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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5권
3. 불도선후편(佛道先後篇)
[유생, 불교의 교화를 어떻게 도교와 비교하겠는가]
유생(儒生)이 오래 있다가 다시 의논하여 말하였다.
“찾아보니, 불교는 중국에서 6백 년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진(晋)나라와 송(宋)나라 이후로 그의 풍속이 비로소 성하여 마치 공을 같이할 이가 없으니 세상에서 능히 이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노자의 도교는 중국에서 오래 되었음은 경서와 사서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가히 간략하게나마 들어보겠습니다.
조사하여 보니, 도교경전 『원황력(元皇曆)』에
‘내가 청탁(淸濁) 원년 정월 갑자일에 땅에 내려와 복희씨(伏羲氏)의 스승이 되어 나라 다스리기를 태평하게 하고 대낮에 하늘에 올라갔다’ 하였으며, 또
‘미분(未分) 원년 8월 갑진일에 내려와 신농(神農)의 스승이 되었고 태원(太元) 원년에 내려와 유(裕)의 스승이 되었다.
(어느 책에는 송용(松容)이라 하였다.)
무릇 12대(代)를 지나면서 변하여 17신(身)이 되어서 현로(玄老)로부터 시작하여 동방삭(東方朔)에서 끝난다’고 하였습니다.
『은진론(隱眞論)』에는
‘하늘과 땅보다 우선하면서도 길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만고(萬古)의 아래에 있으면서도 오래 되었다고 여기지 아니하여 때를 따라 감응하여 변화해서 사물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도교가 때에 따라 세상에 맞게 풍미되어 나라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을 유인(誘引)하여 품물(品物)을 이루는 데 이르러서는 어찌 능히 다 기록하겠습니까.
대략 계산하여도 이미 2백70여 만년을 지냈습니다.
[탄(彈)은
‘태소(太素) 때는 기운과 형체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나 맑고 흐림을 판명하지 못하였으니 이름하여 혼돈(渾沌)이라 한다. 2의(儀)가 이미 나뉘지 아니하고 3재(才)도 아득하여 보이지 아니하였는데 6기(紀)의 서명(序命)한 밖에 복희씨가 비로소 4성(姓)을 내고 수인씨(燧人氏)의 말기에 신농씨가 비로소 탄생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복희씨와 염제씨(炎帝氏)가 청탁(淸濁)의 세상에 나왔겠는가? 축융(祝融)과 용성(容成)의 6갑(甲)이 나뉘기 전의 일이니, 세간에 떠도는 서적은 믿을 것이 못된다’ 하였다.]
그러기에 상도(常道)는 도라 할 수가 없는 도요, 무명(無名)은 이름할 수가 없는 이름이라 하였습니다.
이미 고요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황홀(恍惚)하다고 하였으며, 주나라 왕조를 의지하여 주사(柱史)가 되었고, 한나라 세상에 살면서 큰 신하가 되었고 물을 희롱하고 물고기를 타며 공중에 노닐고 고니[鵠]를 탔으며, 아름다운 우물[玉井]이 땅 아래에서 솟아나는 윤기 있고 아름다운 샘을 머금었고 금 부엌에서 연기가 나니 인간의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3궁(宮)의 흰 구슬 장막에서 혹은 단 지초(芝草)를 먹고 아름다운 장식을 한 대궐의 섬돌에서 항상 단련된 골수(骨髓)를 먹습니다.
매괴(玫瑰)와 호박의 나무들이 낮이 아닌데도 광채를 내고 유리와 마노(馬瑙)의 가지가 바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음향이 납니다. 해골바가지가 능히 말하니 일찍이 장주(莊周)에게 물음을 빌렸으며, 흰 뼈가 도로 살아나니 어찌 서갑(徐甲)에게 빈 말을 하겠는가? 서왕(西王)의 옥무늬의 대추는 성스러운 여자가 받쳐 오고 동해(東海)의 금빛의 배[梨]는 신선이 받들어 와서 형체에 일정한 곳이 없이 가지가지의 얼굴을 나타내고 뜻에 다른 단서가 없이 어지러운 자취를 엽니다.
