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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 제3권
2.3. 유식이십론[3-1], 나락가파라는 사슴을 사냥하는 자와 같다
| 유식이십론에는 이에 대한 게송이 없다 |
논에서 말하기를,
“나락가파라(㮈落迦波羅)는 사슴을 사냥하는 자와 같다”1)고 하였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단지 서로 해치는 고통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처(器處)2)에서 공통된 모양의 고통 역시 받지 않는다. 이 옥졸은 저들을 해치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저 옥졸들은 뜨거운 쇠가 끓어오르는 곳에서, 불태움을 받는 고통도 참을 수 가 없을 텐데, 어느 여가에 저들을 핍박하며 해칠 수 있으랴?
이 뜨거운 곳에서 몸이 움직여 구를 때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는 자기 몸의 마디마저 지탱할 수 없으리니, 더욱이 어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단지 뜨거운 쇠 안이 펄펄 끓어 솟아오르니, 몸이 그것에 억압되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저 옥졸들은 용감하고 굳세게 저들을 해친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들의 고통을 받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요리하는 사람이 뜨거움을 피해서, 쇠 젓가락으로 뜨거운 기름 속에 튀겨지는 생선을 뒤적이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옥졸을 가지고 나락가(那落迦)로 여기면서,
“서로 해치는 데 공능(功能)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곧 옥졸의 뜻을 어기게 된다.
그러나 나락가(那落迦)의 무리가 불태우는 해침을 당할 때, 서로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곧 옥졸이라고 할 수 없다.
나락가(那落迦)를 나락가파라(㮈洛迦波羅)로 성립시켜, 종(宗)을 삼는다고 말한다면 종(宗)을 어긴 잘못이 있으리라.
또다시
“만일 저 뜨거운 쇠의 극심한 고통의 접촉[觸]을 받기 때문에, 모든 나락가가 저들을 해칠 수 없음은 마치 살아 있는 목숨들을 불꽃이 달아오르는 숯 속에 둔 것과 같다.
혹은 이 무리가 마땅히 이 고통을 받지 않기도 하니, 도사천(覩史天)3)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옥졸(獄卒)이 나락가(那落迦)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곧 이 견해에 대해, 외부인은 달리 해석하였다.
경(經)을 이끌어 증명하였으나, 극히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잠시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무리에게, 그 치우친 견해를 밝히기 위하여, 대강 분명한 조목을 들어 보리라.
저들이 대뜸 따져 말하기를
“지옥 경계에서 옥졸의 무리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경의 말씀대로 말하면
‘너희들 필추(苾芻)여, 나락가(㮈洛迦)가 있으니, 6촉처(觸處)4)라고 이름한다. 만일 모든 유정이 그 가운데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저들이 눈으로 온갖 물질[色]을 볼 때, 다 모두 싫어할 일을 분명히 보리라’고 하셨다.
실제로 저 유정에게는 이러한 일이 있으니, 옥졸이 유정이 아니라면 어째서 관찰해 볼 대상이라고 하는가?
유정을 인정하지 않는 논리에 집착한 자를 대하여, 곧바로 ‘함께 모여 허공을 씹는 짓’이라고 하리라”고 하였다.
저들이 논란을 늘어놓아 말하기를
“모든 나락가(那落迦)가 저 고통을 받을 때, 그 차별이 있음은 별도로 달라진 몸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 무간(無間)5)의 죄가 많은 무간의 죄와 같으리라”고 하였다.
이 또한 아직 충분히 남의 의미와 취지에 익숙하지 못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락가(㮈洛迦)에 태어난 유정의 무리가 도려내는 괴로움을 받을 때라고 한 것은, 그 외 다른 지옥[餘趣]이 겪는 혹독한 괴로움과 구별한 것이다.
그러니 저 지옥 가운데서 겪는 공동의 괴로움은, 모두 똑같이 받는다.
그렇지만 저곳에서는 무거운 업의 무서운 광풍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니, 몸이 극심한 고통을 받지만, 어느 한 무간이라면 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 많은 종류의 무간에서 겪는 모진 고통과 비교하여, 똑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곧 결정하지 못함이 성립한다.
