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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니엘 영재교육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
목 차
제 1 부 사모의 역할
제 1 부 인간에 관해서
1. 케이티 루터/ 2. 캐더린 젤 3. 이들렛 칼빈
제 2 부 목회상의 문제점들
4. 수산나 웨슬리/ 5. 메어리 플레쳐 / 6. 사라 에드워즈
7. 유니스 비쳐 / 8. 마가렛 심프슨
제 3 부 사모가 직면하는 도전들
9. 수산나 스펄전/ 10. 엠마 무디 / 11. 데이지 스미스
12. 캐더린 마샬 / 13. 룻 필 / 14. 질 브리스코.
역자 김종일 박사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수학
미국 아일리프신학대학원(M.Div)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철학박사)
스위스 바젤대학 신학부 수학
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역/저서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영문관)
아세아인의 성서연구(대한기독교서회)
도전받는 하나님의 창조(대한기독교서회)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의 원리
제1부 사모의 역할
교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는 사모의 길을 찾아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모가 되도록 훈련시키는 신학적 교과 과정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따라서 사모들은 교회내에서 전문적 분야가 아닌 하찮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워하곤 한다. 사모는 교회에 고용된 것이 아니며, 또한 본래 그 직무에 대한 규정조차 전혀 모르고 있어 사모들은 종종 당황하게 된다.
그러면 사모들의 필수적 역할은 무엇이며, 무엇이 그들의 직무 규정이 되어야 할 것인가? 종교개혁 초기 세 명의 사모들의 활동을 간단히 살펴보면, 초장기부터 자유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케이티 루터 여사는 독립적인 성격과 정열적인 성품을 끝까지 견지했다. 그녀는 남편의 목회에 깊이 참여하는 한편, 목사관에 찾아오는 온갖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사회 사업에 상당히 깊이 관여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캐더린 젤은 교회내의 일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예배당을 피난민들에게 개방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품목을 국가 공무원들에게 알려 주기도 하고, 교구 및 그 근방 지구내의 환자 빛 빈민들을 돕기도 하였으며, 편지를 쓴다든가, 찬송집을 편집한다든가, 필요할 때는 요청을 받고 장례식을 집전하기도 하였다.
이들렛 칼빈 여사의 사역은 케이티 루터 여사나 캐더린 젤 여사의 사역과는 또 다른 면을 갖고 있었다. 이 두 여사들도 남편의 요구와 가정적인 책임을 주요시하였지만 이들렛 여사만큼 남편에게 헌신적이지는 않았다.이들렛 여사는 남편의 필요에 응했으며, 그녀가 병약하였지만 칼빈 목사의 성직 수행은 그녀의 헌신으로 더욱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케이티 루터, 캐더린 젤, 그리고 이들렛 칼빈, 이 세 사람의 여성들은 현대의 사모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될 것이다. 그들의 생애는 16세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유효한 성직 활동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제1장 케이티루터(Katie Luther)
.....케이티 루터의 남편
마틴루터(MartinLuther,1483-1546)는 존 칼빈, 쯔빙글리 등과 더불어 종교 개혁 운동에 앞장선 16세기의 종교개혁가이며, 신학자이고, 프로테스탄트 주의의 창시자이다. 로마 카톨릭의 신부였던 그는 1517년 10월 31일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 상황에 관한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95개 조항을 발표하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결국 개신교가 탄생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첫번째 사모
케이티 루터 여사는 강단의 그늘 밑에서 자신의 정체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든 교파의 사모들이 나아갈 길을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모로서의 성직 사역은 존중되어야 하며, 사모는 단순히 목회자의 보조자가 아니다. 케이티 여사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성직 사역을 구성하고 창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지나칠 만큼 자존심이 강했고 남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까다로왔을 뿐만 아니라, 누구를 소개해 주어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루터에게 먼저 청혼을 하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성직에 종사하는 남자에게 시집가고자 한 그녀의 강한 욕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해할 때 그녀는 자기가 루터의 아내로서 적임자라고 믿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처럼 그녀도 목회자와 결혼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형태의 성직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녀가 안고 있던 갈등과 인격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케이티는 훌륭한 종교 개혁자의 사모로서 자기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프랑스나 베니스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케이티를 포기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녀를 주신 것이며, 다른 여인들은 더 못된 결점들을 갖고 있다.”고 루터는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질병과 좌절과 괴벽을 잘 받아 주었으며 요리나 목초, 가축기르기, 안마 등 모든 일에 능수능란하였다. 어떤 면에서 케이티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범적인 사모상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수년 간 수백 명에 달하는 손님을 늘 따뜻이 친절히 돌봐 주었다.
루터가 상담하기 위해 찾아온 도피자들이나 학생들과 만나고 있을 때 케이티는 그 자리에 찾아와 상담을 돕기도 하고 익살 띤 대화로 격려하는 재치도 보여 주었다.
루터가 머물고 있었던 목사관은 문자 그대로 활기가 넘쳐 흘렀다.
케이티는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루터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가리켜 “친절한 여인이며 루터의 아내이며 설교자, 모략가, 정원사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 이라고 칭찬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케이티를 “나의 사랑하는 여주인, 여자 루터, 여의사, 비텐베르크의 여자 성주”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케이티 루터 여사는 사모들의 특수 목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사모들의 역할상의 모범이다. 뿐만 아니라 케이티 여사는 사모가 목회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생화의 원천을 갑자기 잃었을 때 독립정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자산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제 2 장 캐더린 젤
.....캐더린 젤의 남편
매튜 젤(Mattew Zell)은 원래 카톨릭교회의 사제였다가 루터교 목사로 개종한 사람으로서, 마틴 루터, 존 칼빈, 필립 멜랑히톤, 그리고 울리히 쯔빙글리와 더불어 종교개혁 운동에 앞장 섰었다. 그는 1525년 농민 전쟁 발발 당시 활발한 구호 활동을 펴고 전쟁을 중지시키려는 평화적 노력을 기하였으며, 카톨릭교회의 지배하에서 핍박을 견디다 못해 도망온 피난자들을 목사관으로 받아들여 보호 하기도 하였다.다.
개성있는 사역을 추구한 사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목사관에서 자주 행해지곤 한다. 카렌 메인즈 여사는 남편이 시카고 중심부에서 목사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 집필한 [공개된 마음, 공개된 가정]이란 저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데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사모라는 직책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들과 실망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책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통찰력을 제공한다. “10여 년 간 남편과 나는 시카고 도심부에 살아왔으며, 우리는 주민들의 요구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다. 우리 사회는 치료할 분야가 많은 파괴된 사회다. 어쨌든 이처럼 좌절되고, 얽매이고, 맹목적이며 억압된,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봉사가 바로 우리들의 책임인 것이다.”
캐더린은 개혁자로서 인정을 받은 활동가였다. 그녀는 결혼하기 오래전부터 영적인 가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모로서 캐더린 역사는 주로 신교도 도피자들과 여행자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었다. “그리스도 때문에 가장 천대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한 그녀의 열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남편의 안부를 몰라 초조해 하는 부인들에게 그녀는 편지 형식의 전도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사55:8),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한다”(신32:39)]라고 하신 여호와의 확고한 말씀을 여러분들이 잊지 않게 끔 여러분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고난당하는 여러분과 함께 고통에 동참하도록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고 자부합니다.
많은 시간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목회 사역에 쏟아부었다는 점에서 캐더린 여사야말로 뛰어난 사모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이처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녀는 종교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정열적으로 활동하였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캐더린 여사는 남편을 도와 목회하는 일에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죽고 난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사모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계속했으며, 15년 이상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보살펴 주면서 지냈다.
캐더린은 강인한 여성이었다. 그 당시의 여성들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히 민감하게 기도했다. 그녀의 사역에 대한 비판과 오해, 게다가 남편의 죽음 때문에 오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은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잃게 되었고 휴식과 정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남편이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난 후 캐더린은 교회의 평화를 해친다는 비난을 받고서 그 일에 대해 변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평화를 해치는 자라고요? 맞습니다. 내 자신의 평화를 깨뜨린 것은 사실입니다. 나 자신의 시간을 천박한 쾌락에 사용하는 것 대신 전염병 환자를 심방하며, 죽은 사람의 시체를 운반한 그것을 당신은 평화를 해치는 것이라고 부릅니까? 저는 사형수와 수인들을 심방했습니다. 저는 사흘 낮, 사흘 밤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강단에 올라서서 설교해 본 일은 없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 봉사한 일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더 많습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의 평안을 방해한 일이 되는 것입니까?]