강을 뛰어넘고 바다에 걸터앉았으니 어찌 배를 의지하겠으며, 저자에 들어가고 산에 오르기를 마음대로 하여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헤아리기 어렵고 아득하여 찾기 어렵습니다. 하늘과 사람을 이익되게 하고 지금과 옛날을 모범으로 삼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교화는 해와 달도 가리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도교와 비교하겠는가?”
[보살, 두 큰 보살의 이야기]
보살이 그를 꾸짖어 말하였다.
“그대가 학문에 있어서 예를 상고함이 없어서 스승의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그대가 착한 것을 가려서 미혹한 것을 돌리지 못하고 어리석게 고수하기만 하여서 믿고 헤아리는구나.
내가 들으니 지혜가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는 이를 성인이라 하고 교화가 헤아릴 수 없는 이를 신인(神人)이라 하는데, 멀고 가까움을 찾지 아니하고 처음과 끝을 궁구하지 아니하는 자가 여기에 있으니 어떻게 그 사이에 뜻을 두겠는가?
자네의 의심이 아직도 막혔으면 마땅히 다시 말하겠다.
왜냐하면 대저 세계가 처음 이루어졌을 적에는 해와 달이 있지 않았는데 두 큰 보살이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하여서 이에 3광(光)을 벌리고 이에 8괘(卦)를 일으켰다.
복희라는 임금은 응성(應聲)보살이다.
[『춘추내사(春秋內事)』에서
‘복희씨가 3광(光)을 벌리고 8절(節)을 건립하였으니 글로써 기운에 응하였다. 24절기가 있었으며 화와 복으로 길흉을 판단하였다. 그러기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대대로 해와 달의 관(官)을 맡았으니 다 복희씨의 후손이다. 그러기에 희씨와 화씨라 이름한 것이니, 다 복희 임금의 본 이름이다’ 하였다.]
여와(女媧) 왕후라 함은 길상(吉祥)보살이다.
어찌하여 밝히는가?
찾아보니, 이 겁(劫) 중에 1천 부처가 세상에 나오셨는데 넷째의 부처님은 곧 석가문불(釋迦文佛)이고 그 이후의 부처님도 계속하여 일어나서 겁이 다함에 마쳤다.
그러기에 겁과 겁이 서로 차례로 돌면 부처와 부처가 다함 없는 것이다.
[『입세비담(立世毘曇)』에
‘발타(跋陀) 겁 가운데 무릇 1천 부처가 서로 계속하여 세상에 나오셨다. 그것은 법의 교화가 끊기지 않기에 발타를 현겁(賢劫)이라고 부른다. 한 현겁 가운데 성겁(成劫)과 주겁(住劫)과 괴겁(壞劫)과 공겁(空劫)의 네 개의 큰 중겁(中劫)이 있으니, 말하자면 10세(歲)로부터 8만 세까지 이르고 다시 8만 세로부터 다시 10세에 이르기를 스무 번을 경과하여야 하나의 소겁(小劫)이 되고 스무 개의 소겁이 하나의 성겁이 되니, 무릇 8천만만억 백천 8백만 년이 하나의 소겁이 된다’ 하였다.
『구사론(具舍論)』에서는
‘일곱 번의 화재에 하나의 수재(水災)가 있고 일곱 번의 수재에 하나의 풍재(風災)가 있다. 일곱 번의 화재가 지난 뒤에 풍재가 일어나서 8천8백64의 큰 겁을 지난다. 이 네 가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겁을 지나야 비로소 하나의 현겁이다. 주겁의 가운데 바야흐로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서로 번갈아가며 1천 부처가 나오시니 석가여래의 지위가 제4에 해당하고 나머지 9백9십6분의 부처가 있다. 세계는 부처님의 의보(依報)이고 중생은 부처님의 연인(緣因)이다. 다만 중생이 있어야 곧 부처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수미상도산경(須彌像圖山經)』과 『십이유경(十二遊經)』에 의하면
‘성겁이 이미 지나가고 주겁에 들어 오면 일곱 개의 작은 겁을 지나야 광음천(光音天)들이 내려와서 지비(地肥)를 먹게 된다. 광음천 등 여러 하늘이 목 뒤의 등으로부터 광명이 있어서 멀고 가까운 것을 서로 비추었으나 지비를 먹음으로 인하여 욕심이 점차 생겨서 드디어 광명을 잃고 인민들이 슬피 부르짖었다.
