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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3권
6. 식계품[3]
[시방세계의 부처님의 게송]
이때에 자리에 있던 무수한 사부대중이 이 공혜의 청정하여 집착 없는 법을 설함을 듣고서 갑절이나 의심을 내어 구경(究竟)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세존께서 곧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아시고는,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을 이해하는 경지에 아직 이르지 못함에 응하시어 곧 스스로 몸을 화현(化現)했는데 몸의 높이는 4백 유순이었다.
세존께서 큰 소리를 내시어 시방세계에 고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 현재 법을 설하시니, 보살영락을 듣고자 하는 이가 모두 구름처럼 모여들어 사바세계에 나아가고자 하니,
무앙수(無央數)의 화현 보살[化菩薩]들을 보내어서 시방의 모든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 모두 예를 드리자.
지금 능인여래(能仁如來:석가모니불)께서 사바국토에서 보살 영락을 연설하시고 계시니, 우리들은 마땅히 널리 저 나라에 가서 모이도록 하자.”
이와 같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집착한 바가 없었다.
이윽고 그 상(像)처럼 위의를 거두어 지니고서 사바세계국토에 나아가시었다.
신심을 세운 보살로서 10주(住)를 얻은 이는 모두 부처님을 뵙자 예배하고 공양 올린 뒤에 각각 차례대로 무서움 없는 자리[無畏座]에 앉았다.
아직 신심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범부 경지라서 아직 천안(天眼)을 얻지 못했고 갖가지 신통도 갖추지 못한 탓에 시방의 부처님을 뵙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범부는 뜻이 작아서 범행(梵行)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자리를 잡으셨지만 몸은 범천에 이르셨고, 어떤 부처님께서는 몸을 변화하여서 1천 찰토, 2천 찰토, 나아가 삼천대천 찰토에 이르기까지 두루 충만하였다. 왜냐하면 중생이 교화를 받으려면 응당 형상을 보여야 했고, 법을 받으려면 응당 귀로 들어서 법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동쪽으로 두 강하의 모래알[江河沙] 수효만큼의 세계를 지나가면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명호를 본정(本淨)이라 하였다.
그 부처님께서 곧 대중과 더불어 게송으로 이 법언(法言)을 말씀하셨다.
허공은 끝없건만
상념이 붙으면 의심이 생기나니
본제의 행[本際行] 이미 다하여서
둘도 없고 같이 짝할 이도 없네.
허공의 모양 말하고자 하나
본질은 생겨날 조짐[生兆]도 없네.
어째서 허공의 지혜[空慧]를 의심하여
그 속에서 없음[無]을 구하고자 하는가?
나는 이제 부처를 이루어서
있음[有]을 품어도 물드는 바 없고,
번뇌가 다하여 스스로 존귀한 이 되었으니
다시는 일어나고 멸함이 있지 않으리.
이미 평등하고 올바른 길에 들었으니
좁고 작은 뜻은 좇지 않아서
나[我]를 헤아려 마음을 냄이 없으니
도를 얻음[得道]은 이 멸함으로부터네.
나의 목숨은 겁수(劫數)가 있고
제도할 바 헤아릴 수 없으나
뜻을 끊고 영원히 적멸하면
어찌 남을 제도하는 식(識)이 있으랴?
영락의 몸을 일곱 번이나 관하니
도의 꽃 색깔[道華色] 변하지 않고
무형(無形)으로 온갖 갈래에 들어가니
이것을 보살의 행이라 하네.
여래에게 두 가지 업이 있으니
도의 근본[道本]과 뭇 덕[衆德]을 갖춰서
방편으로 허깨비[幻化]의 법 나타내니
일어나고 멸함은 본래 없는 것이라네.
천상과 세간의 중생 무리
형상도 없고 수효도 없으니
어찌 형상 있는 사람이
무색(無色)의 법을 잘 알 수 있으랴?
부처님은 무진장(無盡藏)이라서
색욕(色欲)으로도 능히 다하질 못하는데
하물며 다시 도를 얻지도 못하고
평등한 슬기를 궁구하려 하는가?
비록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일찍이 뜻을 스스로 쉬지 않았건만.
중생은 게으름 있어
중간에 멈추어 뜻을 못 세우네.
대승의 평등한 법을
듣고서 받아들여도 어찌 다할 수 있으랴?