캐더린은 자선 사업 이외의 다른 일도 했다. 그녀는 평신도들의 마음을 집중시켜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게 할 목적에서 찬송가를 편집하여 그것을 팜플렛 형태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찬송 편집외에도 전도지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는데, 그 안에는 박해와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성경 구절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문필의 재능을 사용하여 성직에 봉사하였다.
[친애하는 펠릭스 경에게 드립니다. 저는 30여년 동안이나 교분을 가진 사이이기에, 당신이 오랫동안 극심한 질병 속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심방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빈민들과 환자들을 돌봐 주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자주 당신을 방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중략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능력과 인내를 갖게 하실 때까지 쓰라리고 배신감마저 느끼셨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셔서 그가 당신에게 십자가를 능히 질 수 있게끔 가르치신 데 대해 오히려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질병에 늘 짓눌려 살며, 그 때문에 당신이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육체가 아닌 영적인 멍에를 가볍게 만들어 드릴 목적으로 보아 보았습니다.(시51)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130)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 두 시편 말씀을 명상한 다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성서에 관한 ‘캐더린 여사의 명상문’은 간결하며 적절한 것이었다. 그 명상문은 학적인 해설이 아니라, 실망에 빠진 영혼에게 실제적인 격려의 원천이 되도록 작성된 것이다.
그녀는 특출한 여성이었으며 당국에 대해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그 당시 여권운동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시의 신념을 방해할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굳은 결의 때문이다. 사모로서의 역할이 그녀의 신분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 3 장 이들렛 칼빈(Idelette Calvin)
............이들렛 칼빈의 남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신학자요 교회 정치가이며, 저술가요 성경 주석가이다. 그는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있어서 마틴 루터, 쯔빙글리 등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며, 기독교의 고전인 [기독교 강요]와 [칼빈 주석]등 많은 저술을 남긴 오늘날 장로교회의 아버지이다.
내조자 역할을 한 사모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사모가 교회에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나의 최상의 목회는 남편에게 행복한 가정을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나의 임무를 완수하면 남편은 매일, 그를 영적인 목자로 초대한 성도들을 위하여 새롭게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남편과 긴밀하고 정직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사모는 목회자 남편을 위하여 마음을 쓰고 기도하며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른 경우에 그녀는 여성적인 시각을 말해 주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모가 해야 할 일은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들렛 칼빈은 위와 같은 많은 특성을 지녔던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을 내조하는 일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보았으며 실제로 그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위대한 개혁자와의 그녀의 결혼생활은 애초부터 문제투성이었고 불만족스러웠다.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에서 목사 직분 이외에도 그 자신이 경영하던 학교의 교사직과 기숙사 사감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렛과 두 아이는 기숙사로 변한 집안에서 아주 강압적이고, 때로는 빈정대기도 하는 가정부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이들렛에게 이런 일은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에 불상사가 겹쳐 그녀와 남편 칼빈은 결혼 직후에 병으로 눕게 되었다. 칼빈은 “마치 하나님께서 혼례를 지배하셔서 우리의 기쁨을 축소하시고 결혼이 기쁨으로 끝나지 않도록 조정하시는 듯하다.”고 기술하였다. 그들의 결혼생활에는 병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개혁 활동에 대하여 그가 엄한 법률을 추구함으로써 신정 정치를 수립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시의회는 어떤 점에 있어서는 협조적이었으나 시민들 가운데서는 반대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칼빈이 자신들의 사회적, 종교적 활동을 규제하려는 것을 거부하였다.
후에 시의회로부터 검은 벨벳에 모피로 가장자리를 둘러친 선물을 칼빈에게 주었고, 국가적 차원에서 아름다운 저택을 목사관으로 주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머무는 대신 검소한 남편처럼 그녀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선 구호 사업에 바쳤다. 병든 사람들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자주 심방하였다. 많은 경우에 그녀는 남편을 찾아와 식견을 구하는 그 고장의 방문객들의 시중을 들기도 하였다.
남편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 이외에도, 이들렛은 치욕스런 인격적 모욕도 감수해야 했다. 프랑소와 파브레와 제네바의 또 다른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의 엄격한 권위주의를 거부하면서 이들렛이 품행이 좋지 못한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두 자녀는 혼회 관계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소문은 이들렛과 그녀의 전 남편이 시에서 인정하는 의식에 따라 결혼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 것이었다.
심한 질병과 세 아이를 잃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들렛은 제네바의 저명한 설교가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편지나 다른 저술 속에서 자신의 가족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그의 가정생활을 매우 신비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나의 인생의 동반자를 잃었다. 그녀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가혹한 것이었을 지라도, 피신생활과 가난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라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 나의 목회를 충실히 도와주었다. 그녀로부터 방해를 받아 본 일이 없었다.” -칼빈-
이들렛은 그녀가 없었더라면 가혹하고 권위주의적 목회가 되었을 칼빈의 목회 사업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칼빈은 재혼하지 않았다. 이들렛의 사후에 그는 “혼자 살아가기로 맹세하였다”“나는 병약하기 때문에 여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존 칼빈은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의 추억만으로 생을 마감했다.
제Ⅱ부 목회상의 문제점들
어느 저자는 “사모가 되는 것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랐으며 감수성이 예민하여 정서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감 없이 그런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많은 목사 사모들은 집회 때마다 성도들 앞에서 미소짓지만 사실상 속으로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사모로서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성도들의 기대치에 못미친다는 것을 그들은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그들이 어느 한 그룹으로부터는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다른 그룹으로부터는 소외되고 마는 것이다.” 수산나 웨슬리 남편이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기와 아이들은 계속 양보해 왔다고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이것은 그녀가 교회내의 여신도들과 의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그녀가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어야 하는 짐이 었다.
제 4장 수산나 웨슬리
..........수산나 웨슬리의 남편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 링컨 주 엡워드의 교구 주임사제이자 시인이었고 학자였다. 그는 라티어 욥기 강해를 준비하는데 10년을 보내고 그것을 유작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임, 영국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하고 성직자들이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영국에 대대적인 복음주의적 각성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부부 문제로 고통당한 사모)
데니스 터너는 여성들의 역할 변화도 결혼 파경의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 더욱 자각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을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목사인 남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들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개성과 지적 관심으로 인해, 다른 무엇보다도 인생의 불확실성과 불평등에 대해 고민한다.
수산나는 아이들을 참을성 있게 대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수용할 줄 알았던 적극적이며 조직적이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사무엘은 의지가 약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고 금전 관리와 사업 수완도 부족하였다. 그리고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사실 사무엘 웨슬리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상당히 부족했다. 그와 교인들 사이의 어려운 관계는 종종 수산나에 의해 원만히 해결되었으며, 그것이 수산나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곤했다. 그는 교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수산나와 상당히 달랐다. 그는 개개인의 상황과 필요는 무시한 채 완고하게 교회의 계율을 고집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목사를 원망하고 불신했다. 자연히 사무엘의 적은 많았고, 수산나와 아이들은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수산나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의 적들은 그가 수확한 아마에 불을 질렀고, 웨슬리의 아이들을 조롱했다. 또한 그들은 목사관의 문에 돌쩌귀를 매달아 놓았다. 그들은 사무엘의 가족들이 우유를 얻지 못하도록 젖소들을 찔러 죽였으며, 심지어 어느 때는 개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까지 하였다.”
무장한 성난 군중에 의해 포위되었다. 교구민들 중 한 사람에게 빚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런 굴욕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사무엘은 오랜 기간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부부간의 갈등, 특히 서로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사무엘이 집을 나갔을 때가 있을 정도로 수산나와 아이들로서는 고통스런 나날들도 있었지만 수산나는 헌신적인 어머니-언제나 ‘슈퍼 엄마’ 자녀들과 한 주일에 한 시간씩 개별 면담을 하였다. 그 때에 그녀는 아이들과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여러 해 뒤, 존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어머니와 가졌던 시간이 매우 의미 있었다고 회상한다.
수산나는 자신의 영적 개발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하루 세 번 명상과 반성의 시간을 가졌으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개인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수산나의 영적 영향력은 그녀의 가족에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수년 후 존은 자기 어머니를 ‘정의의 설교가’라고 언급했다.
수산나는 “여성......그리고 대가족의 여주인으로서....... 영혼에 대한 우선적인 의무는 남편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반면에, 그녀는 남편이 없는 동안 그녀 자신이 영적인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처음에 수산나의 포용력은 그녀의 가족과 이웃 아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 비록 수산나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정은 곧 달라졌다.
