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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5권
5. 색론[5]
5.19. 근부정품(根不定品)
[문] 모든 감관은 결정된 것인가 결정되지 아니한 것인가?
[답] 무엇을 결정이라 하고 무엇을 결정이 아니라 하는가?
[문] 눈 등의 감관의 알 바[所知]와 원인이 되는 것을 결정이라 한다.
[답] 만일 그렇다면 감관은 결정된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감관은 바로 눈 등의 알 바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 눈동자와 혀와 몸은 눈으로 볼 수 잇고, 귀와 코는 속에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답] 죽은 사람도 역시 눈동자와 혀와 몸이 있는데도 실은 감관이 없다.
[문] 눈동자가 두 가지로서 감관인 것과 감관 아닌 것이 있다. 죽은 사람에게는 감관의 동자는 없어지고 감관이 아닌 것만 있다.
[답] 감관의 동자에는 능히 보는[能見] 것이 없다. 그러므로 눈 등의 얻을 바가 아니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다섯 가지 감관은 물질이로되 볼 수 없는 대상[不可見有對]이다”라고 하셨다.
만일 볼 수 있으면, 이 눈동자는 감관이 아니라고 분별할 수 있으리라.
[문] 만일 경전 중에서
“네 가지 요소로 인하여 청정한 물질을 이룬 것을 다섯 가지 감관은 바로 물질인데 볼 수 없는 대상이다”라고 하겠는가?
[답] 그러므로 업력(業力)의 불가사의함을 의심하게 된다. 업력 때문에 네 가지 요소는 변화하여 감관이 된다.
부처님은 “제자가 이 다섯 가지 감관은 저절로 업으로부터 생긴다”고 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물질이라 말씀하셨다.
또 외도는 “다섯 가지 감관이 나로부터 생긴다”고 말하나, 나는 물질이 아니다.
또 말하기를 “다섯 가지 감관은 큰 것도 알고 작은 것도 알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 사람도 역시 물질이 없다는 것으로 감관을 삼는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모든 감관은 그것이 다 물질이며, 물질 등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혹은 말하기를 “물질 등으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면 응당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볼 수도 없고 또는 귀 등의 감관으로 얻을 바도 아니다”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대상이 없어야 한다”
이 때문에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 것이니 모든 티끌에 상대되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로서 형체가 있고 대상이 있으면 이것을 거칠은 물질이라 한다. 다만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외도는 말하기를 “모든 수(數)와 분량(量)이며, 같은 것(一)과 다른 것(異)이며 합하는 것(合)과 여의는 것(離)이며 좋은 것(好)과 더러운 것(醜)이며 업 짓는 것(作業)과 공통되는 모습(總相)과 각자 다른 모습(別相)과 그리고 타라표(陀羅驃)는 비록 물질의 법은 아닐지라도 또한 볼 수는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기를
“이들 중에서는 다만 물질은 볼 수 있으나 그 밖의 것은 보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손(手) 따위에 걸리게 되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모두가 느끼고 닿임이어야 한다.
[답] 아무리 똑같이 장애가 된다 할지라도 모든 곳에 다 생기지는 않는다. 신식(身識)이 따라 식을 내기 때문에 여러 감관을 분별한다.
또 다시 모든 감관은 실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법만으로 결정한다면 마치 손으로 물품을 붙잡되 오직 하나만을 취하는 손과 같은 것이나 눈은 크고 작은 것을 다 보기 때문에 결정이 아니다.
또 만일 결정하여 물품이 닿으면 작용이 있음은 마치 불에 닿으면 타고 칼에 닿으면 베어지는 것과 같을 것이나 눈은 먼 데서도 능히 보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 법이 만일 결정된 것이라면 결정된 법을 장애하는 것을 마치 손이 손에 장애하듯 할 것이나 눈은 수정(水精)이거나 구름의 가림 따위에서도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 감관이 만일 결정된 것이라면 응당 몸 안에 있어야 하며,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록 뜻(意)과 합한다 할지라도 역시 바깥 티끌은 보지 못해야 할 터인데도 실은 능히 본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 법이 만일 결정된 것이라면 숫자(數)로 다섯 가지 감관이라고 하여야 할 터인데도 눈은 각기 둘씩이요 혀와 몸을 보태면 그것이 여덟이 된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다만 처소가 결정되었을 뿐 감관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 왼쪽 눈으로 볼 때에 바른쪽 눈도 역시 알게 되므로 달리 보고 달리 아는 것이 아니다.