지금 공의 지혜[空慧]를 대강 설했으니
어찌 다시 공에 대해 의심을 내리.
그때 여래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18억 항하의 모래알의 수효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엄정(嚴淨)이란 이름의 불국토가 있는데, 부처님 명호는 이구(離垢)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라 하셨다.
열 가지 명호를 갖추시고 몸에 색상을 나타내시니, 더할 나위 없이 높으시고 높으시었다.
대중 가운데 계시면서 다시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도(道)를 깨닫고서
공의 평등한 지혜[空平等慧]를 듣고
12겁을 지나
이 정의 뜻[定意]을 얻었노라.
과거와 미래의 일 사유하니
6바라밀과 네 가지 평등한 행[四等行]은
모두 공혜(空慧)의 업을 말미암았고
공혜의 업은 치연(熾然)한 모든 법의 근본이었다.
뜻을 발함에는 계차(階差)가 있지만
큰 서원엔 차이가 있지 않노라.
지혜로 염(念)을 관함에 집착하지 말지니
사람의 교화에는 약간(若干)의 분별도 없다네.
가령 내가 노니는 나라에는
묘한 영락으로 장엄 청정해서
훌륭하고 특출한 슬기를 선포해서
이 나라엔 3악도(惡趣)가 없다네.
오직 공혜의 행만 연설할 뿐
‘있다’, ‘없다’는 곳에 집착하지 않아
나는 이미 무심(無心)으로 행하니
무엇 때문에 ‘있다’를 설하랴?
가령 성품에 형상 없듯이
법계 또한 청정하네.
알고 나면 이미 다하여 멸했나니
따라서 일어나고 멸함이 없다네.
다시 장엄 청정한 찰토 지나서
10억의 여러 찰토에
그곳에도 이 법이 있어
청정한 함이 없는 행[無爲行]일세.
말을 설해도 말이 있지 않고
모습 있는 근본[有相本]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렇듯 고요한 정[寂然定]에 응하기에
모든 행(行)에 명호(名號) 없어라.
중생의 마음 나아가는 곳
유(類)를 따라 본식(本識)을 일으키지만
나는 영원히 담박(澹泊)하므로
‘있다’, ‘없다’의 행(行) 보지 않네.
이 까닭에 무수한 겁 동안
구하는 것 끊고 유(有)에도 집착하지 않아
일어나고 멸하지 않음 구하고자 하여
따라가 얻어서 비로소 성취했노라.
이제 비어서 없는[空無] 몸으로써
형상을 따라 나타내니
부처의 지혜 끝없어서
결코 물들지 않네.
자연(自然)의 성품 청정하여
항상함이 있다는 상념 보지 않고
도(道)의 지혜와 뭇 덕을 갖추어
그 명호를 이구(離垢)라고 하니,
스스로 도과(道果)를 이루고서부터
허공계를 두루 노닐면서
혹은 천제석(天帝釋)도 되고
대존 범천왕(大尊梵天王)도 되도다.
형상을 변화한 까닭은
저 있음[有]에 집착한 이를 교화해
모두 무생의 지혜[無生慧]에 나아가서
청정하여 구경에 이르도록 함이었네.
다시 전륜왕(轉輪王)이 되어
무수한 성(城)을 거느렸지만,
모두 버리고 가서 도를 배우니
그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네.
다시 성문(聲聞) 가운데 들어가
도에 미치지 못할까 하여
문득 스승을 따라 배워서
온갖 상념의 집착과 결박 끊었네.
다시 정거천(淨居天)에 이르러
청정을 행하는 근본을 설해
저 하늘의 복[天福]을 여의게 했으니,
이것들도 다함없는 고통이기에.
무색(無色)과 색(色)의 중생은
항상함을 헤아리는 상념을 버리지 않고
교만함과 스스로 방일(放逸)함으로서
모두 도의 문[道門]에 들어가게 했네.
본래 등정각(等正覺)은 없고
교화됨도 형상이 없으나
요컨대 생사의 근본을 다하여서
끝내 적멸에 듦을 버리지 않네.
하물며 이제 너희 사부대중
처음 듣고서 문득 게을러지나니
이 품류는 스스로 기약함이 있는지라
빨리 속성시킬 수는 없어라.