처음에 수동적인 수산나는, 그녀와의 교제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다. 그러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장애는 무엇인가? “나는 비록 남자가 아니고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봉헌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정한 열심에 고취되어 있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산사는 여성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어쨌든 수산나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 뿐만 아니라 남편이 그녀의 명성에 대해 갖는 불만까지도 해결해야 했다. 수산나 웨슬리는 남편의 그늘에 머물러 그의 배후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지도력을 발휘해야 했을 때, 그녀는 권위와 겸손한 자세로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 사모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수산나의 목회적 소명도 쉽게 획득된 것은 아니었다. 진실로 수산나는 역사상 위대한 어머니들 중의 한 사람이 었지만, 그녀는 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즉 그녀는 한 사람의 목회자 - 뛰어난 사모- 였으며, 그녀는 그렇게 기억되어야 한다.
제 5 장 메어리 플레쳐
.....메어리 플래쳐의 남편
존 플래쳐는 1729년 9월 12일 스위스의 파우드주 리용에서 출생하여 1785년 8월 14일 쉬로프셔의 메들리에서 사망하였다.그는 존 웨슬리의 절친한 동료이며, 훌륭한 대중 설교가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가장 독실하고 유능한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신학상 알미니안주의자였다.
미망인의 고통을 극복한 사모
목사 없이는 사모도 없으며, 이런 까닭에 즉음으로 인해 목사가 목회로부터 떠나게 될 때는 그의 아내 또한 사모의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사모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자기 자리를 구축하지 못하는 한, 사모의 주체성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남편의 생활과 너무나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미망인이 된 목사사모는 동반자를 잃었다는 것 이상의 시련을 겪게 된다. 남편과 함께 행하던 그녀의 목회는 초점을 상실하게 되고, 그녀가 교회 사택에 살고 있을 경우 그녀의 일상생활은 불확실해진다.
그녀는 미망인이 되어서 “목사 사모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독자적인 일을 시작하느냐 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독신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헌신할 생각이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이따금씩 내가 플레쳐 씨와 결혼한다면 그는 나의 영혼을 위해 도움이 되기 보다는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목회에 대한 그들의 원숙함과 공동의 역할은 행복하고 충만한 파트너쉽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들은 결단코 자기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둘 다 희생적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하였다.
[내 남편은 모든 점에서 나와 뜻이 맞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속 상기함으로써 나의 모든 결점과 실수를 덮어 준다. 그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것은 그의 최고의 희망이며, 바로 나의 영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또 다른 경우에 메어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매일 매일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훌륭한 남편을 두었다. 나는 처음 결혼했을 때보다 더 건강하며,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소명 또한 너무나 분명하다. 나는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자유를 누리며, 사람들에게서도 이와 같이 기분 좋은 격려를 받는다.”
메어리는 남편의 목회를 열심히 도왔으며 목사 사모로서 만족했다.
메어리는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어느 날 그녀가 설교를 마친 후 발티라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녀와의 상담을 통해 그는 회개하였고, 그 직후에 그는 단체를 만들고 고향에 교회를 세웠다.
마델리 교구에서 메어리가 이루어 놓은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감리교인들과 영국교도들을 화해시킨 일이었다. 메어리는 바로, 마델리에 화해의 역사를 이룩한 신비의 인물이었다. 그녀가 죽은 뒤 화해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상담과 자선 활동을 하는 이외에 메어리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계속 설교를 했다. “어느 때는 3천명이나 되는 군중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목사들도 때때로 청중석에 나타난곤 했는데, 그것이 그녀를 ‘목사 중의 목사’로 만들었다. 여성들이 강단에 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공식 예배 때 설교하지 못하고, 다만 그녀가 살고 있던 사택 근처의 ‘십일조 창고’에서 설교하였다. 그 창고는 그 지역을 방문한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들이 사용하곤 하던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비공식적인 ‘목회자’였다.
메어리는 온화한 태도와 명료한 영적 성숙함 덕분에, 그녀와 함께 일하던 남성들은 그녀를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메어리는 남편이 죽은 뒤 25년도 더 되는 기간 동안 목회 활동을 계속했다. 그녀가 34년간 목사 사모로서 능력있는 목회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메어리는 그 기간 중에서 30년을 미망인으로서 봉사했던 것이다.
제 6 장 사라 에드워즈
..........사라 에드워즈의 남편
죠나단 에드워드(1703-1758)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6세에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13세도 못되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다. 13세에 예일 대학에 입학하여 17세에 학급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21세에 예일 대학 강사가 되고, 22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메사추세츠 주 노담프턴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955년에 그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였다.
원망에 찬 불평을 감수한 사모
“회중 가운데 목사 사모보다 더 심한 비난을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로라 리 패롯(Lora Lee Parrot)은 말하고 있다. “사모는 행한 일이나, 행치 않은 일 때문에, 또는 하려고 했던 일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또한 그녀 자신의 행동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의 행동으로 인해서도 비난 받는다. 만약에 그녀가 남편의 목회 사역을 너무 많이 거들게 되면, 그것 때문에 비난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충분히 도와주지 않는다고 비난 받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사모의 행동에서 트집거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첫째 이유는, 사모라는 역할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이다. 그녀의 옷차림이나 화장, 자녀 양육태도, 그리고 그녀의 교양정도 등은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다. 두번째 이유는 대처하기가 훨씬 어렵다. “평신도들은 목사 사모에게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기대한다.” 그들은 사모란 “샹냥하고, 현명하고, 행복하고, 검소하고, 다재다능하고, 강하고, 여성스러우며”, 또한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패롯은 “그와 같이 완전한 모습은 목사 자신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끔씩 교인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압박받고, 비난받는 일에 마음이 상한다. 그러한 생활 방식이란 값싸게 내놓을 만한 것, 즉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검소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훌륭한 요리 솜씨도 적은 돈으로 완벽한 그 고장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만약 목사 사모가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지 않고, 또 남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크리스찬의 삶을 추구해 간다면, 그녀는 적극적인 사모들이 당하는 것과 같은 비난과 험담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적 태도는 내적 깊이와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따금씩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다.... 그녀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여러 면에서 죠나단과 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이 두 사람이 결혼생활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엘리자베스 도드는 말했다. “융통성이 없고, 비사교적이며, 내성적인 에드워즈는 숙명적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소녀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곧은 자태와 우아한 예의 범절을 갖춘, 흥분으로 설레이는 갈색머리 소녀였다. 그녀는 화술도 뛰어났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말주변이 없었고, 그녀는 쾌활했지만 에드워즈는 내성적이었다.”
사모가 인간적인 약점들을 보이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화제로 삼는다.“
그러나 사라의 훌륭한 자질도 역시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훌륭한 어머니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녀의 남편에 의하면, “그녀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를 억제하고 통제할 수 있기까지는 부모가 그들을 돌봐주고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들을 위해 그녀는 늘 기도했다.” 또한 그녀는 “정기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한 번 이상 똑같은 말을 반복한 적이 없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그녀는 사랑이 넘치며 매우 능력있는 어머니요, 훌륭한 훈육자로 여겨졌던 것 같다.
또한 사라는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돌봐주곤 했다. 그녀를 잘 알고 있었던 사무엘 흡킨스 박사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경건성이나 체험적인 신앙은 대단했다.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녀에게 즐거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한 여성들의 사역 문제에 관한 한, 개척자이기도 했다.
사라는 남편이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브로치를 주저없이 달고 다녔고, 또한 집안 장식이나 의상 디자인에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그 모양을 본떠서 옷을 만드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때로는 헌옷을 다시 만들어 이용하기도 했다. 어떤 여성들보다도 멋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목사를 자신들이 갈망하던 남편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이 도를 지나치게 될까봐 항상 불안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회고는 그녀의 정직함과 영적 깊이를 보여 준다. 1750년 7월 2일, 그는 고별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가 갈 곳을 정하지 못했고 교회도 목회자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이제 임시 목회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비참한 시련이었다. 지옥 같은 몇 개월이 지난 후, 사라와 죠나단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며, 더 넓은 목회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사라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였다. 사라는 갑자기 가장 깊은 위기를 맛보게 되었다.
사라 에드워즈는 뉴 잉글랜드 교회의 능력있는 사모가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과 남편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 그들이 많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 덕택이었다.
제 7 장 유니스 비쳐(Eunice Beecher)
.........유니의 비쳐의 남편
헨리 워드 비쳐(1813-1887)는 미국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에서 태어나, 엠허스트 대학과 레인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837년에는 인디아나 로렌스버그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후 1847년에는 브룩클린 플리머드 회중교회의 목사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고 널리 알려진 설교자로서 특히, 달변과 연극적 재능 그리고 건강하고도 인상적인 용모는 그를 대중적 인기 기반을 가진 유명인이 되게 하였다.