감관에는 왼쪽 바른쪽이 없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또 감관과 티끌이 합해진 법은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없다.
또 결정되었다면 물질 등의 법은 깨닫지 못하며 감관을 얻으면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문] 눈의 광명은 크고 작은 것을 보며, 또는 멀리서도 물질을 보면서 장애가 없음은 마치 햇빛을 몸에서 떨어져서도 보는 것과 같다.
이 눈빛은 두 눈의 정해진 곳에서부터 합하여 하나의 빛이 되어서 물질을 본다.
또 눈은 이것이 하나요, 귀와 코는 안에 있어서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달리 보고 달리 안다”는 말은 무너져버린다.
또 정신이 아는 것이요 감관이 아는 것이 아니며, 감관은 바로 작용하는 것이다.
또 그대의 말에 “합해진 법은 얻을 수 없다” 하나,
그 일은 먼저 대답하였으며 햇빛이 비치는 것 따위이다. 귀 등의 여러 감관은 너무 밀착하면 역시 알 수가 없다.
마치 나무가 닿되 딱붙여 놓으면 그 금을 알 수 없음과 같다.
또 정신으로 인하여 깨닫는 것이요 이는 감관 때문이 아니다.
또 감관은 요소로 말미암아 아뤄지되 요소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감관도 깨닫는 것이 아니다.
또 병은 흙가루로 인하였고 흙가루에는 감각작용이 없는 것처럼 병도 역시 감각이 없다.
또 다른 대상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감각이 없다.
[답] 그대가 “빛이 가기 때문에 감관은 결정된 것”이라 한다면,
그대는 빛으로 감관을 삼는 것이며, 빛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관 역시 정해지지 않았다.
또 이 빛이 없다는 것은 먼저 벌써 부수었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말에 “눈은 하나 뿐”이라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한 눈으로 보는 것이 다르고 두 눈으로 보는 것이 다르다.
만일 한 눈이 결단나면 보는 것이 밝지 못하다.
양쪽[左右眼]눈에 대한 것은 먼저 다 대답하였다.
[문] 만일 하나의 눈만으로 식을 낸다면 두 눈은 응당 한 눈이어야 한다. 두 개의 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답] 코의 사이가 막혔기 때문에 하나라 할 수는 없다. 설사 막힌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역시 하나가 되지 않음은 마치 손가락 따위와 같다. 그대가 “이것은 정신의 작용이다”고 하는 이 일은 먼저 부수었다. 정신은 작용할 수 없다. 햇빛이 비춘다 하는 것도 먼저 부수었다.
그대의 말에 “너무 밀착하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하나 그도 역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법이 만일 결정된 것이라면 화합이 없는 것이니 체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무를 합한 것이 아무리 딱 붙었다 해도 오히려 그 금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감관과 티끌이 화합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그와 같다.
그대의 말에 “정신 때문에 깨닫는다” 하면 정신이 엇다고 설명하여야겠다.
그대의 말에 “모든 요소가 감관을 이루었다” 하나 이 일도 그렇지 아니하다.
업의 힘으로 된 것이라 요소를 변화시켜 감관이 되면 차별이 있다.
[문] 감관 이것은 결정된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네 가지 요소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네 가지 요소가 정해졌기 때문에 감관도 역시 결정된 것이다.
또 눈 등의 감관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요소들은 이익이 되며, 또 요소가 변하여 감관이 된다.
요소가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변하여 이뤄진 법도 또한 당연히 결정되어야 하며,
또 감관에는 티끌이 있어야 되고 티끌에는 감관이 있어야 한다.
만일 결정해지지 아니했으면 상당하지 않아야 하며, 뜻의 법과 같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정된 것임을 알 것이다.
또 세간 사람은 눈동자들의 결정된 법을 모든 감관이라 한다.
또 감관은 다섯 가지 결정된 법을 알며, 뜻[意]과는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라 한다.
또 감관은 현재의 것을 알지만 다른 것은 다 추측으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라 한다.
또 감관의 알음[知]은 반연이 있고 뜻은 또한 반연이 없음은 마치 과거들을 아는 것과 같다.
또 감관과 티끌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관을 내고 법을 알며, 결정된 감관으로 결정된 티끌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임을 알 것이다.
[답] 그대의 말에 “감관은 요소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므로 결정된 것이라 한다” 함은 비록 다 같이 모든 요소로 말미암을지라도 이것은 감관과 감관 아닌 것이 있다.
그와 같아서 혹은 결정된 것도 있고 혹은 결정되지 아니한 것도 있다.