이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저 옥졸을 제외 시켰으나, 모든 나락가(那落迦)는 이 차별이 없다. 저 지옥의 똑같은 고통을, 다 모두 받기 때문이다.
곧 성립시킨 종(宗)에는 다른 종(宗)의 경계[異宗處]가 없다. 구르고 변하여 생기는 도리인들, 어찌 결정하지 못함이 성립하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무간에서는 똑같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외부인이 따져 말하기를
“그 옥졸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른 답이 아니니 결정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마땅히 이 결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가 받는 고통을 보고, 그 외 다른 것도 또한 그렇게 되게 하려는 짓이다. 지금의 세상에서도 함께 이 사실을 직접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이나 낙타가 전갈이나 도마뱀에게 물렸을 때, 드디어 문득 죽음에 이르면 새의 한 무리가 가져가서 먹는 것과 같다.
우선 짐승[傍生]에게 이 차이가 있음을 들어 보았다.
인간의 세상 가운데서도 또한 어느 하나는 고통을 받지 않은 경우를 본다.
예를 들면 속에 덩어리가 있는 환자를 상대로, 치료하는 사람이 드디어 문득 뜨거운 철을 밟고 나서, 이내 뜨거워진 발로 아픈 곳을 밟는다. 환자는 비록 극심한 고통을 받을지라도, 치료하는 사람의 발은 조금도 아픈 곳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정은 실제로 차별이 없다. 이 역시 그 나락가(㮈洛迦)의 세상[趣]에서는, 선천적으로 자연히 생긴 괴로움의 법[俱生苦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를 나락가(那落迦)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도마뱀의 독 등으로 목숨이 끊어질 수 있음을 보인 것도, 이 또한 단지 널리 보이는 일을 드러냈을 뿐이다.
교묘하게 세속의 길을 아는 일이, 논하는 대상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만일 단지 세상의 서로 유사함만을 의지해서, 저 지옥 세상을 이 종의 자리에 거뒀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곧 저 지옥 세상 가운데서도. 저 지옥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은 일이 있음을 보리라.
남의 종에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고 밝힌다면, 이 역시 아직 내가 성립시킨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지옥 세상이 겪는 결정된 고통을 저들이 모두가 함께 받지 않음은, 이 앞서의 작용을 주체적으로 세운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축생이 아니면서 저 지옥 세상에 태어났다면, 저 지옥 세상의 법식에 따라서 반드시 결정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말한 바 양 등이 전갈의 독에 쏘임을 당했을 때,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이 있으며, 혹은 뜨거운 발에서 생기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리라.
만일 전혀 저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저 지옥의 성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 허물이 있으리라.
또 다른 견해에 집착한 이가 말하기를
“그러나 옥졸은 자기와 남의 업이 더욱 불어난 데서 생긴 대상이므로, 해침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심각한 괴로움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자기의 견해로 혼미한 마음을 즐긴다면, 가령 허공에 있을지라도, 걸음걸음에 발이 걸려서 넘어진다”고 말하리라.
나락가파라(㮈洛迦波羅)는 저들의 해치는 대상이 아니므로, 저들의 핍박에서 생기는 온갖 고통을 반드시 받지 않는다고 결정하리라.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집착해서 말하기를
“저곳에서 형체의 해침을 당하지 않는다면, 누가 힘을 빌려 주겠는가”라고 한다.
이를 더욱 따져 말하기를
“비록 번갈아 서로 해치는 일이 있을지라도,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드디어 위치가 달라지게 되었다. 마치 묶인 자와 묶는 자의 달라짐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되려 자기의 말을 가지고, 반대로 자기의 종을 무너뜨리는 격이다.
똑같은 시간에 묶는 자와 묶인 자가 번갈아 가며 묶기도 하고 묶이기도 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저 둘이 차례로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묶임을 당해야만 묶인 자라고 이름하고, 상대를 묶어야만 묶는 자라고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이 비록 고통을 차례로 받게 될지라도, 나락가(那落迦)에서는 또한 성립될 수 없다.
만일 혹독하고 극심한 고통을 받을 때라면, 나락가(那落迦)가 아니요.
만일 남의 해침을 당해서 저 고통을 받을 때라면, 나락가(那落迦)이니, 마땅히 인정하지 못한다.