남편에 대한 스캔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사모
우리는 목회자와 사모가 한팀이 되어 대담자들에게 상담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과분한 남편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한 여성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녀와 같은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공주님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소박하고 가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화려하게 빛날 수도 있고 심하게 빈정거림을 당할 수도 있다.” 비쳐 역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디아나폴리스에서 그의 목회는 꽃을 피웠다. 30명밖에 안되던 교인 수가 300명으로 늘어났고, 교회 건물도 신축하게 되었다.
[가정의 불행은, 서로의 성격적인 차이를 모르거나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ㅡ
[교회나 공적인 임무로 지치고 피곤해졌을 때 남편이 안식처--근심과 갈등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안식처--인 가정으로 돌아와 쉬게 해주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
가정에 대한 그녀의 인식은 다분히 감상적이었다. “순수한 사랑, 올바른 생각, 모든 신앙, 만약 그대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면, 그것들의 뿌리를 가정이라는 제단 아래 내려야 한다.” 그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과 아이들 돌보는 일을 무척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또한 엄격한 훈육자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부모를 존경하도록 양육시켰다. 그녀는 아이들이 “안녕, 엄마” 혹은 “안녕, 아빠”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어리광을 자녀들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뛰어난 목회자가 여성 신도들과 함께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서 소문에 시달리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유니스는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헌신했던--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완전한 가정이라는 이상에 헌신했던--충실한 아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 대한 헌신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더욱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유니스는 남편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혼이란 “여성해방론자들이나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찬 여성들은 아무도 이혼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내로서의, 특히 사모로서의 의무는, 속으로는 아무리 쓰라린 고통과 뼈에 사무치는 의심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외적으로는 남편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음보다 더 나쁜 어떤 일, 바로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과 신뢰가 점점 식어가고 흔들리게 될 것 같은 휘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에서 좋은 것을 뽑아내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비쳐는 “잘못과 그릇된 행동을 고치는 데에는 처벌보다 사랑어린 친절이 더 낫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유니스는 남편보다 7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 기간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첨을 좋아했고 수치스러운 일을 탐닉하였다. 그의 아내로서, 그녀는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잘 견뎌내었다.
제 8 장 마가렛 심프슨
...........마가렛 심프슨의 남편
알버트 벤쟈민 심프슨은 미국 토론토에서 신학교를 다녔으며,장로교 목사였다. 그는 온타리오 해밀토의 낙스 장로교회에 시무하였으며, 켄터키 루이스빌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체스넛 스트리트 교회와 뉴욕13번가 장로교회를 담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기독교 선교 연합회와 복음교회라는 독립된 교회를조직하여 교파에 얽매이지 않고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뉴욕 시의 가정 선교와 해외 선교에 힘을 쏟았다.
비현실적인 환상을 가진 목회자와 살았던 사모
성공과 사회적 공헌으로 세상에서 갈채를 받는 사람들은 대개 비현실적인 환상가이거나 창조적인 천재들이다. 그들은 찬양을 받고 명성을 얻는다. 반면에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지경에 처하곤 한다.
그녀가 공감하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 높이 고양되어 있는 남편을 내면적으로 잘 지켜보려고 했던 것은, 그녀에 대한 불후의 명성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모들처럼, 그녀도 사모로서의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작은 교회들과 신앙모임들에서 설교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녀는 사모로서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다. 설교자의 구혼에 동의함으로써 그녀는 자동적으로 사모가 된 것이다.
심프슨이 목회를 시작하던 해에, 마가렛은 남편이 인정받는 것을 몹시 기뻐했다. 그는 젊은 장로교 설교자로서의 신선함을 일으켰고, 청중들은 그를 위대한 설교자로 인정했다. 해밀톤에서 시무하던 8년동안, 약 750명이나 되는 새신자가 교회로 들어왔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시작되었다.
심프슨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마가렛에게 전보로 알렸다.그녀의 반응은 신속했다. “나는 그때 그러한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편지로, 그가 중국에 가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나는 집에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 그의 마음이 잠시나마 진정되리라고 생각했다.
마가렛이 곧 알게 되었듯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킨 것은 “잠시동안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심프슨이 자기 아내의 마음을 묵살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병약한 아내를 영국에 남겨 두었던 C.T스튜드 등의 위대한 선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욕 시로 옮겨온 일로 인해 마가렛이 겪은 좌절감은 남편의 건강이 악화됨으로써 가중되었다.
“나는 몹시 지쳤다. 인생의 모든 것이 허무하고 시들한 것 같다.”
이러한 깊은 절망과 육체적 소모의 기간이 지난 후 곧이어 심프슨은 메인의 올드 오쳐드에서 있었던 치유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그는 그에게서 새로운 메시지와 간증을 들었다. 그리고 명상의 기간이 지난 후 그는 하나님꼐서 친히 병을 고쳐 주셨다고 말했다. 그의 몸이 치유되었다는 간증을 듣고 그의 아내와 친구들은 그것을 기쁜 구원의 일로 받아들였다.
석달 안에 심프슨은 35명의 공인 회원을 둔 “복음교회”라는 이름의 독립된 교회를 조직했다. 처음 몇 년 동안 혼란스럽고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집단은 빠르게 성장했다.
심프슨이 독립하던 초기 몇 년은 마가렛에게 몹시 어려운 시기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프슨의 재정 상태는 개선되었다. 그러나 마가렛과 그녀의 환상가 남편 사이에 있었던 심각한 사상적 차이는 계속남아 있었다. 심프슨이 더욱더 치유 목회에 열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각자의 집에 치료 센터를 마련해 놓고 자기의 인도를 받으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했다. 그 자신도 그의 집을 신체적. 정신적 치료 요양 셈터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가렛이 완강히 반대하였다. “자녀는 어떤 기관이 아니라 가정에서 양육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어머니요 사모로서, 마가렛은 충실했다. 토쳐가 그렇게 부르듯이, “예언자의 아내로서”, 그녀는 때떄로 비탄자와 적대자로서 봉사했다. 심프슨은 충실한 추종자들(그가 죽기 전에 수천 명에 달했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남편의 천재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그녀는 그와 함께 살아야 했고 개인적으로 날마다 그의 엉뚱한 행동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천국의 것들에 대한 환상 떄문에 때때로 그는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지상의 의무에 소홀했다. 반면 그녀의 현실적인 의무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예언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허용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다는 비난만 받았다. 제랄드 맥그로우에 의하면 그녀는 말년에 가서 “남편의 소명을 만족스럽게 여기게 되었고, 비록 가끔씩 남편의 꿈을 공유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남편을 충실히 뒷받침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과 함께 강단에서 설교도 하였으며, 그가 창설했던 크리스찬 운동을 증진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편의 조울증적인 성격 때문에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A.W. 토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께 도취된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기들과 신비주의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정신적 비행 영역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들이 믿을 수 없는 높이의 영적 황홀경을 향해 치솟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이 거기에서 내려오는, 그리고 체바 강가에 앉아 멍하니 낙담해 있는, 혹은 밤새도록 그들만의 슬픔으로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그 슬픔의 무게와 똑같은 것이다.” 죽기 얼마전까지도 심프슨은 깊은 절망에 빠져 괴로워했다. 그리고 “영적 우울감으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는 주님의 얼굴이 자기에게서 가리워져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치 가장 값비싼 보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상심하였다.” 마가렛은 끝까지 남편 곁에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54년 전에 결혼했던 그 남자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제 Ⅲ 부 사모가 직면하는 도전들
많은 여성들이 하나의 문제로 보는 일을 다른 여성들은 하나의 도전으로 본다. 수산나 웨슬리는, 다른 사람의 경우 이혼이라는 파멸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을 어떤 일을 후츠파를 가지고 대처했다. 스코트 팩은 그의 책 ‘찾는 자가 적은 길’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바로 개인적인 성숙과 발전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문제라는 것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문제는 우리의 용기와 우리의 지혜를 불러일으킨다. 참으로 문제는 우리의 용기와 우리의 지혜를 창조해 낸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문제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문제에 대면하고 고통을 통해서이다.
제9장 수산나 스펄젼
..........수산나 스펄젼의 남편
찰스 H. 스펄젼(1834-1892)은 영국의 침례교 목사였으며, 오늘날에도 역사상 최고의 설교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는 15세까지 학교 교육을 받고, 16세 때에는 학교의 수위로 일하였다. 그의 첫 설교는 16세 때에는 학교의 수위로 일하였다. 그의 첫 설교는 16세 때 케임브리지 근처 한 오두막집에서 있었고, 그 한 번의 설교로 그는 뛰어난 설교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22세 때에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 1861년 6천석을 갖춘 메트로폴리탄 성전을 건축하였고, 평생 그 곳에서 목회하였다.