그대는 “이익이 된다” 하나, 알음은 이익되게 하나 감관을 돕는 것이 아니다.
또 말하기를 “요소가 변하여 감관을 이룬다”고 하나, 변하는 것도 또한 알음을 위한 것이요, 감관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네 가지 요소가 청정한 것을 감관이라 한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대는 “감관과 티끌이 서로 만난다”는 것도 역시 뜻이 결정하는 것이요, 감관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는 다 뜻의 힘의 차별이다.
또 아무리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의식으로만 결정하여 안다.
마치 네 가지 진리를 볼 때에 현재의 모든 법을 알듯이 법의 성품[法性]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은 다 의식으로써 한다.
또 마치 불바퀴[旋火輪]와 허깨비[幻化]와 아지랑이[焰]와 신기루[乾闥婆城] 등은 모두가 없으면서도 보이는 것처럼 물질을 보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눈 등은 다 삿된 반연이다.
그대가 “감관과 티끌이 합하기 때문에 앎을 낸다” 함과
혹은 “당도하기 때문에 알고 당도하지 아니하여도 안다”는 것은 모두 먼저 대답하였다.
5.20. 색입상품(色入相品)
다시 말하리라.
푸르고 누른 따위의 빛깔을 물질의 감관[色入]이라 한다.
경전 중의 말씀에
“눈의 감관이 사라지면 물질은 서로가 여의게 되나니,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과 같다.
[문]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업과 양(量)도 역시 물질의 감관이다”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마치 경전 중에서
“검과 희고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모든 물질”을 설명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답] 형상 따위는 그것이 물질의 차별이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만일 물질을 여의면 형상이니 분량이니 하는 등의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형상들이 물질과 다르다면 물질을 떠나서도 또한 그 마음이 생겨야 할 터인데 사실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다르지 아니하다.
[문] 먼저 물질이라는 마음을 내고 뒤에 형상에 대한 마음을 낸다.
무슨 까닭인가? 검다 희다 모나다 둥글다 하는 마음은 한꺼번에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답] 길다 짧다 하는 등의 모양은 다 물질을 반연하기 때문에 의식 가운데서 생김은 마치 먼저 물질을 본 연후에 의식에서 남자다 여자다 하는 모양이 생기는 것과 같다.
업도 또한 모든 함이 있는[有爲] 법이어서 생각생각에 사라지기 때문에 사라지는 법은 떠나가지 않는 것이 없으며 떠나가기 때문에 업이라 한다.
[문] 가는 것을 몸의 업이라 한다. 만일 감이 없으면 몸의 업은 없다.
[답] 세속의 이름 때문에 몸의 업[身業]이 있으며 으뜸가는 진리는 아니다.
[문] 만일 으뜸가는 진리(第一義) 중에서 몸의 업이 없다면 으뜸가는 진리 중에는 역시 죄와 복도 없으리니,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과보도 역시 없으리라.
[답] 법이 다른 곳에서 일어날 때에는 남을 돕기도 하고 남을 괴롭히기도 하기 때문에 죄와 복을 이루는 것이니 따지지 말라.
5.21. 성상품(聲相品)
[문] 무슨 이유로 “소리로 인하여 요소를 이룬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소리는 물질을 여의지마는 물질들은 서로 여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또 소리는 물질들이 항상 서로 이어짐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역시 물질들과 함께 생기지 아니하며 또 물질들과는 생겨남이 다르다.
무슨 까닭인가? 물질들은 서로 생겨나서 점차로 뿌리와 싹으로 차례로 있게 되지마는 소리는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소리는 물질을 따라서 이름이 얻어지며, 마치 병(甁)의 소리를 설명하면서 병 속의 소리라고는 말하지 아니함과 같다.
또 사람은 혹 병을 보았다고도 하고 혹은 병의 빛을 보았다고는 말하나, 애초부터 병을 듣는다고는 말하지 않고 다만 병의 소리를 듣는다고만 말한다.
또 중생은 예로부터 고요한 업을 심었기 때문에 만일 만물이 다 항상 소리가 있다면 잠깐도 고요할 때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소리는 모든 요소의 인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문] 물질에는 다 소리가 있다.
어찌하여 그런 줄을 아는가?
움직이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요소는 항상 서로 움직이기 때문에 온갖 것은 다 소리가 있어야 한다.
