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높은 체하는 아만(我慢)에 빠지면 교만해져서 하심(下心)하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사승(師僧)과 화상(和尙)과 위의를 갖춘 갈마사(羯磨師)와 문도(門徒)와 단월(檀越)과 더 나아가 부모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꺾이거나 항복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이미 보살의 행문을 초월하고 선행(善行)을 깨달아 통달했다면
총지(摠持)와 위의(威儀)가 원만하여 친근히 하고 가까이하기를 바라지 않고
좋은 가르침을 함께 배우거나 익히지도 않으며, 또한 찾고 묻기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일찍이 대승의 행을 닦은 사람이 이미 마구(魔鉤)에 당하여 그 마음이 걸려 집착하면
이러한 이치 때문에 이런 사람은 뒤바뀌어 삿된 행을 닦으며 삿된 도반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외곬으로 삿된 길을 행하여 보리에서 물러나고 잃어버리리니,
어리석은 어미 양이 걷지도 못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몹시 가물 때에 고원과 육지에 섬부수(贍富樹)를 심고 다시 물을 대지 않고
비록 흐르는 도랑이 있으나 둑을 막아 끊어지게 하였다면,
이 사람은 비록 심기는 하였으나 물을 대 주지 않아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먼저 보리심을 내었으나 뒤에 높은 체하는 아만심(我慢心)에 빠진 까닭에 선지식의 가르침에서 물러나 잃어버려서 부처님의 법을 듣지 않고 이미 듣고 받은 이는 다시는 닦아 다스리지 않습니다.
비유하건대 바닷물의 파도가 지세(地勢)를 움직이지 못하고
웅덩이 밑의 물은 깊고 두터우며
이 세상에 있는 강물은 샘의 근원을 모아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하는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사승(師僧)과 부모에게는 마음을 낮추고 적은 공력(功力)을 써서 크고 심오한 법을 얻으며 기억하는 바에 따라 생각하면 법이 마음의 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만약 높은 체하는 아만에 빠져 사승과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람은 이미 마구(魔鉤)에 걸려들고 집착하게 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한 번째 장애가 되는 공고(貢高)의 마구입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형상과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모든 이들이 공경하고 우러르며, 부유하고 넉넉하며 지체가 높은 부족으로 권속이 따르고 창고에 있는 보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그 단정하고 엄숙함은 모든 이들이 아름답게 보는 대상이 됩니다.
부유하고 넉넉하며 지체가 높은 부족으로 따르는 이가 많고 공덕의 자량에 대하여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며 숭앙하나니,
이러한 보살은 지혜를 모을 자량을 구하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위엄과 부호의 힘 때문에 마음이 도취되고 태만해져서 바른 길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출가하여 처음 보살계(菩薩戒)를 닦는 사람을 보면,
이미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 정근 수습(修習)하여 지혜를 모을 자량과 지혜의 힘 때문에 법을 위하는 정성으로 노지(露地)에서 편안히 앉아 좌선하며 피와 살이 마르고 타들어가며 뼈가 드러나도록 바짝 마르지만,
새벽부터 밤중까지 닦고 익혀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높은 체하는 교만에 빠져 수행하는 보살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을 보고 싫어하고 비천하게 생각하여 함께 도반으로 삼지 않고 받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 마음이 우매하여 어둡고 둔하여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두 번째 장애가 되는 나의 마음으로 도취된 마구입니다.”
그때에 보살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수행하는 보살의 열두 가지 마장인 앙구사구(央俱賖鉤)이며, 수행하는 보살로 하여금 도에 장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보살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여의지 못하고 멀리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무명(無明)은 오히려 익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보살에게 어린 시절의 행업을 따르고 좇게 하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처음 수행하는 보살은 응당 정근하여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깨달아서 삿된 마군의 열두 가지 장구(障鉤)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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