인쇄물을돌려 남편의 이미지를 쇄신시킨 사모
사모가 남편의 이미지를 쇄신시킬 책자를 돌린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사모들은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사모는 남편의 목회에 너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늘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다.
스펄젼 부부의 깊은 애정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목회를 돕는 힘이 되었다. 그들의 목회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결혼 첫해에 일어났다. 스펼젼의 인기가 높아져서 콘 음악당을 빌려서 설교를 할 때 였다. 스펼젼이 설교를 막 시작했을 때, 누군가 “불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강당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혼란으로 일곱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1개월 된 쌍둥이 아기를 데리고 집에 있던 수지는 남편이 현관 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 우리의 활기에 넘친 행복한 삶을 거부하기로 작정하셨던 검은 슬픔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이야기는 신문의 머리기사가 되었는데, “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아우성치는 소리 너머로, 그리고 불구가 된 자들과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울부짖음보다 더 크게” 스펄젼의 입에서 “격심한 신성모독”이 울려 펴졌다고 썼다.
그날 밤의 사건은 스펄젼 부부에게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스펄젼은 완전히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는 어떤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고, 그의 신학은 독선적이며 비판적이었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였고, 그래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알미니안 교도들은 태어나기 전의 구덩이로 다시 빠져버릴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알미니안의 신앙을 아주 솔직한 말로 조롱하였다.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사악한 위선이다.” 수지에게 있어서, 사모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은 남편의 목회를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유명하게 된 것은 설교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펼젼은 이렇게 썼다. 설교를 준비할 때, “나는 주님의 인도를 구한다. 그리하여 한 본문이 내 영혼에 강하게 다가오면, 나는 주저없이 그 본문을 취한다.” 본문이 결정되면, 그는 수지를 서재로 오라고 했다. 그녀가 읽어내려가면은 그는 점차 설교의 윤곽을 잡아갔다.
언젠가 스펄젼이 성서 본문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투하다가 수지의 격려에 따라 휴식을 취하였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던지라 깊은 잠에 빠져들어 설교문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서 본문’의 의미에 관한 힘차고도 새로운 주석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달은 수지는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남편에게 완벽하게 준비된 설교 개요를 제시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가 병약하여, 심지어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수산나 스펄젼도 독자적인 목회 활동을 하였다. 남편을 비방하는 글에 대해 직접 반박문을 쓰는 것이 그 중에 하나였다. “영국에 있는 모든 목회자에게 그 책의 사본을 보내는 것”이 그녀의 목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모들의 활동과는 달리, 수지는 남편의 방해없이 목회 활동을 해나갔다. 그는 가정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그녀의 일은 남편을 돕는 것밖에 없었다. 특별히 그녀는 남편의 목회를 후원하고 신문잡지들의 공격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하였다. 스펄젼은 널리 보급된 잡지<칼과 보습>에서 그녀에 대한 자기의 평가를 공공연히 발표하고 그 일에 대해 그녀를 칭찬하였다.
수지의 목회가 초교파주의적이었던데 반해,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영국 국교도들과 알미니안에 대항하였던 것만큼 동료 침례교인들에게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1887년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몰락”논쟁으로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냉혹한 태도를 보인 듯하다. 그는 적들을 ‘주님의 대적자들’이라고 불렀다.
스펄젼은 자신이 지지를 받으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대신 침례회는 그를 책망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는 많은 친구를 잃었다.
스펄젼은 “죄를 버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하고도 평범하게” 설교하고 있었다. 죄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습관까지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분명 스펼젼 자신이 흡연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그 방문 목사는 스펼젼의 설교에 뒤이어 자신이 처음에 어떻게 담배를 피우게 되었으며, 그런 다음에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 습관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시종일관 그는 흡연이 노예적인 습관일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은 그것을 죄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가 그러한 견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스펄젼이 매일 아침 성전에 있는 서재로 가면서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었다. 스펄젼은 충동적이며 자기 방어적이었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습관을 더 옹호하였다. 그 자신은 더 깊은 곤경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죽는 날까지, 그들은 연인이었다. 이 두 노인의 사랑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과연 있겠는가. 그녀는 점점 살이 쪘다. 그래서 그녀가 소녀 같은 곱슬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약간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지치고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아직도 20대인 듯 서로 사랑의 시를 썼고 구애를 하였다.”
건강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수지는 남편보다 10년을 더 살았다. 이 기간 중에 그녀는 남편의 전기를 편집하는 일에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은 진정 사랑의 노력이었다. 그녀의 결혼생활 전체가 그러하듯, 사람들의 눈에는 그 계획 역시 남편을 후원하는 일로 보였다. 그녀는 스펄젼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이미지를 쇄신함으로써 그의 목회도 고양시키고자 했다.
제10장 엠마 무디
..........엠마 무디의 남편
드와이트 L. 무디(1837-1899)는 복음전도자요, 최고의 부흥 설교자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생계 문제 때문에 국민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1854년 보스턴에 있는 외삼촌 사무엘 홀튼의 구두방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던 그는 처음에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였었다. 후에 영국을 방문하여 여러 집회들을 주관하였고 뛰어난 복음전도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남편을 목회에 적합한 인물로 개선시킨 사모
사모가 남편을 목회에 적합한 인격과 지성 그리고 습관 등을 갖추게 하는 노력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일부는 남편이 얼마나 확고한가, 그리고 그가 자기 개선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정확한 문법을 사용할 줄 안다. 나는 남편이 문법이나 발음상의 실수에 대한 아내의 지적이나 요구를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내들이 남편의 설교 말투를 비판할 시기를 잘 잡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되도록이면 하루 정도 기다린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
베티 코우블은 젊은 목회자 사모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남편을 “개선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엠마 무디는 아마도 이러한 충고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의 기벽과 기행을 절망에 차서 포기해 버리고 남편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여성은 아니었다.
비록 처음에는 무디가 목회자로서 기억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의 제1대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찰스 스펄젼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그의 영향력과 인기는 스펄젼에 비견할 만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메트로폴리탄 성전의 위대한 설교자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다. 수지 스펼젼과 마찬가지로 엠마 무디도 남편이 지닌 위대한 잠재력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목사로서의 남편이 여러 가지 결함들을 극복해 나가도록 돕는 일에 일생을 바였다.
엠마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은 무디를 최소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결코 품위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유능한 교사로서, 엠마는 남편을 개선시키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시카고 공립하교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디의 성경 학교를 위해 자신의 전문 지식을 활용했다.
엠마는 공식적인 일 외에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잘 수행했다. 아들 폴에 의하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서 가정에서 떨여진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다. 귀찮고 성가신 일들, 그리고 불안한 것들로부터 언제나 아버지를 보호해 주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대신 써 주었으며 아버지의 모든 돈을 관리하였고 아버지의 청구서들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위해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려고 모든 힘을 다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는 최대한의 자부심과 기쁨을 얻었다.”
무디의 개인 비서로서의 엠마의 역할은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강연 계약을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분쟁이 일어날 때 그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너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인도하시기를 나는 기도하고 있으며, 내가 알기로는 아빠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단다.”
무디가 죽었을 때, 한 친구는 엠마가 그녀의 남편에게 끼쳤던 영향력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의 거친 기질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그녀는 그의 태도를 품위있게 만들었다.” 그리고“그를 자제하도록 가르쳤다.”
남편을 ‘개선’ 시키려는 엠마의 노력에 대해 무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일생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결함들을 알고 있었고, 또한 아내를 신뢰했다. 나중에 장로교 목사이자 대학 총장이 되었던 아들 폴은, 그의 양친의 관계와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깊은 존경에 대하여 기록했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존경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한이 없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버지는 두 가지 일에 대해 늘 신기하게 여기셨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생각했던 당신 자신의 모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용하셨다는 것에 대해서이고, 또 하나는 당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성의 사랑을 얻게 된 기적에 대해서였다. 내가 확신하건대, 나의 아버지를 훌륭한 목사로 키우고 매우 예의 바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가르치신 분은 내 어머니셨다. .
아내로서의 엠마의 능력은 남편의 영감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그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잠재력을 정확히 인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정화될 필요가 있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믿었고, 그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계발시켰다. 그가 원하는 일을 막지 않고 어떠한 새로운 모험에도 공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제11장 데이지
.........데이지 스미스의 남편
오스왈드 J. 스미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선교 지향적인 교회들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토론토 회중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토론토 뉴데일 장로교회와 앨리언스 태버너클 교회를 담임하였다. 그후 순회 전도 사역을 하다가 토론토에 회중교회를 개척하여 30년을 시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세계 각국과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전도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결혼을 위해 교직을 포기한 사모
한 여성이 목사와 결혼한 뒤에도 자기에게 의미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며 많은 여성들은 성직자와 결혼함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게 된다.