[답] 만물이 다 서로 움직인다 하여 소리의 원인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눈이 두 손가락의 서로 움직임을 보아도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그 중에서는 소리를 내기는 하나 작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답] 내지 않는다. 작은 소리까지도 역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소리가 있다고 말하면 실제로 믿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도 역시 “물속에는 내음이 있으나 미세하기 때문에 맡지 못한다. 불속에도 맛이 있고 바람과 허공 중에도 다 물질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없다.
그러므로 온갖 것이 서로 움직여서 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 세속에서는 언제나 “소리는 허공의 구나(求那)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무엇으로 그런 줄을 아는가?
네 가지 요소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답] 지금 당장에 보아도 소리는 네 가지 요소로부터 생긴다. 우리들은 현재에 보는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또는 종소리라 북소리라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종소리요 북소리임을 안다.
또 네 가지 요소는 다르기 때문에 소리에도 차별이 있다. 마치 종소리와 북소리가 다른 것과 같다.
또 구리쇠 그릇을 두드리면 소리와 움직임이 함께 있다가 붙잡으면 다 같이 그친다.
그러므로 알아라. 그릇의 움직임과 소리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소리가 되려면 반드시 네 가지 요소의 소질(質)과 형상[像]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소리는 네 가지 요소로부터 생긴다.
또 업의 인연 때문에 소리에 차별이 있다.
마치 중생의 소리가 혹은 거칠며, 혹은 아름다운 것과 같다.
업의 인연 때문에 허공의 구나를 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니라.
또 인(因)의 모양 때문이다. 인의 모양(相)이라는 것은 법에 따른다.
무엇 때문인가? 존재(有)를 바로 인(因)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소로 인하여 소리가 있으며 요소가 없으면 소리도 없다.
마치 불이 있으면 열(熱)이 있고 불이 없으면 열이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불로부터 열이 생기고 요소로부터 소리가 생기는 것도 그와 같다.
허공에 열이 있는 것같은 허공은 그대로 존재하나 뜨거운 기는 혹 없어지기도 한다.
마땅히 알아라. 허공은 열의 인이 아니다.
소리도 또한 그와 같아서 허공에 소리가 있되 허공은 오히려 존재하지만 소리는 혹 없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인이 아니다.
또 “소리는 허공의 구나”라 함은 이것은 믿을 수 없다.
현재의 일 중에서는 애초에 소리의 인이라는 것을 보지 않으면 허공에서도 또한 비교하여 추측함이 없다. 이 안에서 무엇으로써 비교하여 볼 것인가?
또 경서(經書) 중에서도 서로 틀리는 것이 많다.
이와 같이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옳지 못한 줄 알 것이다.
5.22. 향상품(香相品)
[문] 다마라발(多摩羅跋) 등은 여러 가지 향이 합하여졌기 때문에 그 내음이 본래와는 다르다.
곧 이러한 향들은 다시 다른 향을 내는 것인가?
[답] 향의 화합으로 인하여 다시 다른 내음을 냄은 마치 푸르고 누른빛이 섞여서 연두빛[綠色]을 내는 것과 같다.
또 여러 가지 업의 인연 때문에 여러 가지 내음을 풍긴다.
[문] 우루카(優樓佉)의 제자는 “내음은 오직 땅의 구나일 뿐이다”라고 하는데,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타라표가 없다는 일은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줄 알 것이다.
또 위세사(衛世師)의 사람은 “백랍(白鑞)과 납(鉛)과 주석(錫)과 금(金)과 은(銀)과 구리(銅) 등은 다 불에 따른 물질인데도 그 중에는 향기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문] 백랍 등은 땅과 화합하기 때문에 내음이 있다.
[답] 그것은 객향(客香)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먼저 다른 물질 중에서는 이런 향기를 풍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풍긴 일이 있다면 객(客)이라 말해야 함은 마치 먼저 꽃 속의 향기를 맡았으므로 뒤에 옷 속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지라 이것은 객향이라 말해야 한다.
이 백랍 등의 내음은 그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인이 아니다.
또 이 백랍 등은 내음 없을 때가 없으므로 객이라 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도 역시 “물 따위 중에는 물질들이 없고, 다만 깡과 합하기 때문에 물질들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물 따위 중에는 자연히 물질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도 역시 “백랍들 중에는 저절로 내음이 있다”고 말하리라.
또 만일 물질 중에 서로 떨어지지 못할 법이 있으면 바로 이것이 물질의 존재[有]이다.
그러므로 내음은 서로 떨어지지 않은 곳을 따르는 것이 바로 그 물질의 내음이다.