그때에 서방의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보응성(寶應聲)보살과 보길상(寶吉祥)보살 등 두 큰 보살에게
≺그대가 저 곳에 가서 해와 달을 일으키라. 그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법도를 지어 주라≻ 하셨는데
보응성보살은 복희씨로 나타났고 보길상보살은 변화하여 여와씨가 되었다. 후에 목숨이 다하여 서방으로 돌아갔다’ 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인도[身毒之國]에는 헌원씨가 살았다’ 하였는데
[곽박(郭朴)의 주석에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하였다.]
3황(皇)의 근거가 저곳에 있고 부처님의 사신으로 받들어 이곳에 왔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례를 찾아 글을 취하여서 뜻을 얻게 하겠다.
『제계(帝系)』에
‘개벽의 처음에 사람들의 정신이 어둡고 굳어서 오직 잠자고 먹고 할 뿐이고 거스름과 좇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태호씨가 임금이 되면서 때를 맞추어 모범을 짓고 상(象)을 견주어서 괘(卦)를 그어놓으니 높음과 낮음이 구별되었기에 비로소 공경으로써 위를 받들고 사랑으로써 아랫사람을 기를 줄 알아서 조그맣게 심식(心識)을 써서 점점 지혜의 길을 열게 하였다’ 하였다.
이는 스스로 가이 없는 큰 자비와 깊고 묘한 해탈이 아니면 뉘라서 능히 바탕을 구부리어 어리석은 이와 함께 하여서 어리석음을 개발하고 세상을 교화하겠는가.
두 성인이 와서 응하였음이 참으로 증거가 있다. 그의 도를 키움은 미진수(微塵數)의 겁으로도 능히 다할 수 없고 그의 중생을 이롭게 함은 공교한 계산으로도 다 셀 수 없어서 지나간 일이 항하(恒河)의 모래 수보다 갑절이나 되고 미래의 일도 위의 수보다 넘는다.
그러니 원황(元皇)의 해[歲]라는 것은 큰 땅이 한 티끌에서 비롯함과 같고 개벽의 해라는 것은 넓은 바다를 한 물방울로 따짐과 같아서 이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저 나무를 먹는 벌레는 오히려 나무가죽 외의 맛을 알지 못하거니 어찌 우주의 넓음을 알겠는가?
조사하여 보니, 3사(史)의 정문(正文)과 5경(經)의 전곡(典誥)에서 모두
‘노자(老子)는 주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하였다.
다음으로는 완씨(阮氏)의 『칠록(七錄)』과 왕가(王家)의 『사부(四部)』와 화림(華林)의 『편략(遍略)』과 수문(修文)의 『어람(御覽)』과 도은거(陶隱居)의 글과 유(劉)선생의 기록과 왕은(王隱)과 위수(魏收)의 기록과 양개(楊玠)와 비절(費節)의 글들이 모두 연기(年紀)를 편찬하고 다 대수와 역사를 쓸 적에 함께 정사를 따르지 아니함이 없어서 일찍이 다르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수나라 시대에 요장겸(姚長謙)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恭)으로서 제나라에서는 도요장군(渡遼將軍)이 되었으며, 수나라에서는 수력박사(修曆博士)가 되었다.]
그는 학문이 안과 밖으로 모두 갖추어졌으며 산술을 잘 궁구하였다.
[지금의 태사승(太史承)으로서 인균(仁均)의 스승이다.]
『춘추(春秋)』에 기록된 것이 70여 나라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좌구명(左丘明)이 전기를 쓴 것은 다만 2백여 년일 뿐이다.
세계(世系)와 세본(世本) 같은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근서(根緖)를 잃었으며,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매우 거칠었다. 그래서 후생들이 더욱 의혹함이 많았다.