데이지는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여전도사 훈련을 받고 지금까지 상상하거나 기대해 본 일도 없던 사역을 감당할 문이 열리게 되었다.
설교자로서의 데이지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 바로 데일 장로교회에서 시무한 유명한 설교자 J.D. 모로우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데일은 그녀를 자기가 이끄는 전도 팀에 합류하여 동역자로 일하도록 초청하였다. 이 들은 한 팀이 되어 사역하였다.
이같은 목회 사역은 다양하고 흥미있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심방전도사로 재직하면서 개인 상담을 주로 하였고, 매주 많은 시간을 슬럼가에 가서 보내곤 하였다. 여전도사로서 그녀는 도심 한복판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여러 부류의 여성 사역자들과 협력하였다.
슬럼가에서의 사역은 유효한 “여성 사역”으로 간주되었고, 데이지는 그 일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녀가 활동하면서 가장 만족스럽고 재능이 있다고 여긴 분야는 설교였다. 모로우 목사는 데이지에게 설교에 관심을 갖도록 권고하는 한편, 매월 한 번씩 주일 저녁 시간에 그녀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로우 목사의 조력자로서의 데이지의 활약상도 1915년 모로우가 부목사를 채용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중단되었다. 데이지의 활약이 눈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일개 여전도사일 뿐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데이지는 분노를 느꼈으며, 새 목회자 오스왈드 J. 스미스가 도착했을 때 그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새로 부임한 부목사 오스왈드는 데이지를 매력적인 여자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일생의 반려자로 삼는 데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하였듯이........,
동역자에 대한 열망이다. 하나님께서 그녀로 하여금 나의 이상이 위대하다는 것과,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야망이 크다는 것을 이해하게끔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그녀의 사모로서의 생활은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모로우 박사는 자주 여행을 다녔으며, 그 때문에 오스왈드는 위임목사의 자격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오스왈드가 가졌던 전도의 열정은 교회 안에서 굳어져버린 장로교 특유의 형식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예배중에 성가대로 하여금 복음성가를 부르도록 그가 고집하는 데 대해서도 역시 반대의 소리가 높았다. 이 같은 내적 갈등이 표출되어 마침내 성가 대장과 수석 장로가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의 요소는 날로 심해졌다. 오스왈드에게는 더없는 고난의 시간들었다. “책임을 맡은 지 처음 4개월의 기간은 정말 격랑의 세월이었다. 그 결과 오스왈드는 마음의 상처를 받아 잠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밤새도록 흥분하여 통증을 느끼곤 하였다. 극도로 쇠잔하여 더이상 성직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오스왈드는 한 달 간 교회를 비우고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기도 후에 다시 임지에 돌아온 그는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 교회 부흥을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영혼구령단”이라고 명명된 이 단체 속에 장로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전의 갈등이 조금도 해소되지 않은 것이었다.
데이지에게 이 기간은 시련의 기간이었다. 그녀가 오스왈드와 결혼했을 때 신문은 머리기사로 “뉴데일 장로교회의 부목사와 동교회의 유명한 여전도사의 결혼”이라고 대서 특필했다. 그녀는 교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와서는 사모가 되어 심한 논쟁 가운데 빠져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가 걱정했던 것은 남편이 부흥을 위한 기도에 열중한 나머지 교회의 제반 업무를 등한시 한다는 점이었다.
1920년 31세가 된 오스왈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력한 사역을 맡기실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앞에는 문이 열릴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교인수가 증가하고 사업이 활발해지게 되자 목회 직무 역시 증가되었지만 오스왈드는 한 장소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결혼 전에 그처럼 효과적으로 성직을 감당하던 데이지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재능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의 자존심도 결혼 후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고귀한 소명을 받기는 하였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방해를 받고 말았던 것이다.
남편 오스왈드의 빈번하고 장기적인 출장으로 인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데이지는 생활을 잘 꾸려 나갔고, 사모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목회 사역에 힘썼다. 교회에서는 여성 성경반을 맡아 가르쳤고 상담을 포함한 다양한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피플스 교회를 개척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오스왈드는 러시아 및 스페인 선교를 위해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오, 그리고 아이들도요” 하고 데이지가 간청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흥분하는 것은 물론 열정적으로 선교 여행에 그녀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처럼 말한 것이라고 어느 전기 작가가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어머니였으며 자녀들이 늘 어머니와 함께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과 은사를 살려 주의 사역을 감당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거의 80세가 될 때까지 그녀는 남편을 따라 아홉 번에 걸친 해외 선교 여행을 가졌다. 데이지의 희생은 과연 가치가 있었던 것인가? 그녀가 자신의 은사(재능)를 오래도록 무용화, 무력화시킨 것이 잘한 일인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지불한 그 대가를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고 말 할 것이다. 그녀가 가장 기뻐할 일 중의 하나는 막내 아들 폴이 성직자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고 피폴스 교회의 목사가 된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의 세월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대 가가 너무도 컸다는 것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재능이 많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만큼 그녀를 기쁘게 들어 쓰셨으며, 결혼 후에는 오스왈드의 사역에 동참하여 그 사역을 엄마나 완벽하게 성취시켰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제12장 캐더린 마샬
...........캐더린 마샬의 남편
피터 마샬은 저명한 설교가이다. 그는 아틀란타 교회와 뉴욕 애비뉴 장로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특히 뉴욕 애비뉴 장로교회는 1,200명이 모이는 워싱턴 D.C의 유명한 교회이고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이 다니던 교회로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등록한 교회이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일가가 참석한 크리스마스 연합예배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유명한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사모
사모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는 유명한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채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일의 성격상 교회나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사모는 재능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이로 말미암은 좌절감은 결혼하기 전에는, 교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사모가 된 후로는 더이상 자신의 재능을 활용치 못하는 여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에서의 내 위치는 구겨진 갑옷과 같다. 나 자신에게도 유해하고 교회를 위해서도 큰 낭비인 ... 내가 바라는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평신도로서 남편의 재조자가 되는 것이지 남편을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괴로워할 때 목사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하는가? 프랜시스 노들랜드는 “남편이 아내의 자질이나 능력을 확인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녀의 남편은 매우 유능한 사람이어서 아내를 곁에 매어둘 필요가 없었다. 매사에 자신이 있는 남편은 아내의 재능을 활용하거나 계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평신도 석에 앉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남편이 설교단에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보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남편의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이 되며 설교가 끝나 인사를 나누고 난 후, 사택에서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을 만족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남편의 성공으로 인해 더 가중될 수도 있는 외로움과 고립감에 부딪힌다.
유니스 비쳐와 데이지 스미스의 남편이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작고 어려운 교회를 맡았던 것과는 달리, 캐더린은 아틀란타의 대교회 목사였던 피터 마샬과 결혼했다. 설교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는 아메리카의 위대한 설교가의 한 명으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심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이 결혼식을 올렸을 때, 피터는 35세였고, 캐더린은 22세였다.
캐더린 우드는 자신의 일기에 “유감스럽게도 나의 종교는 확실한 기초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나는 생생한 체험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실제적인 분이 아닌 것 같다. 고 그녀는 적고있다. 그 이후 그녀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고 젊은 목사의 아내로서 영적인 방황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깊고 체험적인 신앙을 가졌음을 고백한 것은 오랜 투병생활을 거친 후인 1944년이었다.” 피터는 빠른 시일내에 수많은 군중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일요일 집회 때마다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숫자가 평균5백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신문지상에 올랐다. 3개월 후에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일가가 참석할 연합 크리스마스 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워싱턴 교회 연합의 추천을 받았다. [볼티모어] 선지는 “루즈벨트가 전쟁을 비난하는 설교를 듣다”라는 머리기사로 그날의 메시기를 요약해 보도했고, [아틀란타] 저널지도 피터를 “몇 해 전 아틀란타에서 시무했던 유능한 설교자”로 평하며 그날의 사건을 보도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문들이 유능한 젊은 목사의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남편에게 쏟아지는 격찬 속에서 캐더린은 사모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아 자신의 감당해야 할 임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뒷층계로 도망치곤 하던 스물세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그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다재다능하고 유명한 목사에게는 그에 걸맞게 유능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뉴욕 아베뉴는 사모에게 많은 것들을 기대했다. 사모는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침착하여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고들 생각했다. 사모는 비천하고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유명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구하고도 침착하게 만날수 있어야 했다.(접대하는 법, 화술, 뛰어난 외교가, 지칠줄 모르는 유머감각)
사모는 공적인 자리에서 쉽게 관찰될 수 있는 그러한 재능이나 자질을 갖추는 것 외에 영적인 면에서도 모범이 되어야 했고, “기도에 깊은 체험을 가져야 했으며” , “사람들을 순수하고 깊이 사랑해야” 했다. 그리고 영적인 성숙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녀는 “옷을 맵시있게 입을 줄을 알아야 했고 교인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또 “나는 그러한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적인 갈등을 겪어야 했다”고 기록했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위한 여성의 조건은 남편의 성공에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는 것이라고 마샬은 주장한다. 아내의 관심은 남편의 관심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캐더린의 이해는 곧 피터의 이해를 뜻했다. 12년 간의 결혼생활에 서 “나는 나서서 활동한 적이 없었다. 늘 숨어서 내조했다”고 그녀는 기록하고 있다.
