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소문경론 제4권
3.2. 행의 마음을 성취함(3)
[살생]
[문] 살생을 멀리 여읜다 함의 살생하는 등의 모습을 말해야 하리라.
[답] 살생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 고의(故意)이며,
둘째 다른 이[他]이며,
셋째 정하여지거나 정하여지지 않은 중생의 모습[定不定衆生相]이며,
넷째 의심(疑心)함이며,
다섯째 목숨을 버리게 하는 방편을 일으킴[起捨命方便]이며,
여섯째 작위(作爲)이며,
일곱째 부작위 모습[不作爲相]이며,
여덟째 무작위 모습[無作爲相]이다.
이들을 살생에 대한 몸의 업이라 하나니, 몸ㆍ입ㆍ뜻의 업을 살생이라 한다.
[문] 고의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의 없이 죽여도 살생의 죄가 이루어지나니, 마치 불에 닿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치 불이 태울 수가 있으므로 고의로 닿거나 고의 없이 닿거나 간에 모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것처럼, 살생하는 것도 그러하여 고의로 죽이거나 고의 없이 죽이거나 간에 모두 다 살생의 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리라.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마음 없이 죽였다 하여 죄의 과보를 받는다면 곧 아라한은 열반을 얻지 못하리라.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아라한은 세간의 원인[因]을 끊느라고 고의 없이 중생을 죽이나니, 이와 같은 것도 도로 세간에 태어나야 하는데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이치 때문에 고의 없이 죽이면 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또, ‘불과 같다’고 말하지만,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악한 업 중에 악한 마음이 없이 막이[隔]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치 저 불을 땔나무와 숯 따위에 막이를 두고 대면 타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저 악한 업 중에도 악한 마음이 없이 막이를 두면 비록 살생을 하였다 하더라도 과보를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에 대한 비유도 이치가 서로 맞지 않다.
[문] 어떻게 죽는 이는 고통을 받거늘 살생하는 이가 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가?
[답]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이치는 그렇지 않나니,
왜 그러한가?
중생을 괴롭히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떠나고, 중생을 이롭게 하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을 떠남은 마치 선한 뿌리를 끊는 것과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과 다툼이 없는 것과 생각 끊은 선정[滅盡定] 따위가 죄를 얻고 복을 얻는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다른 이라고 하는가?
[답] 자기 목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무슨 이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가?
[답] 죽일 수 있는 것과 죽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는 죽일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을 살생할 수 있으며 살생죄를 얻지만, 자기가 죽이는 것은 죽일 수 있는 대상이 없으므로 곧 다시는 죽일 이가 없으며 죽이는 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목숨을 끊으면 나쁜 과보를 받지 않는다.
또, 과거의 쌓임[陰]이 살생 따위의 쌓임에 계속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스스로가 죽는 것은 살생죄가 되지 않는다.
[문] 자신을 죽이는 이는, 죽이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사람의 목숨을 끊고 다섯 가지 쌓임을 파괴하며 사람의 갈래[人趣]를 버리고 떠나며 살생이라는 업이 성취되거늘 어찌하여 살생죄의 과보를 받지 않는가?
[답] 만약 그렇다면 아라한인 사람도 으레 살생의 죄가 되어야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죽음의 모습이 된 아라한이 스스로가 그 몸을 해치고 몸소 목숨을 끊기 때문이다. 저 아라한 역시 목숨을 끊은 죄를 얻어야 하는데도 그는 죄가 없다.
왜 그러한가?
성냄 따위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죽는 것은 살생의 죄가 되지 않는다.
또 정하여지고 정하여지지 않은 중생의 모습이라 함은 일정한 중생의 모습과 일정하지 않은 중생의 모습인데, 그 중생의 모습을 정하여지고 정하여지지 않은 중생의 모습이라 한다.
또 정하여진 중생의 모습이라 함은 백천의 사람이 있을 적에 고의로 그 중에서 아무개를 죽이겠다고 정하면 이를 정하여 졌다고 한다. 만약 그 사람을 죽이면 살생의 죄가 이루어지지만 만약 딴 사람을 죽이면 살생의 죄가 되지 않는다.
정하여지지 않았다 함은 모두를 버렸기 때문에 죽임에 따라서 죄가 되나니, 그곳에서 중생이라는 모습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한다 함은 의심하면서 살생하여도 역시 살생죄가 된다. 그는 이 중생을 이미 버린 중생이었고, 그 마음이 비록 의심한다 하더라도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중생을 버리고 중생을 죽였기 때문에 살생의 죄가 된다.
목숨을 버리게 하는 방편을 일으킨다 함은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죽이려는 이가 그 일 중에서 착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서 반드시 그 중생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아니고 죄에서 보호하는 마음이 없으며 중생을 버리는 마음으로 죽일 방편을 쓰나니, 이를 일으킨다고 한다.
또, 작위와 부작위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인데, 작위라 함은 적극적으로 동작하는 일이며, 부작위라 함은 직접 동작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 동작하는 일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며, 비록 지은 업이 없어지더라도 착함[善]과 보람 없음[無記]의 법은 서로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문] 어떻게 하여 작위가 아닌데도 업이라고 하는가?
[답] 짓는 일과 함께 원인을 짓고 결과를 짓는 일과 함께 원인을 지을 수 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곳곳에서 또한 원인 있는 가운데서는 결과를 말하고 결과 중에서는 원인을 말한다.
여래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다.
“볼 수 있고 닿을 수 있으면 무작색(無作色)이라 하며, 지음으로써 볼 수도 없고 닿을 수 없으면서 지어지면 볼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느니라”고 하시어,
그 짓지 않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닿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나니,
이와 같이 그곳에서 몸이거나 몸에 의지하여 섬기는 칼과 몸뚱이 등으로 살생하게 되면, 작위 또는 부작위라고 하며 몸의 업이라 하게 된다.