한 상속의 형체[一相續形]에 삶과 죽음이 있다면, 큰 잘못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한 때에 있으면서 번갈아 서로 해친다는 사실을 성립시킴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한번 이 옥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되돌려 이렇다고 헤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반대의 논리를 좀더 생각해서 전개한다면, 비록 동일한 지옥세계일지라도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름과 호가 문득 달라지리라.
하나는 나락가(那落迦)라 이름하고, 하나는 옥졸로 부르리라.
마치 인간의 세상에 감옥의 담당자가 없는데도, 칼쓴 이가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저[獄卒]를 의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용의 차별을 의탁하여 나락가(那落迦)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묶인 자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지옥이 원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떻게 옥졸을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위치에 차별이 있음은 지옥세계가 똑같지 않으니, 이와 관련된 단서를 마련해야만 묶음과 묶임이 달라지고 작용이 별도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치는 마땅히 저들을 따라서, 나뉜 자리가 정해져야만, 참으로 틀림이 없으리라.
만일 어느 때인가 순서의 자리[階位]가 다름을 인정하고 기뻐한다면, 마땅히 반드시 나락가(那落迦) 모두가 온통 옥졸이 아님을 함께 인정하리라.
내가 세운 종에서는 그렇게 요구할 뿐이다. 이로 인하여 앞에서 주체적으로 성립시킨 뜻과 잘 부합되어 순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실제로 나락가(那落迦)의 성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작용의 차별을 근거로 때로는 지옥을 관장하는 자로 이름한다면, 때문에 이 집착한 견해가 지닌 순서의 자리[階位]는 문득 없어지는 실수를 범한다. 그렇다면 계급(階級)의 다른 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성냄이 많아 참혹한 업을 불러오더니
죄악의 못된 일 행하기를 좋아하여
괴로운 일 보면서 마음속에 기뻐하면
당연히 염마왕의 옥졸로 태어나리라.
이 상(相: 階級의 다른 길)이 나락가(那落迦)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가타(伽他)6)가 참된 뜻이라면, 어찌하여 대뜸 이와 같이 그 옥졸(獄卒) 등이 유정의 무리[有情數]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나락가(那落迦)가 보인 모양에 따라서, 이와 같이 말한들 이치에 또 무엇이 틀리겠는가?
가까이서 보는 이는 모두 다른 이가 거동하는 차별을 보면서 자세히 헤아리기 때문에 저의 마음을 추측하여 안다.
그렇지만 본래 식에 있는 종자(種子)가 성숙해졌을 때, 이와 같은 모양과 상태의 차별이 있음을 따라서 분별을 일으킨 것이다.
저들의 소견을 따라 부처님께서
“파파(波跛)의 악한 업의 유정에게 죄의 견해를 끊어 없애려고, 나락가(㮈洛迦)의 지극히 험악한 곳에서 악한 업으로 생긴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분명하게 밝혔노라”고 말씀하셨다.
저들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견해를 따라 그 식 이외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니, 확실한 논리의 참다운 이치가 다 안으로 유사한 모양을 인연하여 나타남은 진실로 어긋남이 없다.
다른 견해에 집착한 이가 말하기를
“비록 또 서로 함께 괴롭히며 해칠지라도, 이 정도의 순서[階級]는 평범한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에 그 결정된 자리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침을 당하는 자를 나락가(那落迦)라 이름하고, 해치는 자를 파라(波羅: 옥졸)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든 나락가(那落迦)가 바로 해침을 당할 때에 문득 옥졸이 성립되는 잘못이 있을 리 없다.
이를 집착하여 헤아릴 때는 내가 성립시킨 옥졸의 일과 작용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꺼이 인정하여 좋아할 수 없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업의 힘에 그 다른 상태가 있어서 유정을 따라 쫓기 때문에, 되려 일정한 표준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이전에 번갈아 서로 괴롭히며 해쳤으니, 다시 지옥의 경계에서 함께 벌을 주며 죽이게 되었고, 이들과 저들이 핍박하고 해치면서 모든 고통을 받는다.
만일 어떤 생명이 자기의 힘도 없으면서 남을 해친다고 한다면, 단지 고통을 참을 줄만 알 뿐 다시 그 외 다른 틈이 없으리라.