캐더린이 사모로서, 가정 주부로서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녀가 뉴욕 아베뉴 장로교회에서 지낸 처음 몇 년 간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데이지 스미스처럼 그녀도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살았고 점차 자기가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 피터는 나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 일을 훌륭히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터의 독립적인 생활 방식은 캐더린을 더욱더 자신감 없는 여자로 만들었다. 그는 결혼 전부터 교회 서재에서 하루종일 연구하는 습관이 있었다.
결혼 후에도 그는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캐더린은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피터는 자신의 깊은 감정을 표현할 줄 몰라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쉽게 털어놓지 않았다.
사모로서 캐더린이 겪은 갈등은 그녀 자신의 무능력과 고독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는 남편이 대도시 교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분쟁에도 휘말리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있었던 터라 남편이 죽은 이후의 삶에 대하여는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는 직업을 갖는 데 필요한 다른 자질이 특별히 없었다. 남편 없는 새로운 독립적인 생활은 그녀 자신의 권리 신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녀의 친구들이 충고하였다. 그리고 피터의 설교집을 출판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피터의 생애와 사역은 캐더린의 초기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기도와 전기에 관해서도 출판하였다. [A Man Called Peter]라는 제목의 책이 1952년에 전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으며, 20세기 폭스사는 이것을 영화화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다음 과부로서 지낸 자신의 생활과 영적 성숙에 관한 책도 출판하였다. 다른 책도 많이 저술하여 그녀는 20세기 중반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인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살아 생전에 남편이 얻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83년 그녀가 68세로 임종하였을 때 그녀의 남편은 “이 23년을 갖게 된 드문 기회와 특권에 관해” 말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경력을 공유하였다.
제 13 장 룻 필
.........룻 필의 남편
노만 빈센트 필은 감리교 목사이며, 베스터 셀러의 작가로서 미국에서 가장 낙천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시라큐스 대학 교회와 뉴욕 마블칼리짓 개혁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라디오와 TV르로그램에서 적극적 사고를 통한 성공 비결을 다루었다. 또한 그는 [적극적 사고 방식],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능력], [왜 적극적 사고자가 성공하는가] 등을 저작하였으며, 특히 [적극적 사고 방식]은 1952년 출판된 이래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부 이상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적극적 사고로 좌절을 극복한 사모
교회사에서 빛나는 영적 거인들 중에도 깊은 좌절로 고통을 당한 이들이 있었다. 버마의 개척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의 경우가 그랬고, 위대한 목사이며 선교사인 심프슨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들은 남편을 깊은 좌절의 수렁에서 건져내어 가정의 평정을 유지시키는 일을 때때로 아내가 하곤 한다.
룻 센터는 좌절이 목사의 결혼생활에 잠재해 있는 문제임을 인정한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중 한 권에서 “인생--고통인가, 기쁨인가?--긍정적 조망에 관해 배움”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행복은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침울함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기뻐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도 기뻐할 수 없다. 남편이 침울하거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면 사모는 미리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편이 성급하게 화내거나 신경질적으로 웃는다거나 설교할 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감정적 폭발의 위험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아내는 알아야 한다. “애정의 증명을 요구하거나 동정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남편의 감정적 필요에 따뜻하게 응함으로써,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아내들에게 충고한다.”
베티 코블은 상처입은 남편 때문에 고통받는 사모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내는 남편의 짐이나 고통을 덜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녀 자신이 쉽게 좌절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코블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아내들을 격려한다. “아내는 남편과의 진정한 인격적 교류를 나눌 권리가 있으며, 남편을 올바로 파악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가령, 남편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인다거나, 신선한 관점을 남편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 모든 여성이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남편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여성은 아주 훌륭히 이것을 해내었다. 룻 필이 그 대표적인 에이다.
노만 빈세트 필은 미국에서 가장 낙천적인 사람으로 인정되곤 한다. 그러나 배후에서 그는 좌절과의 투쟁을 끝없이 계속해 왔다. 그에게 낙천적인 자세가 결여될 때마다, 가정과 목회 현장에서 적극적인 사고를 매일 실천했던 그의 아내 룻이 그것을 보충해 주었다.
룻은 남편의 우유부단함에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우물쭈물하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떠한 방향으로도 결심을 굳히지 못하는” 노만에게는 매우 고통스런 일이었다. 마침내 룻은 미결정 상태가 더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거실문을 걸어 잠그고는 최종적인 결단을 요구했다.-계속해서 선택을 연기시켜서는 안된다.
부부는 장시간 그 방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대화를 나누며 성경을 읽었다. 마침내 “멀리 어스름이 짙게 깔리고”, “갑작스런 평온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뉴욕의 작은 교회를 택하길 원하심을 노만은 확신했고, 그리고 룻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노만은 우유부단함 못지 않게 정리 정돈에 대한 그의 결벽증도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일은 아니었다. 노만은 조간 신문을 저녁 커피 시간까지 그냥 내버려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창조성은 정돈이 안된 상태에서는 결코 발휘되질 못했다.
남편의 사역을 위한 그녀의 헌신과 남편의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믿음 때문에 그녀는 그의 이러한 괴팍한 성격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우유부단함과 정돈 결벽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쉽게 절망하는 그의 성격이었다. 적극적 사고의 주창자가 암울한절망의 시간으로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낙담하게 되면 그는 무슨 일이든 부정적 측면밖에 보질 못한다.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내로서의 의무이다. 아내는 한 가정의 분위기를 밝게 유지시키는 사람이다. 본래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적인 면에서 훨씬 안정되어 있다. 여성은 쉽게 낙담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황에서 목사인 남편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설교나 저술에서 왕성한 활동을 가능케 한 것은 룻의 공로였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아내의 주요 임무는 지역 사회에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설령 자신의 생활 방법을 완전히 바꾸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이 일을 못해낸다면 자신의 인생도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조직적인 일에 있어서 룻의 재능은 기금 마련 계획과 사모로서의 봉사적 임무다.
적극적인 교회 활동에도 불구하고 룻은 가저으이 임무를 자신의 주요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녀의 탁월한 조직 능력은 까다로운 남편과 세 자녀를 돌보는 것 이외에 다른 일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가정생활도 아주 재미있고 즐거웠다. 휴가도 자주 갔으며 가족의 유대도 강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인 것은 역시, 남편이 사역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Marble Collaiate교회에서의 처음 몇 년은 룻에게 힘들었다. 유서 깊은 교회당의 가족석은 비는 때가 많았고, 노인층이거나 은퇴할 시가가 다 된 이들이었다. 노만은 자신의 목표가 “좌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혼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맹세했다.
노만과 룻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체된 교회를 부활시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일을 수행하기 전에 통과해야 될 깊은 수렁이 있었다.
그 곳은 절망적인 것 같았지만 그러한 심정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은 긍정적인 젊은 아내는 능숙한 솜씨로 남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노만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크게 꾸짖었다.
[당신은 내 남편이기만 한 게 아니에요. 나의 목사님이기도 해요. 솔직히 말해 당신에게 실망했어요. 당신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에 대해 믿고 신뢰할 것을 권면하는 설교를 나는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당신에게서는 믿음도 신앙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군요. 당신은 당신의 패배를 투덜대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한 와중에서 나는 나의 모든 약함을 고백하며 주께서 임하시길 간구했고 자복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즉각 응답되었다.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감싸는 것을 나는 느꼈다.