또 물 따위 안에 만약 내음이 있으면 내음이 미약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마치 달 가운데 불이 있다고 말하면서 “불은 결정코 뜨거운 것이라” 함과 같다.
또 그대는 “온실(溫室) 중의 불이 꺼져도 남은 열기 중에는 조그마한 빛이 있다”고 말하며,
또는 “끓는 물속에 조그마한 찬 모습이 있다”고 말함과 같이 물의 내음도 또한 역시 그렇다.
“이중에는 결정된 원인으로서 물 속에는 내음이 없다”고 말할 것까지도 없다.
또 그대의 모든 타라표는 결정된 모양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그대 스스로 맹세하기를 “땅 가운데는 내음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과 파리(頗梨)들은 달구면 변화(變化)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모두가 이는 땅의 물질이면서도 다 내음은 없다.
또 그대가 “물의 모양은 결정코 차다”라 말한다면
젖들의 모습도 결정코 또한 차야 할 것이며, 타락도 내음이 있기 때문에 땅에 속한 물질이라 말해야 한다.
또 말하기를 “불은 결정코 뜨거운 것이다”라 하나 백랍 등은 불에 속한 물질이지만 그 중에는 일정한 열이 없다.
또 달 등은 실로 찬 것이건만 그대로 불에 속한 물질이라 하니 이 때문에 모든 타라표는 결정된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내음은 오직 땅에만 있다”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대는 백랍 등을 불에 속한 물질이라 하나 그도 또한 옳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결정된 열이 없기 때문이다. 우루카의 제자는 “불은 결정코 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랍 등의 물질에는 열이 없다.
[문] 백랍 등의 물질의 열은 결과 중에 있는 것이요, 닿임의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답] 소[酥]의 결과는 찬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에 속한 물질이라 해야 하는데도 그대는 일정하게 내음이 있기 때문에 땅에 속한 물질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결과를 말한 것이요 원인으로써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하리륵이 과일일 때에는 열이 있으므로 응당 불에 속한 물질일 터인데도 사실인즉 향기가 있고 다섯 가지 맛이 있다.
그러므로 불에 속한 물질이라 하지 않으리니, 결과는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백랍 등은 불에 속한 물질이 아니다.
또 불의 모양은 가볍고 백랍 등은 무거우며 불빛은 하얀데도 백랍 등의 빛깔은 그와 다르다.
또 백랍 등과 불과는 똑같은 모양이 없는데 바로 불에 속한 물질임을 알 수가 있겠는가?
또 백랍 등은 불과 서로 틀린다.
무슨 까닭인가? 뜨거우면 녹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불에 속한 물질이라 하면 불을 만나면 응당 더 늘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더 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에 속한 물질은 아니다. 그대들이 잘 생각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내음은 오직 땅에만 속한 물질이라 하나, 그 내음은 다 네 가지 요소의 무리 가운데 있다.
5.23. 미상품(味相品)
맛이라 함은 단 것[甛], 신 것[酢], 짠 것[鹹], 매운 것[辛], 쓴 것[苦], 싱거운 것[淡] 등을 말한다.
이 여섯 가지의 맛은 다 물질에 따라 차별이 있다. 네 가지 요소가 치우치게 많기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땅과 물이 많기 때문에 달다고 함과 같은 그런 일은 옳지 못하다.
단 맛에도 한량없는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물질에는 생기면서 제각기 다름이 있다.
[문] 약제사(藥劑師)는 다만 여섯 가지 맛이 있을 뿐이라고 하나, 그 일은 어째서인가?
[답] 여섯 가지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혹 두 가지 맛이 화합하기도 하고, 혹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로 화합하는 등 이와 같이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달고 신 것을 합했기 때문에 달고 신맛이라고 하지 아니하며 달고 신 것이 화합되면 다시 다른 맛이 생긴다. 그와 같이 한량이 없다.
또 세속에 따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맛을 구분하여 말하게 된다. 마치 남이 달다 하기 때문에 역시 달다고 말함과 같다.
또 여러 가지 맛이 익을 때에는 제각기 서로 의지한다. 만일 맛이 익을 때에는 혹은 달기도 하고 혹은 달리 변하기도 한다.
그 밖의 맛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법에는 그와 같은 힘이 있다.