개황(開皇) 5년 을사년에 국자좨주(國子祭酒) 개국공(開國公) 하타(何妥) 등과 더불어 임금의 부름을 받아 역서(曆書)를 편찬할 적에 그가 미루어 살핀 30여 사람은 모두 당세의 재목들로서 모두 경적(經籍)을 아는 자들이었다.
『삼통력(三統曆)』을 근거로 하여 그 연호를 편찬하여 위로는 운개(運開)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위정(魏靜)에서 마쳤다. 머리로는 당나라 연월일인 갑자를 쓰고 옆으로는 여러 나라를 열거하였다.
이에 9기(紀)ㆍ3원(元)
[9두(頭)ㆍ5룡(龍)ㆍ괄제(括提)ㆍ합웅(合雄)ㆍ연통(連通)ㆍ서명(序命)ㆍ수비(修飛)ㆍ인제(因提)ㆍ선통(善通) 등을 9기라고 한다.]
ㆍ천황(天皇)ㆍ인제(人帝)ㆍ『오경(五經)』ㆍ『십위(十緯)』ㆍ육예(六藝)ㆍ오행(五行)ㆍ『개산도(開山圖)』ㆍ『괄지상(括地象)』ㆍ『고사고(古史考)』ㆍ『원명포(元命苞)』ㆍ『원신계(援神契)』ㆍ『제계보(帝系譜)』ㆍ『구명결(鉤命決)』ㆍ『시학편(始學篇)』ㆍ태사공(太史公)의 『율력지(律曆志)』ㆍ『전략(典略)』ㆍ『세기(世紀)』ㆍ『지림(志林)』ㆍ『장력(長曆)』과 백왕의 조서와 고문[誥]과 5대(代)의 『관의(官儀)』ㆍ『지리서(地理書)』ㆍ『권형기(權衡紀)』ㆍ『삼오력(三五曆)』ㆍ『십이장(十二章)』ㆍ방숙기(方叔機)ㆍ도홍경(陶弘景) 등의 수십 부의 서적을 발췌하여 차례대로 편집하니 도합 40권이며, 『연력제기(年曆帝紀)』라고 이름하니 자못 완비되어 있으며 글과 뜻을 의지할 만하다.
태극 상원(太極上元)의 경술년으로부터 개황(開皇) 5년 을사년까지 누적된 것이 14만 3천7백80년이었다.
『양기(梁紀)』에서
‘개벽으로부터 양나라 태종(太宗)의 대보(大寶) 2년에 이르기 무릇 2백 83대(代) 76만 1천45년이다’ 하였다.
여러 부(部)의 연기(年紀)를 조사하여 보았으나 노자[老氏]가 복희씨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이 하나의 헛됨을 고증하면 백 가지의 일이 사실이 아님을 알겠다.
『장겸기(長謙紀)』에서
‘부처님은 주나라 소왕(昭王) 26년 갑인의 해에 나셨고, 주나라 목왕(穆王) 53년 임신(壬申)의 해에 열반하셨다’ 하니,
[개황(開皇) 5년에 이르기까지 1천5백76년이다.]
그런즉 『주서이기(周書異紀)』와 아울러 한나라 『법본내전(法本內傳)』과 『법왕본기(法王本記)』와 오나라 상서령 감택(闞澤)과 위나라 담모최(曇謨最)법사 등이 기록한 것과 차이가 없다.
미루어 보건대 노자는 주나라 환왕(桓王) 6년 정묘의 해에 주나라에서 벼슬하고 주나라 경왕(敬王) 32년 계축의 해 5월 임오일에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지나간 것 같다.
[개황 5년에 이르기까지는 1천37년 밖에 아니 된다.]
갈선공(葛仙公)의 서문을 조사하여 보니,
‘노자는 상황(上皇) 원년 정묘의 해 2월 12일 병오일에 주나라의 스승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주나라 환왕 정묘의 해이다.
또 ‘무극(無極) 원년 계축의 해 5월 임오일에 주나라를 떠나서 함곡관을 지났다’고 하니,
이는 곧 주나라 경왕 계축의 해이다.