저들 유정이 이전에 함께 원한이 맺혔기 때문에 지금에야 서로 번갈아 괴롭히고 해치게 되었으니, 저들은 다 이 나락가(那落迦)의 유정이다. 저들이 붙고 배반하면서 함께 서로 해치는 일은 다른 것이 인정할 대상이 아니다.
자기의 업(業)을 따라서 식이 서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옥졸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저들을 해치는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허물을 벗으려는 말이니, 전혀 뜻으로 비교할 것이 없다.
만일 피해자를 이 나락가(那落迦)로 인정한다면, 해치는 자는 이 고통을 받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동일한 지옥세계의 모든 옥졸의 무리에서도, 반드시 형상의 크기 등이 똑같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지만 저들 옥졸과 함께 있으면, 혹독함이 두려울만하여 보기만 해도 문득 무서움이 생길 것이다.
높고 큰 형체는 대단히 위엄스럽고 장중하리라. 가령 형상의 크기가 서로 비슷함을 용납하더라도, 그러나 저 옥졸의 몸과 형상에는 독을 품고 있어서 그 무서움이 멸려차(蔑戾車)7)처럼 보기만 해도 문득 두려울 것이다.
이 해치는 자가 설령 몸 모양이 난쟁이처럼 작을지라도, 그 품성이 사납고 날카롭기 때문에 비록 대적할 자의 형상이 무척 크더라도, 느낌부터 적수로 견줄 생각을 못하리니, 사세(事勢)는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으리라. 저 무리를 업신여기는 힘에는 여유만만한 태도가 서려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아직 남의 취지가 심오한 뜻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저의 서툰 실수는 내가 우선 용서하리라.
어떤 때는 비록 다음과 같이
“모든 나락가(那落迦)는 번갈아 서로 해치니, 일 또한 다르지 않아서 형상의 크기와 힘 등이 반드시 서로 비슷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지라도,
이 말의 형세를 틈타서, 드디어 곧 따져 말하기를
“반드시 형상의 크기 등이 똑같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것은 누구와 더불어 반격하고 따지려는 짓인가?
모든 일에는 자기의 용기와 힘이 남을 상대로 결코 이긴다는 헤아림이 앞서 있어야만, 곧바로 두려운 마음이 없다.
이와 같이 인정할 때, 그로 인해서 혹독하게 해치고, 혹은 또 위엄 있는 자라고 하리라.
이것은 이에 참으로 뜻이 없는 말이다. 절박하게 억압하여 괴롭혀야만, 극심한 두려움을 내기 때문이다.
해치는 자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 그 극심한 두려움을 말한다면, 문득 성립시킨 잘못을 범한다.
방편으로 이 차별의 상(相)을 밝혔으나, 그대가 이제 다시 또 혹독한 해침과 위엄까지 성립시켰으니, 이것은 곧바로 크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성립된다. 충분히 훌륭한 벗이 되어, 나를 더욱 빛나게 하리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차별의 체(體)를 체득한다면, 지옥세계의 고통은 똑같이 받지 않는다.
혹은 온갖 사나운 불일지라도, 업력(業力)이 원인이기 때문에, 문득 불에 타는 고통이 없으리라.
이거야말로 스스로 훌륭한 벗이 아니라면, 누가 대뜸 이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보통 친밀한 벗으로서 성품이 선량한 사람이라야, 순조로운 경계[順境], 거스르는 경계[逆境]를 막론하고, 언제나 은혜로운 이익을 베풀어주는 법이다. 그 불에 타는 고통을 받지 않음을 밝히려고 일부러 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성립을 도와주는 뜻이 바로 훌륭한 벗의 뜻에서 뚜렷하게 나온 것이다.
저들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가 아님을 성립시키려고 하는데,
이제 또다시 말하기를
“그 업의 힘 때문에, 큰불이 있다고 설하여, 불에 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거야말로 진정 유식(唯識)의 뜻을 성립시키리라. 실제의 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오직 업의 힘일 뿐이니, 자체의 성품[自性]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미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결정되었으므로, 곧 이 불의 자체 성품도 원래부터 없다는 것이 성립한다.