이때에 여래가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서쪽으로 백억 항하의 모래 수효의 여러 불국토를 지나면 이름이 수정(水精)란 세계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정존(淨尊)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저 국토의 중생은 한 가지 법만을 받들어 지니므로 6바라밀의 온갖 행과 업의 근본이 없었다.
다시 대중 속에서 이 게송을 설하시었다.
여덟 가지 행[八行]에 높고 낮음이 없어서
평탄하게 멸진(滅盡)에 돌아가고,
몸을 버리고 또 몸을 받으니
다만 번뇌의 더러움만 더할 뿐.
허공의 둘 없는 법[無二法]은
머묾도 없고 또한 자취도 없어라.
여덟 가지 도의 평등한 지혜는
여러 부처님의 노니시는 곳이로다.
나는 옛 적에 스스로 행을 세워
법을 굴릴 것을 크게 서원하고
믿음을 체득하여 무(無)로 돌아가
이제는 인중존(人中尊:부처)이 되었노라.
여러 부처님의 계신 나라는
훌륭한 방편과 법도가 각각 다르니
어느 곳에나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코자 하여라.
즐거움에 얽매이고 집착하면
길이 어두운 집에 처하게 되니,
도(道)는 본래부터 서원이 없고
그런 뒤에 비로소 여읨을 얻네.
가령 나의 국토의 사람들은
마음을 거두어 악을 짓지 않고
끝까지 무위(無爲)를 숭상하니
이처럼 스스로 도에 가깝도다.
음행ㆍ화냄ㆍ어리석음의 때가 적고
또한 크게 은근(慇懃)하지 않아서
율행(律行)에 자연히 들어가기를
꽃이 때에 따라 피듯 하도다.
도의 뜻 옮겨 움직이지 않고
고락(苦樂)의 마음 영원히 끊어
온갖 찰토를 오고 가면서
공혜를 모조리 닦도다.
내 이제 이미 한 번 행하면
저 무리들도 다르지 않나니
이제 석가모니에게 듣기 때문에
등혜(等慧)를 닦음을 나타내도다.
구름같이 모인 큰 성현
거룩하여 높고 낮음 없어라.
비록 국토의 다름은 있으나
닦는 바는 똑같은 한 가지 법이로다.
이제 5도(道)의 사람을 살펴보니
무명(無明)의 행(行)에 가려서
나고 죽음에 빠진 채
갈수록 모진 고통만 더할 뿐이어라.
어째서 스스로 뜻을 세워서
공의 도를 체득하고 믿어
빨리 해탈을 얻지 않는가?
마치 바깥 찰토의 중생처럼.
여래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북쪽으로 세 항하의 모래알 수효만큼 먼 불국토를 지나면 보조(普照)라는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그곳의 부처님의 명호는 기변(機變)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다시 대중 가운데서 게송을 지어 말씀하셨다.
여래의 도[如來道]는 한 모습[一相]으로
본래 명색[名色]으로부터 생겨났네.
부지런히 닦아 무수한 겁 지나니
비로소 번뇌와 근심 다하네.
가령 사람이 허공을 건너고자 하여도
건널 수 있는 방법 구하지 못하듯이
다만 공한 법 기억해 바랄 뿐
그로 말미암아 과보 얻음 없도다.
뜻과 상념[意想]에 얽매어서
사물의 항상하지 않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죽지 않는 세계를 구하고자 하지만
이것 또한 일찍이 얻은 적 없네.
편히 머무름은 상념을 여의는 방법이니
있음 없음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아서
이미 공의 지혜를 밟을 수 있으면
자연히 물들어 집착함이 없으리.
도는 몸의 근본[身本]으로부터 나와
그런 뒤에 정각을 이루니,
미혹의 심의(心意)는 그릇되어서
마음을 여의고 밖에서 공(空)을 구하네.
외적인 고통에 비록 이름 있지만
그 식상(識想)을 여의지 않고,
법계의 청정한 도(道)는
곧 청정한 지혜에 응하네.
중생은 나고 죽음에 처해 있지만
빠져 헤매며 스스로 구하지 못하니,
뭇 고달픔 여의고자 하거든
먼저 의식(意識)을 반드시 없애야 하네.
여래가 출현하신 것은
비할 바 없는 법 연설하시어
한 상념도 물들어 더럽힘 없게 하심이니,
무엇 때문에 다시 공(空)에 물들랴?