또, 자재인(自在人)이 입으로 살생을 명령하고 신선이 성을 내어 중생을 죽이려 할 적에,
명령 받은 심부름꾼이 자재인의 명령에 의하여 살생하고 신선을 믿는 야차가 신선의 성냄에 의하여 중생을 죽이면 그 자재인과 신선 등은 살생의 원인을 지었고 심부름꾼과 야차는 몸의 업이 이루어진다. 그때에 그 자재인과 신선은 모두 부작위의 몸의 업[身業]이 성취된다.
또 계율 받는 사람과 같나니, 계를 받으려 할 때 이는 몸이 움직이고 입이 말하다가 계를 받는 때에는 잠자코 서서 몸과 입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스승이 갈마(羯磨)하여 마치면, 그 사람은 무작위의 몸의 업이 성취된다.
이것 또한 그와 같아서, 또 입의 업의 일도 같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고서 머리를 움직이고 눈을 깜짝이고 눈썹을 치키며 손을 드는 이와 같은 따위의 형상으로 앞의 일을 나타내는 이라면, 역시 부작위의 입의 업을 성취하게 된다.
또, 몸으로 업을 지어야 하는데도 몸은 움직이지 않고서 입으로만 갖가지 몸의 업의 방편을 말한다면,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역시 부작위(不作爲)의 몸의 업이 성취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입과 뜻으로도 살생을 이룩할 수 있다. 이 살생의 업은 바로 입과 뜻의 업이며, 이는 몸의 업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비록 이런 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이치는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곧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살생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입의 업일 수 있고 이는 뜻의 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입과 뜻이 바로 살생하는 업의 바탕이라면 자재인이 아무개 중생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신선이 마음으로 아무개 중생을 죽이겠다고 생각하는 즉, 명령하고 생각할 때에 그 목숨은 끊어졌어야 하는데도, 이 일은 그렇지가 못하고 그 심부름꾼과 신선을 믿는 야차의 몸의 업이 이루어질 때에야 살생의 일이 이루어진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그 자재인이 입으로 죽이라고 말할 때와 그 신선이 성을 낼 때에 으레 살생이 이루어져야 하였을 터인데, 사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허물이 있다. 그 자재인이 입으로 살생하라고 명령하였는데도 심부름꾼이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그 자재인이 견도(見道)를 증득하게 되었고 명령받은 심부름꾼은 그 뒤에야 살생하였다고 하자. 만약 입으로 죽이라고 명령한 뒤에 살생이 이루어졌다면, 견도한 뒤에야 살생을 하였으므로 이 이치도 옳지 않다.
그 살생의 원인과 계율을 깨뜨리는 등의 나쁜 마음은 멀리 여의게 되었나니, 그러므로 입과 뜻의 뚜 가지 업으로서는 살생의 바탕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업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착함[善]과 착하지 않음[不善]과 보람 없음[無記] 등의 업은 서로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는 형상이라면 이와 같은 몸과 입과 뜻의 업은 곧 차별이 없을 터인데, 멀고 가까운 방편으로 몸ㆍ입ㆍ뜻 등은 살생의 업을 이루므로, 이는 곧 막아내지 못한다.
[문] 입으로 “죽인다”고 말하는 것은 마침내 이루어지게 되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답]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시간 등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어떠한 때에 어떠한 방편으로 어떠한 곳에서 그 사람이 죽이는 때에, 자재인은 말한 때와 처소 등이 경과하였으므로 죽이는 이는 죄가 되지만 가르친 이는 죄가 없다.
몸의 업이라 함은, 몸에 의하여 짓는 업이므로 몸의 업이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몸에 의하여 짓는 업은 몸을 따라서 행하는 일이므로 몸의 업이라고 한다.
[문] 죽일 목숨이 없거늘 어떻게 목숨을 끊으면 살생죄가 되는가?
[답] 비록 실제의 목숨이 없다 하더라도 화합된 바탕을 끊으면 살생이라고 한다. 마치 나무숲을 베고 등불 심지를 없애는 것 따위이다.
만약 신아(神我)가 있다면 신아는 항상[常]하는 것이므로 살생이라는 이치가 없다.
[문] 어떠한 쌓임[陰]을 해치면 죽였다고 하는가?
과거를 해치는 것인가, 미래를 해치는 것인가, 현재를 해치는 것인가?
만약 과거를 해치는 것이라면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만약 미래를 해치는 것이라면 미래는 아직 이르지 않았고, 만약 현재를 해치는 것이라면 찰나(刹那)는 머무르지 않는다.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세상에 머무르다가 미래세상에 무너지는 화합된 쌓임의 바탕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래와 현재에 무너지는 것이다”라고도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현재의 쌓임 가운데서 칼과 몽둥이가 닿을 수 있고 해로운 일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은 저절로 없어지고, 인연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재의 쌓임 중에서 오직 빛깔의 쌓임[色陰]만이 무너지나니, 칼과 몽둥이 따위로써 벨 수도 있고 부딪칠 수도 있지만 나머지 네 가지 쌓임은 베거나 부딪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을 살해한다. 스스로 나머지 네 가지 쌓임은 비록 부딪칠 수가 없다손 치더라도 빛깔 쌓임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이므로, 빛깔의 쌓임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들 또한 따라서 무너짐은 마치 병이 깨지면 물과 우유도 역시 상실되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직 보람 없음의 쌓임[無記陰]만이 해친다. 보람 없음의 쌓임 중에 칼과 몽둥이를 댈 수 있다”고 한다.
닿음이 없는 쌓임은 그 두 가지가 있고, 온갖 업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아까 말한 바와 같은 것인 줄 알아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