3황(皇) 이하의 본기(本記)를 조사하여 보니, 또한 연호를 세운 것이 없었고 한나라 무제(武帝)의 세상에 처음으로 연호가 있었다. 그러니 거기에서 상황(上皇)이니 무극(無極)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말이며 전혀 근거가 없다.
또 고려의 임금이 표(表)로 제나라 임금에게
‘모든 부처님께서 나신 때를 들을 수 있습니까?’ 하니,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상통(上統)법사를 불러서 글을 만들어 고려에 보고하였다.
그때에 주나라 목왕(穆王)의 전기를 인용하여대개 목왕의 별전(別傳)이다. 그 사신에게 대답하였는데 요장겸이 인용한 글과 다름이 없었다.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서는
‘노담(老聃)이 윤희(尹喜)와 함께 유사(流沙)의 서쪽으로 가서 거승(巨勝)의 열매를 먹었다’ 하였다.
이는 공자(孔子)와 노자(老子) 두 사람이 다 주나라 말기에 난 것이니, 그로 보면 노자는 부처님의 뒤에 12왕(王)을 지나서 난 것이다.
『국어(國語)』에서는
‘주나라 유왕(幽王) 2년에 3천(川)이 진동하여 기산(岐山)이 무너지니,
백양보(伯陽父)가 ≺주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할 때
따로 노인이 있었으니, 이 노인은 노자가 아니다.
양(梁)나라 원제(元帝)가 장자와 노자를 해석한 것을 조사하여 보니,
‘노자는 주나라 경왕의 초기에 죽었고 장자는 경왕의 말기에 죽었다’고 하였다.
요장군(姚將軍)은
‘공자와 노자가 서로 보고 공자가 예를 물었을 때는 또한 경왕(景王) 10년 갑인의 해이고 윤희를 위하여 경을 설한 것이 또한 경왕의 때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부처님이 먼저 나셨고 도교가 뒤임을 분명히 알겠다.
그대가 말한 대로 청탁(淸濁)의 해에 국사가 되었다는 것은 과장되기가 은하수와 같아서 사람의 정리(情理)에는 가깝지 않다 하겠다. 원래 청탁이 처음 조짐하였을 적에는 음과 양이 나뉘지 아니하였으니 음과 양이 나뉘지 아니하였으면 양의(兩儀)가 혼돈되었을 것이요, 양의가 혼돈되었으면 삼재(三才)가 형성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이 때문에 아득하여 무어라 이름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년이 대요(大撓)에서 일어났다 하나 연월일시(年月日時)는 「요전(堯典)」에서 비로소 정하였다. 그러니 이때는 복희 임금이 아직 나지 아니하였고 하늘과 땅이 아직 개벽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하늘과 땅이 정기를 얽어서 남자와 여자가 화하여 났으니, 복희씨와 노자 그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이라 함은 이의(二儀)의 안에 반드시 있을 것이요 삼재(三才)를 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속이겠는가?
또 ‘동방삭도 노담의 몸’이라 함은 더욱 옳지 아니하다. 전(傳)에 ‘동방삭이라 함은 해의 정기이다’ 하였다.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는가?
살펴보건대 만청(曼倩)이 조정에 있기 20여 년인데 태세성(太歲星)이 나타나지 않기 또한 20여 년이었으며, 동방삭이 죽자 태양의 정기가 비로소 나왔음은 통인(通人)이 기록한 것으로 경험하여 알 수 있다.
포박자(抱朴子)의 『신선전(神仙傳)』에서는
‘대저 성인인 자는 외롭지 아니하여서 반드시 만물에 응하여 교화를 이룬다. 그러니 어찌 천하의 국사(國師)가 모두 이이(李耳) 한 사람만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기이하구나, 이 말이여. 참으로 진선진미(盡善盡美)하구나. 만일 많은 세대를 지나오는데 오직 노담만이 스승이 되었으면 또한 많은 왕조를 지나오면서 오직 복희씨만을 임금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미 많은 정치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많은 임금에 힘입을 것이요, 참으로 한 스승은 다만 하나의 다스림만 바로잡았을 뿐이다.”