부처님은 세 가지 통달한 지혜로
걸림 있는 형상을 이미 초월하였으니
지금의 염(念)은 본념(本念)이 아니요
중생의 유념(有念)을 반연한 것이로다.
온갖 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어서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으니,
소리를 인해 메아리가 있듯이
중생에겐 곧 부처[佛]가 있네.
교화 받는 중생들아,
항상 몸을 스스로 싫어하고 근심하라.
도는 도 아님[非道]을 능히 멸하니
있다 없다는 것은 참다운 법[眞法]이 아니니라.
그때에 여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동북쪽으로 92억 항하의 모래 수효의 찰토를 가면 정관(淨觀)이란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명호는 법관(法觀)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그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색(色)은 본래 색이 있지 않고
또한 색의 모습[色相]도 있지 않네.
고통의 법은 본래 일어나고 멸함이 없고
또한 더한 즐거움 낳지도 않네.
의식(意識)은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아서 오래 머무르지 않네.
몸 없는 슬기는 스스로 청정하니,
이것을 일러 평등한 공[平等空]이라고 한다.
일관(一觀)과 일의지(一意止)는
청정하고 존귀한 범행이니
내[吾我]가 유상(有想)에 집착하면
있음과 없음의 경계에 이르지 못하리라.
스스로 깨치고 다시 남도 깨우쳐서
공의 지혜에 통달하게 하는데도,
중생들 스스로 깨닫지 못해
이 때문에 망설임을 품도다.
성품에 상ㆍ중ㆍ하 있고
선과 악[善惡]은 늘 상대가 있으니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더라도
공무(空無)의 지혜는 얻지 못하리.
선과 악을 능히 보지 않으면
마음이 정직해서 뒤바뀜 없네.
그대가 곧 공을 믿고 이해하면
청정한 지혜를 따라서 얻으리라.
본래 평등한 뜻을 따르면서
중생의 무리를 보지 않음이
오래오래 되면 스스로 통달해서
위없는 도[無上道]에 감응하리.
혜관(慧觀)으로 탐착(貪着)을 끊고
마음을 씻어서 때 없이 청정하며
어진 지혜(仁智)는 공의 지혜와 같나니
그러므로 진인(眞人)의 법이라 이르노라.
세간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들은
그 까닭에 허무(虛無)의 도를 연설하나니
선과 악의 상대성을 생각지 않아
형상도 없고 정(情)의 상념도 없어라.
내 본래 평등한 뜻을 따라
여래에게 이 법을 받았나니
듣고서 문득 공한 지혜 통달하여
교화를 염(念)하면서 찰토를 청정히 관했네.
목숨을 아승기겁 동안 받아서
법을 설하여 끝내 교화하고
무수한 사람을 인도하여
이 법계의 근본에 들어갔노라.
세존께서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1억 불토를 가면 극묘(極妙)라는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미묘(微妙)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다시 게송을 말씀하셨다.
식(識)은 본래 5음[五陰]으로 인해
인연이 공통으로 합하고 모여
무수한 겁을 유전(流轉)하면서
스스로 일어났다 자연히 멸하는데,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들은
나고 죽는 근본을 통달치 못하고
끝내는 포태(胞胎)에 처해서
근심 걱정 여의기를 구하지 않네.
가령 사람이 한 생각[一念] 사이에
순전히 뒤바뀐 소견을 내면
얽매이고 집착함만 더욱 심해지니
어찌 다시 도의 뿌리를 낳겠는가?
중생의 무리를 생각해 보니
3독(毒)의 뿌리를 애착하고 즐겨하도다.
5개(蓋)가 심신(心神)을 가리어
눈이 없으니 어찌 살피겠는가?
여래는 큰 횃불을 잡아서
티끌 욕심의 근본을 태워 없애시건만
비록 중생들은 다시 혜명(慧明)을 보고도
오히려 돈독치 못한 믿음을 내도다.
내가 시방세계를 살펴보니
뜻을 발하여 도를 구하고자
행이 다하면 다시 생(生)을 받아
3악도(惡道)의 괴로움을 다시 받네.
네 곳은 본래의 소원이 아니니
네 가지 연못에 스스로 던져서
네 가지 생의 문[四生門] 여의지 못하면
네 가지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하네.
어떤 때엔 네 가지 법 여의지만
5성음(盛陰) 문득 생기고
증상만(增上慢)에 집착 없으나
방일한 행은 다하지 않네.