그리고 진실한 성품이 있음을 이 종(宗)은 인정하였다.
만일 또 이 식이 나타낸 모양이라고 인정한다면, 일 자체도 원래부터 없다. 이것은 업의 힘을 따른다. 때문에 실제의 불이 없다. 이것이 알맞은 이치를 성립함은 그 이전의 업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저들의 더욱 불어난 업으로 불러들인 과보(果報)가 이미 당장 저들에게 있는데도, 어째서 못 보는가?
마치 지혜 없는 자가 불을 끄려고 하면서 다시 또 우유[酥]를 퍼붓는 것처럼 유식종(唯識宗)으로 하여금 타오르는 빛이 더욱 밝아지게 할 뿐이다.
이 여러 가지 이치를 근거로, 이것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로 성립되지 않음을 증명하노라.
만일 그렇게 성립되지 않는다면, 나락가(那落迦)의 무리를 귀신이나 축생이라 한들, 또한 이치에 무엇이 손상되랴?
그러나 이미 나락가(那落迦)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험악한 곳에 태어나는가?
그 외 다른 세계의 무리가 나락가(㮈洛迦)에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저곳에 태어났으니, 반드시 마땅히 나락가(那落迦)와 똑같아야 하리라.
또다시 어째서 저곳에 태어나는 이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가?
만일 저기에 태어난다면, 그 지옥세계와 똑같은 성분[同分]이니, 저들이 처음 태어날 때는 마땅히 똑같은 성분이 있지 않아야 한다.
유정의 무리[有情數]에 드는 성질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저 똑같은 지옥세계에서 유정은 결정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견해에 집착하여 태어남이라고 이름한다면, 큰 위엄을 갖춘 온갖 신들도 또한 이 나락가(㮈洛迦)의 경계에서 유정을 구제하는데, 구제에 따른 고통이 있다고 하리라.
이들이 비록 나락가의 무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거기에 있음을 보기 때문에 문득 불결정(不決定)이 성립된다. 곧 이 영원하다고 결정하는 견해를 근거로 이 말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오직 나쁜 지옥세계인 나락가(那落迦)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일임을 논하려고 하였다.8)
이때에 염마왕(琰摩王)9)의 모든 시종사자(侍從使者)는 만일 왕이 밖으로 나온다면, 반드시 따라다닌다. 이때 왕과 아울러 시종은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1)
현존(現存)의 『이십론』에는 이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본서가 순석(順釋)한 『이십론』은 이본(異本)인 듯하다.
2)
기세간(器世間)으로서, 중생이 사는 세상의 통칭. 여기서는 지옥(地獄) 세상을 말한다.
3)
도솔천(兜率天)의 다른 음사(音寫)로서,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이다.
4)
5변행(遍行)의 하나. 일체의 심(心)ㆍ심소(心所)법에 따라서 대상과 접촉시키는 것으로서, 안(眼)등 의 여섯 접촉[六觸]의 경계를 말하며, 나아가 근(根)ㆍ경(境)ㆍ식(識)의 화합접촉(和合接觸)으로 이뤄지는 심식작용(心識作用)을 뜻한다.
5)
곧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서, 쉴 틈 없이 혹독한 고통을 받는 지옥을 말한다.
6)
풍송(諷誦), 게송(偈頌) 등으로 번역하며, 성가(聖歌)라는 뜻이다.
7)
미려차(彌戾車)라고도 하는데, 인도의 서쪽 또는 북쪽의 변방에 살았다는 포악무도한 미개인을 말한다.
8)
이상이 『이십론』의
“모든 것은 지옥에서 옥졸 등이 핍박하며 해치는 일을 똑같이 보는 것과 같다. 때문에 네 가지 뜻이 다 성립한다”에 대한 해석이다.
[一切如地獄 同見獄卒等 能爲逼害事 故四義皆成]
9)
지옥(地獄)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염라(閻羅)ㆍ염마(焰摩)ㆍ염마(琰摩)ㆍ염마(閻摩)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박(縛)ㆍ쌍세(雙世)ㆍ차지(遮止)ㆍ정식(靜息)ㆍ가포외(可怖畏)ㆍ평등(平等)으로 번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