5.24. 촉상품(觸相品)
닿임[觸]이라는 것은 단단함[堅]과 부드러움[軟]과 가벼움[輕]과 무거움[重]과 강함[强]과 약함[弱]과 찬 것[冷]과 더운 것[熱]과 깔깔함[澀]과 미끄러움[滑]과 억세게 노는 것[强濯]과 편안하게 즐기는 것[猗樂]과 고달픈 것[疲極]과 고달프지 아니한 것[不疲極]과 혹 병들고[病] 혹 낫고[差] 몸의 영리함[身利]과 몸의 우둔함[身鈍]과 묵직함[嬾重]과 답답함[迷悶]과 흐리멍텅함[瞪瞢]과 쑤시고 저림[疼痺]과 기지개 킴[嚬呻]과 배고프고 목마름[飢渴]과 배부름[飽滿]과 즐겨함[嗜樂]과 즐기지 않음[不嗜樂]과 아득함[懵] 등을 말한다.
[문] 어떤 이가 말하기를 “닿임에는 세 종류인 찬 것과 더운 것과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 단단한 것 따위 중에서 알음(知)을 일으킨다. 만일 단단한 것들을 여의면, 차다 덥다는 알음이 없다.
[문] 우루카는 말한다. “땅의 닿임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하다. 바람의 닿임도 또한 그렇다. 물의 닿임은 차고 불의 닿임은 덥다” 하니, 이 일은 어떠한가?
[답] 먼저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다. 소[酥] 등은 결정코 차고 백랍 등은 열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또 먼저 세 가지 닿임을 말하였으나 만일 바람이 객(客)이라면 바람에게는 따로의 닿임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모양이 없다.
또 끓는 물속의 찬 모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은 결정코 찬 모양이 아니다.
[문] 끓는 물 중에도 조금은 찬 모양이 있으나 불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아는가?
만일 불의 세력이 다하면 도로 다시 차지기 때문이다.
[답] 백랍 등과 소 등의 단단한 모양을 잃지 않고 녹아 흐르는 모양이 있다면 단단한 모양은 곧 흐르는 모양이 된다.
만일 단단한 모양을 잃으면서 흐르는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찬 닿임이 사라진 다음에 다시 찬 닿임을 내는 것이 된다.
땅의 닿임의 차도 덥도 아니한 것도 불과 합할 때에 닿임을 잃지 아니하면 잘 구어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이 닿임을 잃는다면 다시 다른 닿임을 낸다.
그렇다면 찬 닿임을 잃어버리고, 다시 찬 닿임을 내는 것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물의 모든 구나도 또한 아주 잘 변하여져야 한다. 그대의 말은 되풀이 할수록 허물이 있다.
또 서로 반대되는 법이 생기기 때문에 모든 현상[諸相]은 무상(無常)하다. 마치 불과 합하기 때문에 풀들의 모양이 없어짐과 같다.
만일 뜨거운 닿임이 차가운 닿임을 덮는다 하면,
다른 사람도 “젖의 모양은 없어지지 않고 타락의 모양만 덮어졌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있을 수가 없다.
만일 그대가 “젖은 도로 젖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면 그렇다면 잘 변하여 진 것[熟變]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끝없이 생사하는 중에서 어떤 물질이 불에 타지 않을 것인가? 또한 흙속에서 검정 흙가루를 얻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라. 역시 잘 변하여진 것으로부터 환원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잘 변하여지되 언제나 환원하지 아니하는 것은 없다. 이와 같다면 차가운 닿임이 잃었다가는 도로 차가운 닿임을 내게 된다.
혹은 불과 합하기 때문에 검정빛은 없어졌다가 도로 검정빛을 내며, 붉은 빛은 없어졌다가 도로 붉은 빛을 낸다. 그와 같이 차가운 닿임도 없어졌다가는 불을 여의면 도로 생긴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또 위세사의 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땅만이 잘 변질되는 현상이 있을 뿐 물들 중에는 없다”고 하는가 하면
약제사는 말하기를 “만일 끊는 물을 마시면 다른 결과를 얻는다”고 한다.
만일 끓는 물중에서 물질들이 없어지지 아니하면 어떻게 다른 결과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물들에도 역시 잘 변하여짐이 있다. 마치 불이 물질을 태우면 그의 근본 모양을 잃기 때문에 다시 다른 모양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물질에는 달라지는 모양이 있으며, 물도 또한 그와 같다.
또 이 모든 현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무상하다. 마치 물은 능히 불을 끄고 불은 능히 물을 갖추는 것과 같다.
불의 세력으로는 물질을 갖추지 못할 것이 없거든 하물며 물과 합하면서 차가운 닿임을 없애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위세사의 경서에서 “물은 결정코 차다”는 그 말은 옳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