차츰 무수한 법에 이르러
성행(聖行)의 근원도 보지 않으니,
마치 사람의 뜻이 유탕(遊蕩)하여
마음이 스스로 생각을 막지 못하듯이.
여래의 6신통행은
공이 아니면서 공과 다르지 않아서
나고 죽는 근본을 영원히 버리고
곧 평등한 지혜에 응하네.
본래 스스로 나고 죽음 없건만
유전하면서 색(色)에 물들어 집착해서
드디어 법계의 색을 이루니,
있음을 멸하고 있음에 집착하지 말라.
도가 있으면 식이 있나니
이 식은 본래 없는 것이 아니로다.
능히 도와 식(識)을 보지 않으면
지혜와 선정의 법에 곧 응하리.
도는 식이 더욱 즐김을 따라서
몸을 나타내 수 없이 변화하나니,
스스로 알아서 선정과 지혜 이루면
뭇 모양의 변화에 곧 응하리.
머묾이 없으매 변역(變易)도 없고
의심과 망설임의 상념 없으면
온갖 번뇌를 항복시켜
평등한 지혜에 곧 응하리.
사람의 행(行)에 세 가지 걸림 있으니,
상념을 말미암아 공을 버리지 않고
뭇 행의 근본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 업(業)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때에 여래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13억 불토를 가면 광승(廣勝)이란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명호는 묘적(妙迹)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대중 가운데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각(覺)이 낳은 이 환법(幻法)은
깊은 법요(法要)에 있지 않으니,
도(道)도 오히려 이름이 없거든
하물며 공에서 말의 자취를 보랴?
여러 외입(外入)과 내입(內入)은
분별하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으면
청정한 지혜에 곧 응하리.
마음이 계욕(計欲)을 여의고
또한 다시 공에 집착하지 않으면
피차에 물들어 집착함이 없어서
최정각(最正覺)을 이루리라.
어리석은 미혹으로 밝음을 보지 못하매
계욕(計欲)은 심식(心識)으로부터 일어나
6법(法)이 6진(塵)을 내나니
이로 말미암아 의심의 상념을 일으키도다.
식(識)으로 인하여 이 몸을 받아
자연히 4대(大) 이루었네.
5도(道)를 향해 윤회를 하느라고
공의 성품의 법 알지 못하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말하기를
물든 것은 본래 없다고 하나,
몸과 마음이 함께 걸림을 내니
어찌 유(有)와 무(無)의 상념을 통달하랴?
묘관(妙觀)으로 3세(世)를 비춰
온갖 법을 나타내 보이면서 설하시니,
모든 불체(佛體)의 묘한 교법은
있음도 아니요 또한 없음도 아니로다.
세간의 고통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으나
평등의 공(空)은 의지하는 데 없도다.
유무(有無)를 동등하게 관하여 요달하므로
평등한 지혜라고 말하네.
때로 유(有)와 무(無)를 인식하면
이것은 여래의 지혜 아니니
피차 물들지 않는 것이
마음의 평등으로 마치 메아리의 응함 같네.
여덟 가지 도[八道]는 고(苦)의 근원 다하고
여덟 가지 이해[解]는 마음의 티끌을 씻고
여덟 가지 메아리는 모조리 허공으로 돌아가고
여덟 가지 지혜는 생기(生起)하지 않노라.
스스로 여의고 다시 상대[彼]도 여의어
중간에 걸림이 없어서
식(識)의 물들어 집착한 바에 따르나니
이것을 평등한 지혜라고 이르도다.
사람은 본래 허공에 있는데
물든 식(識)으로 3유(有)의 길이 생겨
번뇌에 스스로 집착하느라
본무제(本無際)에는 들어가지 못하나니.
본래 처음 뜻을 발함으로부터
공성의 지혜[共性慧]를 덜지 않고
다시 한량없이 지난 뒤에
곧 이 정(定)을 얻었네.
나는 모인 대중의 마음이
식을 여의고 공을 구하고자 함을 아네.
어찌 식을 스스로 염(念)하지 않는가?
안이 공(空)하고 밖도 마찬가지인 것을.
가령 법마다 상(相)이 없듯이
지혜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정(定)을 염(念)하여 어지러움 제거하면
이것을 평등한 지혜라 하네.