[만일 역대(歷代)가 모두 노담의 몸이라면 이러한 말을 누가 받들겠는가? 갈치천(葛稚川)의 말을 근거로 하면 이러한 말은 모두 무식(無識)한 도사가 억지로 신이(神異)함을 꾸민 것이니 어찌 그러하겠는가?]
[유생, 노자와 부처는 한때의 사람이다]
그 유생(儒生)이 물었다.
“황보밀(皇甫謐)의 말에 노자가 함곡관을 나가서 천축국에 들어가 호왕(胡王)을 가르쳐서 부도가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자와 부처는 한때의 사람입니다.
어찌 부질없이 부처는 먼저요 노자는 뒤라고 말하여 세속을 바로잡으려 합니까?”
[보살, 부처가 먼저요 도교가 뒤이다]
보살이 깨닫게 말하였다.
“찾아보니, 지극한 사람은 현묘하고 고요하기 곡신(谷神)과 비슷함이 있어서 응변(應變)하기 방소[方]가 없는 것이요, 일이 산울림과 한 가지여서 서둘지 않아도 빠르니, 어찌 화(華)와 이(夷)를 따지리오. 정감(井坎)의 무리들은 스승의 편견을 좋아하여 조삼모사(朝三暮四)격인데 공연히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를 비우고 만물에 감응하는 자는 반드시 천 가지로 변하는 얼굴이 있을 것이요 뜻을 좁게 가져 일에 맞추려는 자는 어찌 만 가지로 다른 묘함을 알겠는가?
『서역전(西域傳)』을 조사하여 보니,
‘노자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도를 보고서 스스로 그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이에 게송을 읊으며 공양을 올리고 불상을 대하여 뜻을 펴서 이르기를
≺내가 태어난 것이 왜 늦은 것이며 [신본(新本)에는 부처의 탄생이 어찌 그리 늦었느냐고 하였다.]
부처의 탄생은 어째서 한결같이 빠릅니까? [신본에는 고쳐서 말하기를 부처의 열반이 어찌 그리 빠릅니까?≻하였다.]
석가모니를 뵈옵지 못하여 마음 속으로 항상 오뇌(懊惱)합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를 뵈옵지 못함을 말한 것이며 그 때문에 연모하여 생각을 낸 것이다.
『위략(魏略)』의 「서역전」에
“임예(臨猊) 나라의 임금이 아들이 없어서 부도에 치성을 바쳤더니 그의 왕비 막야(莫耶)가 흰 코끼리 꿈을 꾸고서 잉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태자를 낳으니 또한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출생하였으며 자연히 살상투가 있었고 땅에 떨어지자 일곱 걸음을 걸으니 그의 형상이 부처와 같았다. 부도에게 제사하여 아이를 낳았기에 태자의 이름을 부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사율(沙律)이라는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았고 머리털이 흰 것이 노자와 같았다. 항상 백성들을 교화하여 부도를 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세에 황건(黃巾)을 쓴 이들이 그의 머리가 흰 것을 보고 저 사율을 고쳐서 노자로 한 것이니 사실을 왜곡하여 안온(安穩)하게 천하를 속이고 미혹하게 한 것이다.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에 진경(秦景)이 월지국(月氏國)에 이르렀을 적에 그 나라의 임금이 태자를 시켜 입으로 부도(浮圖)의 경전을 전수하였기에 한나라로 돌아왔는데, 부도경에 실려 있는 것이 대략 도교의 경전과 서로 비슷하였다”고 한다.
황보밀의 말은 그러한 근본을 추구하지 아니한 것이다.
「화호경(化胡經)」에
“계빈국의 임금이 노자를 요사스런 도깨비로 의심하여 불에 태웠으나 노자가 안연(安然)히 죽지 아니하니 계빈왕이 노자를 신인으로 알아 온 나라가 허물을 뉘우쳤다.