이러한 강도 높은 감정적 체험은 노만의 어두운 기질의 종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약함을 더욱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적극적 사고의 능력]이라는 책이 출판된 직후 그는 또다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책은 필이 예상했던 것 이상의 인기를 얻고 널리 보급되긴 했지만 초기에는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노만은 신문에 난 혹평을 읽고 목사직을 그만 두겠다는 맹세를 할 정도로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남편의 강력한 지지자였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사모들이 범하기 쉬운 만능의 이미지를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한 결혼생활을 누리는 양 꾸미지 않았고 사실, 완전하다고 장담하는 다른 목회자의 가정을 오히려 의심스러워 했다.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 결혼생활은 참으로 따분할 거야.]
그녀는 부부 사이의 불일치가 실제로 건설적이며 유용할 수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어떤 관계이서든 그 관계를 해칠 수 있을 만큼 화를 내기도 한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한다.
남편에게서 화나고 불친절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나는 항상 놀란다. 우리가 결혼한 후 처음 얼마동안은 함께 살기가 아주 힘들었다. 노만이 화를 내고 불평할 때 나도 같이 화를 내었다.
룻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주로 자신의 책임임을 알았다.
“이 모든 것에서 배운 중요한 것은 싸움이나 냉전이 빨리 끝나기를 원한다면 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싸움을 자제함으로 불화를 예방하면 모든 위기가 아주 빨리 지나갔다.
여러분의 진정한 적은, 여러분 속에 여성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다움을 강조한 룻은 또한, 자신의 권리에도 강했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사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그 역할을 당당히 수행해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교인들이 예배 시작 20분 전까지 모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부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으로 인식될 만큼 생명없는 교회도 크게 부흥시켰다.
제 14 장 질 브리스코
.........질 브리스코의 남편
스튜어트 브리스코는 원래 은행가였으나 은행을 그만두고 영국 리버푸울에 있는 청년 수련원의 간사로 일하면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로 순회 설교자로 일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 엘름브룩 교회에서 전국적인 여성 선교 프로그램을 개발 시행하였다
남편과 한 팀을 이루어 효과적으로 목회한 사모
사모의 역할과 지위는 모호하다. 만약 개신교 500년사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사모가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목사와 사모가 협조를 잘 해나갈 때에만 이러한 사역을 가장 적절히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 아내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게 되면 불안감을 느낀다. [오직 단 한 명의 지도자만이 존재] 자기 아내에게 잠재해 있는 ‘목회’ 은사를 갑자기 깨달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한 아내 벨은 자신의 사역이 아내와 조화를 이룰 때 잘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패기있는 통찰력과 민감한 정서는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의 자질을 보충할수 있도록 그녀에게 은사를 주셨기 떄문에 나는 그녀와 함께 가족을 잃은 사람달을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다.”
사모들이 사모라는 이름으로 인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질 브리스코는 자신의 역할을 나름대로의 전문적인 사역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탁월한 모범을 보였다. [결혼생화에서 나는 그가 운전하는 동안 지도만 읽어 주는 승객일뿐일까? 스튜어트만이 우리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가?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재능을 경쟁하는 것 대신에 부족함을 채워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수도인의 아내는 결혼 외의 다른 영적인 은사들은 모두 모아 하나님께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일까? ] “선교 이외에 전에 해왔던 것처럼 꼭 필요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해 오는 것이 어떻겠는냐”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억지로 하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에게 도전이 되었던 그의 제안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중년 여성들의 영혼에도 관심을 쏟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을 마음에부터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또 시작했지요” 다음날 피터를 유모차에 태우고, 4살 된 데이비드를 한 손에 집고 정찰 활동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고, 그 부인들을 성경 공부에 초대하였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점차 이들에게 애착이 갔다. 그녀는 마침내 12명의 여성을 모았는데 이들 중에는, 이 중년 여성의 딸들과 손녀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인이 영적 은사를 계발시켜 활용하도록 격려하였다. 놀랍게도 그런 일에 대한 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과 사역의 문제에 관하여 영적으로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옳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성들의 영적 자질을 발휘하도록 고무해 영적인 자질을 갖춘 여성들이 그러한 자질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 계발하고, 격려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다. 영적인 자질은 매장시키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은사이다.] 그는 그녀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목회 사역의 책임을 더 많이 짊어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완전한 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부엌 서랍이 “젖은 테니스 신발과 개 접시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의 청소년 사역과 부인들에 대한 사역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것에 영원한 가치를 두고 있었다.
[사탄은 빈정거렸다. 모든 사람들은 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 놓고 있지. 이것은 교회마다 다르고 문화 배경마다 달라서, 너는 그 때마다 열심히 그것을 좇아가야 할 거야.]
그녀 임무는 “죽어가는 사람을 구조하고 가난한 사역자들을 위하여 내다버린 옷을 수선하며 주일날 입을 옷을 만드는 일” 더욱이 여기에는 놀랄만한 자질이 있었다. 그녀는 “피아노를 쳐야했으며, 매주일 여신도회 회장이 되어야 했고 주일 학교에서 가르쳐야했다.”
“사모의 이미지를 완전히 묻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질을 다른사람들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중요한 일이였다. 그녀는 사모의 이미지를 좇지않으려고 노력하므로써 훨씬 더 훌륭한 사모가 될 수 있었다. 무력감 그녀는 재빨리 의무와 자질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사모의 역할을 부담으로 여기는것은 자질이 없기때문이다. 견디기 어려운 문제는 남편이 비난받는 일이었다. 그누구도 비난받지 않는 목사는 없으며, 목사 자신보다도 사모가 이런 것 때문에 더 고통을 받는다. 즉 목회적 ‘밀월 관계(honeymoon)' 비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교회내의 몇몇 가족이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되고 남편이 그 책임을 져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몇 사람이 교회를 떠난 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혹자는 교회에 계속남아 그녀와 남편을 괴롭혔기때문이다.
교회 분위기 쇄신! ’떠나는 사람들‘
“남편에 대한 비난에 관한 나의 과민 반응......”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비난 보다도 훨씬더 참기 힘든것이었다. 그녀가 지닌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새로운 사모의 역할을 시도하여 그녀의 영적인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계획과 생각들을 실천 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목회에서 보인 질의 장점 중의 하나는, 재난을 성공으로 바꿀 수 있으며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접촉점을 만들기 위하여 그 상황을 이용하였다. 비록 세속적인 모임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매주 목요일 새벽마다 그 지역의 모든 여성들에게 봉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커피 휴게소를 개설한 이후 질은 알콜, 마약 중독,가정 파괴 등을 일으키는 비행 청소년,그들을 다룰줄 아는 여성 전문가들이 인도하는 몇몇모임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직장여성들을 위하여 ‘Brown Bag Bible Studies' 를 마련했다. 여성 수양회,비디오,T.V.교육 프로그램이 질의 관리하에 개발되었다. 1987년에 그녀는 여성 선교 사역의 목회자로 임명되었다.
맺 는 말
수많은 사모들의 충성스러운 봉사가 모든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고,그 ‘착하고 충성된 종’ 으로서의 보상을 해주실것이다.
그러한 여성들 중에는 성공회 주교인 남편과 함께 19세기 후반 북서 캐나다에서 사역한 샤롯테 셀리나 밤프스가 있다. “연약할 것처럼 보인 그녀의 인내와 끈기는 실로 놀라웠다.”그녀는 게으름을 부리지않고 매일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현재 거의 잊혀진 또 한 명의 사모는 “제시 바랫트 헤쓰이다.
그녀는 사모로서 활동적이고 정열적으로 사역을 담당했다. 그들 부부는 처음에 ‘서부의 오지’에 열두개의 개척교회를 세웠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의 전임 동역자로 봉사 1929에는 사모인동시에 목사가 되었다. 남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 그녀가 목회를 계속 감당해 나갔다. 그들은 거의 영예를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퍼스트 레이디’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사역한 곳은 그들고 인해 영적으로 풍요로웠다.
사모들은 대부분 목회사역의 완전한 동역자였다.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봉사했을 뿐만아니라 봉사와 교회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때로는 남편보다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모들은 보상이나 공식적인정을 받지못했지만,그들 자신의 소명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에 평생을 받쳤다. 실제로 그들은 여러 면에서,해외에서 독신으로 평생을 받친 여선교사 못지않게 주님의 일에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선교사들과 달리 기억되지 않았다. 여선교사는 적절한 존중을 받았으나, 사모들은 망각되거나 혹은 기억된다해도 그것은 남편의 명성에 의한 것이였고 수산나 웨슬리의 경우는 아들들의 명성에 의한 것이였다. 그들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소명을 다했으나, 역사는 그들을 과거속에 묻어버리고 그들이 행한 사역의 중요성을 감소 시켜버렸다.
샤롯테 셀리와 반푸스, 그리고 제시 바레스 헤쓰와 같은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자신을 발전시키고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보존된다면, 우리의 영적 순례의 길은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the end....