이 몸은 모조리 공에 돌아가
영원히 적멸하여 일어나고 멸함 없나니,
여래는 널리 크게 서원하시어
이 중생의 무리를 제도하도다.
그때 세존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서북쪽으로 54억 강하의 모래 수효의 불국토를 지나가면 유순(柔順)이란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중상(衆相)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를 갖추셨다.
대중의 회상에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가령 내가 공행(空行)을 관함은
한뜻[一意]로서 높고 낮음이 없고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된 마음은
모두 생사를 말미암아 일어나니
부처님의 깊은 곳간[藏] 구하고자 하거든
온갖 행의 근본을 궁구하여 다하라.
아직 여래의 신령스런 신통과 지혜를
능히 궁구하여 창달한 적이 없다면.
가령 어떤 한 선비가
겁으로부터 다시 겁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억백천이 되어도
그 수효는 늘거나 줄지 않고,
저 사람이 여러 근(根)을 갖추어
6정(情)이 줄어들지 않으니
여래의 지혜 듣고자 하나
아직은 문득 쉽게 얻지 못하도다.
하물며 다시 처음 뜻을 발해서
평등한 지혜에 이르고자 함이랴?
다만 스스로 더욱 손해만 있을지언정
도의 법에는 이익이 없네.
요컨대 큰 자비를 닦아서
방편과 슬기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두려움 없는 서원을 굳건히 하면
그 뒤에 마음을 조복하리.
다시 세계에 노닐면서
여러 부처님께 공양코자 하면
지은 공(功)을 일으키지 말고
자연히 성행(聖行)에 응하라.
여래 10력(力)의 성인은
온갖 삿된 소견을 조복시키고
‘나의 상념’ 없음을 인내해 알았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이 되셨도다.
법의 머묾과 머물지 않음을 요달해서
공덕의 행을 보지 않고
생(生)을 다해도 다시 받지 않으니
이것이 부처님의 경계이어라.
뭇 상호를 이루고자 하거든
여러 선(善)의 근본 끊지 말고
뜻을 멸하고 상념을 일으키지 말지니,
이것을 평등한 지혜라 이르느니라.
내가 중생의 무리를 관하니
때로 공을 스스로 알지 못해서
그 까닭에 자주 피로하여
길이 적멸한 곳에 들지 못하니,
빨리 도과를 행하고자 하거든
뭇 덕으로 몸을 장엄하고
다만 마음 근본 끊기만 염(念)해야지
어째서 의심을 일으키는가?
그때에 세존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위쪽으로 무수한 부처님의 국토를 지나서 중생계(衆生界)가 다한 곳에 회전(廻轉)이란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음향(音響) 여래ㆍ지진ㆍ등정각으로서 열 가지 명호가 구족하시다.
저 대중 가운데 계시면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허공이라서 형상 없는 식(識)은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없고
중생이 있음도 보지 않으니
하물며 법계에 노님이 있으랴?
현재 도(道)를 구하는 이는
허공에 노닐면서 허공을 구하니
자기 식(識)이 깨끗지 못한 이는
다시 바깥에서 허공을 구하고 있노라.
뜻으로 성스러운 지혜를 알지 못하는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니,
이 혜관(慧觀)을 사유하면
또한 무상한 도[無常道]를 얻으리.
이제 삼계의 몸을 받아
신통한 지혜로 스스로 분별하니
정식(定識)에는 형태의 상념이 없어,
종자를 끊음이 도의 뜻이 되노라.
사람은 스스로 식(識)을 사유하여
4대(大)로 소굴[窠窟]을 삼으니
아무리 바깥 공[外空]에 있지만
4대(大)와 다르지 않네.
다만 이제 지혜를 얻지 못해
안팎의 정(情)을 요달하지 못하나니
이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어서
세존께선 더욱 책망하지 않도다.
견줄 이 없는 장부[丈夫無等倫:부처]께서는
무상정(無想定)을 행해 초월하셨으니,
이것을 뭇 부처님의 법이라 이르건만
미혹한 이는 스스로 ‘나’를 계교하도다.
본래 일어나고 다하는 법 없으니
궁극적으로는 모조리 청정하고,
범행(梵行)도 끝내 청정하여
3세의 염(念)을 내지 않노라.
앞의 말은 지금의 말이 아니고
생각 생각[念念]이 스스로 변하고 바뀌니
이로써 증거를 삼을 수 있다면
어째서 삿된 의심을 내는가?