노자가
‘나의 스승의 이름이 부처이다. 그러니 그대가 만일 출가를 하면 그대의 죄를 용서하겠다’고 하기에
그 나라에서 노자의 가르침을 받들어 다 사문(沙門)이 되었다 하니,
부처가 만일 먼저 없었으면 노담이 어찌 몸을 변하여 부처가 될 줄 알았으리오.
그것은 계빈국에서 옛부터 불교를 믿었기에 노자를 부처님으로 미루어 교화한 것이지 윤희와 노담 때문에 부처가 있었음이 아니라 하겠다.
수나라 복야(僕謝) 양소(楊素)가 임금의 거가(車駕)를 좇아 죽림궁(竹林宮)에 이르렀을 적에 누관(樓觀)을 지나 노자의 사당을 보았는데 그 벽 위에 노자가 계빈국의 사람들을 제도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모양을 그렸기에 도사에게
‘도교가 만일 부처보다 크다면 노자가 호(胡)를 교화하여 마땅히 도사가 되게 하였을 것인데 어찌하여 사문이 되게 하였습니까?
그러니 부처의 힘이 커서 능히 호를 교화하였고 도교의 힘이 적어서 호를 교화하지 못하였음을 알겠습니다. 이는 부처가 호를 교화한 것이니 어찌 도교가 호를 교화한 것과 관계되리오’하니,
그 도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진세잡록(晋世雜錄)』에
‘도사 왕부(王浮)가 매양 사문 백원(帛遠)과 토론하였는데 왕부가 여러 번 굴복하였기에 분하여 드디어 『서역전(西域傳)』을 고쳐서 『화호경(化胡經)』을 만들어 윤희가 노담과 더불어 호를 교화하여 부처가 되게 하였으니 부처가 여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배자야(裵子野)의 『고승전(高僧傳)』에
‘진(晋)나라 혜제(慧帝) 때에 사문 백원의 자는 법조(法祖)였다. 매양 좨주(祭酒) 왕부(王浮)-어떤 데는 도사 기공차(基公次)라 하였다-와 함께 사(邪)와 정(正)을 쟁론하였는데, 왕부가 여러 번 굴복하였기에 성이 나서 참지를 못하여 이에 『서역전』을 고쳐서 『화호경』을 만들어 부처님의 법을 낮추었다.
그것이 세상에 행하여졌으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주는 이가 없고 재앙은 돌아가는 데가 있었다’고 한다.
『유명록(幽明錄)』에
‘포성(蒲城)에 사는 이통(李通)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문 법조를 보았는데 염라대왕을 위하여 『수능엄경(首楞嚴經)』을 강하고 있었으며, 또 도사 왕부를 보니, 몸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법조를 보고 참회를 구하니 법조가 수긍하지 아니하였다. 성인을 저버리고서 죽어서 뉘우침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위(魏)나라 시대에 강빈(姜斌)이라는 도사가 허망하게 『개천경(開天經)』을 끌어다가 위나라 명제(明帝)에게 대답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노자는 주나라 정왕(定王) 때에 탄생하였다’ 하였다.
『파사론(破邪論)』 가운데 이 증거를 모두 들었다.
『장자(莊子)』에서는
‘노자가 진(秦)에서 죽었기에 진나라에서 조문하였다’ 하였으며,
『궐중기(闕中記)』에서는
‘노자는 괴리(槐里)에 장사하였다’고 하였다.
[지금의 옛 부풍(扶風) 땅의 시평(始平) 남쪽에 괴리라는 시골이 있다.]
그러나 칠원(漆園)의 아전이 친히 노담에게 도를 배웠다. 그러니 노자[宋]와 공자[魯]의 나라가 다르나 세상에 나온 시기는 동일함을 말한 바의 글을 통해서 믿을 만하다.
노자가 인도에 가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어서 의심이 없다. 황보사안(皇甫士安)이 그러한 궤설(詭說)을 물리쳐서 저의 잘못된 말을 밝혔다.
노자가 유사(流沙)에 갔다는 사실이 실록에 없음은 고사(高士)의 전기에 모두 실려 있다. 그러니 어찌 가히 속이겠는가?
부처가 먼저요 도교가 뒤임을 그대는 의혹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