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설법]
‘어떻게 사람들을 위하여 바르게 설법해야 하는가?’ 등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여래께서는 스스로 내가 화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실 때에
자신이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으니
스스로 그런 말씀 하시지 않으셨기에
이 말은 진실한 말씀이라네.
이것은 무엇을 진술하기 위한 것인가?
여래께서 비록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선양(宣揚)하여 교화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곧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으니,
이와 같은 말을 하여 올바르게 설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그 설법이 바른 설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그가 교화시킨 모든 중생들이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많은 중생들의 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다시는 어떤 법으로도 설함이 없기 때문이다.
[설법과 열반]
‘만약 여래가 많은 화신(化身)이 되어 끝없는 설법을 하신다면, 왜 그는 다시 열반(涅槃)이 있다고 설하실까?’ 하는 의혹이 생겨날 것이므로
이런 의혹을 풀어주기 위하여 게송[伽他]으로 말하였다.
여래께서 증득하신 열반은
조작해서 된 것도 아니지만 또한 그와 다른 것도 아니다.
모든 여래가 증득한 열반[圓寂]은 조작(造作)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유위(有爲)의 자성은 그 조작에 의한 것처럼 그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비록 열반을 보인 뒤에도 그는 화신으로 나타나 생사(生死)가 똑같다는 이치를 보여 유정(有情)을 이익 되게 한 것이니,
여래의 머무름 없는 열반은 생사(生死)와 열반, 이 두 가지 모두에 머무르지 않음을 밝히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위법의 비유]
또 무슨 까닭으로 생사와 같다는 것을 보이시면서 생사인연(生死因緣)의 일에 머물지 아니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별ㆍ삼눈[翳]ㆍ등불ㆍ허깨비와 같고
이슬ㆍ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별 등 아홉 가지 일로써 법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니, 아홉 가지 일로 비유함으로써 바른 지혜로 경계를 관찰하게 한 것이다.
어떤 것을 아홉 가지 관찰이라고 하는가?
곧 이것은 아홉 가지로 관찰해야 할 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을 관찰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견상(見相)과 인식작용[識]과
거처[居處]와 몸[身]과 수용(受用)과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이 가운데에서 ‘마땅히 별[星宿]처럼 관찰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 심법(心法)의 바른 지혜는 태양처럼 밝으니 태양이 이미 떠오르면 그 물질은 모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며,
‘인연이 되는 경계의 모습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마치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발단(髮團)이 보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허망하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며,
‘마땅히 그 인식 작용은 마치 등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곧 능의견(能依見)은 마치 등불에서 기름과 같은 존재인 애착(愛着)의 힘으로 인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땅히 거처에 대해서는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곧 기세간(器世間)에는 기이한 바탕이 많이 있지만, 그 성품이 부실(不實)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그 몸에 대하여 이슬과 같은 존재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몸이 이 세간에 머무는 시간이 이슬처럼 짧기 때문이며,
‘수용(受用)하는 것에 대하여 마치 물거품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그 수용하는 성품이 이 세 가지 일[三事]이 합해져서 생겨난 성품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과거에 있었던 모여지고 지어진 일들을 마치 꿈속에 있었던 경계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다만 오직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성품 때문이며,
‘마땅히 현재의 일에 대하여 번개와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빠르게 소멸하는 성품 때문이며,
‘마땅히 미래의 실체[體]는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종자(種子)와 같은 위치에 있어서 실체가 능히 여러 가지 종자를 포섭하여 갈무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를 가지고 관찰할 때에 어떤 이익이 있으며 어떠한 뛰어난 지혜를 획득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습[相]을 관찰하고
수용과 변천하는 흐름을 관찰한 까닭에
유위(有爲)의 일 가운데에서
번뇌 없이[無垢] 자재(自在)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계와 인식작용을 관찰하기 때문에 곧 모여지고 만들어진 유위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며,
둘째는 기세계의 몸과 작용(作用)하는 것을 관찰하는 까닭에 곧 이것도 그 수용(受用)을 관찰하여 여기에서 저[彼]에게 수용되는 바가 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3세(世)가 차별이 있어 변천한 것임을 관찰한 까닭에 이것은 곧 변천하여 흐르고 머물지 않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기 때문에 문득 모든 유위법 가운데에서 장애(障礙)가 없음을 획득하여 마음대로 자재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생사(生死)의 세계에 거한다 하더라도 번뇌[塵勞]에 더럽혀지지 않아서 그 지혜가 원적회신(圓寂灰燼)함을 증득하리니, 어찌 그 비(悲)를 맛볼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모든 부처님의 희유(希有)한 법과
다라니 구절의 매우 심오한 뜻으로 말미암아
존귀한 이를 따라 자신의 뜻을 결정하고 널리 연설하여
복을 획득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빨리 청정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