내가 이미 스스로 일컫지 않았던가,
권도의 방편으로 범부가 되었다고.
이 4대(大)를 사유하니
식법(識法)은 무엇으로부터 되었나.
지나간 세상의 법 설하는데
형상 없어서 볼 수도 없고
비록 오는 세상의 식(識)은 있지만
또한 아직 4대(大)를 받지 못했네.
지금 세상은 두 품[二品]으로 만들어
이제 하나하나 설하리니
각각 이 평등한 지혜에 대해
함부로 의심을 품지 말라.
지나간 세상의 식(識)을 분별하니
죽은 자는 지금의 형체 아니지만
이 식은 썩어 없어지지 않았으매
지나간 세상의 식이라 일컫네.
설사 식이 지금 나타나 머문다면
4대(大)의 인연이 합침이니,
이 식은 항상 변치 않으므로
다시 식의 현재라고 일컫네.
또한 다시 지금의 현재를 버리면
미래는 아직 생지지 않았고
저 식도 또한 지금이 아니니
무엇을 말미암아 3세라 일컬으랴?
식의 성품은 항상 스스로 머물러 있어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네.
식의 근본을 구하고자 하지만
소굴(巢窟)은 어디에 있나.
부처님은 견줄 바 없는 지혜로
식의 ‘본래 없음’을 통달하여
공의 성품으로 담박한 하나뿐이시니
다시는 의심의 상념을 두지 말라.
등정각을 이루고자 하거든
상념에 물들거나 행에 집착하지 말라.
식의 성품 본래 없다고 밝게 깨달으면
그 까닭에 평등한 지혜라 하느니라.
그때에 여래께서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서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아래로 11항하의 모래알 수효만큼 멀리 가면 무감(無減)이라는 이름의 찰토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보원(普願)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이고, 호(號)는 불세존이시다.
세존께서는 저 회상에 계시면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 모이시니
평등하여 둘이 없도다.
공의 정[空定]을 설하여 다하니
고요하여 행이 있지 않도다.
중생에게 항상함의 상념이 있어
공(空)은 한정이 있다고 말하나
근본에 통달하면 물들어 더러움이 없나니
이것을 모두 공에 돌아간다고 말하느니라.
베풀지 못하는 마음은 얽매이고 집착해서
본원(本願)의 행(行)을 잃기 때문에
드디어 비방하는 법을 내게 되어서
불법(佛法)의 성스러운 무리가 없다네.
여래의 계와 덕의 몸은
청정하여 티와 흠이 없어
제도 못한 이를 제도했으니
3세에 관하는 상념이 없도다.
공식(空識)은 스스로 이름 있어
자연히 생겨나고 자연히 멸하나
이 생(生)은 공식이 아니니
식의 멸함도 또한 그러하도다.
저 근본을 통달하지 못하여서
바삐 헤매면서 식(識)의 모습 구하나
가공(假空)을 이름하여 식(識)이라 했거늘
공과 식이 어찌 차이가 있으랴?
몸의 모습이 오히려 형상이 없지만
하나를 낳으면 다시 하나가 생겨나니
다만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
식을 일으킴이 약간 있을 뿐이로다.
뭇 지혜가 법체(法體)를 이루고
상호가 스스로 몸을 장엄하지만,
몸이 멸하고 지혜는 공(空)으로 돌아가면
다시 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
찾아보니 3세(世)는 없고
식도 없고 4대(大)도 없어서
이에 법계에 노닐 수 있으니
‘있음’ 또한 본래 있지 않음을 알았노라.
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는
권도(權道)로 나타나 늘고 주는 일 없으니
이 때문에 식의 형상이 없어
모든 불찰(佛刹)에 두루 노니시도다.
이 의심 오래부터 이미 있어서
너만 아니라 나 또한 그러하니
통혜(通慧)가 널리 다 비추면
그게 바로 부처의 식[佛識]에 응함이로다.
그때 여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홀연히 보이지 않으셨다.
즉시 대중 모임에 있던 11나술의 중생들이 모두 평등한 공혜의 관(觀)을 얻었고,
다시 한량이 없는 중생인 하늘ㆍ용ㆍ귀신들이 이 법문을 설하심을 듣고서 누구나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無上正眞道意]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